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11일 목요일

의혹 제기 위법성 여부

권력을 감시해야 하는 언론의 속성상, 최고 권력 가까이 접근하기 어려운 현실을 감안해서 사실이라고 믿을 수 있는 정황이면 권력빞나 보도는 다소 오보의 여지가 있어도 위법성이 문제되지 않는 것이 언론판례의 방향

측근이 불법한 국정개입을 하고 있다면 이것만큼 언론이 급하게 보도해야 할 내용은 없기 때문

그런데 대통령의 해명과 이에 따른 검찰의 수사 방향에 따라 사건은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고 있다.
측근의 국정개입이 아니라 청와대를 둘러싼 측근끼리의 암투가 초점이 되고 국정개입 의혹을 사던 정윤회씨는 피해자로 둔갑한다. 

권력암투는 권력자에게 치명적인 사건
국정개입은 감시와 비판도 없는 암흑지대에서 정책을 잘못 이끌어 국가 전체를 불행에 빠뜨릴 수 있다.\
권력암투는 권력의 향배에 촉각을 곤두선 이들에게 중요한 일
국정개입은 국민 모두에게 중요한 문제
현재 검찰수사도, 청와대 발표도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
언론으로서는 검찰과 청와대발 보도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

대통령이 측근의 국정개입설을 봉쇄하며 객관적 검증은 받을 필요가 없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러면 항간에는 의혹이 더 증폭된다는 사실을 대통령도 모르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확인도 하지 않고 무책임한 보도를 한다"는 말
청와대와 검찰은 권력암투가 아니라 국정개입이 있었느냐는 온 국민의 관심사에 수사의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국민의 편에서 보도하는가 / 권력자의 편에서 보도하는가


오늘 조선일보는 국정농단 관련 사설에서 "무소신.무기력.무책임한 정권이 앞으로 3년 넘게 이 나라를 끌고 가야 한다는 사실이 걱정스럽다"는 문장으로 결론부를 시작했습니다. 노무현 정부를 잡아먹을 것처럼 비난했던 때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보는데요. 
어제 논의 과정에서 방향을 잘 잡지 못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우리가 '조중동을 조져야 한다'는 답을 정해놓고 보고서 방향을 잡으려고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이번 정윤회 문건 관련 보도에선 딱히 문제점을 발견할 수 없단 말이죠. 보수-진보 언론을 막론하고 검찰의 수사영역에 대해서 비판하고, 그 수사 가이드라인을 내린 대통령을 비판하고, 언론 스스로 정윤회 VS. 박지만 전현직 비서관 권력암투ㆍ비선 국정개입 등을 열심히 취재하고 있어요. 

이번 정윤회 문건 유출 보도에서 살펴볼 수 있는 건, 언론사 각각의 사안을 바라보는 관점ㆍ논조가 아니라 
'왜 언론은 이런 보도를 할 수 밖에 없는가'를 

문건 의혹 수사 쟁점

정윤회씨의 국정개입 의혹이 담긴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의 동향보고서에 대한 수사를 벌이고 있는 검찰이 어떤 결론을 내놓을지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현재까지 검찰은 정씨와 청와대 관계자들의 회동 실체가 없고, 문건의 신빙성을 입증할 근거를 찾지 못했다며 '찌라시에 의한 국정농단'이라는 박근혜 대통령의 뜻을 철저히 따르는 모양새다. 하지만 검찰 수사와 언론 보도 내용을 추적하면 상식적인 수준에서 청와대와 검찰이 답해야 할 것들이 많다. 
'정윤회 대 박지만 회장의 암투'라는 사건의 배경을 토대로 '누가 문건을 유출했느냐'라는 프레임에 갇혀 있다보니 이번 사건의 본질을 놓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우선, 검찰 수사의 형평성 문제를 들 수 있다. 박지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의 지적처럼 검찰은 문건 작성자와 유출 경로자에 대해서는 증거확보를 위해 자택과 사무실 등을 압수수색하고 체포까지 했다. 하지만 정윤회씨에 대한 수사는 사건이 터지고 열흘이 지난 뒤 지난 10일 소환 조사만 진행했다. 
박 의원은 "사방천지 압수수색을 하면서 왜 거기만 안 하냐는 말이에요. 이것도 국민들과 야권에서 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포인트"라며 검찰이 정씨에 대한 압수수색을 벌이지 못한 이유에 대해 의구심을 드러냈다.
진술이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상황에서 물증을 잡고 이를 신문하는 것은 수사의 기본이다. 문건 진위를 입증하려면 우선 문건 정보가 생산됐던 '회동'의 실체를 밝혀내야 한다. 검찰은 정씨와 청와대의 통신기록 등을 분석해 특정 장소에 모인 흔적이 있는지를 찾고 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검찰은 문건 작성 시점인 지난 1월 6일 이전인 2013년 12월 한달치만 통신 기록을 분석(노컷뉴스 보도)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회동의 실체를 밝힐 의지가 있는지조차 의심을 받고 있다.
정씨가 회동의 주체라고 한다면 문건에 나오지 않은 연락책이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하다못해 압수수색을 통해 정씨가 소지한 기록물 등을 찾아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씨가 언론과 인터뷰에서 박관천 경정과 통화해 박 경정이 조응천 전 비서관 지시대로 타이핑만 했다고 들었다는 진술에 검찰이 주목해 수사를 벌이고 있는 것도 우려할 만한 대목이다. 언론도 정씨의 '타이핑' 진술과 관련해 검찰 수사에서 어떤 결론을 냈는지 집중적으로 캐묻고 있다. 
정씨의 말이 사실이라면 박 경정은 조 전 비서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 ‘꼭두각시’이며 문건의 작성자조차도 진위를 확인하지 않고 보고서를 쓴 것이 된다. 
하지만 정씨의 진술과 정면 배치되는 발언은 계속 나오고 있다. 특히 문건의 제보자로 지목된 박동열 전 대전지방국세청장이 조선일보와 인터뷰한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박 전 청장은 9일 조선일보와 인터뷰에서 "박관천 경정에게 '강원도에 있는 정윤회 씨가 가끔씩 오토바이를 타고 와서 청와대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갔다', '그 장소가 성수대교 남단에 있는 식당이다'라는 얘기를 해준 것은 맞다"라고 말했다. 박 전 청장은 "아는 사람으로부터 그런 얘기를 들었고 그 내용을 박 경정에게 전한 것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박 전 청장의 발언이 '전언'이라고 하더라도 정씨와 청와대 관계자가 만났다는 정보를 '누군가'로부터 들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박 전 청장의 발언은 청와대 관계자와 접촉을 전면 부인하고 있는 정윤회씨를 곤경에 몰아넣을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이다. 정상적인 검찰 수사라면 문건의 제보자(박 전 청장)가 누구에게 이 같은 내용을 전해 들었는지 파헤쳐야 한다. '성수대교 남단에 있는 식당'이라는 구체적인 회동 장소에 대해서도 검증이 필요하다. 
▲ 지나 11월 28일 세계일보가 보도한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실 동향 보고서
인터넷에서는 하다못해 진술이 엇갈리는 사람들의 대질조사 뿐 아니라 거짓말 탐지기를 통해서라도 진실을 찾아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국정농단의 실체가 있는 건지 아니면 문건 유출을 통해 국정농단을 획책했는지 둘 중 어떤 결론을 내리더라도 파장이 크기 때문에 검찰이 할 수 있는데까지 수사를 해야 국민들도 납득할 수 있다는 얘기이다. 엇갈리는 진술만 듣고 물증이 없는 상태에서 한쪽 손만 들어주는 식으로 수사를 종결시킬 경우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다. 
게다가 문건에는 정씨가 지난해 말 송년 모임에서 "(김 실장은) '검찰 다잡기'가 끝나면 그만두게 할 예정이다"라는 발언이 나온다. 세계일보는 '검찰 다잡기'라는 표현에 대해 지난해 말 당시 김진태 총장이 취임해 채동욱 전 검찰총장 계열 검사를 한꺼번에 지방으로 좌천인사를 한 때라는 점에서 '검찰내 자기 사람 심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분석했다. 문건이 사실이라면 정씨의 영향력은 검찰 인사권까지 쥐락펴락하는 정도인데 과연 검찰이 문건의 진위를 밝혀낼 수 있을지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문건에 '제거' 대상으로 거론된 이정현 전 청와대 정무수석과 김종석 국세청장이 실제 사퇴와 퇴임으로 이어져 일명 '데스노트'로 작용한 것도 설명이 필요하다. 
청와대와 김기춘 비서실장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도 검증 대상이다. 노회찬 정의당 의원은 정윤회 문건이 100% 날조면 박관천 경정을 전보발령만으로 끝내겠나라는 질문을 던졌지만 속시원한 해명을 찾아볼 수 없다.  
김기춘 비서실장은 또한 정씨 동향과 관련해 구두보고가 아니라 직접 보고서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후속 조사 혹은 조치를 하지 않은 것도 의아한 대목이다.
김 비서실장이 후속조치를 취할 경우 청와대 3인방과의 갈등이 깊어지고 후폭풍이 거세질 것을 예상해 문건 내용을 덮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문건 정보를 알고 있는 박관천 경정과 조응천 전 비서관을 내치는 형태로 인사 조치를 단행했다는 분석도 있다.
문건과 별개로 정씨의 전 부인 최순실씨와 박근혜 대통령과의 관계도 규명 대상이다. 최씨가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 때 입은 한복을 챙겼다는 고발뉴스의 보도와 관련해 대통령 한복 디자이너는 "사실과 다르다"라고 했지만 청와대에서는 별다른 공식 해명이 없다.
김기춘 비서실장은 자신이 청와대 비서실장 교체에 대한 풍문을 알아보고 감찰을 지시했다는 동아일보 보도와 관련 기자 등을 검찰에 고발했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씨와 접촉 의혹을 제기한 보도에 대해서는 사실 여부 확인 해명은 물론 고발과 같은 후속 조치가 없다는 점도 그동안 청와대의 언론 강경 대응 기조로 봤을 때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고발뉴스 관계자는 “현재까지 청와대 쪽에서 연락이 오거나 항의를 받은 것은 없다”고 전했다. 최순실씨는 승마협회 감사에 영향력을 끼치고 문화체육관광부 인사에 개입한 게 아니냐는 의혹의 핵심당사자이기도 하다.  
한웅 변호사는 "이 사건의 본질은 비선라인의 국정농단이 있었는지 여부인데 박근혜 대통령이 찌라시 유출 엄단을 지시하면서 검찰이 쓰레기 유출을 찾는데만 집중했다. 처음부터 수사의 방향이 잘못된 것"이라면서 "정씨에 대해 압수수색을 벌이지 않은 것도 예를 들어 공무원과 협력해 직권남용을 했다는 혐의로 들어갔다면 모르지만 찌라시 유출 수사가 되면서 단순한 참고인 자격이 돼버린 것이다. 검찰 스스로도 굉장히 자존심 상하고 위상이 추락한 수사로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서울시민인권헌장

서울시의 서울시민인권헌장 제정 취소 파행에 항의하여 서울시청 점거농성에 들어갔던 ‘성소수자 차별반대 무지개농성단’이 오늘 저녁 7시 촛불문화제를 끝으로 6일 간의 서울시청 점거농성을 마무리하기로 결정했다. 
무지개농성단은 “농성 5일째 박원순 서울시장은 우리의 요구 중 하나였던 무지개 농성단과의 면담에 응했으며, 성소수자인권단체와 시민사회단체 대표 6명과의 면담과정에서 ‘제 책임이고 잘못이다’라는 말로 사과를 표명했다”라고 밝혔다.
▲ 박원순 서울시장이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했다.
또 무지개농성단은 박원순 서울시장이 “여러분이 입은 마음의 상처에 대해서 미안하게 생각하고 어떤 표현을 요구하더라도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언급했으며, “이 자리는 여러분들이 겪었던 마음의 상처를 위로하고 제가 죄송하다는 말을 하는 자리”, “어떤 오해나 발언에도 불구하고, 어떤 시민도 차별이나 불이익을 당할 수는 없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고 전했다. 무지개농성단은 박 시장이 “제가 여러분들이 겪는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을 실무적으로 찾아보도록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면서, “이와 같은 발언은 그간의 농성 과정을 통해 이끌어 낸 중요한 성과이며 향후 이 발언에 대해 서울시는 책임 있는 행보를 보여야 한다”고 주문했다.
무지개농성단은 서울시의 공식 보도자료는 박원순 시장의 발언에 비해 충분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면서, “우리는 서울시가 서울시민 인권헌장의 내용을 이행할 수 있도록 계속 요구할 것”이며, “또한 공공 기관인 서울시가 혐오세력에 대해서는 인권의 원칙에 따라 대처하도록 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무지개농성단의 한 관계자는 <미디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어제 저녁 박원순 시장과 면담 후 오늘 아침에 서울시 담당자와 다시 한 번 면담했다”고 전했다. 그 관계자는 “서울시 담당자가 12월에 박 시장과 재차 면담하자고 제안했지만, 우리는 의제를 정하고 생각을 해둔채로 만나자고 역제안하여 1월 중 면담을 가지기로 합의했다”고 설명했다. 무지개농성단 측이 제시한 중심 의제는 첫째, 인권의 원칙을 확립하는 것, 둘째, 혐오세력의 문제에 서울시 등 공공기관이 어떻게 대처할지 가이드라인을 정하는 것인 것으로 알려졌다.
▲ 시민위원회는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의 날을 맞아 서울시인권선언을 선포했다. ⓒ미디어스
어제까지 강경하게 점거농성을 이어갈 의사를 밝혔던 무지개농성단이 오늘 태도가 바뀐 것에 대해 무지개농성단 관계자는 “오늘 아침 담당자와의 면담을 통해 나름의 성과가 있었고, 어제 토크콘서트에서 (인화물질 투척 테러라는) 혐오범죄가 발생한 것에 대해 시민사회가 공동대처해야 하며 그에 결합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고 설명했다.
한편 박원순 서울시장은 무지개농성단과의 면담 이후 오늘 관련 담당자들과 가진 회의에서 “(인권헌장 제정 취소 파행에 항의한 이들에 대해) 진정성 있는 조치를 취하라”는 지시를 했다다고 알려졌다. 
아래는 ‘성소수자 차별반대 무지개농성단’이 쓴 성명서의 전문이다. 
당신의 인권이 여기에 있다
- 6일간의 서울시청 점거농성을 마무리하며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 서울 시청 로비에 와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서울시민 인권헌장 제정 과정에서 보여준 성소수자 차별발언에 대한 사과와 인권에 대한 입장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는 시민이 만든 서울시민 인권헌장을 일방적으로 거부했고, 한국장로총연합회와의 간담회에 가서 공개적으로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발언했으며, 서울시민 인권헌장 제정과정에서 성소수자 혐오세력들이 저지른 폭력과 혐오 발언을 방치했다. 특히 서울 시장이라는 선출직 공무원이 국제인권기준과 헌법에서 정하고 법률에 규정된 성소수자 차별금지라는 인권의 원칙을 공개적으로 버림으로써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무시할 수 있다는 메시지와 혐오폭력을 허용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었다는 점에 대해 심각하다고 판단했다.
공론의 장에서 성소수자의 존재 자체가 죄악이라는 혐오발언이 아무렇지도 않게 행해지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한탄했지만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이제 행동해야 한다! 성소수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혐오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을 서울시청 점거라는 행동으로 보여줬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사랑은 바로 차별과 혐오가 익숙한 대한민국 한가운데에서 벌어지기에 우리의 싸움도 여기서 시작될 수밖에 없음을. ‘성소수자에게 인권은 목숨이다’라는 절박한 마음으로 이곳에 왔다.
우리는 누구와 있는가
우리가 서울시청 점거농성을 무사히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들어가자마자 끌려나올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는 행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도 밟히면 악하고 소리 지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줘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분노를 보여줘야 했기에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행히도 우리의 점거농성은 아프고 고통 받는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다. 농성장은 성소수자라서 차별과 억압을 감내해야했던 순간들을 동료들과 나누는 공감의 장이었고, 개인의 서사를 넘어 우리 모두의 서사를 만들어가는 장이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고 나누는 많은 시민들을 만났다. 그렇게 우리는 누구와 함께 있음으로써 주는 따뜻함을 느꼈다. 우리가 싸워야할 이유를,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유를 다시 한 번 알게 되었다. 농성기간 내내 넘쳐나는 사람들과 음식들 사이, 웃음 사이로 우리는 우리의 힘을 확인했다. 저녁마다 벌어지는 축제의 장, 삶의 이야기들은 우리가 어떻게 싸워야할 지를 어렴풋이 깨닫게 해주었다. 우리는 진지하게 싸우면서도 웃음과 노래를 잃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성소수자 운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의미는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연대를 확산했다는 것이다. 하루 만에 인권, 장애, 여성, 시민사회, 노동, 소수자 등 300여개의 단체의 지지연명을 받았고, 시장면담과 사과를 요구하는 직접 행동을 벌였다. 차별에 저항하여 1000만 인구가 있는 대도시이자 수도인 서울의 시청을 점거하는 한국 성소수자 운동의 용기 있는 직접 행동에 전 세계 성소수자들과 연대자들의 지지의 목소리 등 국제적인 성원이 끊이지 않았다.
우리는 어디에 왔는가
농성기간 동안 시청에서 사람들은 인권의 원칙을 확인했고 그것은 종소리처럼 서울시청 밖으로 번져나갔다. ‘인권은 합의의 대상이 아니다. 성소수자의 존재가 찬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존재를 가지고 찬반을 논하는 것은 모욕이다. 함께 싸우고 행동할 때 차별과 폭력으로부터 안전해질 수 있다.’ 우리가 확인한 이 원칙을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계속 가져갈 것이다.
어제 서울 시장은 무지개 농성단과의 면담에 응했다. 이후 서울시가 밝힌 입장에 대한 여러 아쉬움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다음은 명백한 성과이자 서울시가 책임져야 할 내용이다.
먼저 농성 5일째 박원순 서울시장은 우리의 요구 중 하나였던 무지개 농성단과의 면담에 응했으며, 성소수자인권단체와 시민사회단체 대표 6명과의 면담과정에서 “제 책임이고 잘못이다”라는 말로 사과를 표명했다.
“여러분이 입은 마음의 상처에 대해서 미안하게 생각하고 어떤 표현을 요구하더라도 제가 하겠습니다.”라고 언급했으며, “이 자리는 여러분들이 겪었던 마음의 상처를 위로하고 제가 죄송하다는 말을 하는 자리”, “어떤 오해나 발언에도 불구하고, 어떤 시민도 차별이나 불이익을 당할 수는 없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또한 “제가 여러분들이 겪는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을 실무적으로 찾아보도록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와 같은 발언은 그간의 농성 과정을 통해 이끌어 낸 중요한 성과이며 향후 이 발언에 대해 서울시는 책임 있는 행보를 보여야 한다.
둘째, 서울시는 공식 보도자료에서 “농성의 원인을 제공한 것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는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정리했다. 이러한 내용의 표현은 흡족하지도 충분하지도 않다. 무엇보다 그는 서울시민들이 만들고 12월 10일에 선포한 서울시민 인권헌장을 선포하는 의무를 이행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하기에 우리의 요구와 싸움은 계속돼야 한다. 우리는 서울시가 서울시민 인권헌장의 내용을 이행할 수 있도록 계속 요구할 것이다. 또한 공공 기관인 서울시가 혐오세력에 대해서는 인권의 원칙에 따라 대처하도록 요구할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는 서울시가 향후 논의의 자리를 만들어나갈 것을 약속한 점을 중요하게 평가한다. 오늘 오전 담당자와의 면담에서 우리는 시장이 면담에서 밝힌 대로 “진정성 있는 조치를 취하라”는 지시를 했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며, 이를 위해 성소수자인권단체와 만나 논의하고 계획을 세우기로 약속했다. 서울시는 약속을 지켜 앞으로 성소수자 인권 보장과 혐오 방지 대책을 세우고 실행해야 한다. 또한 다시는 선출된 공직자가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 금지 원칙을 깨지 않는 시금석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우리는 이번 싸움에서 확인했던 우리 모두의 힘과 인권의 원칙을 이어갈 것이다. 우리의 시청 점거 농성이 오늘 마무리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투쟁은 이제 시작이다.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세력은 단지 성소수자만을 공격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권의 가치를 바닥에 팽개치며 다른 사회적 약자를 공격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주민, 장애인, 빈곤층... 우리는 이렇게 확대되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모욕을 방치할 수 없다. 최근 몇 년간 확대되고 있는 혐오세력의 발흥으로 우리 사회가 그동안 세워온 인권의 원칙과 제도를 뒤로 돌리도록 하지 않을 것이다.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 등 성소수자 인권을 부정하고 차별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고 있다. 성북구 ‘청소년 무지개와 함께 센터’ 주민참여예산 사업 무산,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최이우가 인권위원이 되고 국가인권위원회법에서 성적 지향을 삭제하려는 개정 운동 등을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 그 싸움에 여기 모인 우리는 그 싸움에 함께 할 것이다.
2014년 12월 11일
성소수자 차별반대 서울시청 농성 6일차
무지개농성단 참가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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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10일 수요일

1211_반쪽 빅딜

여야 '반쪽의 빅딜, 공무원연금 더 합의해야

- 여야 국민대타협기구 국회특별위원회 연내 구성 합의
ㆍ 해외자원개발 국조 합의, 방산비리 국조도 조건부 실시
ㆍ 부동산 3법을 비롯한 경제활성화 법안은 29일 본회의에서 최대한 처리하기로

- 여야 합의는 그제 막을 내린 제329회 정기국회의 '잔무 처리'를 위해 15일부터 열리는 임시국회의 전망 밝혀
ㆍ 경제활성화 법안 및 공무원 연금 개혁, 사자방 국조 등의 쟁점을 함께 올련호고 일괄 타결을 시도하는 방식

- 공무원연금 개혁의 구체적 내용을 최종적으로 국회 특위와 국민대타협기구에 맡기기로 한 것이 문제
ㆍ 문제 해결보단 연기, 논란의 지속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적극적 평가를 하기 어려움
ㆍ 여야 논란도 불을 보는 듯하지만, 직접적 이해당사자인 공무원을 포함한 대타협기구 구성은 우려 크게 해
ㆍ 공무원연금 개혁은 재정구소 악화를 막고 미래세대에 부담을 떠넘기지 않기 위해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

- 국민연금과의 뚜렷한 대조를 이루는 혜택과 그를 위한 재정부담의 실상이 확연해져 국민 다수 공감대 형성
ㆍ 2016년 총선까지 대통령 선거나 총선 등 전국적 선거 없어 정치적 반발에 여야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기회

- 올 정기국회에서 끝내 처리하지 못한 '김영란법'에 대한 합의가 불발한 것도 여야 의지 의심
ㆍ 전체 법체계화의 최소한의 정합성을 확보하는 선에서 조속히 합의, 처리해야
ㆍ 현격한 시각차이에 비춰 최대한 처리에 합의한 부동산 3법 등 경제활성화 법안의 처리 전망도 밝지 않아
ㆍ 모든 경기부양 대책에서 동전의 양면이라는 인식을 토대로 여야가 조속히 이견 조정을 매듭짓길 바람


십상시 모임보다 비선 국정개입 규명이 본질

- '비선 실세 국정개입' 의혹의 핵심 인물인 정윤회씨가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음
ㆍ 검찰은 청와대 동향보고 문건에 등장하는 '십상시' 모임, '청와대 비서관 3인방'과 접촉이 있었는지 집중 조사
ㆍ 정씨는 강하게 부인, 박관천, 지방국세청장 3자 대질신문에서 서로 진술 엇갈려
ㆍ 청와대 문건의 진위에 대한 검찰 수사는 신빙성 없음으로 결론 날 가능성 높아져

- 관련자 몇명 되지 않는 경우 사실과 다른 진술이 나오는 것 다반사
ㆍ 반대 진술 하는 이가 많다는 이유로 진위를 판단하는 것은 위험천만
ㆍ 의혹 핵심 당사자인 정씨, 압수수색조차 하지 않은 채 불러서 해명만 듣는다면 면죄부 주는 절차에 불과

- 의혹의 전제를 '십상시' 회동의 실재 여부로 설정
ㆍ 그런 모임 자체가 없다면 국정개입 의혹을 적극적으로 조사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로 수사 전개
ㆍ 십상시 모임이 없었다고 해서 문건을 허위로 단정하고 국정개입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는 일
ㆍ 일부 내용은 실제 정황과 맞아떨어지는 부분도 있음(이정현 홍보수석 교체, 김덕중 국세청장 경질)
ㆍ 박 대통령이 승마협회 조사를 담당한 국장과 과장의 교체를 직접 지시, 이재만이 문체부 인사에 개입
ㆍ 박지만 회장도 주변인을 통한 언론인터뷰를 통해 문건 내용의 신빙성을 방증하는 발언을 내비쳐

- 청와대와 여당은 문건 진위와 유출 과정 등 적당한 선에서 매듭지어야 한다는 입장
ㆍ 황교안 법무부 장관 "일단 고발된 것을 중심으로 하되, 수사 단서가 있고 범죄의 단초가 되면 대상 확대할 것"
ㆍ 언론에 나온 내용만으로도 수사 근거는 충분
ㆍ 사건의 본질은 비선 실세의 국정개입 의혹
ㆍ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과 문건에 '청와대 핵심 3인방'으로 소개된 이재만ㆍ정호성ㆍ안봉근 조사 해야


이 가문을 보라 : 몰락한 가문이 남긴 것

이 가문을 보라 : 몰락한 가문이 남긴 것 (부끄)(부끄)


1743년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혈족인 '안나 마리아 루이사 데 메디치'가 임종함으로써
1397년부터 약 350년간 이어온 메디치 가문은 역사의 뒷무대로 조용히 사라졌다.

말대신 당나귀를 탔던
국부(國父) 코시모 데
메디치(1389~1464)의
'은둔의 미학'이라는 위대한 정신이 위대한 가문을 낳았다.
그 정신이 쇠퇴하자 가문은 문을 닫았다.



(꽃)메디치 가문이 문을 닫게된 원인

코시모 3세의 오랜 통치기간(1670~1723)에 반복해서 나타난 리더십 부재에 있다.
실제로 무능했던 피렌체의 대공은
잘못된 결혼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고,경제를 파탄에 이르게 하여 유럽에서 무시를 당했다.
그는 또한 기독교 신앙을 피렌체 시민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광분했지만,
본인은 무절제한 주색잡기로 유명세를 떨쳤다.
결국 그는 불규칙한 폭식과 무절제한 생활 때문에 만성적인 질환을 얻었고,
주치의는 그에게 규칙적인 걷기 운동을 처방하였다.

800m에 달하는 바사리 회랑은 비만에 시달리는 코시모 3세의 비밀 피트니스 센터가 되었고,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600점이 넘는 초상화가 바사리 회랑의 긴벽을 장식했다.



(꽃)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선물

21세기 피렌체 사람들은 18세기 중엽에 문을 닫은 메디치 가문이 남긴 막대한 문화유산 덕분에 살아간다.

세계5대 박물관 중 하나인 우피치 미술관이나 거대한 피티 궁 박물관에 몰려드는 관광객과 미술 애호가들에 의해 시의 재정이 유지되고 있다.

안나 마리아는 임종 직전에 피렌체 바깥으로 반출하지 않는다는 단 하나의 조건을 약속받고 모든 예술품을 피렌체 시민들에게 기증했다.


http://me2.do/Fh4ddEMF



(부끄)탁월함을 추구하던 조직이 더 이상 탁월함을 추구하지 않을 때,
그 조직은 문을 닫게 된다.
메디치가 그랬던 것처럼...


☆김상근 연대 교수,<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에서...

천관우 칼럼

옳다는 것
 
국민교육헌장을 읽어 보시오. 「정의」라는 대목이 전혀 비치지 않는단 말이오.
누군가가 그런 귀띔을 하기에, 4년 남짓 전에 발표된 이 文書를 새삼스럽게 찾아 읽어 보았더니, 과연 그 말이 맞았다. 기왕 어린이, 젊은이들에게 나라의 이름으로 주입하고 있는 이 문서인 바에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 한 마디 집어넣어 달라고 요구를 아니할 수 없다.

국민교육헌장의 그 많은 덕목들은 왜 필요한가. 바르고 옳은 세상 만들어 보자, 그러기 위해 바르고 옳은 일 해 보자고 해서 그것이 필요하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외곬으로만 보는 것이라고 할는지도 모르나, 국민교육헌장이 정의라는 덕목에 인색해야 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뒤집어 말하는 것이 빠르다. 헌장의 표현 그대로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른> 청년이 여기 한 사람 있다고 하자. 그런데 다른 모든 것이 갖추어진 그 청년이, 유감스럽게도 정의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다고 하자. 그 청년의 성실과 건강과 학문과 기술과 창조와 개척이, 정의를 향해 간다는 보장이 없다면, 모든 것이 갖추어진 그 조건이라는 것이 어디로 動員될 것인지, 두렵게 될 경우도 있을 듯하다.
거의 새로 만들다시피한 지난 번 헌법개정에도, 3·1정신이나 4·19정신은 다행히 그대로 살아 남았다.
지난 번 3·1절의 都下 각 신문의 기념 논설들을 보자니, 3·1운동은 「민족주체의식」의 발로였다던가 「국민총화」의 실현이었다던가 하는 면을 주로 강조한 것이 많았다. 이제는 3·1 정신의 해석도 많이 달라져 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3·1정신이나 4·19정신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다른 어느 것보다도, 正義를 위한 용감한 실천, 不義에 대한 용감한 저항이라는 면이라고 하고 싶다. 그것이 기둥이요 뼈다귀다.
3·1운동이나 4·19운동에서 연상되듯이, 「의로운 일」이라면 우리네 凡人은 여간 근접하기 힘든, 어떤 엄숙한 것을 느끼게도 되지만, 같은 말도 「바른 일, 옳은 일」이라면 누구나가 우선은 그렇게 해 보려고 마음먹는 일이요, 자기는 그렇게 못하더라도 자기의 아들 딸들에게는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일일 것이다.
성실과 건강과 무엇과 무엇, 그 모든 것이 갖추어졌으되, 정의에 대한 관념이 엷은 청년이, 3·1운동이나 4·19운동에 참여할 수 있었을까? 그런 거창한 「의로운 일」은 고사하고, 평소의 대인관계나 직업상의 일에조차, 의리 없는 일쯤 눈썹하나 까딱 안하고 해치울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자기의 아들 딸들은 그런 사람으로 기르고 싶지 않다면, 국민교육헌장에 정의의 한 대목은 마땅히 들어가야 하겠다는 말이다.
얼마 전에 「의리의 사나이 돌쇠」라는 말이 우스개로 곧장 화제에 등장한 일이 있었다. 어느 TV 드라마에 나온 돌쇠라는 이 「의리의 사나이」를 嘲弄한 것은, 우선 그가 천한 남의 집 종인데다가, 그나마 아주 코믹하게 그려진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뿐일까. 그가 고지식한 「의리의 사나이」이기 때문에, 그런 인간형은 時代의 感覺에 맞지 않기 때문에, 비웃은 구석은 없었을까? 정의다, 외롭다 하는 것을 정면에서 비웃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런 인간형을 만나면 자연히 비정상으로 보게 되어 있는 것일 것이다.
만일 그 「의리의 사나이」가, 돌쇠처럼 천한 인물이 아니고 코믹하지 않은 인물이었더라면, 어떤 반응이 일어날까 생각해 보자. 어떤 사업가의 충신·열사론을 경청한 적이 있다.
『누구 못지 않게 나도 존경도 해요. 그러나 말하자면 일종의 독종이 아닐까요. 자기를 희생하고 심지어 자손까지도 고생시키는 것을 뻔히 알면서 굳이 그런 길을 택한 건, 보통 독한 마음 아니고는 안될 거예요.』
그가 말하는 독종이란, 처음부터 헐뜯자고 하는 것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역시, 충신·열사가 독종이라는 비정상적인 유형의 인물로 비쳤던 것이다. 이 경우는 표현이 유난스러울 뿐이지, 「의리의 사나이」를 비정상으로 보는 생각이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반드시 이 실업가 뿐일까.
의롭다는 인간형이 시대의 감각에 맞지 않아서인가······라고 했다. 그런 인간형을 비정상으로 보는 것은 오랜 유래를 가진 것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사회는, 「의롭다는 것」은 둘째요, 「바르고 옳은 것」이 무엇인지조차 판단하기 어렵게 되어가고 있는 성싶다. 그러니 시대의 감각이라는 것도 그렇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두고 있는 바둑을 새로 두자고 판을 뒤엎으면 싱거운 사람이라고 하면서, 큼지막한 일을 덩어리째로 그리고 무더기로 바꾸는 데에는 아낌없이 갈채를 보내기도 한다. 자식을 욱박질러 말도 못하게 하면 참을성 없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어느 신문을 보나 예외없이 똑 같게 吉報만의 세상이 되어도 시끄럽지 않아 다행이라고 하기도 한다.
「힘이 곧 正義」라고 한 것은 진부한 格言이라고들 하더니, 우리주변의 시대감각은 이것이 진부한 것이 아니라 가장 앞선 것, 가장 「한국적」인 것으로 느끼게 되어가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정의는 역시 정의 그대로 따로이 있다. 힘이 곧 어느 경우에나 정의일 수는 없는 것은 분명한 것이다.
국민교육헌장을 굳이 흠 잡자는 것은 아니다. 짧은 문장에 많은 덕목을 집어 넣자니, 들어가야 할 것이 어쩌다가 빠진 것일 것이다. 그러나 말이 난 김에 한 두 가지 말을 더해야 하겠다.
「공익과 질서를 앞세우자」고 한다. 한 편에 「공익과 질서」, 또 한편에 「개인의 권리와 자유」, 이 두편이 잘 균형되고 조화되기를 바라야지, 그 어느 한 편을 「앞세우라」니,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우리는 지금 제 밥도 제대로 못 찾아 먹는 일이 많으니 말이다.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라」고 한다. 「자유와 권리를 찾아서 누리라. 그와 동시에 책임과 의무도 다하라」ㅡ 이렇게 일러 줄 친절이 아쉽다. 국민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는 다해도 자유와 권리는 굴러 들어오지 않는 일이 많은 것은, 모를 사람이 없으니 말이다.
「공익과 질서」, 「책임과 의무」, 이것도 모두 정의와 무관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주어진 정의를 성실하게 지켜나간다는 소극적인 측면이라는 느낌이 든다면 잘못 안 것일까? 도대체 정의란, 주어진대로 성실하게 지키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주어진 것 가운데 정의는 취하고 정의가 아닌 것은 버리는 것부터가 정의일 것이다.
「자유와 권리」는, 3·1운동이나 4·19운동에서 보듯이, 없으면 찾아서 얻고 빼앗겼으면 싸워서 얻는 정의가 아닌가. 헌법의 기본 정신이 아직도 3·1정신이요 4·19정신이라고 하는 바에는, 국민교육헌장에서 정의의 한 대목은 결코 빠져서는 안되겠고, 자유와 권리는 좀더 力點을 두어 강조되어야 하겠다.
헌법의 기본 정신을 들출 것까지는 없다. 자유와 권리는 인류가 최근에 와서야 찾아낸 재산이라고 하자. 그러나 정의는 예부터 소중히 여겨온 재산이다. 정의를 생명으로 아는 기풍은, 그 사회 그 나라의 元氣다. 이 원기가 줄어 시들시들 맥을 못추게 되면, 사회는 문드러지고 나라는 기울고 하는 것을, 세계의 역사에서 또 우리의 역사에서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흔히들 인류의 역사는 자유를 찾아 자라온 역사라고 한다. 그 길은 험하기도 했고, 그 어느 부분만을 떼어 보면 도리어 역전의 국면도 많았다. 그러나 그 全過程을 大觀하면, 역시 자유를 한 발자욱 한 발자욱 키워온 역사라고 하는 것일 것이다.
흔히들 事必歸正이라는 말을 쓴다. 가다가는 부정과 불의가 이기고 판을 치는 수도 있지만, 결국 正과 義가 이기고 만다고들 한다. 그렇게 본다면, 인류의 역사는 정의를 찾아 자라온 역사라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정의는 결국 이기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부정 불의에 시달리는 피해자들이 스스로를 달래 보는 말투는 아닐까? 물정에 밝다는 이들일수록, 그런 것은 순진한 책상 물림들의 환상이요, 허황한 기대라고, 마음 속에서 비웃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사필귀정인가 아닌가. 의인이나 선지자처럼 앞 일을 내다보려 해서 될 일도 아니고 점장이에게 물어 거기에 매달릴 일도 아니다. 다만 사필귀정은 이것을 믿어야 되겠다는 것이 지금 나의 생각이다.
4·19운동이 혁명이냐 아니냐로 論難을 벌였을때,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4·19운동이 혁명이었다고 하는 것과, 그것이 혁명이어야 하겠다고 하는 것은, 서로 깊은 관련이 있어 보였던 것이다. 객관적 과학적인 관찰을 마다고 하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것과, 우리가 믿는 것은, 결코 별개가 아닌 듯하다는 말이다.
그런 뜻에서 나는 사필귀정을 믿으려 하는 자이다.
 
(<씨알의 소리>·1973.3.)
 
<천관우 산문집>, 심설당
보람 있게 사는 길
 
『이젠 국회의원이나 한번 나가보지』. ㅡ 고향 친구들을 만나면 이런 말을 가끔 듣는다. 신문 잡지에 더러 이름이 오르고 하니까, 소위 유명인 축에 끼워 주느라고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신문기자나 제대로 해 보아야 하겠는데, 그것도 쉽지 않네 그려』. ㅡ 건성으로 이렇게 대답을 하곤 하지만,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씁쓰름한 느낌을 가누는데 한참이 걸린다.
나에게 국회의원 될 역량도 포부도 없는 것은 내가 잘 안다. 그러나 아무튼 국회의원 해보라는 기대라도 걸어주는 옛정이 고맙고, 또 그 친구들 말이 뻔히 「지나가는 말」인줄 알면서도 듣기에 과히 거슬리지 않다가, 다음 순간에는 좀 씁쓸해지는 것이다. ㅡ 신문기자는 아무래도 국회의원만 못한 것이로구나.
국회의원 하는 분들이 이 글을 읽으면 허허 하고 웃을 것이고 또 웃어주어야 할 일이지만, 신문기자를 앞에 놓고 그 국회의원 한번 나가보라니, 이건 신문기자를 무얼로 알고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어느 구석인가에 있기에 씁쓸해지는 것일게다.
그야 꼭 신문기자 하겠다 해서 이 세상에 나왔다고 공언을 할 만큼 기자생활에 자신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어찌어찌하다가 신문기자가 되었고, 되고 보니 더러는 실망도 하지만 더러는 내 나름으로 보람을 느끼기도 하고, 그렇게 지나다 보니 신문기자 일 할 수 있는 날까지라도 정성껏 해보리라는 마음을 먹게 된 것 뿐이다.
인생의 방향을 내가 잡은 것이라기보다는 어찌어찌하다가 이렇게 신문기자로 인생의 방향이 반쯤 잡히게 된 것이다. 그러한 나로서는 내 직업에 대해서 할 말이 별로 없다.
ㅡ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고, 서른에 제 자리에 서고, 마흔에 動搖하는 일이 없게 되고, 쉰에 天命을 알게 되었다.
는 어느 성현의 술회는 아무나 자신에게 비춰보기도 어려운 일이겠고,
ㅡ 열살 때는 菓子에 動하고 스물에는 愛人에 동하고 서른에는 쾌락에 동하고, 마흔에는 野心에 동하고, 쉰에는 貪慾에 동하니, ···叡智는 어느 때나 추구하나.
고 한 「에밀」의 한 토막이 훨씬 실감있게 느껴지는 凡人으로서는 아직 반쯤은 남았다고 믿는 나의 인생을 되도록이면 보람있는 쪽으로 이끌어가 보아야 하겠다는 생각 밖에 있을 수가 없다.
새삼스럽게 부귀영화를 꿈꾸어 본대도, 홍진에 썩은 名利를 비웃어 본대도 이제 별도리 없는 한낱 신문기자다. 그러나, 다른 길로 가기가 어렵다 해서 주어진 일이나 제대로 하겠다는 것만은 아니라고, 나 자신을 타일러 본다. 또 기가 죽어서야 일이 되겠는가해서 억지로 자부심을 불러 일으키려는 것은 아니라고, 자신을 타일러 본다.
다만 신문기자로서 부끄럽지 않은 신문기자 노릇을 하고 있느냐라고 나 자신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기자로서 할 일을 다는 못해도 스스로 부끄럽지 않을 만큼이나 하고 있다면 정말 국회의원이 부럽지도 않을 것이다. 기자로서 할 일을 부끄러울이만큼 못다하고 있다면···그때는 인생의 방향을 돌려본들 거기서 무엇을 바라겠는가.
(<샘터>·1970.6)
 
<천관우 산문선>, 심설당

정달영 에세이

아니다, 이 모습이 아니다
(1999.3.19)
 
本과 末의 혼동
 
가령 ‘O양의 비디오’ 따위는 신문이 제아무리 심각하고 엄숙한 현안들로 가득 차 있다고 한들 세상의 흥미와 관심에서 앞선다. ‘현안’에 무슨 하자가 있어서가 아니라 인간의 심사가 본래 그러한 것이기 때문이다.
전 인구의 12%쯤이 일거에 빈곤층으로 전락한 처지에 연봉이 몇십억이라는 청년 펀드매니저나 회사값이 몇십억 달러라는 재미한인 벤처기업가의 ‘성공담’이 신문에 대서특필되는 현상을 다만 천박하다고만 치부할 계제도 못된다. 실업자의 문제는 실업자의 문제로서 심각하고 성공담은 성공담으로서 소중하다.
문제가 있다면 본과 말의 혼동이다. 아예 본을 잃어버리거나 말로써 본을 지워 없앤다면 그때는 큰일이 된다.
경우가 꼭 같다고 할 수는 없으나 요즘 신문에서 걱정스러운 현상을 자주 만나게 된다. 경제위기 극복의 섣부른 낙관론 전파가 그 하나다. 국가부도라는 파국을 모면한 것은 사실이지만 외환위기가 근원적으로 수습된 것은 아니다.
외채는 그대로 남아 있고 무역흑자는 수입을 하지 않기 때문이며, 늘어난 외환보유고의 상당 부분은 차입한 것이다. 그러고도 위기의 변수는 너무나 많다.
그런데도 ‘위기 극복’은 알게 모르게 기정사실로 홍보된다. 그리고 정부를 끊임없이 유혹하는 한마디가 있다. ‘고성장’이다. 지나간 30년의 고도성장 체질이 격렬한 금단현상을 일으키는 탓이라기에는 걱정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IMF체제를 이미 ‘졸업’한 것으로 착각하는, 누구에겐가 그렇게 유도된 행렬이 지금 이리저리 몰리고 있다. 그 행렬은 백화점의 고급 외제품 매점에도 있고, 공항의 출국장에도 있고, 아파트 분양 현장에도 있다. 심각한 것은 경기 진작에 애타는 정부가 부동산 부추기기에 앞장 서고 있다는 점이다. 그린벨트 풀고, 준농림지 규제 풀고, 양도세 없애고…·.
이야말로 악몽일 수 있다. ‘경기부양’의 이름으로 땅값에 불을 지른다. 70년대, 80년대 천정부지로 치솟은 땅값이 국가경제를 거품으로 풀어헤치고, 그것이 결국 IMF체제로 직행한 지름길이었음을 모르지 않으면서, 지금 정부는 그 땅값에 건곡일척의 베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도무지 꿈쩍도 않는 경기를 이렇게라도 건드리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정부의 생각이 비장할 뿐이다.
 
국가재생의 보약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경기를 활성화하고, 그리하여 하루빨리 국가경제의 재도약을 이루자는 뜻은 옳지만, 그래도 이것은 아니다. 이런 모습으로 손쉽게 우리 경제가 회복되어서는 안 된다. 손쉬운 회복은 우리 사회를 또다시 부패의 천국으로 몰아넣는 악마의 유혹이다. 시련이 더 혹독하지 않고서도 회복되는 경제도 약이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더 부패할 것이다.
이 예언자적인 말씀은 우리 사회 한 원로가 최근 어느 공개석상에서 털어놓은 눈물의 경고다. 이 분은 IMF체제라는 청천벽력을 맞았을 때에도 “이제 살았구나! 하늘이 주신 기회요 축복이다”라고 외쳤던 사람이다.
온 천하가 탈세·사기·뇌물·부패로 가득 찬, 국민청렴도 세계 44위의 나라에서 소돔·고모라 따로 없이 향락에 빠지고 저마다 기고만장, 천민근성에 젖은 백성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깨우침의 기회가 또 있겠느냐는 것이다.
단단히 깨우쳐야 할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경제환경이 저성장시대라는 사실이다. 부동산 투기로 떼돈 버는 ‘신화’는 더 이상 없는 사회라야 한다는 것이다. 욕구를 억제하고, 기대를 낮추고, 겉치레를 버리고, 그리고 가진 것을 나누는 봉사정신이라야 저성장 시대를 살아가는 최소한의 자격을 갖는다. 생각을 바꿔야 산다.
21세기는 물질의 축적이 주는 행복보다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가치가 더 소중하게 존중되는 사회. 국가나 개인의 이기주의가 아니라 공동선을 먼저 생각하는 시민이 만들어 가는 사회라야 한다. 지금 우리가 겪는 시련은 쓰고 힘들고 괴롭지만 국가 재생의 보약이다.
우리 사회의 총체적 부패구조에 대한 과감하고 전면적인 개혁의 기회는 그러나 바야흐로 사라져 가는 중이다. 도덕 재생의 의지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정달영 <나는 부끄러움을 찾았다>, 사람생각
한국 축구, 한국 경제
(1996.12.18)
 
비관론 일색인 우리 경제
 
비자금 관련 재벌총수들이 항소심에서 일제히 실형을 모면한 것은 최근의 극심한 경제불황 ‘덕분’이었다는 배경분석이 재미있다. 재판부는 이들 재벌총수의 “한국 경제발전에 기여한 공로”와 “그룹 회장이 뇌물사건의 피고인으로 있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해외시장에서의 어려움” 등 정상(情狀)을 작량(酌量)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에 앞서, 모든 지표와 전망에서 비관론 일색인 우리 경제의 참담한 오늘이 법적용 논리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추정이다. 실제로 우리 경제의 지표는 상황이 절박하다.
나라의 총 외채가 1천억 달러를 넘었다. 올 경상수지가 적자가 230억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연구기관마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내년에는 경상수지 적자가 올보다 더 늘어날 것이라는 데 전망이 일치한다. 숫자에 어두운 사람도 이런 경제가 위기적 상황임을 모를 수 없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국제경쟁력의 추락이다.
경쟁력은 그것 없이는 국제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는 절체절명의 핵심요소인데, 우리는 앞서간다고 내세울 것이 별로 없다. 후발 개도국들에 덜미를 잡히는 모습은 전반에는 앞서다가 후반에 와르르 무너져 무더기 골을 먹는 우리 축구를 많이 닮았다. 왜 이런 지경이 되었는가.
 
정치 논리가 경제 망친다
축구로 치면 ‘아시아에서 가장 잘 나가는 최강’입네 방심한 오만이고, 무계획이다. 경쟁력으로 치면 무더기 골을 먹도록 무기력 경제 체질을 방치해 온 정치권의 책임이다. 한국을 무참하게 무릎 꿇린 이란 축구의 감독은 그 전날 경기 전망을 묻는 기자들에게 “한국은 이미 아시아 축구의 맹주가 아니다”고 단언했었다. 그의 말은 정확했다. 그들은 후반에만 5골을 몰아넣으며 한국의 추락을 철저하게 확인했다.
축구와 국제경쟁력의 동반추락은 서로 닮기는 했으나 똑같이 사활적인 비장감을 준다고 보기는 어렵다. 찬바람 몰아치는 생존의 그라운드는 경제 쪽의 가파른 현장에 있다. 1996년의 세밑에 한국의 월급쟁이들은 ‘나의 일자리’가 불안해진 시대에 살고 있음을 실감한다. 지금은 ‘월급 올려받기 보다 직장의 내 자리 유지하기가 더 중요해진’ 시절이 됐다. 평생직장의 개념이 달라지고, 세상이 급히 변하고 있다.
열흘 남짓 앞으로 다가온 1997년이 더 조심스럽고 더 걱정스러운 까닭은 ‘정치의 해’이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어두울 것으로 예고된 경제가 대선바람에 휘말려들 가능성이 놓다. 대선을 의식한 정치적 논리가 경제의 기본원리에 우선하는 상황이 전개될 경우 우리의 새해 경제는 혼란과 위기와 파국을 맞이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
 
‘신경제’의 실종
 
정치논리는 여론의 눈치를 보기 때문에 위험하다. 이성적이고 합리적 파단에 따라 움직이는 대신에 감성적이고 즉흥적으로 판단하기 쉽다. 흔히 ‘국민감정’을 내세워 표와 인기를 따라가는 것이 정치논리다. 국민경제의 장래를 내다보기보다 눈앞의 표를 모으는데 열중하는 정책은 경제를 망친다.
클린턴이 재선에 성공한 이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였다고들 한다. 그러나 우리의 문민정부는 행여나 ‘경제’를 업적으로 내세울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임기를 1년 남짓 앞두고 지금 시작해서 업적으로 남길 수 있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요즘 국회에 의원입법 형식으로 제안되고 계류 중인 몇몇 법안들은 업적이 되기보다는 나라의 장래에 유해하게 될 수도 있는 독소가 우려된다. ‘표’를 탐해서는 좋은 정책이 될 수 없다.
문민정부 출범 초기에 나라 안에는 ‘신씨들의 행진’이 요란했다. ‘신한국’ ‘신경제’를 필두로 ‘신정치’ ‘신안보’ ‘신외교’ ‘신사고’까지.
그중 ‘신한국’ 하나는 집권당 당명에 남아 있으나, 나머지들은 종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중에도 위력이 대단해 보이던 ‘신경제’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살아서 ‘신한국’을 구출하는 날이 올 것인지 궁금하다.
인기 있는 정책으로 경제를 회생할 길은 이미 없다. 어렵고 인기 없어도 경제논리에 충실한 정책, 정치바람이 철저히 배제된 경제정책이 운용돼야 경제가 살고 나라가 선다.
경제위기를 헤쳐 나가는 유일한 처방도 다만 ‘국민이 잘해야’한다고 다그침 받는, 그래서 지갑 속의 마지막 달러 화폐 한 장을 찾아들고 길거리로 나서는 이 착한 국민!
그런데도 김수환 추기경이 말하듯이 “한국이 경제적 난국에 처하게 된 책임은 분수를 모르고 흥청망청하며 사치와 과소비에 흘렀던 우리 자신에게 있다”고 뼈아픈 자책부터 앞세워야 하는, 이 불쌍한 국민!
중요한 대목은 그 다음에 이어진다. 이 모든 위기와 난군은 “우리의 삶을 반성하고, 다시 부지런히 일하고, 상부상조 할 줄 아는 민족이 되라고 그분께서 채찍을 드신 것”이라는 덧붙임이다. ‘하느님의 채찍’을 지금 우리는 맞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소설(小雪)이 지난 게 언젠데 겨울비가 그치지를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계속될 비는 아니다. 이 비가 개면 아마도 혹한이 엄습할 것이다. 혹한이라는 표현보다 더 춥고 더 황량한 대량해고의 회오리가 12월을 예비하고 있다. 불과 2년 전에 2조 5천억 원의 순익을 냈던 초우량 첨단기업이 지금은 스스로 ‘생존의 위기’를 말하는 지경이다.
몇해 전 ‘내 탓이오!’ 캠페인을 벌였던 한 단체가 올해에 내건 슬로건은 ‘이제 제자리를 찾아 나섭시다’라고 한다.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론까지 나오기에 이른 국민적 분노가 설 자리는 지금 어디란 말인가. 국민은 언제나 소외되고 당하고, 그래서 분노하지만, 국민이 제자리를 잡지 않으면 이 나라를 지탱할 힘은 어디에도 없다. 분노를 삭이면서 결국 국민은 제자리를 찾아 나설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대통령을 잘 뽑는 것은 그 같은 제자리 찾기의 첫걸음이다. 그것이 바로 계획된 일이고 필연이다.
 
정달영 <나는 부끄러움을 찾았다>, 사람생각
내 고향, 지금 어찌 되었나
(1989.1.21)
 
춥지 않은 大寒에
 
초겨울 들면서 바꿔 낀 스노 타이어가 눈길은 한번도 밟아본 일없이 빗길을 헤매고 다닌다. 이상한 겨울이다.
연중 가장 춥다고 해서 대한(大寒)인데 기온은 종일토록 영상에 머물고, 그 대한이 끽소리 못하고 얼어죽는다던 소한(小寒) 역시 행세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채 벌써 물러갔었다.
어제로 스물네 절기가 모두 지나갔으므로, 보름 뒤면 봄꿩이 스스로 운다(春雉自鳴)는 입춘(立春)이다. 그때쯤, 또는 그 뒤라도 늦추위가 예비되어 있겠지만, 봄을 기다리는 마음은 이미 봄을 맞이한 듯 가볍다.
올 입춘은 마침 ‘설날’에 잇닿아 있다. 구정(舊正)이며 민속의 날이며 갖은 구박 다 받다가 영문 모르게 복권됐다는 ‘오랜만의 설날’을 기다리면서, 도시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지금
‘옛 고향의 그림자’를 생각할 것이다.
고향의 영원한 모습은 언제나 흙내 풍기는 농촌이다. 지금은 도시의 아파트에서, 또는 달동네에서 밤하늘의 별 그림자 한번 살피는 일 없이 살아가지만, 그 모든 도시인들의 뿌리가 멀고 먼 농촌의 흙에 닿아 있음을 부정할 도리는 없다. 그들은 모두 뿌리뽑힌 자 되어, 잃어버린 고향의 흙내를 문득문득 떠올릴 뿐이다.
그런데 그 고향땅, 그리운 그 농촌의 흙내는 지금 어찌 되었나. 누가 있어 옛 '설날‘을 지키는가. 떠나온 자의 귀향이 버려진 고향 땅에 무슨 뜻을 전할 수 있는가.
 
옛 農村 어디 가고
 
들리는 소식은 자못 살벌하다. 농촌 주민의 집단시위와 저항운동은 전국 어디서나 ‘보통일’이 되었다. 답답한 처지를 호소하고 탄원하려던 행동들이 점차 체제저항의 성격으로 발전하는가 하면. ‘헌정사상 초유’라는 농민에 의한 군청사 점거농성도 드물지 않은 일로 확산되고 있다. 농성하다 잡혀가고, 잡혀간 사람 풀어라 다시 농성하고, 강제해산 하다가 또 충돌하고…고분고분 말 잘 듣던 그 옛날의 농민은 결코 아니다. 그 고향땅의 흙내 풍기던 정경(情景)도 물론 아니다.
우리나라에는 농촌은 있었으나 농촌정책은 없었다. 특히 5공화국의 농정은 “무사려(無思慮)한 복합영농정책이 빚어낸 대실패작”으로 손가락질 당한다.
한 통계에 의하면 1981년부터 1986년까지 6년 사이에 농가 부채는 6.5배가 늘었고, 1980년부터 1988년까지 사이에는 300만 명이 넘는 농업인구가 농촌을 등졌다. 이농(離農)이 반드시 부정적인 현실을 반영한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것이 다른 산업부문의 ‘흡인효과’에 의한 것이 아니고 농촌 내부의 ‘배제효과’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 문제이다. 그들은 농촌으로부터, 자신의 오랜 고향으로부터 쫓겨났던 것이다.
농촌에 대한 6공화국의 생각은 어떤가.
지난 17일 노태우 대통령 연두회견에서 농촌에 관련된 문제가 언급된 것은 “무역마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농축산물 수입 제한조치들을 과감하게 폐지할 수밖에 없다”는 단 한가지였다.
대통령의 “열 것은 열어야 한다”는 선언에 가슴이 철렁했을 농민들만 가여울 따름이다. 19일에 있었던 농림수산부의 업무 보고에서도 주로 강조된 일은 수입개방에 따른 농민 설득 대책이었다. 1988년 현재 농축산물의 수입자유화율은 83% 선을 유지했으나, 1989년에는 아마도 100%로 홀랑 알몸이 되고 말 것이다. 정부는 우리 농민들에 대한 가격지지정책은 없이 이른바 농외소득이라고 하는 농촌 공업화시책을 대안 삼아 제시하지만, 이것은 상공업 측면의 지역개발정책이지 농업정책은 아닌 것이다.
우리의 농촌은 주곡농업을 포기하다시피 뒤로 돌려놓았을 때 이미 그 기능을 정지한 것이나 다름없다. 농민들은 ‘상업적 농업’으로 재빨리 전신하려고 했지만 그 결과는 이리 몰리고 저리 쏠리는 과잉 생산과 가격 폭락의 악순환을 불렀을 뿐이다.
 
小農經濟 살려야
우리의 식량자급률은 지난 1979년의 58%에서 1988년 40%로 급락 추세에 있다. 오는 2000년에는 30%에도 미달하는 ‘식량이 불안한 선진국’이 될 전망이다. 농촌을 ‘완전히 숨 끊어 놓고’ 선진국이 되겠다는 것이지만, 이야말로 너무나 불안정하고 생각 모자라는 계획이다.
유엔식량농업기구는 지난 연말의 1988년 송년성명을 통해 “곡물생산이 2년째 계속 줄어 1989년에는 식량안보와 공급부족 간의 격차 때문에 중대한 시련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한 일이 있다. 전문가들은 1989년의 국제 곡물생산량의 6년 만에 처음으로 소비량을 밑돌게 된다고 예측한다. 심상찮은 일들이다.
농경제학자 김성훈 교수는 네덜란드의 간척농업, 스위스의 산악농업, 덴마크의 불모지농업, 이스라엘의 사막농업을 예로 들면서 ‘소농(小農)경제’ 로서의 우리 농업이 살아갈 길을 찾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비교우위나 수익성을 고려해서가 아니라, 국민경제적 타당성과 사회적 기여도를 중시해서 경영의 고밀도화와 생산성 향상을 가져오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농업의 장래가 끝났다고 치부하는 사고방식에는 확실히 문제가 있다. ‘소농경제’를 기술혁신을 통해 발전시킨다면 수출지향의 구조로 우리 농촌을 바꿔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자동차를 만들어 수출하는 실력으로 수출지향의 농축산업을 일으키지 못하는 법이 있겠는가. 농업이 ‘전(前)근대산업’ 아닌 ‘근대산업’으로 재평가받게 될 때, ‘설날’에 귀성하는 도시인들의 마음도 한결 더 가벼울 수 있을 것이다.
 
정달영 <나는 부끄러움을 찾았다>, 사람생각
 

김중배 칼럼

고양이와 쥐의 共生
 
 
독재사회의 유머들은 거의가 정곡을 찌르는 寸鐵(촌철)을 송덩이 같은 웃음으로 포장한다. 가령 붉은 잉크와 푸른 잉크의 유머도 그 중의 하나다.
뜻을 같이했던 두 친구중의 하나가 붙잡혀가는 데서부터 얘기는 비롯된다. 갇혀가는 친구는 밖에 남은 친구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허락되는 대로 편지를 쓰겠다. 붉은 잉크와 푸른 잉크로, 푸른 잉크로 쓴 편지는 사실 그대로라고 믿어라. 붉은 잉크로 쓴 편지는 사실과 정반대라고 믿어달라』
약속했던 대로 갇힌 친구는 박의 친구에게 편지를 보냈다. 푸른 잉크의 편지였다. 이번엔 사실 그대로를 적어보냈거니 믿었던 친구는 끝대목을 읽고선 당황했다.
『이 곳엔 붉은 잉크가 없으므로 부득히 푸른 잉크로 썼다』
그 유머는 우선 붉은 잉크마저 가난한 물자난의 심각성을 날카로운 촌철로 쏘아댄다. 그러나 보다 무거운 뜻은 찬양과 동조의 「體制言語(체제언어)」만이 판치는 경직된 사회를 풍자했다는 데 있다.
한 빛깔 한 가락의 언어만이 활개치는 사회는 참으로 살아있는 사회일 수 없다. 「반대자의 애국심」이 「찬양자의 애국심」과 동일하게 존중되어야만 찬양의 언어들도 제빛깔로 살아난다.
「비판자의 애국심」이 「동조자의 애국심」과 동일하게 받아들여져야만 동조의 언어들도 허심탄회하게 평가된다. 「반대당은 반대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는 영국 의회의 전통도 다른 이유로 쌓여 온 건 아니다.
 
 
두 손을 벌리면 양극이 되지만 두손을 합치면 합장이 된다
 
나는 요즘 강조되는 「和合」의 제창들을 가슴에 새기면서 맨 먼저 그걸 말하고 싶었다. 찬양과 동조, 그리고 반대와 비판의 엇갈림이 화합을 깨뜨리는 요인일 수는 없다.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거든 두팔을 활짝 펴보기 바란다. 두 손은 가장 거리가 먼 좌우의 양극이 되고 만다. 그러나 두 손바닥을 모아보면 그 양극은 하나로 합쳐진다. 그 合掌이야말로 화합된 모습의 극치가 아니던가.
모두가 깊이 생각하고, 또한 깊이 생각한 바를 소신있게 밝힐 때 서로 다른 각의 거리는 두팔을 벌린 만큼 멀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깊이있는 생각들이 서로 만나는 接點을 찾는다면 그건 바로 합장의 모습이 된다.
반대를 위한 반대와 비판을 위한 비판이 의미 없는 것이라면, 마찬가지로 동조를 위한 동조와 찬양을 위한 찬조도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그 공허한 생각과 언어들은 접점을 찾지 못한다. 평행선을 달릴 뿐이다.
서로가 邪慾(사욕)에 빠지지 않고 깊이 생각하고 깊이 말한다면, 서로 만나지 못할 턱은 없다. 그 접점은 우선 자유와 민주의 나라를 가꾸어 나간다는 목표에서 확인된다.
다음으로 만나게 되는 접점은 진실이다. 서로의 생각과 말에 잡념이 생기지 않았다면 우리는 언젠가 진실의 뿌리에서 만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나는 화합의 제창에 붙이고 싶은 두 번째 당부를 거짓과 속임과 糊塗의 추방에서 찾는다. 비록 자리는 다르나 분명히 비슷한 생각을 갖는 분은 동시대의 산소를 함께 마시고 있었던 것 같다.
신문의 고십란을 들여다보면 신임 丁來赫(정래혁)민정당대표위원의 말이 선명하게 찍혀있다. 그는 『호도하거나 숨기지 않고 있는 현상을 그대로 직시, 하나 하나 과감히 시정해 나가야 한다』고 다짐했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다. 해를 달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달을 해라고 부를 수도 없다. 말과 사슴을 뒤바꿔 부르는 「馬鹿(마록)의 어리석음」에 누구나가 빠져 들어서는 안된다.
얇은 풀칠로 어긋난 매듭이 다시 이어지지는 않는다. 덮어둔다고 고름이 살로 둔갑할 수도 없는 일이다.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고 수술이 필요한 자리에 메스를 대어야만 患部는 낫는다.
그 진실의 교류 위에서만 우리는 힘을 모아 환부의 아픔을 다스려 나갈 수 있다. 비록 환부의 치료가 더디더라도 힘을 모으는 그 과정 속에서 우리의 화합은 다져진다.
호도와 거짓과 숨김은 환부의 치료만을 가로 막는 건 아니다. 화합의 근거인 믿음을 깨뜨린다.
 
거짓으로 이어진 악수는 野合(야합)일 뿐이다.
 
거짓이 난무하는 사회의 모습을 셰익스피어는 일찍이 이렇게 그려댔다. 그의 작품 《소네트》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내가 사랑하는 여인이 진실한 사랑을 맹세하면, 나는 그것이 거짓인 줄 알더라도 그대로 믿는 체할 것이다. 세상의 거짓을 모르는 멍청한 젊은이로 보이기는 싫으므로, 나는 여인에게, 여인은 나에게 서로 거짓을 지껄인다』
거짓 위에 쌓아올린 화합의 모습은 모래성에 지나지 않는다. 그건 野合일 뿐이다. 화합은 진실 위에서만 자라난다.
바웬사의 말대로 물이 들어있는 병에 샴폐인의 레테르를 붙인다고 그 안의 물이 샴페인으로 바뀌어질 수는 없다. 물을 물로 보는 데서부터 서로의 대화는 이어진다.
더구나 진실을 알 권리를 가진 사람들에게 거짓을 말하는 건 악일 수 밖에 없다. 더더구나 신뢰를 보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거짓을 말하는 건 보다 무거운 악일 수밖에 없다.
화합의 제창에 붙이는 나의 세 번째 당부는 자유로운 선택의 개방과 사회의 결속이 균형있게 추구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 두 가지 인간의 요구는 모순되는 것만은 아니다.
그걸 모순의 관계로만 파악하고 한쪽만을 강조할 때, 불행의 그림자는 찾아든다. 사회의 결속이 零이며,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 무한대로 뻗어나면, 그건 동무의 세계가 되고 만다. 그 극단의 세계는 놀랍게도 먼 거리에 동떨어져 있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가꾸어 가고자 하는 나라는 그런 세계일 수 없다. 선택과 결속이 조화를 이루는 나라이어야 한다. 진실과 정직이 보다 존중되는 땅이라야 한다. 진실과 정직이 바로 개인이나 사회의 이익이 되는 조국이어야 한다.
오늘, 나는 굳이 그 제도적 처방을 나열할 생각은 없다. 내 딴엔 이미 무던히 말해 왔고, 다른 분들도 무던히 목청을 높이는 시점인 까닭이다. 또한 나의 「世評」을 읽어 온 분들의 밝은 눈을 믿기 때문이다.
다만 한가지, 蛇足으로 붙여두고 싶은 얘기 한토막이 있을 뿐이다. 그건 「재미있는 동물의 세계」에서 읽었던 얘기다. 남의 나라에선 어린이도 읽는 책이다.
그 책은 서로 앙숙인 고양이와 쥐가 어떻게 하면 사이좋게 살 수 있도록 이끄는가의 묘방을 소개한다. 한마디로 갓 태어났을 때부터 서로의 體液(체액)을 서로의 몸에 나루며 기른다는 거다.
서로의 체액을 나누며 자라난 고양이와 쥐는 어른이 되어서도 사이좋게 살아간다. 알고 나면 신통한 묘방도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서로가 서로를 속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나누며 살아가는 가운데서 親和力이 자라난다는 교훈은 값지다. 서로의 체액을 역겹게만 느끼지 않고, 잦은 접촉으로 공생을 기약케 하는 그 슬기엔 고개가 숙여진다.
이 땅에도 피가 통하는 언어들이 스스럼없이 나누어진다면, 화합도 산너머 과제만은 아닐 성 싶다. (83.10.22)
 
김중배 칼럼 <민초여, 새벽이 열린다> 동아일보사
「네가 기자냐」는 물음
 
서울대학의 金暻東(김영동)교수가 조사한 「직업관과 사회구조」는 자못 심각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 같다. 「같다」고 말하는건 요즘 유행하는 「추상적 말투」를 흉내 내려서가 아니다.
사실 나는 그 논문을 보지 못했다. 지난 8일자 <연합통신>에서 그 요지에 접했을 뿐이다.
그 가운데서도 눈에 번쩍 뜨이는건 이른바 不信度(불신도)의 측정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불신하는 대상은 재벌로 나타났다. 다음이 상인, 중소기업, 세무서원 등의 순서다.
국회의원, 경찰관, 종교인, 고위직 공무원 그리고 언론인등에 대한 불신도도 높은 편이다.
거꾸로 신뢰도가 높은 대상은 대학교수와 교사, 근로자와 군장교의 순서로 나타났다. 그 밑으로 판· 검사와 대학생 그리고 의사 등이 이어진다.
이른바 「不條理」가 가장 많은 걸로 보이는 대상은 재벌과 세무서원, 국회의원과 상인, 그리고 경찰관의 차례로 나타났다.
더러는 막연하게나마 짐작했던 그대로이기도 하고, 더러는 예상이 전혀 빗나간 경우도 있다.
그러나 金暻東교수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사회적 책임의 비중이 큰 계층에 대한 불신도가 높거나, 신뢰도가 기대보다 낮다는 건 아무래도 암담한 일이다.
비록 인상적인 판단일지라도 우리 경제를 주도하는 재벌과 나라살림의 기본인 세금을 담당하는 세무서원의 불신도가 높다는 건 그만큼 그 쪽에 그늘진 구석이 있다는 실감의 반영이 아니겠는가.
정치인과 고급공무원 그리고 경찰관에 대한 불신도 예사로운 일은 아니다. 더구나 언론인과 종교인에 대해서도 불신감이 높다는건, 사회의 경제적 지주는 물론 정신적 지주마저 흔들린다는 조짐에 다름아니다.
 
아들딸이 겪은 가혹 행위를 호소하는 중년의 어머니들
 
나는 그 통신조각을 유심히 들여다 보면서 스스로의 역할이행과 책임과 행태가 과연 신뢰를 부를만한 수준인가를 거듭 되새겨 보았다. 불신도의 중간쯤에 언론인이 자리한다고 자위할 만한 처지는 아니었다.
남들에게 돌을 던지기 전에 스스로의 머리위에 돌을 던져야 마땅하다는 생각, 그리고 그 조사가 2년전이 아닌 오늘에 이루어졌다면 결과가 어떠했을까의 의문을 지울 수도 없었다.
그 때 떠오른게 지나간 어느날의 정경이었다. 나는 난데없이 중년부인들의 방문을 받았다. 그분들은 이른바 피구속자들의 어머니들이었다.
그분들은 아들 딸에 대한 수사과정에서의 가혹 행위를 하소연했다. 그분들은 수사의 비리를 공판정에서 진술한 아들 딸의 조서를 복사해서 가져왔다.
그저 더듬거리는 나에게 그 분들은 오히려 『오늘의 언론정황을 다 아노라』고 위로하면서, 『그러나 언젠가 써줄 수 있다면 고맙겠다』 『알고나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그날의 참담했던 심정은 오늘도 잊을 수 없다. 더구나 「人權의 날」을 맞아서는 그분들의 애절하면서도 혼연스러웠던 얼굴이 눈동자에 못박혀 온다.
 
(중략)
 
김중배 칼럼 <민초여, 새벽이 열린다> 동아일보사

저널리즘 패러다임 변화

저널리즘의 패러다임 변화 :
한국저널리즘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위한 제언
 
 
 
 
 
 
서론: 저널리즘 현실을 보는 시각
 
 
뉴스원이 분명치 않고, 확인되지 않은 소문은 뉴스가 아니다. 아니면 말고 식의 무책임한 형태는 절대로 저널리즘이 될 수 없다. 그런데도 이런 풍토가 마치 시대의 흐름인것처럼 일상화되어가고 있다. 사회의 목탁이란 말은 꺼낼 수도 없고, 모든 언론인이 무관의 제왕은 고사하고 시정잡배 취급도 제대로 받지 못할 판국이 되었다. 자유가 범람하면서 맞게 된 이 난장판의 모습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하고 대응해야 하는가? (최서영, 2009).
 
한 은퇴기자가 관훈저널에 기고한 글의 일부다. 그는 한국저널리즘의 현실을 “난장판”이라 부르고, 기자는 “시정잡배” 대접도 받지 못할 처지라고 개탄했다. 성장하는 미디어 산업과 발전하는 디지털기술보다 추락하는 한국 저널리즘의 수준과 상대적으로 축소된 기자들의 위상에 주목한 평가다.
2009년 11월 26일 관훈클럽이 개최한 “언론계 갈등 극복 대안찾기”토론회에서 남시욱은 한국 언론계가 반목하고 갈등하는 현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한국 언론계가 이렇게 된 데는 외부적 환경요인과 내부적 요인이 있다. 앞서 언급한 우리 사회의 격렬한 이념대립과 정치적 분열이 외부적 환경요인이라면, 언론사의 자사이기주의와 언론인들의 정치오염과 직업윤리 및 직무수행능력 저하가 내부요인이라 할 것이다 (남시욱, 2009).
 
대단히 신랄한 현실진단이다. 특히 내부요인으로 꼽은 내용들은 네 가지 모두 현장기자들에게 심각한 반성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전직기자인 소설가 김훈의 진단도 가혹하기는 마찬가지다.
 
요즘 신문, 저널 읽기가 고통스럽고 목이 멘다...... 현재 우리 사회의 지배적 담론들은 사실과 의견을 구분할 줄 모르는데, 그것은 자신의 당파성이 정의라고 믿기 때문이다 (박선희, 2008).
 
김훈이 한 포럼에서 한 강연 내용의 일부다. 그는 같은 강연에서 한국저널리즘 현실을 비판하며 “우리시대 언어의 모습은 돌처럼 굳어지고 완강해 무기를 닮아가고 있다”고도 말했고, 글쓰는 이들이 “의견을 사실처럼 말하고, 사실을 의견처럼 말하기 때문에 언어가 소통이 아니라 단절로 이르게 된다”고도 했다 (김태훈,2008).
다행인지 모르겠으나, 저널리즘 현실에 대한 이러한 진단은 한국만의 상황은 아니다. 수정헌법 1조 등 가장 선진적 저널리즘 제도를 갖고 있는 미국에서도 저널리즘 학자와 현장 기자들이 이미 10 여 년 전부터 거의 비슷한 관점의 진단을 제시했다. 1997년 6월 하버드 대학 교수클럽에 미국의 저명 언론인과 학자 25명이 모였다. 이들은 미국 저널리즘의 변질과 타락을 걱정했다. 더 나가 저널리즘의 소멸을 두려워했다. 저널리즘이 10년 후에도 살아남아 있을까? 남아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그들은 오래전부터 자신들의 직업과 관련해 무언가가 심각하게 잘못됐다고 느꼈다. 동료들이 생산하는 신문과 방송기사들 가운데, 저널리즘이라고 인정하고 싶은 기사가 적은 것이 문제였다. “편집국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저널리즘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날 모임에서 당시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 신문의 편집인이었던 맥스웰 킹(Maxwell King)씨가 한 말이다 (Kovach & Rosenstiel,2007, p.3).
컬럼비아 대학 저널리즘 스쿨의 제임스 캐리(James Carey)교수는 좀 더 종합적인 관찰을 제시하며, 그 날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을 제시했다.
 
문제는 점점 더 거대해지는 커뮤니케이션 산업의 영역 안에서, 저널리즘이 사라지는 현실을 여러분이 보고 있다는 점이다. 여러분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은 그 거대한 커뮤니케이션의 세계에서 저널리즘을 다시 살려내는 일이다 (Kovach & Rosenstiel, 2007, p.3).
 
이들은 이 모임을 통해 “저널리즘을 염려하는 언론인 위원회”(Committee of Concerned Journalists)를 결성한다. 그리고는 미국 저널리즘 현실에 대한 정밀진단에 착수한다.
돌아보면 1990년대 중반부터 저널리즘의 패러다임은 혁명적 변화를 겪어왔다. 이 변화는 저널리즘의 글쓰기 방식에서부터 뉴스의 생산방식과 전달매체, 언론사의 경영구조, 심지어는 독자와 시청자의 성격에 이르기까지 저널리즘의 모든 요소를 포함한다. 이러한 저널리즘 패러다임의 변화는 1990년대 중반에 시작돼 현재까지도 지속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앞으로 어느 정도 시간이 더 지나야 새로운 패러다임의 저널리즘 질서가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게 될지는 정확한 예측이 어렵다. 그러나 최근 진행되는 미국 미디어의 변화를 보면, 머지않은 장래에 어느 정도는 정리된 저널리즘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자리를 잡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 글은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 저널리즘이 경험하고 있는 다양한 변화와 위기의 상황들을 패러다임 전환의 증상들로 규정한다. 이러한 규정을 토대로 이 글은 우선 미국 저널리즘의 패러다임 전환 추세를 정리해보려 한다. 그 다음 미국 경험과 대비해 패러다임 전환 과정에서 나타나는 한국저널리즘의 특성을 저널리즘을 형성하는 주요 요소별로 정리하고자 한다. 이 글은 마지막으로,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한국 저널리즘이 추구해야할 새로운 패러다임의 주요가치들은 무엇인가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이 글의 접근법
 
이 글은 크게 두 가지 자료에 의지해 논지를 전개한다. 하나는 문헌자료들이고 두 번째 자료는 연구자의 현실에 대한 경험과 관찰에서 얻어진 정리된 생각들이다. 문헌자료는 크게 책과 연구논문들 그리고 다양한 전문지와 일간 신문들의 기사 등을 포함한다. 특히 미국의 저널리즘 패러다임 변화를 설명하는 부분은 코바치와 로젠스틸(Kovach & Rosenstiel)이 함께 쓴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The Elements of Journalism, 2007)의 개정판과 다우니 2세와 슈츤(Downie, Jr. & Schudson, 2009)이 공동으로 발표한 보고서인 “미국 저널리즘의 재건”(The Reconstruction of American Journalism)이라는 자료를 중점적으로 활용했다. 미국 저널리즘 현실에 대한 논의는 이 밖에 뉴욕타임스 신문의 미디어 면에 실리는 기사들과 www.journalism.org 사이트에 발표된 뉴스 미디어 현황보고서(The State of the News Media Report)를 많이 참고했다.
한국의 저널리즘 현실에 대한 논의는 다양한 학술논문과 연구 보고서, 전문지 기사 등을 자료로 한다. 지난 20여 년 동안 연구자가 저널리즘 현장을 대상으로 진행한 전문가로서의 관찰은 이 글에서 사용하는 2차 자료들의 의미를 체계화하는 일종의 분석틀로 활용했다.
 
 
 
 
저널리즘의 주요 요소와 패러다임 변화
 
이 글에서는 모두 5가지를 저널리즘을 형성하는 주요요소로 다룬다. 이들은 기사와 기자, 경영주체(발행인), 그리고 뉴스의 전달 매체와 수용자를 포함한다.
기사는 뉴스를 담는 표현양식이다. 글이나 소리가 중심이 되지만 텔레비전에서는 영상을 포함한다. 인쇄매체에서 사진이 포함됨은 물론이다. 기자는 기사를 생산하는 사람이다. 전통적으로는 신문이나 방송·통신사에 고용된 전문직 종사자를 일컬었으나 인터넷 등장 이후, 그러한 제한이 거의 무의미해졌다. 경영주체는 신문이나 방송사를 경영하는 주체를 말한다. 기사에 관해 최종 결정권한을 행사하는 주체라 할 수 있다. 기자의 채용과, 해임을 결정하는 행위자이기도 하다. 뉴스의 전달매체는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인터넷, 휴대폰 등 뉴스를 수용자에게 전달하는 매체를 말한다. 수용자는 신문의 독자와 텔레비전 뉴스를 시청하는 사람 또는 인터넷을 통해 뉴스를 찾아 읽는 사람을 모두 포함한다.
저널리즘은 이들 5가지 요소가 함께 어우러져 만드는 뉴스의 생태계를 종합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이들 5가지 요소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빠지게 되면 저널리즘 현상은 형성되기 어렵다. 또 이 가운데 어느 한 요소에 관해서라도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면, 이는 예외 없이 다른 4 가지 요소에 그에 상응하는 변화를 만들어 낸다. 5가지 요소는 기본 속성상 서로 상호작용을 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 다섯가지 요소를 기능에 따라 분류하면, 기사는 상품 또는 생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경영주체와 기자는 생산기능을, 수용자는 소비 기능을 담당한다. 전달매체는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수행하는데 기사라는 상품은 매체를 통해서 생산자로부터 소비자에게로 전달된다.
패러다임의 변화(Paradigm Shift)는 토머스 쿤(Thomas Kuhn)에 따르면 한 시대를 지배하던 사고체계 또는 연구 전통(research traditions)이, 전혀 새로운 사고체계(연구 전통)로 대체되는 변화를 말한다(Kuhn, 1962). 하버마스(1973)는 이러한 변화를 시스템 이론적 관점을 활용해 시스템의 조직원리(organizing principles)가 바뀌는 상황이라고도 표현했다.
이 글에서 현재 저널리즘의 상황을 패러다임의 변화로 규정하는 이유는 한국 뿐 아니라 전 세계의 저널리즘 생태계가 경험하는 변화가 단순히 한 가지 요소의 변화로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1920, 30년대 라디오가 새로운 매체로 등장했을 때나 1950, 60년대 텔레비전이 새로운 매체로 등장했을 때 신문을 비롯한 인쇄매체들은 심각한 위협을 느꼈었다. 이러한 새로운 매체의 도전은 기존 매체의 위기로 규정되었고, 전통매체들은 그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뉴 저널리즘이나 섹션신문의 개발, 전문화 등 생존을 위한 전략을 개발해 자신의 터전을 지켜 내며, 상당부분 성장도 이루어낼 수 있었다. 탐사보도 기법도 이러한 노력의 결과였다. 다시 말해, 위기는 있었지만, 저널리즘은 오히려 더 다양해졌고, 공중과의 관계를 더 깊게 다질 수도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부터 현재에 이르는 상황은 과거 전통매체들의 위기와는 여러 면에서 근본적으로 다른 양상을 드러내왔다. 현재 진행되는 변화는 특정한 기업이나 매체의 실패가 아니라, 캐리 (Carey)교수가 말하듯이, 저널리즘 자체의 소멸을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 현재 상황을 패러다임의 변화 (Paradigm Shift)로 규정하는 이유는 이처럼 근본적으로 깊이와 폭이 다른 변화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해야하기 때문이다. 현재 진행되는 저널리즘의 변화를 매체 기술의 진화 때문에 벌어지는 또 하나의 지나가는 위기로 진단해서는, 제대로된 대응 방안을 제시하기가 어려워진다. 또 잘못된 처방을 고집하게 되면, 한국의 저널리즘은 돌이킬 수 없는 소멸의 길로 접어 들 수도 있다.
 
 
미국 저널리즘의 패러다임 변화 증상
 
미국 저널리즘에 근본적인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먼저 느낀 사람들은 의식 있는 현장 기자들과 저널리즘 연구자들이었다. 그 시기는 대체적으로는 1990년대 중반쯤으로 판단된다. 문제의 심각성을 느낀 기자들은 1997년 저널리즘을 염려하는 언론인 위원회(CCJ: Committee of Concerned Journalists)를 결성한다. 그리고는 3년여에 걸친 전문가 포럼개최와 100여 명 저명 언론인을 대상으로한 심층인터뷰 등 연구작업을 실시해 미국 저널리즘의 현실을 진단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이들은 이러한 노력을 통해 미국 저널리즘을 변화시키는 세 개의 커다란 동력이 작용한다고 주장했다(Kovach & Rosenstiel, 2007, pp.63-67).
첫째는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과학기술의 발전이다. 이들 주장에 따르면, 인터넷과 디지틀 기술의 발전은 지역사회(Community)를 토대로 유지돼오던 언론사와 수용자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면, 공간적 조건이 지배하고 정치 공동체가 중심이던 과거 체제가 공간 제약을 넘어 상거래나 이익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인터넷 공동체로 대체된다는 뜻이다.
두 번째 동력은 언론사의 거대기업화(Conglomeration)다. GE사가 NBC를 사고, 디즈니사가 ABC를 소유하는 사례들이 이 추세를 대표한다. 타임사를 아메리카 온라인(AOL)이 인수하는 것도 예외가 아니다. 문제는, 이렇게 되면, 저널리즘 회사가 제조업, 금융업 또는 인터넷 기업의 자회사로 편입되는 구조에서 발생한다. 이들 거대 기업은 저널리즘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들 주력기업의 이윤확대가 최우선 과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소유구조에서 저널리즘은 어쩔 수 없이 모회사의 이익에 봉사하는 역할을 강요받게 된다.
CCJ가 제시하는 저널리즘 변화의 세 번째 동력은 세계화(globalization)이다. 이들에 따르면 세계화는 자본과 수용자 모두의 다국적화를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뉴스는 특정한 국가나 민족만을 대상으로 생산되지 않는다. 다양한 시장에서 모두의 관심을 끌어야 하기 때문이다. 저널리즘이 세계화되면, CCJ사람들이 제기하는 커다란 걱정은, 저널리즘의 전통적인 기능인 권력에 대한 감시견(watch dog)역할을 수행할 가능성이 줄어드는 점이다. 이들이 지적하는 또 다른 문제는, 모든 나라 수용자가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명사 (celebrity) 중심의 뉴스나 선정적 기사들을 주요뉴스로 다루려는 언론사들의 상업주의 확산이다.
「저널리즘을 염려하는 언론인 위원회」사람들은 이러한 구조적 원인들로 인해 미국 저널리즘의 수준이 심각하게 저하됐다고 진단한다. 이에 따라 그들은 저널리즘 현실에 대한 정기적인 진단을 제도화 하고 기자들에 대한 순회교육을 강화하는 한편 저널리즘의 기본가치를 다시 정립하는 교재인 「저널리즘의 기본원칙」(The Elements of Journalism,2001)을 출판한다. 이 책에서 공동저자인 코바치와 로젠스틸(Kovach & Rosenstiel)은 주관성이나 의견을 앞세우는 주장저널리즘(journalism of assertion)이나 정파성을 드러내는 옹호저널리즘(advocacy journalism), 그리고 여러 매체의 기사를 포털들이 모아서 전하는 집합의 저널리즘(journalism of aggregation) 등 새롭게 세력을 키워가는 저널리즘의 부정적 요소들의 폐해를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이 책이 출판된지 3년 뒤인 2004년, 당시 L.A타임스 신문의 편집인(executive editor)이었던 존 캐롤(John Carrol)은 미국 저널리즘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미국 전역에 걸쳐, 편집국을 꼭 빼닮은 사무실들이 발견된다. 그리고 이 사무실들에는 기자를 닮은 사람들이 일한다. 그러나 그들은 저널리즘에 종사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은 저널리즘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일은 독자를 -방송의 경우는 시청자를 - 그들이 섬겨야할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들은 자신들의 수용자를 차가운 냉소주의로 대한다. 나는 이 영역을 사이비 저널리즘(pseudo-journalism)이라고 부르는데, 이곳에서 수용자는 이용당하는 대상이다. 그리고 수용자가 오도됐을 때, 사이비 편집국(pseudo-newsroom)에서 일하는 사람은 아무도 그 일에 대해 저항하지 않는다 (Carrol, 2004).
 
이 글에서 캐롤이 겨냥한 대상은 주로 라디오 토크쇼들과 인터넷 매체들이었다. Fox TV같은 정파적 매체들도 비판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 무렵까지만 해도 저널리즘의 주류 언론사들이나 기자들이 심각한 타격을 받으리라고 예상하지는 않았다.
2008년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상황은 급격히 악화됐다. 인쇄신문을 포기하고 인터넷으로만 뉴스를 전하는 신문이 속출하고, 전통 저널리즘의 중추적 존재인 취재와 편집인력에 대한 감원 작업이, 특히 지난 2-3년 사이, 급격히 확산됐다. 2009년 이러한 저널리즘 현황을 조사했던 레너드 다우니 2세와 마이클 슈츤(Leonard Downie, Jr. & Machael Schudson, 2009)은 그들의 보고서 첫 단락을 다음과 같이 시작했다.
 
미국 저널리즘은 격변의 순간(a tranformational moment)을 맞았다. 지배적인 신문들과 강력한 영향력을 가졌던 네트워크 TV뉴스 보도국이 급격히 쇠퇴하고 있다. 그 대신 뉴스의 취재와 전달 능력은 광범위하게 분산되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듯이, 오랫동안 광고에 의지하던 미국 신문들의 경제적 토대는 이제 무너지고 있다. 그리고 독립적 보도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었던 신문들 자신은 말그대로 급격히 축소되고 있다. 숫자가 크게 줄어든 편집국 기자들은 역시 페이지가 크게 준 지면에 훨씬 적은 량의 뉴스를 보도 한다. 지난 세기의 마지막 30여 년 동안 거의 독점적 지위를 누리던 대도시 신문들의 영향력은 그들의 주요 독자가 떠나면서, 이제 종착역에 다다르고 있다. 상업적 텔레비전 뉴스 또한 과거 오랫동안 누리던 신문의 중요한 경쟁 상대로서의 지위에 타격을 받았다. 텔레비전 저널리즘 영역에서는 시청자와 광고수입, 그리고 취재 인력까지 모두 감소하는 것이 현실이다. (Downie, Jr. & Schudson, 2009. p.1).
 
다우니 2세와 슈츤은 신문이나 TV뉴스가 조만간 사라진다고 예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역할이 크게 축소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변화의 가장 큰 동력은 역시 매체의 디지털화 추세다. 이들에 따르면, 지난 10여 년 사이 “뉴스의 성격은 새롭게 재구성(reconstructed)되고 있고, 취재의 도구들은 재발명(reinvented)되었으며, 취재 능력은 훨씬 다양한 전통적 매체와 완전히 새로운 매체들로 급격히 확산돼왔다.”
이들이 제시한 보고서에서 우선 눈길을 잡는 사실은 전통적인 신문들에서 급속히 진행되는 취재인력의 감축현상이다. 다음의 표는 그 상황을 정리한 내용이다.
 
 
주요 신문의 취재 인력 감축현황
 
신문
과거 기자수
현재 기자수
감소자수
감소율(%)
볼티모어 선
(The Baltimore Sun)
400
150
-250
62.5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
(The Philadelphia Inquirer)
600
300
-300
50
클리블랜드 플레인딜러
(The Cleveland Plain Dealer)
400
240
-160
40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TheSan Franscisco Chronicle)
500
200
-300
60
L.A. 타임스
(TheL.A. Times)
1,100
600
-500
45
(Downie, Jr & Schudson, 2009. p.17).
 
 
다우니 2세와 슈츤이 추산한 종합적 통계를 보면, 미국의 신문기자수는 1971년 4만 명 정도에서, 1992년 6만명으로 크게 늘었다가 2009년에는 다시 4만명 수준으로 줄었다.
신문 업계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는 계속 보도되는 신문사의 파산과 매각, 그리고 폐업 사례 등이다. 파산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L.A. 타임스와 시카고 트리뷴(The Chicago Tribune), 뉴욕 뉴스 데이(The New York News Day), 볼티모어 선(The Baltimore Sun)과 올랜도 센티넬(The Orlando Sentinel) 신문을 갖고 있는 트리뷴 사(The Tribune Company)의 경우다. 2009년 덴버 시의 록키 마운틴 뉴스(The Rocky Mountain News)사는 폐업을 선언했다. 비슷한 시점에 시애틀의 포스트 인텔리겐서(The Seattle Post-Intelligencer)지는 소수의 취재 인력만 남겨 인터넷으로만 뉴스를 전달하기로 했다.
2009년 후반에 이르자 토요일에 신문을 인쇄하지 않고 인터넷으로만 전하기로 한 신문이 전국에서 100개를 넘겼다 (Downie, Jr & Schudson, 2009). 신문이 인터넷으로만 뉴스를 전하기로 하거나 취재인력을 감축하는 기사들은 뉴욕 타임스의 미디어 면을 보면 2010년에도 하루가 멀다하고 등장한다. 2010년 2월 4일에는 CBS뉴스가 새해들며 수십명의 보도인력을 감원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 감축계획에는 아침뉴스 프로그램(The Early Show)과 60 Minutes, 그리고 해외나 국내 지역 취재팀 인력의 축소가 포함됐다고 이 기사는 보도했다(Stelter, 2010). 2010년 2월 12일자 신문에는 버클리 데일리 플래닛(The Berkeley Daily Planet)이라는 캘리포니아 주의 지역 신문이 2월 말부터 인터넷으로만 뉴스를 전하기로 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Wollan, 2010). 2월 14일에는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발행되는 스타 트리뷴(The Star Tribune)이라는 신문에 이 회사 기자 노조가 2006년 이후 신문사를 떠난 기자들을 기억하는 광고를 실었다는 기사를 올렸다(Perez-pena, 2010). 이 기사에 따르면, 스타 트리뷴은 2006년 400명에 달하던 편집국 기자수가 2010년에는 250명 정도로 축소됐다고 한다. 이 신문기자들은 과거 이러한 회사의 정책에 저항해 기사에 기자이름 밝히기 거부 투쟁(byline strike)도 했었다고 이 기사는 전했다.
여기까지 살펴본 미국 저널리즘의 변화는 코바치와 로젠스틸(2007)이나 다우니 2세와 슈츤 교수의 표현대로 그 성격이 매우 근본적이다. 또 변화의 영향이 미치는 범위는 앞에서 제시한 저널리즘의 5가지 요소를 모두 포괄한다. 가장 직접적인 타격을 입는 대상은 지속적인 감원과 파산 사례들에서 알 수 있듯이 기자들과 경영주체들이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더욱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취재환경의 급격한 위축이 초래하는 기사 품질의 저하와 저널리즘 가치들의 훼손이다. 「저널리즘을 염려하는 언론인 위원회」(CCJ)와 다우니 2세와 슈츤 교수같은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 시민을 위해 독립적 시각으로 뉴스를 공급하는 저널리즘(Independent Journalism)은 사라지고, 홍보와 선전을 교묘하게 뉴스로 포장하는 사이비 저널리즘(pseudo-journalism)만 남을 수 있다고 걱정한다.
빔과 위버 그리고 브라운 리(Beam, et al, 2009) 등은 2002년과 2007년 사이 5년 동안 미국 기자들의 전문직 정신(professionalism)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분석하는 패널 연구를 시도했다. 미국 전역에서 400 명 정도 되는 기자들을 5년 간격을 두고, 두 차례에 걸쳐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이들은 두 가지 결론을 강조했다. 하나는 중요한 주제들을 취재하는 능력이 크게 축소됐다는 기자들의 인식이 확인된 점이다. 특히 이러한 인식은 가장 중요한 뉴스공급자인 일간 신문 기자들에서 더 두드러졌다. 두 번째 결론은 대규모 감원이나 명예퇴직이 시행된 매체들 경우, 기자들의 독립성이 눈에 띄게 축소됐다는 인식을 확인한 점이다. 이러한 회사에서 일하는 기자들은 예외 없이 담당 업무가 크게 증가했다고 응답했다. 빔 등(Beam, et al, 2009)은 이 논문에서 “미국기자들에게 지금보다 더 불확실성이 높았던 시기는 없었다”고 강조했다.
 
 
 
미국 저널리즘 업계의 대응
이러한 근본적 위기에 대응하는 움직임은 그 주체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는 의식있는 기자 집단의 대응이고, 두 번째는 개별 매체사들의 대응노력이며, 세 번째는 사회전체 차원에서 제도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대응노력이다.
 
엘리트 기자들의 대응
 
엘리트 기자들의 대응노력은 앞에서 여러 차례 소개했듯이 「저널리즘을 염려하는 언론인 위원회」(CCJ)가 중심이 돼, 이미 1997년부터 체계적인 노력을 기울여왔다. 빌 코바치와 톰 로젠스틸이 주도하는 CCJ는 2001년 「저널리즘의 기본원칙」(The Elements of Journalism)이라는 책을 출판하며, 1차적으로 저널리즘의 기본가치를 다시 확립하고, 변하는 매체 환경에서도 현장기자들이 반드시 지켜야할 행동준칙들을 10가지로 나눠 제시했다. 2004년 부터는 www.journalism.org 사이트를 만들어, 저널리즘 산업과 취재보도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양한 통계자료와 연구보고서등을 통해 대중화하기 시작했다. 특히 해마다 3월이 되면, 이 사이트에 발표되는 「뉴스 미디어 현황 보고서」(The State of the News Media Report)는 신문, 잡지, 텔레비전, 인터넷 등 각 분야별 매체들의 경영이나 인력구조변화 현황을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체계적인 자료를 제공한다.
 
뉴욕 타임스의 대응
 
개별 매체사의 대응은 소유구조와 경영철학 등의 차이로 편차가 대단히 크다. 트리뷴 사 (The Tribune Company) 경우 는 L.A. 타임스를 인수하는 등 사세 확장을 꾀하다가 불경기를 만나, 회사를 매각하고, 급기야는 파산에 이르렀다. 그런가 하면 뉴스 코퍼레이션(News Corperation)은 소유주인 루퍼트 머독(Rupert Murdoch)의 지휘아래, 미국을 대표하는 전국지인 월 스트리트 저널(The Wall Street Journal)을 인수해 계열사를 확장했다. 그리고는 현재 인터넷 중심의 독자구도로 재편되는 추세를 고려해, 인터넷 독자들에 대한 유료 모델을 개발해 실험하는 중이다. 신문재벌가운데는 가네트(The Gannett)사에 이어 두 번째 규모를 자랑하던 나이트 리더(The Knight-Ridder)사가 그보다 규모가 훨씬 적은 맥클래치(The McClatchy Company)사에 매각됐다. 맥클래치 사는 나이트 리더를 인수한 뒤, 경영이 어려워져 주식가격이 매입시에 비해 30%수준으로 폭락하는 어려움을 격고 있다. 4대 일간지의 하나였던 L.A. 타임스는, 앞에서 표로 보여준 것처럼, 한 때 1,100명에 달하던 편집국 인력을 5-6년 사이 600명 수준으로 축소했다. 존 캐롤(John Carrol)이 편집인으로 있을 때, 한 해 퓰리쳐 상을 7개나 타내며 수준높은 저널리즘을 추구하던 신문의 명예가 형편없는 수준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뉴욕타임스의 대응은 달랐다. 인터넷의 도전과 금융위기로 광고가 급격히 줄면서 회사의 수익구조는 크게 악화됐지만, 뉴욕 타임스는 대규모 감원을 실시하지 않았다. 2009년, 자회사인 보스톤 글로브(The Boston Globe)가 경영난을 겪으며, 회사 자금 상황을 압박할 때도, 뉴욕타임스는 저널리즘의 수준을 유지하려면, 최고의 인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감원을 자제했다. 이 회사 경영진은 기자를 60 여명 감원하는 안과 전체 직원의 급여를 한시적으로 5%삭감하는 안을 놓고 기자노조와 협상을 시도했다. 양측이 합의한 대책은 감원을 최소화 하는 대신 일정기간동안 전체 직원의 급여를 일부 삭감하는 안이었다.
뉴욕타임스는 최고 수준의 저널리즘을 추구하기 위해 여러 지역에 소유하고 있던 지역 방송사들을 매각했다. 설즈버거 2세(Arthur Sulzberger, Jr.)의 생각은 뉴욕타임스의 핵심역량은 모기업인 신문의 저널리즘 기능이므로 그곳에 모든 에너지를 집중하는 것이 맞다는 것이었다.
뉴스의 취재와 편집을 책임지는 편집인(executive editor) 빌 켈러(Bill Keller)는 2003년 벌어진 제이슨 블레어(Jayson Blair)사건을 딛고 일어서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독자의 신뢰(credibility)를 회복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2005년 편집국의 운영원칙으로 천명되는 「신뢰도 보고서」(The Credibility Report)를 발표하면서, 독자들과의 교감을 강화하고, 독자의 소리를 제도적으로 수용하기 위해 두 개의 새로운 서비스를 시작한다. 하나는 옴부즈맨 제도인 시민 편집인(The Public Editor)의 임명이고, 다른 하나는 인터넷 홈페이지에 개설된 「편집국과의 대화」(Talk To The Newsroom)섹션을 개설하는 일이다.
시민편집인은 다른 회사에서 명예로운 기자 경력을 축적한 기자를 초빙해 계약직으로 임명하는 자리다. 객관적이고 독립적인 기능이 가능하도록 고려한 원칙이다. 2005년, 다니엘 오크렌트(Daniel Okrent)씨, 2007년 바이런 컬레임(Byron Calame)씨에 이어 현재는 클라크 호이트(Clark Hoyt)씨가 시민편집인을 맡고 있다. 시민편집인의 역할은 말그대로 시민의 시각으로 뉴욕타임스 기사를 감시하는 일이다. 시민편집인은 2주에 한번 신문에 칼럼을 게재한다. 홈페이지에 있는 시민 편집인 코너에는 독자들의 질문과 비판이 그때그때 요약돼 제시된다. 시민 편집인이 싣는 칼럼을 보면 편집인 빌 켈러를 비롯한 각부문 담당 에디터들의 답변들이 실명으로 인용된다. 시민 편집인이 독자의 질문들을 토대로 담당자에게 문제를 제기하면, 책임자는 반드시 실명으로 응답하도록 회사에서 규칙으로 강제하기 때문이다.
「편집국과의 대화」(Talk To The Newsroom)는 담당 에디터가 직접 독자와 인터넷을 통해 대화하는 공간이다. 뉴욕 타임스는 첫 회에 빌 켈러 편집인을 시작으로, 매주 한 사람씩 이 코너의 담당자를 지정한다. 그러면 독자들은 자신들이 궁금한 점을 이 사람에게 메일로 질문한다. 담당자는 자신이 맡은 1주일 동안 이렇게 들어오는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인터넷에 올리도록 돼있다. 이 코너엘 들어가 보면, 2005년 시작했을 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독자들의 질문에 답변한 에디터들과 전문기자들의 명단이 모두 올라와있고, 그들과 독자들의 대화내용도 보관돼있다.
따라서 이 글들을 보면, 이 신문의 편집책임자들이 어떠한 기준으로 기사를 판단하고, 취재하는지, 독자들은 어떠한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 등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도록 돼있다. 이 코너는 특히 선진적 편집관행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취재, 편집 수준을 높이고 싶어하는 한국의 기자들에게도 매우 유용한 정보원이 될 수 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뉴욕타임스의 주식 가격도 크게 떨어졌다. 금융위기로 광고 매출도 대폭 줄었다. 그래서 2011 년 부터는 인터넷 독자들 경우, 한달에 일정한 숫자 이상의 기사를 보게되면, 요금을 부과하도록, 인터넷 유료화를 추진하고 있다. 매일 2000만 명 이상 찾아오는 인터넷 독자를 수익원으로 전환해 보려는 구상이다.
 
사회 제도적 대응
 
저널리즘 패러다임 변화에 대응하는 미국의 사회제도적 대응은 아직은 지극히 초기적 수준에 머물고 있다. 1947년 제시된 허친스 위원회(The Hutchins Commission)보고서 같은 포괄적인 대안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나야 구체화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시점에서 그래도 가장 종합적인 제안은 다우니 2세와 슈츤(2009)이 내놓은 「미국 저널리즘의 재건」(The Reconstruction of American Journalism)에 담겨있다. 이 보고서는 신문과 네트워크 TV 등 무너져내리는 전통적 저널리즘 매체들의 공백을 메워줄 대안을 어디서 어떻게 찾을 수 있을 것인가에 전체 지면 98쪽의 60% 이상을 사용한다. 그리고 보고서의 마지막 결론부분에서는 독립적 저널리즘이 유지될 수 있게 하려면 미국 정부와 사회가 어떠한 일을 해야하는가를 6가지 제안(recommendation)으로 정리해 제시한다.
다우니 2세와 슈츤은 새롭게 독립저널리즘 매체를 만들어내는 집단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눈다. 첫째 집단은 기존 신문과 방송사를 떠난 전직 기자들이다. 두 번째 집단은 전국대학의 저널리즘 스쿨과 그곳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다. 그리고 마지막 집단은 인터넷 블로거들과 시민기자들(citizen journalists)이다.
이들은 캘리포니아 주의 샌디에고(San Diego)에서부터 텍사스(Texas), 아이오와(Iowa)와 미네소타(Minnesota)를 거쳐 뉴저지 (New Jersey)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전지역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취재하는 영역은 주로 각 도시의 지역 뉴스(local news)이다. 이들은 또 정치나 환경, 세금 문제 등 특정한 분야를 집중적으로 심층취재하는 탐사저널리즘을 추구하기도 한다. 가장 많이 사용하는 기사게재 공간은 인터넷이지만, 이들은 각 지역의 공영방송(라디오)과 신문, 잡지, 텔레비전에 자신들의 기사를 제공하기도 하고, 타지역에 있는 비슷한 매체들과 제휴해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하기도 한다. 다우니 2세와 슈츤(2009)의 조사에 따르면, 이러한 매체들은 영리(for profit)법인도 있고, 비영리(non-profit)법인의 형태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 두가지를 혼합한 형태를 띠는 매체도 발견된다.
흥미로운 점은 뉴욕을 포함한 각 지역에서, 이들 같은 독립저널리즘 매체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려는 자선재단(Foundation)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나이트 재단(Knight Foundation)과 샌디에고 재단(Sandiego Foundation)은 2009년 www.voiceofsandiego.org라는 매체를 위해 각각 10만 달러 씩을 후원했고, 샌디에고 재단은 자신의 건물공간을 이 매체에 좋은 조건으로 임대하기도 했다.
뉴욕 시에는 2008년 프로퍼블리카(ProPublica)라는 미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비영리 탐사보도전문 매체가 등장했다. 프로퍼블리카는 30 여 명의 경력 기자와 에디터를 고용했다. 편집장은 전 월스트리트 저널의 편집국장 폴 스테이거(Paul Steiger)이고, 기금 3천만 달러는 캘리포니아의 금융재벌 샌들러(Sandler)부부가 만든 자선기금에서 제공했다. 프로퍼블리카는 정부의 재정지출이나 경제위기, 에너지, 교육, 건강분야 등에 대한 탐사보도 만을 추구한다. 프로퍼블리카는 이미 워싱턴 포스트와 뉴욕 타임스, L.A.타임스, ABC, CBS, CNN 등에, 자신들이 생산한 기사를 게재했다. 이 기사들은 프로퍼블리카의 홈페이지에도 공개된다.
다우니 2세와 슈츤은 대학과 공영방송들이 독립저널리즘의 유지를 위해 수행할 역할이 크다고 주장한다. 대학은 저널리즘 교수들의 전문적 능력과 풍부한 학생자원을 활용해 수준높은 권력 감시기능을 수행할 수 있고, 공영방송들은 기존의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활용해 저비용으로 이들이 생산하는 기사를 보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독립매체들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AP통신도 참여를 선언했다. 2009년 6월 13일자 뉴욕타임스 기사에 따르면, AP통신은 탐사보도를 전문으로 하는 4개의 비영리 매체들과 기사 배달을 위한 협정을 체결했다(Perez-Pena, 2009, June,13). 이 작업에 참여한 4개의 비영리 매체는 프로퍼블리카와 The Center for Public Integrity(워싱턴 D.C.). 아메리칸 대학에 있는 the Investigative Reporting Workshop(워싱턴 D.C.), 그리고 the Center for Investigative Reporting(버클리,캘리포니아) 등이다. 이 협정에 따르면 AP통신은 이들이 생산한 기사를 전국에 있는 회원사들에게 전송한다. 그러면 AP회원사들은 무료로 이들의 기사를 자사의 신문이나 잡지, 방송뉴스 등에 사용할 수 있다.
블로그를 통해 뉴스와 주장을 전하는 신종매체들의 성장도 빠르다. 다우니 2세와 슈츤(2009)에 따르면, 블로그를 통해 개인들이나 소집단으로 활동하는 이 사람들은 전통매체들과 공생적 관계를 형성하며, 뉴스거리를 제공하고 서로가 기사의 진실을 검증하며, 디지털 저널리즘 생테계를 확장시킨다. 이들 가운데 대표적인 블로그는 조쉬 마샬(Josh Marshall)이라는 사람이 맨하탄의 첼시(Chelsea)지역에서 운영하는 TPM(Talking Points Memo)이라는 매체다. 중도진보적 성격의 이 블로그는 뉴스와 오피니언을 섞어서 전하는데, 1년에 60만 달러 정도의 예산으로 뉴욕과 워싱턴 지역에 소수의 기자를 주재시키며 기사를 생산한다. 이 블로그는 2008년 부시 정부에서 검사들을 정치적으로 해고한 사안을 탐사 보도한 공로로 조지 포크상(The Georg Polk Award)을 수상하기도 했다.
TPM 이 외에도 the Daily Kos나 the Huffington Post, the Daily Beast 등의 매체는 상당한 방문자를 끌어 모으며, 이 분야의 대표적 매체로 성장했다. 특히 허핑턴 포스트 경우는 워싱턴 D.C.에 Huffington Post Investigative Fund라는 비영리 기금을 설치해 175만 달러를 투입했다. 과거 워싱턴 포스트 지에서 탐사보도 에디터로 일했던 래리 로버츠(Larry Roberts)가 책임을 지게 된 이 기금은 프로퍼블리카와 같은 방식으로 워싱턴 지역을 중심으로 연방 정부 관련 탐사 기사를 생산한다.
대학저널리즘 스쿨의 노력은 미주리 대학처럼 전통적으로 유지해온 지역 신문의 발간작업을 강화하는 일과 인터넷 사이트를 만들어 학생들이 쓴 기사를 게재하는 일 등이 주류를 이룬다. 최근 들면서는 저널리즘 현장에서 일하던 탐사 기자들을 교수로 초빙하거나 프로젝트 담당자로 고용해 과거보다 크게 강화된 탐사보도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학교가 느는 추세다. 콜롬비아 대학의 The Stabile Center for Investigative Journalism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런가 하면, 버클리 대학 저널리즘 스쿨의 학생들은, 샌프란시스코 지역에서 방송하는 KQED라는 공영방송과 협정을 맺어 2010년부터 이 방송의 라디오와 텔레비전 뉴스를 위해 기사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버클리 대학 저널리즘스쿨 학장인 닐 헨리(Neil Henry)교수는 “이 지역의 취재 인력이 절반으로 축소될 만큼 뉴스의 위기가 급박하기 때문에, 학교가 더 적극적인 노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Downie Jr. & Schudson. 2009. p.61).
좀 더 적극적인 대학들은 스스로 운영하는 통신사를 설립했다. 다음 표는 다우니 2세 와 슈츤(2009)이 소개하는 대학 통신사들을 정리한 내용이다.
 
대학 저널리즘 스쿨이 운영하는 통신사
통신사
대학
뉴스 공급대상
Cronkite News Service
Arizona State 대학
아리조나 주 내 30개 매체에 뉴스 공급
Capital News Service
Maryland 대학
워싱턴 D.C.와 주 수도에 사무실
Medill School of Journalism News Service
North Western 대학
워싱턴 D.C. 소재 전국에 있는 매체에 기사 공급
(Downie Jr. & Schudson. 2009. pp.61-62.)
 
 
다우니 2세와 슈츤의 6가지 제안
 
독립적인 저널리즘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 다우니 2세와 슈츤은 6가지 구체적인 제도적 대안을 권고했다. 이들은 그러나 많은 유럽국가들 사례처럼, 정부가 직접 보조금을 지원하는 방식을 제안하지는 않는다. 정부가 TV 네트워크에 자본을 대거나 통제권을 행사하는 것도 반대한다. 미 국민의 정서가 정부의 직접 개입에 대해서는 강한 불신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이 들은 그러나 예술분야나 인문학, 과학 등을 지원하는 정도의 정부 역할은 거부할 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정부가 매체의 저널리즘 활동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다는 전제하에서, 다우니 2세와 슈츤은 다음의 6가지 제도적 개선을 제안한다.
 
1. 국세청이나 의회는 독립적 뉴스 조직이 공공의 사안을 충실하게 보도 할 수 있도록, 이들을 비영리법인 이나 저영리 법인(Low-profit)으로 규정해주어야 한다. 국세청이나 의회는 또 소규모 매체들에 대한 재정지원이나 광고, 협찬 등의 행동도 같은 기준으로 취급하고, 영리 매체가 보도하는 공공성이 강한 뉴스 프로그램에 대한 협찬도 이러한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2. 자선 단체나, 공익 재단, 지역 재단 등은 공공성이 강한 뉴스를 공급하는 뉴스 매체에 대한 지원 규모를 대폭 늘려야 한다.
 
3. 공영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은 지역의 중요한 공적 사안들을 충분히 보도하도록 기능이 강화돼야 하고, 의회는 이들에 대한 재정지원을 증가 시켜야 한다.
 
4. 대학들은, 주립이나 사립을 막론하고, 교육적 사명 외에 공공적 문제를 취재해 보도하는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 스스로 매체를 운영하고, 사회와 연계해 협력사업을 추진해야 하며, 뉴스의 취재와 전파를 효율적으로 하는데 필요한 디지틀 혁신 작업의 실험실 기능도 담당해야 한다.
 
5. 지역 뉴스를 위한 기금(Fund for Local News)을 만들어야 한다. 재원은 FCC가 통신사업자나 방송사 인터넷 사업자에게서 걷는 면허세(License Fee)를 활용하면 된다.
 
6. 기자와 비영리 조직, 정부 등은 공공정보의 접근성과 활용성을 강화해, 시민들이 이들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한국 저널리즘의 패러다임 변화 증상
 
1920년 동아일보가 창간할 때, 편집국 인력은 논설반과 국장, 부장 등을 합쳐 22명 이었다 (동아일보사, 2000). 편집국에서 일선 취재를 담당하는 기자 수는 16명에 불과했다. 신문의 발행부수는 1만 부, 발행지면은 하루 4면 이었다. 8.15해방과 6.25전쟁을 마친 1954년 무렵, 조선일보는 6만 부 정도를 인쇄했다. 당시 편집국 사원 수는 41명이었다. 여기에는 그 해 새로 선발한 수습기자 8명도 포함돼 있다 (권영기, 1999).
2010년 현재 두 신문사의 편집국 인력은 모두 300명을 웃돈다. 발행부수는 200만 부 전후이고, 평일 인쇄하는 지면은 50면을 넘는다. 이 두 신문은 1920년 창간 이후 90년을 지나며, 여러 측면에서 엄청난 양적 성장을 이뤘다. 인력은 15배, 지면은 10배, 발행부수는 100배쯤 는 셈이다.
그러나 매체의 사회적 영향력을 따지면, 현재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1920년대, 또는 1950년대 이 신문들의 영향력에 비해 크게 밀릴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1920년대와 1950년대 초에는 텔레비전도 없었고, 인터넷은 더욱 없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 말, 텔레비전이 등장하며, 신문은 강력한 경쟁 매체를 맞게 된다. 그러나 매체 시장에 대한 포괄적인 정부 규제와 신문과 방송의 겸영을 통해 큰 어려움 없이 성장을 계속할 수 있었다. 1980년대 초 5공화국에 의한 상업 방송의 공영화와 1도 1사 원칙 등에 따른 신문 시장의 정비는 정치 환경은 지극히 부자유했지만, 경제적으로는 매우 안정적인 영업기반을 마련해줬다.
한국 매체 시장은 1980년대 말, 민주화가 시작되며, 격변기를 맞는다. 정기간행물등에 관한 법률의 자유화 조치 덕분에 등록제에서 신고제로 신문 설립 규정이 바뀌자, 신문사 숫자가 크게 늘었다. 1980년, 10,000명 수준이던 전국의 신문 종사자 수는 10년 뒤인 1991년 20,000명을 넘어섰다. 1990년대 초 케이블 TV와 지역 민영방송들이 등장하며, 1980년 7,000명 수준이던 방송종사자 수도, 1997년에는 20,000명을 넘었다 (한국신문방송연감, 1997).
그러나 신문과 텔레비전 등 전통적 대중매체의 성장은 1990년대 말 두 개의 강력한 구조적 장애 요인을 만난다. 하나는 IMF사태로 알려진 1997-98년의 외환위기 이고, 다른 하나는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기술의 확산이다. 1997년 말에 닥친 외환 위기는 금융업과 제조업 뿐 아니라 신문과 방송사에도 엄청난 타격을 가했다. 가장 눈에 띄는 충격은 역시 거의 모든 매체에서 진행된 큰 폭의 감원 사태였다. 다음 표는 당시 주요 신문과 방송사의 감원현황을 정리한 내용이다.
 
외환위기 매체별 감원현황
 
매체
종사자수
감원율 (%)
1997년
1999년
경향신문
1017
575
43.5
동아일보
1032
652
36.8
문화일보
576
375
34.9
조선일보
1028
871
15.3
중앙일보
1362
637
53.2
한국일보
1279
932
27.1
KBS
6245
5517
11.7
4296
3238
24.6
MBC
1421
791
44.3
SBS
(자료 : 한국 언론재단,1999)
 
이 숫자에는 기자직 뿐 아니라 총무직과 기술직 등 다른 직종의 인력도 포함돼있다. 이 자료에는 또 단순감원만이 아니라 자회사의 설립을 통한 분사대상 인력도 함께 계산돼 있다. 그러나 2년 정도의 기간에 전 산업적으로 이처럼 대규모 인력감축이 진행된 사례는 과거에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는 한국 매체 시장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다. 이러한 대량 감원사태 이후로 한국 매체 시장에는 크게 두 가지 부정적 변화가 나타났다. 의사 결정에서 경영적 고려가 저널리즘적 고려에 우선하는 것이 하나이고, 기자에 대한 경영주체(발행인)의 장악력이 거의 절대적으로 변한 것이 다른 하나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초고속 인터넷 망의 보급은 뉴스 전달과 소비 방식을 혁명적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네이버와 다음, 야후 등 포털사들의 발전은 수용자들의 뉴스를 포함한 정보 소비 양식을 인터넷 중심으로 바꾸며, 미국식 집합의 저널리즘(journalism of aggregation)시대를 열었다. 초고속 인터넷 기반의 확산은 이와 함께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 등 인터넷으로만 뉴스를 전하는 매체들의 성장을 위한 토양으로 작용했다. 초고속 인터넷망을 바탕으로한 진보와 보수 등 정치적 성향을 분명히 드러내는 웹진과 블로그들의 등장은 주장 저널리즘(journalism of assertion)과 정파저널리즘(advocacy journalism)을 일상화 시켰다.
이들 정파적 매체들은 노동, 교육, 환경, 복지 등 사회적 쟁점들에 대해 적극적인 목소리를 펼치기 시작했다. 인터넷을 중심으로 주관적 정파적 글쓰기 방식이 세력을 키워가자 전통매체인 신문과 방송의 표현방식도 급속히 정파성을 강화했다. 물론 신문과 방송 등 전통매체들의 정파화는 정치권에서 대립하는 진보 보수 세력과 조응하는 매체를 필요로 했던 사회정치적 필요가 중요하게 작용했다. 또 급격히 떨어져나가는 독자들을 정파적 동질감으로 붙잡아 보려는 신문들의 판매전략도 무시할 수 없는 기능을 했다.
돌아보면, 1990년대 말의 외환위기와 그 무렵부터 속도를 내기 시작한 디지털 기술의 발전, 그리고 민주화 이후 일상화한 정파저널리즘(partisan journalism)등은 앞에 소개한 미국 사례 가운데 「저널리즘을 염려하는 언론인 위원회」가 제시했던 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세계화, 매체의 거대기업화 등 거시 요인들과 중복되는 부분이 많다. 차이가 있다면 한국의 외환위기가 10년 쯤 일찍 발생하며 경제적 요인을 제외한 디지털 기술의 발전이나 매체 회사의 융합화, 거대화 등 다른 주요 요인들이 저널리즘에 미치는 파괴적인 영향력을 제대로 보지 못하도록 한 점이다.
다시 말하면, 한국 저널리즘의 패러다임 변화는 이미 10여 년 전에 시작됐다. 언론 학계와 언론계에서 외환위기의 파괴력 때문에 현상의 본질을 꿰뚫어보지 못했을 뿐이다. 여기에 한국 사회가 지나와야 했던 민주화 과정이 만들어낸 지독한 정파적 갈등 구조도 문제를 잘못 진단하게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환경적 조건은 한국 사회의 저널리즘 문제에 대한 처방이 주로 매체사의 생존과 정파저널리즘 극복 쪽으로 집중하게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두 가지 가치는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을 희생하는 매체 회사의 생존은 바람직한 선택이 아니다. 또 정파저널리즘 관점에서 균형을 추구하기 위해, 보수 신문에 맞설 수 있는 진보신문을 정부가 지원하는 정책도 바람직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이러한 사회 문화적 구도에서는 “얻을 수 있는 최선의 진실”보다는 극단적으로 편파적인 기사들이 독자들에게 전달돼 사회적 갈등을 촉발하기 때문이다.
 
 
 
패러다임 변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한국 저널리즘의 특징들
지난 10여 년 급격한 구조변화를 겪으며 한국 저널리즘은 몇 가지 뚜렷한 긍정, 부정적 특징을 드러내왔다. 우선 눈에 띄는 긍정적 특징은 다음의 세 가지다.
표현 자유의 확장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표현의 자유를 거의 무제한으로 넓혀줬다. 인터넷과 휴대전화가 보편화하면서, 개인의 의사표현이나 시민 단체의 집단 행동 등이 전혀 제약을 받지 않는 상황이 됐다. 심지어 동영상을 방송하는 인터넷 매체의 설립도 어렵지 않은 환경이 만들어졌다. 유튜브나 트위터, 싸이월드, 마이스페이스 등의 서비스는 국가의 경계를 넘어 표현의 자유를 확장해주는 추세다.
의제설정 능력의 다원화
표현자유의 확장과 매체 설립의 자유화는 자연스레 사회적 의제 설정능력을 과점하던 전통 매체들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과거에는 주류매체들이 단합해 특정한 사실을 보도하지 않는 경우, 그 의제는 여론을 형성할 수 없었지만, 디지털 미디어시대에는 개인 블로그를 통해서도 세상을 바꾸는 여론 형성 작업이 가능해졌다. 1990년대 중반 반미의식을 크게 높혔던 미선·효순양 사건을 전국민적 의제로 바꾼 것이 오마이뉴스에 게재된 기사 한 것이었던 점이나, 최근 쟁점이 됐던 미네르바 사건이 한 청년의 블로그에 올려졌던 글이었다는 점 등은 이러한 현실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게이트 키핑의 과점 해제
과거 뉴스의 흐름을 통제하는 게이트 키핑 권력은 전통 매체의 기자들이 과점적으로 행사했었다. 주요 매체의 보도책임자만 설득하면, 특정 뉴스의 전파를 막을 수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표현 도구가 크게 늘며, 이러한 게이트 키핑 질서는 유지될 수 없게 됐다. 특정 세력이나 권력자들이 원하지 않는 정보의 흐름을 완전하게 차단하는 일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졌다는 뜻이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 정치권력이 미디어를 통제하던 정보관리 방식이나 주류 매체들이 담합해 정보흐름을 왜곡하는 일이 기술적으로는 어려워진 것이다.
 
 
 
부정적 특징
 
패러다임 변화 과정이 만들어낸 한국 저널리즘의 부정적 특징은 다음의 다섯 가지다.
 
저널리즘가치보다 경영우선 추세
외환위기 이후 광고 물량이 급감하며, 앞에 제시한 바와 같이, 전통 매체들은 대량의 인력 감축을 포함하는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그 이후 신문사와 방송사의 의사결정구조는 경영 측이 주도해왔다. 어찌보면 위기를 맞은 기업에서 이는 당연한 결과이다. 그러나 문제는 저널리즘이 기본적으로 공익적 기능을 자임하는 특별한 산업이라는 데 있다. 시민을 위해 정부와 기업을 감시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언론사가 진실보도나 공정한 보도보다 회사의 이익 증대를 위해 기사에 관한 결정을 내리고, 취재인력을 운용하는 관행이 일상화해버렸다. 이는 대부분 주요 매체의 임원이나 국장급 간부들이 임명되는 사례들을 보면 쉽게 확인되는 관행이다. 좋은 예가 사장실장 또는 비서실장, 기획실장 등의 보직에 각사의 유력한 기사를 임명하는 추세다. 이러한 보직은 최고 경영자의 경영적 결정을 보좌하는 직책이다. 저널리즘적 가치나 판단 보다는 경영자의 대리인적 성격이 강하다. 그런데 지난 10여년 추세를 보면, 이러한 경력을 거치지 않은 사람이 편집국장(보도국장)이나 편집담당 임원으로 기용되는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이러한 인사 관행이 지배하면, 편집의 독립은 불가능해진다.
 
정부(권력)감시 능력의 쇠퇴
지난 10여 년 한국 저널리즘이 보여준 또 하나의 부정적 특징은 정부와 대기업 등 권력에 대한 감시 기능이 약화된 사실이다. 이러한 추세에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한다. 첫째는 경영압박에 따른 경제적 요인이다. 외환위기이후 모든 주류 매체는 광고가 급감했다. 따라서 신문과 방송사에 광고를 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정부 각 기관과 대기업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크게 강화됐다. 정부는 또 다양한 방법으로 신문과 방송에 정책적 혜택을 제공할 수 있는 장치를 갖고 있어 매체 장악력이 더 커졌다. 지역 언론지원예산의 배분이나, 정부 정보에 대한 선택적 접근 허용, 세무적 압력 수단의 활용 등 정부가 사용할 수 있는 수단들의 위력은 위기가 지속되는 기간에 더욱 커졌다.
두 번째 요인은 매체의 정파성이 강화된 사실이다. 주류 신문과 방송사들이 정권의 성격에 따라 보수와 진보로 확연히 나뉘어 모든 기사를 보도하다보니, 권력에 대한 감시보다는 반대편 정파와 매체에 대한 비판과 비난이 더 중요한 일이 돼버렸다. 이러한 정파적 보도 환경에서는 시민을 위한 권력의 감시는 우선 순위에서 뒤로 밀릴 수 밖에 없다.
 
사실의 상대화
앞에서 제시한 두 요인이 매체의 경영과 관리 측면에 관한 내용이라면, 사실의 상대화는 기자가 생산하는 기사의 핵심 성격과 관계되는 문제다. 과거 1970, 80년대 권위주의 시대에는, 권력의 압력 때문에 기사를 보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을 왜곡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발생한 사실에 대한 기술이 신문이나 방송사의 성향 때문에 정반대로 제시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1990년대 중반이후 상황이 크게 변했다. 지난 10여 년, 한국 사회의 정파갈등이 강화되면서, 정치성이 조금이라도 내포된 사안의 경우는 보도하는 매체의 성향에 따라 예외없이 진보적 관점이나 보수적 관점의 편향적 기술이 일상화했다. 이러한 사실의 상대화 현상은 북한 문제나 한미 관계, 노동 문제 등 이념적으로 민감한 영역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연구 논란이나 PD수첩 방송으로 문제가 된 광우병에 대한 과학적 해석에 대해서도 진보적 사실은 보수적 사실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제시됐다. 이는 서로 다른 진영의 기자들과 매체들이 사실을 형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자신들의 이념적 틀에 맞춰 선택적으로 조합하는 일이 일상적으로 벌어진다는 뜻이다. 더 안타까운 점은 한국 사회가 이러한 현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사실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한국의 저널리즘 이론은 기자에게 최대한 진실을 완전하게 복원하려고 노력하도록 요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매체별로 각자가 원하는 진실의 버전을 제시하는 것이 한국식 저널리즘 원칙이고, 그러한 진실의 종류가 다양하면, 그것이 미디어의 다양성을 구현하는 일이 된다.
 
기사 품질에 대한 인식 부족
한국신문이나 방송뉴스는 기사 품질이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품질 기준에 대한 고려를 제도화해본 경험이 적다. 일부 신문과 방송사가 탐사보도팀을 구성해 심층취재를 제도화하고, 일부 신문은 한때 퀄리티 페이퍼(quality paper)를 명시적으로 지향하기도 했지만, 여러 학자들의 비교언론학적 연구는 한국의 주요매체들이 생산하는 기사의 품질이 선진국 매체가 생산하는 기사들과는 크게 다르다는 점을 확인해줬다(박재영, 2006; 이건호 등, 2007; 이재경, 2006). 이러한 현실은 한국 저널리즘이 시급히 극복해야할 과제이다. 그러나 앞에 제기한 경영 중심의 매체운영현실이나, 정파주의에 매몰된 보도 관행, 그리고 여전히 계속되는 경영환경의 위기는 수준 높은 저널리즘을 추구할 환경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
 
정치의 덫에 빠진 방송 저널리즘
1980년대 초 출범한 공영방송체제는 사실은 5공화국 정부가 직접 통제하는 관영방송이었다. 방송위원회가 있고, 각 사의 이사회도 있었지만, KBS와 MBC 두 방송사의 사장이 모두 청와대 대변인이나 문화공보부 장관 출신이었던 사실이 이러한 체제의 실상을 말해준다. 1980년대 말 민주화가 시작되며 방송법도 개정됐다. 그 때 도입된 체제가 1990년대 말 부분적 수정을 거쳐 현재까지 유지되는 2기 공영방송체제다. KBS이사회와 방송문화진흥회(MBC)로 대표되는 현재의 공영 방송체제는 켈리(Kelly,1983)의 분류에 따르면, “Politics-in-broadcasting" (방송지분의 정파배분 구조)체제에 가깝다. 집권 세력과 야당이 6:3으로 이사회를 구성하도록 한 이사회 운영 방식 때문이다. 과거 5공화국과 그 이전 체제는 켈리의 구분에 따르면, ”Politics-over-broadcasting"(방송에 대한 정권의 직접 통제 체제)방식이었다. 켈리가 제시하는 또 다른 체제는 “autonomous"(독립적 방송제도)체제이다. 물론 이 3가지 체제는 완전히 상호 배타적이지는 않다. 현대 방송에서는 방송사의 일상적 운영은 어느 정도는 현장의 전문가들에게 맡겨야 하기 때문이다. 영국의 BBC나 일본의 NHK가 상대적으로 정치적으로 독립적인 보도를 유지할 수 있는 근거도 이러한 전문직 정신(professionalism)이 작동하고, 또 존중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특히 정권이 교체되는 시점에는 정치가 저널리즘에 개입하는 방식이 대단히 직접적이다. 보수정권에서 진보정권으로 권력이 이동하거나 진보에서 보수로 권력이 이동하거나 상황은 마찬가지다. 이러한 지배구조에서, 높은 수준의 방송 보도, 시청자를 위해 권력을 감시하는 이상적인 공영방송은 실천할 수 없는 환상일 뿐이다. 이러한 방송구조는 탁월한 방송인을 키워낼 수도, 독립적인 방송 저널리즘을 발전시킬 수도 없는 조건이다.
 
 
 
 
한국 저널리즘의 과제
 
미국과 한국의 저널리즘은 똑같이 급격한 패러다임 변화의 소용돌이에 빠져있다. 두나라 매체사들과 기자들이 겪고 있는 작업 환경의 악화는 비슷한 강도로 진행된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두 사회와 두 나라 기자 집단의 대응방식은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미국 기자와 학자들은 1990년대 중반부터 “저널리즘을 염려하는 언론인 위원회”(CCJ)를 만들어 조직적으로 현실을 성찰하고, 체계적인 자료를 통해 대응 방안을 모색하며 실천해왔다. 또 「저널리즘의 기본원칙」이라는 책을 저술해 동료기자와 독자들에게 왜 현재에도 저널리즘이 중요하고, 저널리즘은 어떠한 기능을 해야 하는가를 교육해왔다. 그러나 한국 저널리즘 업계는 이 기간 동안 정파적 갈등에 매몰돼, 거꾸로 저널리즘의 신뢰도를 추락시켜왔다.
미국에서는 최근에도, 다우니 2세와 슈츤(2009)의 작업처럼, 독립 저널리즘(independent journalism)의 가치를 재확인하는 조사활동이 진행돼, 사회전체가 독립저널리즘의 명맥을 유지하지 위해 어떻게 이러한 노력을 기울이는 기자와 매체들을 지원해야하는가를 계몽해나가고 있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는 종합편성채널을 따내기 위한 신문사들의 경쟁과 방송사의 주도권을 둘러싼 정치투쟁 등으로 저널리즘의 위기는 고민할 여력도 없어 보인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 한국 저널리즘의 미래는 어둡다. 미디어 산업의 존립기반도 더욱 부실해진다. 우선 단기적으로 다음 여섯 가지 과제가 시급해 보인다.
첫째, 저널리즘의 기본가치들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민주화가 진행되며 정파 저널리즘은 한국형 저널리즘의 고정형이 되다시피 했다. 그 결과 언론사와 기자의 이념적 경향에 따라 대단히 상충적인 저널리즘 철학이 공존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보수주의 기자가 생각하는 저널리즘의 역할과 기자의 기능은 진보주의 기자가 생각하는 역할과 기능과 현격하게 다르다.
이처럼 기자들이 진영에 따라 서로 다른 저널리즘의 이상을 실천하는 상황에서는 정부나 정치인, 기업인 등 사회 구성원들과 뉴스를 소비하는 수용자들에게 저널리즘의 가치를 설명하는 일이 불가능하다. 저널리즘이 왜 필요하며, 정부나 사회세력들로부터의 독립은 무엇을 위한 것인지도 설명할 방법이 없다.
한국 저널리즘은 한국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오늘날의 정체성을 형성해왔다. 이제 이 과정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필요하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한국 사회에서의 저널리즘의 역할과 기자의 정체성 등에 대한 합의(consensus)를 끌어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합의가 한국의 저널리즘 이론으로 뿌리내려야 한다. 1990년대 중반 관훈 클럽에서 주도했던 “한국언론 2000년 위원회”보고서나 2000년대 초 조선일보 후원으로 한국언론학회 연구팀이 출판한 「민주화 이후의 한국언론」등 작업이 도움이 될 수 있다. 미국의 “저널리즘을 염려하는 언론인 위원회”(CCJ)가 출간한 책과 보고서들도 좋은 참고자료가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작업을 지도적 언론인들이 주도해야한다는 점이다. 그래야 현장에서 실천력이 생기고, 저널리즘에 대한 사회의 신뢰가 회복될 수 있다. 이렇게 제시되는 한국적 저널리즘 이론은 선진국이론의 주요 내용을 그대로 도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선진국의 저널리즘 가치가 한국 사회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으며, 그러한 가치들은 왜 필요한지를 한국사회의 현실적 조건과 엮어서 설명하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둘째, 경영보다는 저널리즘 중심의 의사결정체제의 회복이 중요하다. 이는 모든 매체에 해당되기는 어려운 주문이다. 그러나 엘리트 기자들을 보유한 지도적 위치에 있는 신문사는 창간의 초심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경영보다 저널리즘을 중요하게 강조하는 일은 최고 경영자(발행인)의 몫이다. 회사를 위해 일하는 기자들이 나서서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다. 뉴욕타임스나 워싱턴 포스트 등 최고의 신문들은 모두 최고 경영자의 저널리즘 철학을 토대로 오늘의 위치에 갈 수 있었다. 한국의 주요 신문사도 훌륭한 지도자들이 있어 이 만큼 이나마 성장할 수 있었다. 오늘날 같은 격변기에 다시 저널리즘과 공익을 앞세우는 지도자가 절실히 필요하다.
셋째, 정부와 그 밖의 권력에 대한 감시자로서의 기능을 회복해야 한다. 정권은 보수나 진보에 관계없이 언론을 길들이고 홍보에 활용하고자 한다. 그러기위해 정부는 사용할 수 있는 가용수단을 모두 동원하려한다. 그러한 회유와 압력을 거부하지 않고는 시민을 대신해 권력을 감시하기 어렵다. 거대기업에 대한 감시와 사회 세력에 대한 감시도 소홀히 하면 안된다. 지난 10 여년 정파주의에 휘둘린 매체들은 취재 대상에 대한 자세에서도 지나칠 정도로 차별이 분명했다. 저널리즘은 독립적 자세가 유지되지 않으면 수용자의 신뢰를 얻기가 어렵다.
넷째, 저널리즘의 수준을 높이는 노력을 체계화 해야 한다. 신문과 방송사들은 스스로 생산하는 기사의 수준을 주기적으로 평가하고,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한다. 경쟁사의 기사나 선진국 신문, 방송사의 기사를 벤치마킹하는 방법은 매우 유용한 수단이다. 저널리즘의 수준을 높이는 일에는 취재 시스템에 대한 성찰이나 기자인력의 재교육 체제 등에 대한 노력도 포함돼야한다. 2007년, 50대 대기업의 매출액 대비 교육훈련비가 0.78% 수준인데 비해, 전국 종합일간지의 교육 예산은 0.08% 방송사는 0.23%에 그쳤다. (황치성 외, 2009). 신문사는 대기업의 10%, 방송사는 30% 정도의 교육 훈련비를 사용한다는 의미다.
다섯째, 동시에 고려할 과제는 기자의 경력관리 제도다. 현재 대부분의 언론사는 수습기자 선발을 통한 신입인력 충원을 토대로, 지극히 관료화된 인력운용제도를 유지한다. 그러다보니, 부장이나 국장 등의 보직은 길어야 2년 정도를 담당하는 순환제도가 고착됐다. 이 제도의 장점은 많은 사람이 비교적 공평하게 보직을 경험하는 기회를 갖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제도는 강력한 지도력을 갖는 언론인을 키워내기 힘든 점이다. 워터게이트 사건을 지휘했던 워싱턴 포스트 지의 벤 브래들리(Ben Bradlee)는 30 여 년을 에디터로 일하며, 이 신문을 최고의 신문으로 키울 수 있었다. UPI통신에서 일했던 헬렌 토머스(Helen Thomas) 기자는 50년이 넘게 백악관을 취재했다. 그녀가 취재한 대통령이 9명에 달한다. 한국의 청와대 출입기자는 2명의 대통령을 취재한 경우가 많지 않다. 이러한 제도로는 권위있는 기자를 많이 양성하기가 어렵다.
여섯 째, 한국적 풀뿌리 독립저널리즘이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도록 기성매체의 도움이 필요하고 사회 제도의 정비도 중요하다. 미국의 신문과 방송, 통신사들은 탐사보도나 지역 뉴스를 전문으로 보도하는 풀뿌리 매체의 기사를 실어 그들의 기사가 많은 독자들에게 전달되도록 지원한다. 다양한 자선기금이나 공공기금등은 이들 매체가 시도하는 공공성이 강한 취재 프로젝트에 비용을 지원한다. 한국 사회에서도 부분적으로 탐사 기획에 취재비를 지원하는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1회성으로 그치고, 기성 매체에 대한 지원인 경우가 많다. 이러한 지원 제도가 보다 확장되고 지속적 지원이 되도록 강화돼야 한다. 공공성이 강한 풀뿌리 매체가 보다 쉽게 활동할 수 있는 비영리법인 제도의 도입도 고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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