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10일 수요일

김중배 칼럼

고양이와 쥐의 共生
 
 
독재사회의 유머들은 거의가 정곡을 찌르는 寸鐵(촌철)을 송덩이 같은 웃음으로 포장한다. 가령 붉은 잉크와 푸른 잉크의 유머도 그 중의 하나다.
뜻을 같이했던 두 친구중의 하나가 붙잡혀가는 데서부터 얘기는 비롯된다. 갇혀가는 친구는 밖에 남은 친구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허락되는 대로 편지를 쓰겠다. 붉은 잉크와 푸른 잉크로, 푸른 잉크로 쓴 편지는 사실 그대로라고 믿어라. 붉은 잉크로 쓴 편지는 사실과 정반대라고 믿어달라』
약속했던 대로 갇힌 친구는 박의 친구에게 편지를 보냈다. 푸른 잉크의 편지였다. 이번엔 사실 그대로를 적어보냈거니 믿었던 친구는 끝대목을 읽고선 당황했다.
『이 곳엔 붉은 잉크가 없으므로 부득히 푸른 잉크로 썼다』
그 유머는 우선 붉은 잉크마저 가난한 물자난의 심각성을 날카로운 촌철로 쏘아댄다. 그러나 보다 무거운 뜻은 찬양과 동조의 「體制言語(체제언어)」만이 판치는 경직된 사회를 풍자했다는 데 있다.
한 빛깔 한 가락의 언어만이 활개치는 사회는 참으로 살아있는 사회일 수 없다. 「반대자의 애국심」이 「찬양자의 애국심」과 동일하게 존중되어야만 찬양의 언어들도 제빛깔로 살아난다.
「비판자의 애국심」이 「동조자의 애국심」과 동일하게 받아들여져야만 동조의 언어들도 허심탄회하게 평가된다. 「반대당은 반대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는 영국 의회의 전통도 다른 이유로 쌓여 온 건 아니다.
 
 
두 손을 벌리면 양극이 되지만 두손을 합치면 합장이 된다
 
나는 요즘 강조되는 「和合」의 제창들을 가슴에 새기면서 맨 먼저 그걸 말하고 싶었다. 찬양과 동조, 그리고 반대와 비판의 엇갈림이 화합을 깨뜨리는 요인일 수는 없다.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거든 두팔을 활짝 펴보기 바란다. 두 손은 가장 거리가 먼 좌우의 양극이 되고 만다. 그러나 두 손바닥을 모아보면 그 양극은 하나로 합쳐진다. 그 合掌이야말로 화합된 모습의 극치가 아니던가.
모두가 깊이 생각하고, 또한 깊이 생각한 바를 소신있게 밝힐 때 서로 다른 각의 거리는 두팔을 벌린 만큼 멀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깊이있는 생각들이 서로 만나는 接點을 찾는다면 그건 바로 합장의 모습이 된다.
반대를 위한 반대와 비판을 위한 비판이 의미 없는 것이라면, 마찬가지로 동조를 위한 동조와 찬양을 위한 찬조도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그 공허한 생각과 언어들은 접점을 찾지 못한다. 평행선을 달릴 뿐이다.
서로가 邪慾(사욕)에 빠지지 않고 깊이 생각하고 깊이 말한다면, 서로 만나지 못할 턱은 없다. 그 접점은 우선 자유와 민주의 나라를 가꾸어 나간다는 목표에서 확인된다.
다음으로 만나게 되는 접점은 진실이다. 서로의 생각과 말에 잡념이 생기지 않았다면 우리는 언젠가 진실의 뿌리에서 만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나는 화합의 제창에 붙이고 싶은 두 번째 당부를 거짓과 속임과 糊塗의 추방에서 찾는다. 비록 자리는 다르나 분명히 비슷한 생각을 갖는 분은 동시대의 산소를 함께 마시고 있었던 것 같다.
신문의 고십란을 들여다보면 신임 丁來赫(정래혁)민정당대표위원의 말이 선명하게 찍혀있다. 그는 『호도하거나 숨기지 않고 있는 현상을 그대로 직시, 하나 하나 과감히 시정해 나가야 한다』고 다짐했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다. 해를 달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달을 해라고 부를 수도 없다. 말과 사슴을 뒤바꿔 부르는 「馬鹿(마록)의 어리석음」에 누구나가 빠져 들어서는 안된다.
얇은 풀칠로 어긋난 매듭이 다시 이어지지는 않는다. 덮어둔다고 고름이 살로 둔갑할 수도 없는 일이다.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고 수술이 필요한 자리에 메스를 대어야만 患部는 낫는다.
그 진실의 교류 위에서만 우리는 힘을 모아 환부의 아픔을 다스려 나갈 수 있다. 비록 환부의 치료가 더디더라도 힘을 모으는 그 과정 속에서 우리의 화합은 다져진다.
호도와 거짓과 숨김은 환부의 치료만을 가로 막는 건 아니다. 화합의 근거인 믿음을 깨뜨린다.
 
거짓으로 이어진 악수는 野合(야합)일 뿐이다.
 
거짓이 난무하는 사회의 모습을 셰익스피어는 일찍이 이렇게 그려댔다. 그의 작품 《소네트》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내가 사랑하는 여인이 진실한 사랑을 맹세하면, 나는 그것이 거짓인 줄 알더라도 그대로 믿는 체할 것이다. 세상의 거짓을 모르는 멍청한 젊은이로 보이기는 싫으므로, 나는 여인에게, 여인은 나에게 서로 거짓을 지껄인다』
거짓 위에 쌓아올린 화합의 모습은 모래성에 지나지 않는다. 그건 野合일 뿐이다. 화합은 진실 위에서만 자라난다.
바웬사의 말대로 물이 들어있는 병에 샴폐인의 레테르를 붙인다고 그 안의 물이 샴페인으로 바뀌어질 수는 없다. 물을 물로 보는 데서부터 서로의 대화는 이어진다.
더구나 진실을 알 권리를 가진 사람들에게 거짓을 말하는 건 악일 수 밖에 없다. 더더구나 신뢰를 보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거짓을 말하는 건 보다 무거운 악일 수밖에 없다.
화합의 제창에 붙이는 나의 세 번째 당부는 자유로운 선택의 개방과 사회의 결속이 균형있게 추구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 두 가지 인간의 요구는 모순되는 것만은 아니다.
그걸 모순의 관계로만 파악하고 한쪽만을 강조할 때, 불행의 그림자는 찾아든다. 사회의 결속이 零이며,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 무한대로 뻗어나면, 그건 동무의 세계가 되고 만다. 그 극단의 세계는 놀랍게도 먼 거리에 동떨어져 있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가꾸어 가고자 하는 나라는 그런 세계일 수 없다. 선택과 결속이 조화를 이루는 나라이어야 한다. 진실과 정직이 보다 존중되는 땅이라야 한다. 진실과 정직이 바로 개인이나 사회의 이익이 되는 조국이어야 한다.
오늘, 나는 굳이 그 제도적 처방을 나열할 생각은 없다. 내 딴엔 이미 무던히 말해 왔고, 다른 분들도 무던히 목청을 높이는 시점인 까닭이다. 또한 나의 「世評」을 읽어 온 분들의 밝은 눈을 믿기 때문이다.
다만 한가지, 蛇足으로 붙여두고 싶은 얘기 한토막이 있을 뿐이다. 그건 「재미있는 동물의 세계」에서 읽었던 얘기다. 남의 나라에선 어린이도 읽는 책이다.
그 책은 서로 앙숙인 고양이와 쥐가 어떻게 하면 사이좋게 살 수 있도록 이끄는가의 묘방을 소개한다. 한마디로 갓 태어났을 때부터 서로의 體液(체액)을 서로의 몸에 나루며 기른다는 거다.
서로의 체액을 나누며 자라난 고양이와 쥐는 어른이 되어서도 사이좋게 살아간다. 알고 나면 신통한 묘방도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서로가 서로를 속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나누며 살아가는 가운데서 親和力이 자라난다는 교훈은 값지다. 서로의 체액을 역겹게만 느끼지 않고, 잦은 접촉으로 공생을 기약케 하는 그 슬기엔 고개가 숙여진다.
이 땅에도 피가 통하는 언어들이 스스럼없이 나누어진다면, 화합도 산너머 과제만은 아닐 성 싶다. (83.10.22)
 
김중배 칼럼 <민초여, 새벽이 열린다> 동아일보사
「네가 기자냐」는 물음
 
서울대학의 金暻東(김영동)교수가 조사한 「직업관과 사회구조」는 자못 심각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 같다. 「같다」고 말하는건 요즘 유행하는 「추상적 말투」를 흉내 내려서가 아니다.
사실 나는 그 논문을 보지 못했다. 지난 8일자 <연합통신>에서 그 요지에 접했을 뿐이다.
그 가운데서도 눈에 번쩍 뜨이는건 이른바 不信度(불신도)의 측정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불신하는 대상은 재벌로 나타났다. 다음이 상인, 중소기업, 세무서원 등의 순서다.
국회의원, 경찰관, 종교인, 고위직 공무원 그리고 언론인등에 대한 불신도도 높은 편이다.
거꾸로 신뢰도가 높은 대상은 대학교수와 교사, 근로자와 군장교의 순서로 나타났다. 그 밑으로 판· 검사와 대학생 그리고 의사 등이 이어진다.
이른바 「不條理」가 가장 많은 걸로 보이는 대상은 재벌과 세무서원, 국회의원과 상인, 그리고 경찰관의 차례로 나타났다.
더러는 막연하게나마 짐작했던 그대로이기도 하고, 더러는 예상이 전혀 빗나간 경우도 있다.
그러나 金暻東교수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사회적 책임의 비중이 큰 계층에 대한 불신도가 높거나, 신뢰도가 기대보다 낮다는 건 아무래도 암담한 일이다.
비록 인상적인 판단일지라도 우리 경제를 주도하는 재벌과 나라살림의 기본인 세금을 담당하는 세무서원의 불신도가 높다는 건 그만큼 그 쪽에 그늘진 구석이 있다는 실감의 반영이 아니겠는가.
정치인과 고급공무원 그리고 경찰관에 대한 불신도 예사로운 일은 아니다. 더구나 언론인과 종교인에 대해서도 불신감이 높다는건, 사회의 경제적 지주는 물론 정신적 지주마저 흔들린다는 조짐에 다름아니다.
 
아들딸이 겪은 가혹 행위를 호소하는 중년의 어머니들
 
나는 그 통신조각을 유심히 들여다 보면서 스스로의 역할이행과 책임과 행태가 과연 신뢰를 부를만한 수준인가를 거듭 되새겨 보았다. 불신도의 중간쯤에 언론인이 자리한다고 자위할 만한 처지는 아니었다.
남들에게 돌을 던지기 전에 스스로의 머리위에 돌을 던져야 마땅하다는 생각, 그리고 그 조사가 2년전이 아닌 오늘에 이루어졌다면 결과가 어떠했을까의 의문을 지울 수도 없었다.
그 때 떠오른게 지나간 어느날의 정경이었다. 나는 난데없이 중년부인들의 방문을 받았다. 그분들은 이른바 피구속자들의 어머니들이었다.
그분들은 아들 딸에 대한 수사과정에서의 가혹 행위를 하소연했다. 그분들은 수사의 비리를 공판정에서 진술한 아들 딸의 조서를 복사해서 가져왔다.
그저 더듬거리는 나에게 그 분들은 오히려 『오늘의 언론정황을 다 아노라』고 위로하면서, 『그러나 언젠가 써줄 수 있다면 고맙겠다』 『알고나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그날의 참담했던 심정은 오늘도 잊을 수 없다. 더구나 「人權의 날」을 맞아서는 그분들의 애절하면서도 혼연스러웠던 얼굴이 눈동자에 못박혀 온다.
 
(중략)
 
김중배 칼럼 <민초여, 새벽이 열린다> 동아일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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