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가 세계 120개국 인권기구 연합체인 국가인권기구 국제조정위원회(ICC)의 정기 등급 심사에서 ‘등급 보류’ 판정을 받았다. 재승인 심사는 2014년 하반기 회기에 이뤄진다. 한국 인권위는 2004년 ICC에 가입한 이래 줄곧 최고 등급인 A등급을 유지하면서 다른 회원국의 등급을 심사하고 부의장국까지 지내는 등 선도적 지위에 있었다. 등급 재심사 대상이 된 것은 사실상 등급 강등이라고 할 수 있다.
인권위의 국제적 위상 추락은 예견됐던 바다. 이명박 정부가 인권위를 ‘식물기구’로 만들고 현 정부가 이를 묵인·방관해온 결과다. 현병철 위원장 취임 후 인권위를 둘러싼 온갖 잡음과 파행, 역할 방기 등의 과정은 굳이 다시 열거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봉숭아 학당’ ‘국가이권위원회’ 등 차마 입에 올리기도 거북한 비아냥까지 들었던 터다. ICC의 심사 보류 결정은 이런 인권위의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국가적 망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권위는 구구한 변명으로 사태를 호도하고 있다. 인권위는 ICC의 등급 심사는 ‘국가인권기구의 지위에 관한 원칙’(파리원칙)의 준수 여부를 제도적으로 검토하는 것으로 국가의 인권 상황이나 인권기구의 활동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등급 보류 결정도 ICC가 몇몇 사항을 권고해 최종 결정을 다음 회기로 연기하는 최근 추세를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인권위는 아무 문제가 없고, 등급 보류도 별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ICC가 인권위에 대해 심사 보류 결정을 하면서 지적한 것은 인권위원 임명 절차의 투명성과 시민단체 등의 참여 보장, 인권위원과 직원 구성의 다양성, 인권위원과 직원 활동에 대한 면책 조항 등의 부족이다. 인권위는 이런 제도적 문제로 등급 보류 판정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제까지 A등급을 유지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묻고 싶다. 인권위는 또 ICC의 권고 사항은 법과 제도 등 법률 개정 관련 사항이므로 인권위가 독자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며 그 책임마저 입법부에 떠밀고 있다. 이는 결국 이번 등급 재심사 사태가 인권위 잘못이 아니고 인권위가 앞으로 할 일도 없다는 태도다.
국가인권기구의 독립성이 매우 중요한 문제이고 큰 숙제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제도를 바꾸기 이전에 그 틀 안에서 독립성 확보의 의지와 노력을 보이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점은 인권위의 지난 역사가 잘 보여준다. 인권위원과 직원 구성의 다양성을 해치고 인권시민단체의 참여를 차단한 것 등은 제도가 아니라 현 위원장 체제의 인권위가 자초한 일이 아니던가. 인권위는 물론 현 정부 지도층도 각성하고 반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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