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언론인’이라는 직업
한겨레 전 논설위원 성한표
언론인이라는 직업은 복합적인 정체성을 갖는다. 하나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하는 직장인이라는 정체성이다. 그는 일반 직장인과 마찬가지로 일정한 성실성과 정직성을 요구받는다. 다른 하나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에 적극적으로 기여해야 하는, 투사로서의 정체성이다. 언론인은 이 일을 위해 때로는 실직이나 투옥, 또는 그 이상의 희생도 감수할 각오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것은 언론의 특별한 사회적 의미 때문이다. 언론은 정치권력과의 긴장관계를 지속시킬 때 생명력을 가지며, 긴장관계가 무너지면, 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가 맨 먼저 점령하는 기관은 으레 방송사다. “만약 당신이 한 나라의 정신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미술관, 교육부, 혹은 저명한 소설가의 집으로 향하는 대신, 혁명가들처럼 정치권력의 신경중추인 뉴스 본부로 곧장 탱크를 몰고 가라”라는 ‘일상의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의 충고도 의미심장하다.
그런데 권력이 스스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면서 언론과 ‘선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우리나라의 경우 재벌의 덩치가 비대해 지면서 언론에 대한 경제권력의 영향력이 정치권력 못지않게 강해졌고, 언론사 스스로 대기업화 한 곳도 많다. 그래서 언론인은 정권, 재벌, 사주로부터 오는 삼중의 억압 아래 놓여 있다.
이른바 ‘공영방송’, 곧 KBS, MBC 등은 정권의 향배에 따라 경영자가 바뀌고, 권력의 뜻을 따르는 새 경영자들은 언론인 대량해직을 서슴지 않는다. 이제는 시사교양 PD에 대한 대량 ‘숙청’까지 경영자에 의해 자행되고 있다.
하지만 정권의 공영방송 탄압은 정권, 재벌, 사주의 결합에 의한 삼중의 억압에 비하면, 비교적 단순한 고전적인 형태에 불과하다. <한겨레>와 <경향신문> 등 일부 ‘독립 언론’을 제외하면, 대부분 언론사에서 삼중의 억압이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최악의 침해는 정부의 간섭이 아니라, 편집책임자와 사주에 의한 자기 검열에서 온다고 말할 수 있다. 언론자유의 진정한 적은 언론사 바깥이 아니라 내부에 있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직장인과 투사라는 복합적인 정체성을 가진 언론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선 언론인들의 대동단결이 필요하다. 직종간의 차이를 넘어서는 언론사 내부의 단결은 물론이고, 언론사의 벽을 뛰어 넘는, 전 언론인이 하나가 되는 단결이다. 각 언론사 내부의 색깔과 논조는 서로 달라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언론의 역할이 ‘진실의 추구’라는 것에 이의를 달 언론인은 없을 것이다.
다음, 생활규모를 줄여나가는 일이다. 언론의 진실추구는 권력의 이익과 충돌하기 마련이다. 정치․경제 권력이 언론 사주를 통해 실직의 위협을 가할 때, 늘려놓은 생활규모는 언론인에게 큰 짐이 된다. 형편이 서로 다르긴 하지만, 생활규모를 줄일 만한 여지가 있는 언론인들도 적지 않다. 생활의 규모를 줄이면, 일시적인 실직은 견뎌낼 수 있는 ‘내성’이 길러진다. 그렇게 되면, 실직의 위협 앞에서도 사주의 자기검열 요구에 맞설 수가 있다. 언론인 가운데는 이미 실직의 시련을 딛고 일어서서, 뉴스타파, 국민TV 등 새 언론에서 진정하고 활기찬 언론인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도 있다.
마지막으로 독자와 시청자들을 ‘우군’으로 만들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에 동참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이들이 ‘우리 신문’, ‘우리 방송’이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이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이들 대부분은 흔히 생각하듯이 신문이나 방송에 의해 조종당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인터넷과 SNS를 통해 여러 소식과 의견들에 접하고 있다. 따라서 독자와 시청자들에게 다가가는 일은 이 사람들의 관심사와 의견을 큰 덩어리로 묶어서 지면과 프로그램에 반영하고, 이들의 공통된 어려움을 찾아내어 사회적인 의제로 만들어 내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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