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10일 수요일

송건호 선생님 칼럼

진상을 추구하는 풍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좀 하게.” 신문기자는 때때로 이런 질문을 받는다. 매일같이 신문을 꼬박꼬박 읽는 독자들도 기자라고 하면 반색을 하며 이런 질문을 한다. 기자는 세상 돌아가는 비밀을 따로 알고 있다는 눈치다. “신문을 매일 읽으면서 무슨 말씀을……” 이렇게 대답해도 독자는 납득하지 않는다. 기자는 세상에 말 못할 비밀을 꼭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신문을 믿지 않는 것인지, 신문이 말 못할 사정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진상(眞相)’ ‘이면(裏面)’이라는 말에 한국사람들은 묘한 매력을 느낀다. 신문도 ‘진상’ ‘이면’이란 타이틀로 한몫 보는 경우가 이지만, 한 때 『진상(眞相)』이라는 잡지까지 나온 적이 있다. ‘이면’ ‘진상’이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기도 하나, 신문은 결코 진상을 발표하지 않는다는 신문불신론도 내포하고 있다. 한 사건이 터지면 신문보도 외에 꼭 그 진상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심리, 이것이 한국사람들의 뉴스관이다.
의처증이 일종의 병이기는 하다. 하지만 의처증은 결코 병이 아닐 때도 있다. 뉴스에 꼭 진상을 요구하는 버릇도 뉴스 불신론자라고만 탓할 수 없다. 큰 뉴스가 터졌을 때 사람들은 모두 신경을 날카롭게 한다. 현대인은 알려고 하는 버릇이 있기 때문이다. ‘큼직한 사람’이 ‘큼직한 말’을 던졌을 때는 더운 ‘진상 욕(慾)’이 발동한다.
그러나 꼭 무슨 말을 기대했던 입에서 ‘논평할 가치 없다’라는 말을 들으면 국민은 어리둥절해진다. 정말 일고의 가치도 없고 논평할 가치가 없는지 국민은 납득을 못한다. 논평할 가치가 없는 것은 당사자뿐, 국민에겐 크게 논평할 가치가 있어 보인다. 논평할 가치가 없다는 말을 들으면 더욱 논평할 가치가 있어 보인다. 호기심이 더욱 커진다.
B라는 ‘사실’이 발표된다. 그러나 B만 발표되고 원인 A에 대해서는 충분한 발표가 없는 경우가 있다. B가 큰 뉴스면 아무리 논평할 가치가 없다고 우겨대도 국민은 믿지 않는다. A를 제멋대로 상상한다. 상상은 새로운 상상을 낳는 것이다.
쑥덕공론이 굶주린 뉴스욕을 채워준다. 유언비어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유언비어를 없애는 길이 하나 있다. 속시원히 A를 밝히는 일이다. 독자가 기자에게 ‘진상’을 캐묻는 버릇이 없어지는 날도 이때다.
 
송건호 전집17 <현실과 이상>, 한길사
사실을 보는 눈
 
한국의 신문들이 공정한 보도를 않고 일방적이며 과장된 표현을 한다고 불평하는 외국인이 있다. 군용견에 물렸다는 ‘평택사건’이 하나면 ‘사실’도 하나일 텐데 두 가지 ‘사실’이 보도된다면 묘한 이야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두 가지 ‘사실’ 중에 어느 편인가 한 쪽이 허위라고 생각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허위를 좀더 깊이 분석해보면 한 가지 보도가 전적으로 ‘진실’이 되거나 전적으로 ‘허위’가 되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다. 보도에는 누구에게나 하나의 자세가 있다. 자세가 다르면 하나의 ‘사실’도 독자에게 상당히 다른 이미지를 준다. 한국인의 도둑질을 보는 ‘눈’이 미국군인과 한국 신문기자와의 사이에 같지 않을 경우는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다.
제임스 A. 미치너는 언젠가 한국에 관한 글에서 대부분의 GI가 코리안들을 디스파이즈한다고 쓴 적이 있다. GI가 모두 코리안들을 디스파이즈하고 있을 까닭은 없겠으나, 미국 GI의 ‘눈’과 비록 스네키를 할망정 동포를 보는 한국기자의 눈이 같을 까닭은 없다. 한 가지 ‘사실’이 독자에게 상반된 이미지를 주는 이유는 ‘눈’의 앵글이 서로 상반된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눈’의 앵글이 다르고서 한 사건을 양측이 똑같이 보기는 어렵다. 한 사건을 똑같이 볼 수 없는 한 양측이 하나의 이해점에 도달하기는 힘들다. 하나의 이해점에 도달키 위해서는 공통한 광장에 설 필요가 있다. 한 ·미 두 나라가 공통의 광장에 서려면 보다 두터운 신뢰와 이해가 필요하다. 진실한 신뢰와 이해가 있는 곳에 디스파이즈가 있을 까닭이 없고 우월감이 있을 까닭이 없다. 학생들의 데모 기세를 가슴 아프게 생각할수록 미당국의 보다 진지한 이해를 바라는 마음도 간절하다.
 
(1962. 6. 8)
 
송건호 전집17 <현실과 이상>, 한길사
자라
 
‘자라’라는 바다짐승은 편리한 목을 가지고 있다. 안전하다고 볼 때는 목을 길게 빼고 두리번거리다가도 위험을 느끼면 어느새 쑥 목을 움츠리고 만다. ‘자라’는 특히 위험을 느끼는 눈치가 빠르다. 아무리 주위의 사람들이 목을 빼라고 졸라도 위험을 느끼는 이상 결코 목을 내미는 법이 없다.
신문기자들이 ‘용기가 없다’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자라’생각이 난다. 5·16 후로 신문이 재미없다고 말하는 독자들이 많다. 독자가 말하는 ‘재미’가 무엇을 바라는 마음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박 의장도 기자들이 “기개가 없다”고 말하고, 윤 대통령도 10일 “신문이 지나치게 소심한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자라’의 경우라면 목을 빼도 상관이 없겠는데 왜 움츠리고만 있느냐는 꾸지람인 것 같다. 신문에 용기를 바라는 주위의 소리가 요란한데 기자들이 공연히 위축하고 있는 것이라면 스스로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목을 빼지 않은 ‘자라’만을 나무랄 수는 없다. ‘자라’도 실상은 목을 길게 빼고 바깥공기도 쐬고 싶고 동서경치도 감상하고 싶을 것이 틀림없다. ‘자라’인들 궁상맞고 답답하게 움츠리고만 있고 싶을 까닭이 없다. 문제는 왜 ‘자라’가 움츠림을 펼 줄 모르냐에 있다. 민주정치를 지향하는 사회에는 반드시 비판이 있어야 한다. 이 비판의 책임을 떠맡은 기관이 바로 ‘의사당’과 ‘신문’이다. 따라서 ‘의사당’의 기능이 정지되고 있는 사회일수록 ‘신문’이 ‘의사당’의 몫까지 떠맡게 되니, 신문의 책임이 더욱 커진다. 비판을 싫어하는 ‘정치’는 독선으로 기울기 쉽다.
자기가 하는 일만이 옳고 자기 이외의 의견은 모두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면 민주정치는 위기에 빠진다. 그렇게 되면 여론은 지상에서 지하로 들어간다. 여론이 지하로 들어갈수록 그에 비례해서 위장된 여론이 판을 친다.
위장된 환영의 태극기 속에 파묻혀 이 박사는 민중과 점점 유리되어 갔다. 정치가 민중으로부터 유리되는 위험을 막는 유일한 방패는 자유스러운 신문의 비판 속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1962. 3. 12)
 
송건호 전집17 <현실과 이상>, 한길사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 까닭
 
“제기랄!” 신문을 읽던 다방 안의 한 손님이 내뱉듯 중얼대더니 친구들과 무엇인가를 소곤소곤 주고받는다. 주택가의 아낙네들도 요즘의 신문·라디오의 뉴스에는 제법 관심이 많은 듯 얼굴을 찡그린 채 소곤소곤 화제의 꽃을 피우고 있다. 중학생들마저도 시사에 관심이 있는지 말없이 신문을 열심히 탐독한다. 무엇인가 납득할 수 없는 무리(無理)가 자행되고 있는 데 대해 분개하는 눈치가 틀림없으나 그러면서도 표면화되지 않고 잠재하기만 하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솔직한 자기를 드러내놓는 것을 꺼려하는 때문일까.
어쩐지 불안해하는 표정들이 다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을 두려워하는 듯한 눈치가 역력해 보인다.
‘시국’이라는 이름의 버스가 있었다. 벌써 30년은 되었으리라. 이 버스를 놓칠세라 너도나도 편승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 버스를 놓치면 큰일 날 것이라고 생각들 했다. ‘국민복(國民服)’으로 단장한 예의 많은 유명인들이 제각기 다투어 이 버스에 올라탔다. 문필인도, 예술인도, 판검사들도 빠지지 않았다. 그 버스가 어디로 향하고 어떻게 될 버스인지 생각해보려고도 않은 채.
개인생활도 그렇고 한 시대의 흐름도 그렇다. 자기의 행동이나 시대의 흐름이 어떻게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반성하는 사람이란 의외로 적다. 설사 알고 있으면서도 사람이란 자기 행동에 대해선 언제나 관대하게 마련이다.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는 아주 사정없이 날카롭게 시비곡절을 따지는 삶도 큰일을 대할수록 더욱 어두워진다. 자기 일에 대한 지나친 관용이 숱한 죄과를 범하게 한다는 역사의 교훈도 아랑곳없이.
요즘 우리의 주변엔 무엇인가 잘못돼가는 듯한 감을 금할 수 없다. 한데도 좀처럼 그 잘못을 정시하려는 사람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무엇인가 말 못할 답답증과 안타까움을 느끼면서도 모두들 자기 속을 내보이기를 꺼려하는 눈치다. 북한산 봉우리 백운대에 올라앉아 시내를 굽어보면 서울시내가 온통 자욱하게 오염돼 있다. 대기뿐이랴.
권력과 이권을 위해 사람들의 이성조차 온통 오염돼 있는 것이 아닐까.
 
(1971. 2. 13)
 
송건호 전집17 <현실과 이상>, 한길사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