2014년 4월 7일 월요일

이방인(L'Etranger, 1942)

이방인(L'Etranger, 1942)는 알베르 카뮈의 장편소설이다.
알제리에 사는 평범한 월급장이 뫼르소는 모친 장례일(葬禮日)의 이튿날 해수욕장에 가고, 희극 영화를 보고 웃으며 여자친구와 더불어 밤을 지낸다. 다음 일요일에 여자친구의 분쟁에 휩쓸려 해안에서 아라비아인을 이유도 없이 사살한다. 재판에 회부되어 범행동기를 물을 때 "모두가 태양 탓이다" 라고 대답하고, 사형이 언도된다. 독방에서 형의 집행을 기다리는 뫼르소는 사제(司祭)가 권하는 속죄(贖罪)의 기도도 거절하고 자기는 과거에나 현재에나 행복하다고 느낀다. 모든 기성의 가치와 습관에 무관심하게 되어 인생에는 어떠한 의미도 없다고 생각하는 주인공은 그 부조리의 의식을 최후까지 굳게 지켜나간다. 이 작품은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작으로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프랑스어: albɛʁ kamy1913년 11월 7일 ~ 1960년 1월 4일)는 프랑스의 피에 누아르 작가저널리스트 그리고 철학자이다.
알베르 카뮈는 그의 아버지 뤼시앵 카뮈가 주아브 보병 연대에서 복무하고 있던 1913년 알제리의 몬도비(Mondovi)에서 프랑스계 알제리 이민자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1842년생의 노동자였고 아버지는 1885년 생이다. 뤼시앵은 제1차 세계대전의 전투 중 하나인 마른 전투에서 1914년 사망했다. 그의 어머니는 스페인인으로 문맹이며 청각장애를 가졌다. 그는 스페인을 좋아했으며 어머니를 무척 사랑해 공공연하게 알제리 독립 반대의 이유가 어머니의 생활터전이기 때문이라고 할 정도였다.
카뮈는 어린 시절 알제에서 가난하게 지냈다. 한 집에서 할머니, 어머니, 형 그리고 두명의 외삼촌들과 살았다. 1923년 그는 프랑스의 중등학교인 리세[1]에 들어갔으나 빈부격차를 크게 느꼈고 어머니가 하녀라는 사실을 부끄러워 했다. 후일 알제리 대학에 입학했으나 1930년 폐결핵으로 중퇴하였다. 재학 중에도 각종 임시직을 전전하였으며 대학 중퇴 이후에도 가정교사, 자동차 수리공, 기상청 인턴과 같은 잡다한 일을 하였다. 이 시기 평생의 스승인 장 그르니에를 만난다. 그는 1935년 플로티누스(Plotinus)에 관한 논문으로 철학 학사 학위 과정을 끝냈다. 그 동안에 아마추어 극단을 주재했다. 가난했지만 멋부릴줄 아는 멋쟁이였으며 축구팀 골키퍼를 할 정도로 운동을 좋아했다. 훗날 외모면에서 종종 험프리 보가트에 비교되곤 했다.
1935년 카뮈는 명백히 마르크스주의의 강령에 대한 지지보다는 에스파니아 내전의 원인이 된 스페인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관심때문에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했다. 1936년 좀 더 독립적인 성향의 알제리 공산당이 수립되자 카뮈는 알제리 공산당에 가입하였고, 이로 인해 그의 공산당 동료들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그 결과 그는 트로츠키주의자로 비난받았고 1937년 당에서 제명당했다. 그는 공산당의 교조적인 태도를 혐오했다.
1934년 시몬 이에(Simone Hie)와 결혼했으나 서로간의 불륜과 시몬의 모르핀 중독으로 인해 1940년 이혼한다. 1940년 카뮈는 수학자이자 피아니스트인 프랑신 포르(Francine Faure)와 결혼했다. 비록 그는 프랑시느를 사랑했지만 카뮈는 결혼제도에 대하여 극렬히 반대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결국 이 부부의 관계는 비끄덕 거렸다. 심지어 프랑시느가 1945년에 케서린과 잔이라는 쌍둥이 아이를 낳은 후에도 혼외 관계를 가졌으며 그중 널리 알려진 스페인의 배우 마리아 카자레스와의 관계도 있었다. 이러한 카뮈의 불륜은 프랑신에게 더 고통을 주었다.
1935년부터 1939년까지 운영된 '노동자의 극장'(Théâtre du Travail)을 설립했다. 공산당과의 결별 이후에도 이 극단은 에키프 극단으로 이름을 바꾸어 지속되었다.1937년부터 1939년까지 그는 사회주의자를 위한 소품을 썼으며, 1938년부터는 좌익 성향의 신문 알제 뤼페블리껭(Alger-Republicain)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문화기사와 르포를 주로 썼다. 사르트르의 책 '구토'에 대한 서평도 알제 뤼페블리껭에 쓴 것이다.
카뮈는 1939년 독일에 저항하기 위해 참전을 신청했지만 폐결핵으로 프랑스 군대입대를 거절당했다. 이후 카뮈는 파리스와(Paris-Soir) 잡지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소위 포니 워(Phony war)라고 불리는 시기에 카뮈는 반전론자였다. 그러나 그는 1941년 11월 15일 파리에서 베르마흐트(독일육군)가 저지른 가브리에 페리의 처형을 목격하고 독일에 대한 저항을 결심했다. 그 후 그는 보르도로 이동하여 그 근교에서 파리스와의 활동을 끝냈다. 이 해, 그의 첫 책인 "《이방인》과 《시지프 신화》를 저술하였다. 그는 1942년에 잠시 동안 알제리의 오랑으로 돌아갔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카뮈는 지하에서 같은 이름의 신문을 출판하던 레지스탕스 조직 콩바(Combat)에 가담하였다. 이 그룹은 나치에 저항하여 활동하였고 여기서 카뮈는 뷔에샤르(Beauchard)라는 필명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카뮈는 연합군이 파리를 해방한 1943년 신문의 편집자가 되어 전투 이후를 보도했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 편집인으로서는 드믈게 1945년 8월 8일에 일어난 사건 직후에 히로시마 원자폭탄 사용에 대한 반대를 주장하는 논설을 실었다. 카뮈는 콩바가 상업적인 신문이 되자 1947년 사임했다. 이때부터 카뮈는 장폴 사르트르를 알게 되었다.
전쟁 이후에 카뮈는 사르트르와 함께 생제르망 가에 있는 카페 드 플로르(Café de Flore)를 자주 찾기 시작했다. 카뮈는 프랑스적 사고에 대한 강의를 하기 위해 미국을 여행하기도 했다. 비록 그는 좌익의 정치학을 배웠지만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그의 강한 비난으로 인해 사르트르와 소원해지게 되었다.
1949년 카뮈의 폐결핵이 재발하여 2년간 은둔상태로 살았다. 1951년 그는 공산주의에 대하여 명쾌하게 반대하는 반란과 반역에 관한 철학적 분석의 내용을 담은 《반항하는 인간》를 발표했다. 이 책은 프랑스에 있는 그의 많은 당시 동료들을 화나게 했고 결국 사르트르의 기분도 상하게 했다. 이러한 반응은 카뮈를 화나게 했고 그는 연극들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철학에 대한 카뮈의 기여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시지프 신화》에서 설명하고 《이방인》과 《패스트》와 같은 많은 작품에서 설명한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은 상태, 세계의 의미, 정순함에 대한 우리의 열망의 결과에 따른 부조리에 대한 카뮈의 사상이다. 그의 학문적 동반자 사르트르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카뮈가 실존주의자들의 캠프로 굴러 떨어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그의 에세이 에니그마와 다른 작품들을 통해 그에 대해 이념적 꼬리표를 붙여 분류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의 사상 중 많은 중요 부분은 실존주의와 깊은 관계가 있다.
작품으로는 <이방인(異邦人)> <시지프의 신화>로 사상가로서의 인정을 받았고, 극작가로서는 해방 후 <오해>(1944)와 <칼리귤라>(1945)로 성공을 얻었다. <계엄령(戒嚴令)>의 각색이 바로에 의해 상연되고, 그 다음에는 <정의의 사람들>이 나왔는데, 작품 수는 얼마 안되지만 순도(純度)가 높은 고전적 문체의 실존주의 연극으로 호평을 받았다. 그 후에는 자작보다는 각색·번안 등에 힘을 쏟아, 라리베의 <정령>, 칼데론의 <십자가에의 예배>,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 등이 있다.[2]
1957년 그는 사형에 반대한 에세이, 《단두대에 관한 성찰》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1950년 카뮈는 인권 운동에 자신의 전력을 다 바쳤다. 1952년 UN이 프랑코 치하에 있는 스페인을 회원국으로 받아들이자 UNESCO의 임원직을 사임했다. 1953년 그는동베를린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을 분쇄한 소비에트 연방의 방식을 비난했다. 1956년 그는 폴란드에서 일어난 같은 방식의 파업분쇄와 소비에트 연방이 10월 헝가리 반란을 진압한데 대하여 저항의 소리를 냈다.
카뮈는 그의 평화주의와 세계 어디에서든 일어나고 있는 사형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여 주장했다. 사형 반대 운동에 대한 그의 주목할 만한 기여로 사형반대협회의 설립자인 아서 쾨슬러(Arthur Koestler)와 협동하여 쓴 에세이가 있다
1954년 알제리 독립전쟁이 발발하자 여전히 어머니가 알제리에 살고 있었던 카뮈는 도덕적 딜레마에 빠졌다. 그러나 그는 알제리계 프랑스인(pied-noirs)의 정체성을 택하여 프랑스 정부를 옹호하였다. 그는 북아프리카 식민지의 반란이 이집트주도의 신 아랍 제국주의와 소비에트 연방의 정책인“유럽둘러싸기”, “고립된 미국”, “반 서방주의”의 일부분이라고 주장하였다. 카뮈는 알제리에 더욱 큰 자치권을 인정하거나 연방정부를 구성하면 알제리계 프랑스인과 아랍인들간의 공존이 이루어 질 것이라고 믿었으며, 알제리의 완전 독립에는 부정적이었다. 전쟁 기간 동안 그는 양측 모두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정전협정을 위하여 헌신했다. 이러한 활동 뒤에 그는 사형에 직면한 체포된 알제리인들을 구하기 위하여 비밀리에 활동하였다. 그는 1957년 스톡홀름 대학교 학생들을 상대로 강의하며 알제리 문제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였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알제리에 살고 있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염려된다고 성명을 발표 하였다. 이 성명은 프랑스의 좌익 지성으로부터 더욱 극심한 배척을 야기하였다.
카뮈는 상스(sens)에서의 차 사고로 Villeblevin의 작은 마을에 있는 Le Grand Fossard라고 불리는 장소에서 1960년 1월 4일에 사망했다. 그의 코트 주머니에서는 사용되지 않은 전철 티켓이 발견되었다. 카뮈가 전철로 여행을 떠나려 했음은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는 전철 대신에 자동차로 떠났다. 동시에 카뮈는 젊은 시절 가장 잘못된 죽음의 방법은 자동차 사고로 죽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포셀 베가 차의 운전자, 미첼 갈리마르, 카뮈 책의 출판자이자 친한 친구, 역시 사고에 대해 곤란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카뮈는 the Lourmarin Cemetery, Lourmarin, Vaucluse, Provence-Alpes-Côte d'Azur, France에 매장되었다.
카뮈 사후, 그의 두개의 작품이 유작으로서 출판되었다. 그중 첫 번째는 이방인과 흡사한 Meursault이라 불리는 인물의 특징을 그린 행복한 죽음이라 명명된 책이었는데 1970년에 출판되었다. 그러나 두 작품 사이의 관계에는 많은 논쟁이 있다. 두 번째 유작은 미완성의 소설로 카뮈가 죽기 직전까지 지은 최초의 인간이다. 이 소설은 알제리에서의 어린시절을 그린 자전적 작품으로 1995년에 출판되었다.
많은 작가들이 개인의 부조리에 대해 정의하고 해석하여 왔으며, 부조리의 중요성에 관한 그들 나름의 생각에 대하여 글을 써왔다. 장 폴 사르트르는 일반적인 종교들이 우리가 의 존재에 도달하는 것을 막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부조리를 지적하는 키르케고르를 언급하며 부조리를 개인적인 경험의 범주로 인지하였다. 카뮈는 부조리주의의 창시자가 아니며 부조리주의 철학자로 계속 여겨지는 것을 후회했다. 카뮈는 《시지푸스의 신화》를 출판한 이후 점차 부조리주의에서 관심이 멀어졌다. 연구자들은 카뮈의 사상을 다른 철학자들의 사상과 구별하기 위하여 부조리의 패러독스를 말한다.
카뮈의 부조리에 관한 생각은 1937년 발간된 그의 첫 에세이집 《안과 겉》에 나타나 있다. 부조리 테마는 1938년 발간된 그의 두 번째 에세이집 《결혼》에 좀 더 세련되게 나타나 있다. 이러한 에세이들에서 카뮈는 부조리에 관한 철학적인 설명을 하거나 정의를 내리고 있지 않고, 대신에 부조리의 경험을 투사하고 있다. 1942년 카뮈는 인간 존재의 삶에 존재하는 부조리에 관한 이야기인 《이방인》을 출판하였고 이어 동시에 부조리에 관한 문학적 에세이인 《시지프 신화(Le Mythe de Sisyphe)》를 출판하였다. 그는 또 부조리 논리를 추구하는 로마 황제 칼리귤라에 관한 연극을 작성했다. 그러나 이 연극은 1945년까지 상영되지 못했다.
1943년 7월에서 1944년 7월까지 익명의 독일인 친구에게 보낸 4개의 편지에서 카뮈는 부조리에 대한 생각의 변화를 드러낸다. 첫 번째 것은 1943년 the Revue Libre에서, 두 번째 것은 1944년 Cahiers de Libération에서, 세 번째 것은 1945년 Libertés신문에서, 출판되었다. 4개의 모든 편지들은 《독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이름으로 1945년에 작품집 《레지스탕스, 반역, 그리고 죽음》에 수록되어 출판되었다.

요점 정리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지은이 : 알베르 카뮈 / 김병일 옮김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형식 : 소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성격 : 실존적,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사상 : 실존주의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주제 : 인간은 이 세계가 부조리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하고, 자기 운명의 불합리함에 대해 끊임없이 반항함으로써 스스로의 가치를 만들어내야만 함을 보여줌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인물 : 뫼르소는 언제나 현재의 욕망에 강하게 지배되어 이해타산도 없이 행동에 몰입하는 인간이며, 그런 의미에서는 순진하고 자신에게 정직한 인간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를 부조리(不條理)한 인간의 전형(典型), 즉 인간 존재의 무상성(無償性)을 자각한 인간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그러한 의식이 그에게 있는지 없는지는 의문이며, 오히려 알제의 거리에서 볼 수 있는 무책임한 청년들과 공통된 점이 많다. 그러나 뫼르소를 현대사회에서 소외된 '비극적 인간상(人間像)'(反小說作家 로브그리예의 말)으로까지 승화시킨 것은 카뮈의 작가적 역량이다. 카뮈 자신이 영어판(英語版) 서문에서 뫼르소는 현대에 있어 유일한 그리스도일 수 있다고 한 것은 흥미 있는 말이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줄거리 : 1942년 발표. 카뮈의 처녀작으로, 그의 명성을 일약 세계적으로 떨치게 한 작품이다. 주인공 뫼르소는 북아프리카의 알제에 사는 평범한 하급 샐러리맨인데, 양로원에서 죽은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이튿날, 해수욕장에 가서 여자 친구인 마리와 노닥거리다가, 희극 영화를 보면서 배꼽을 쥐는가 하면, 밤에는 마리와 정사(情事)를 가진다. 며칠 지난 일요일에 우연히 불량배의 싸움에 휘말려, 동료 레이몽을 다치게 한 아라비아인을 별다른 이유도 없이 권총으로 사살한다. 재판에 회부된 그는 바닷가의 여름 태양이 너무 눈부시기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고 주장하고 속죄의 기도도 거부하며, 자기는 과거에나 현재에도 행복하다고 공언한다. 처형되는 날은 많은 군중이 밀려들 것을 기대하며 이 수기(手記)는 끝난다.

이해와 감상1
귀머거리인 어머니와 할머니와 함께 가난 속에서 자란 카뮈는 초등학교 시절 L.제르맹이라는 훌륭한 스승을 만나 큰 영향을 받았으며, 어렵게 대학에 진학해 고학으로 다니던 알제대학교 철학과에서 평생의 스승이 된 장 그르니에를 만나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대학시절에는 연극에 흥미를 가져 직접 배우로서 출연한 적도 있었다. 초기의 작품 '표리(表裏)'(1937) '결혼'(1938)은 아름다운 산문으로, 그의 시인적 자질이 뚜렷이 보이고 있다.
 1942년 7월, 문제작 '이방인(異邦人) L' tranger'을 발표하면서 주목받는 작가로 떠올랐다. '이방인'은 부조리한 세상에 대하여 완전히 무관심한 태도로 살다가, 살인죄를 범하고 사형을 선고 받은 사나이가 세상에서 버림받고 죽음에 직면함으로써 비로소 삶의 의미와 행복을 깨닫는 이야기이다. 이와 같은 부조리성과 반항의 의욕을 철학적으로 설명한 것이 '시지프의 신화(神話)'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저항운동에 참가하여 레지스탕스 조직의 기관지였다가 후에 일간지가 된 <콩바>의 편집장으로서 정의와 진리 및 모든 정치 활동은 확고한 도덕적 기반을 가져야 한다는 신념에 바탕을 둔 독자적인 좌파적 입장을 견지했다. 또 집단적 폭력의 공포와 그 악성과 부조리함을 알레고리를 통해 형상화한 소설 <페스트>로 문학계의 대반향을 일으켰고 1951년에는 마르크시즘과 니힐리즘에 반대하며 제3의 부정정신을 옹호하는 평론 <반항적 인간>을 발표하여 사르트르와 격렬한 논쟁을 벌이다가 10년 가까운 우정에 금이 가기도 했다. 1956년 <전락>을 발표하여 샤르트르에게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이 동안 알제리 독립전쟁에 대해서도, 알제리에 거주하는 친척과 친지들을 생각하여 정치적 발언을 일체 삼가는 태도를 고수하였다. 195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후 최초의 본격 장편소설 <최초의 인간> 집필 작업에 들어갔으나 1960년 자동차 사고로 생을 마쳤다.
이해와 감상2
 1942년 발표된 알베르 카뮈의 처녀작이자 출세작. 그는 이 작품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평범한 샐러리맨인 뫼르소는, 양로원에서 죽은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다음날 여자 친구인 마리와 해수욕을 하고 희극영화를 본다. 그리고 밤에는 마리와 정사(情事)를 가진다.
며칠 뒤 일요일에는 해변에서 우연히 친구 레이몽과 다투고 있는 아랍인을 권총으로 쏘아 죽인다.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된 그는 왜 죽였느냐는 재판관의 질문에 <햇빛때문>이라고 대답한다. 그는 재판관, 검사, 변호사는 물론, 일상의 모든 것에 무관심한 태도를 나타내고 사형이 선고된다.
 그는 재판과 세상의 부조리를 느끼며, 속죄의 기도를 거부하고 고독한 이방인으로 사형집행일을 기다린다. 감방의 창을 통해 보이는 별과 하늘과 자연이 인간에 대해 무관심한 것이, 그가 인생에 대해 무관심한 것과 일치한다는 것을 깨닫고 행복을 느낀다.
 그리고 처형되는 날은 많은 군중이 밀려들 것을 기대하며 이 소설은 끝난다. 논리적 일관성이 결여된 뫼르소의 행동을 그려, 근원적인 인생의 부조리를 나타낸 작품이다. 앙드레 말로에 의해 발간되었다. (출처 : 한메디지털백과사전)
이해와 감상3
 소설 '이방인'은 뫼르소라는 주인공을 통해서, 이 세계가 부조리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부조리에 눈을 뜬 뫼르소는 허망을 경험하게 되어 허무주의자가 되고, 삶에 대한 의욕을 포기했다가 사형 집행을 앞두고 생의 거부가 아닌 수용의 철학을 비추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이 부조리의 세계를 거부했다면 우리는 희망의 부재만을 인식했을 것이다. 그러나 부조리한 이 사회를 받아들인 '뫼르소'에 의해 삶이란 결국 허무의 연속이 아니라 존재할만한 가치 있는 사회로 인식되는 것이다.

부조리

카뮈는 자신의 에세이에서 독자에게 행복과 슬픔, 어둠과 빛, 삶과 죽음과 같은 이원성에 관하여 독자에게 발표하고 있다. 그의 목표는 행복이란 무상한 것으로 인간의 상태는 하나의 필멸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분석하는 것이었다. 그는 병적이지 않고 삶과 행복의 위대한 진가를 반영하면서 이 분석을 행하고 있다. 신화(Le Mythe)에서 이 이원성은 페러독스가 된다. 우리는 우리의 삶과 존재가 좀 더 위대해지는 데 가치를 둔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언제가 우리가 죽을 것을, 그리고 극단적으로는 우리의 존재가 무의미해 질 것임을 알고있다. 우리가 이러한 이원성과 함께 사는 한(나는 나의 불행한 시기를 받아들일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또한 행복한 경험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페러독스와 무관하게 될 것이다.(나는 나의 삶이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동시의 나의 삶은 무가치하다.) 신화에서 카뮈는 우리는 어떻게 부조리를 경험하고 어떻게 부조리와 함께 살아가는지에 관심을 가졌다. 우리의 삶은 여기에 가치를 두는 데 의미를 가져야 한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삶은 의미가 없고 따라서 무가치하다고 받아들이면, 우리는 죽어야 하는가?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그의 죄로 사형을 선고받은 죄인이다. 칼리쿨라는 끝내 자신의 부조리 논리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가 고의로 야기한 암살에 의해서 죽는다. 그러나 카뮈가 아마 칼리쿨라의 부조리적 이성이 틀렸다고 제안하는 할지라도 이 연극의 반 영웅은 작가가 뫼르소의 마지막 대사를 찬양하는 것과 같이 마지막 말을 할 기회를 한다.
카뮈의 부조리에 대한 이해는 대중의 토론을 고양시켰다; 그의 다양한 제안은 우리를 부조리에 대하여 생각하고 우리 자신이 기여하도록 유혹하였다. 협동, 울력, 일치와 같은 개념은 카뮈에 관한 중요한 열쇠이다.
카뮈는 부조리에 관한 우리의 이해에 의미심장한 기여를 하였고 확실한 대답으로서의 니힐리즘을 거부하였다.
만약 아무것도 의미를 가진 것이 없다 하더라도, 그것은 옳을 것이다. 그러나 어딘가에 여전히 의미를 가지는 것은 존재한다.
 
— 독일인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1943년 11월
이것은 그리고 인간은 무관심, 객관, 때때로의 모호함, 그리고 자연적 질서에 의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는, 그러나 예비되고 불안정한 인간의 행동에 의하여 창조된 부조리적 세계의 신하라는 실존주의가 자주 취하는 관점을 따르고 있다.

전체주의에 대한 반대

카뮈는 자신의 삶을 통틀어 독일의 파시즘이나 스탈린주의 같은 전체주의의 다양한 형태에 관하여 수많은 반대성명을 발표하고 반대행동을 실천에 옮기기도 했다. 젊은 시절, 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치하에 있던 프랑스에서 유명한 레지스탕스 저널 콩바(combat)의 편집장을 하며 프랑스 레지스탕스 활동을 수행하였다. 나치 점령자와 프랑스의 이적자들에게 카뮈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지금 유일한 도덕적 가치는 나치의 꼭두각시와 그들의 이름을 말하려 하는 척하는 수다쟁이들을 판단할 때 유용한 정의다.
카뮈의 잘 알려진 사르트르와의 결별은 이러한 전체주의에 대한 반대와 연관되어 있다. 카뮈는 근본주의자의 이름안에 사르트르에 의해 신봉되는 대중정책이 전체주의에 호응하는 것임을 간파했다. 이는 공산주의 경찰국가에 대한 맹공뿐만이 아니라 대중혁명정책에 관한 의문을 드러낸 《반항하는 인간》이라는 그의 작품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카뮈는 소비에트 연방의 가혹한 통치를 비판했으며, 1957년 감정에 사로잡혀 1956년 헝가리 혁명 일주년을 기념하는 연설에서 소련군의 잔인한 진압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이미 너무나도 많은 죽음이 벌판에 널부러져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닌 다른 이들의 피에 관대할 수 없습니다. 헝가리인들은 우리는 숨이 다하도록 그들을 질투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소중하게 유럽과 자유를 하나로 합쳤습니다.
그러나 나는 심지어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라고 하는 테러의 제도를 만든 누군가와 자신을 크리스쳔이라고 말하는 조사의 실행자가, 설혹 단기적일지라도, 이에 책임을 지고 사직을 하더라도 여기에 타협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유의 기념일에 나는 내 심장의 헝가리 인들의 소리없는 저항을 견뎌내고, 좀 더 강하게 되어, 우리가 육성 가능한 지원의 목소리를 강화하여, 만장일치로 그들로 하여금 압제를 거부하도록 권유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실존주의(實存主義, 프랑스어: Existentialisme)는 개인의 자유책임, 주관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철학적, 문학적 흐름이다. 실존주의에 따르면 각자는 유일하며, 자신의 행동과 운명의 주인이다.

제1차 세계대전스페인 내전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유럽에는 허무감과 좌절감이 팽배했다. 그 결과 인간의 이성역사의 발전, 의 권능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생겨났다. 전쟁의 체험, 수용소에 갇혀 있던 사람들의 고발 및 증언 앞에서 허망과 절망을 철학적, 문학적 고찰의 출발점으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절망감을 지성으로 극복하고 논리화하는 과정에서 실존주의 철학이 생겨났다.
이렇게 우발적이고 허망한 세계에 내던져진 인간은 자신의 자유에 모든 것을 걸고, 이성으로 절망을 인식해야했다. 이성을 가진 인간과 비합리적인 세계 사이 사이에 있는 모순이 부조리인데, 이것을 논리화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긍정하며, 즉 반항하며 허무감을 이겨내고 휴머니즘을 재건하게 된다.

19세기 중엽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에 의하여 주창된 이 사상은 후에는 야스퍼스가브리엘 마르셀 등으로 대표되는 유신론적 실존주의와 하이데거사르트르,메를로-퐁티보부아르 등의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1]
‘실존’이란 말은 이들의 사고양태(思考樣態)나 표현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표현되고 있으나, 공통된 사상은 인간에 있어서 ‘실존은 본질에 선행(先行)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인간은 주체성으로부터 출발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실존은 ‘인간’이라고 하는 개념으로 정의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존주의는 니힐리즘이 ‘자아’를 강조한 나머지 세계를 부정하기에 이르는데 반하여, 같은 ‘자아’의 실존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어떤 형태로든지간에 ‘자아’와 세계를 연결지으려고 노력한다. 즉, ‘내가 있다’고 하는 전제로부터 출발하여 그 ‘나’를 세계와 연결지음으로써 그 전제를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데카르트가 말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하는 논리가 역전되고, 어떻게 하면 ‘내가 존재’한다고 하는 사실을 먼저 파악할 수 있는가가 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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