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9일 수요일

불평등 확대 지표 심각하게 봐야(출처: 한국일보)

[사설] 연일 나오는 불평등 확대 지표 심각하게 봐야

양극화 심화로 부의 불평등 현상이 확대되고 있다는 지표들이 연이어 나오고 있다. 우리 사회의 분배구조가 전반적으로 악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들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15년 빈곤통계연보’에 따르면 지니계수(Gini coefficient)는 소득과 지출 측면 모두에서 정체되거나 나빠지고 있다. 지니계수는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 정도가 심하다는 의미다. 2014년 지니계수는 시장소득 기준 0.331로 전년대비 0.003 상승했다. 소비 지출 기준으로는 0.262로 2013년부터 다시 올라 세계 금융위기 때인 2008년 수준으로 높아졌다. 또 최상위 10%에 해당하는 가구의 소득을 최하위 10%에 해당하는 가구의 소득으로 나눠 구한 값인 ‘10분위 소득배율’도 세계 금융위기 이후 2009년부터 3년간 9.5를 유지하다가 2012년 9.4로 떨어지고 지난해에는 9.1로 추락했다.

얼마 전 ‘수저 계급론’을 내세웠던 김낙년 동국대 교수는 우리나라 20세 이상 성인 기준으로 자산 상위 10% 계층에 전체 부의 66.4%가 쏠려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이는 2000~2007년 연평균 63.2%보다 높아진 것으로 부의 집중화가 가속되고 있다는 얘기다. 통계청 자료에도 2013년 기준 소득 상위 10% 가구의 연 평균소득은 1억3,757만원, 하위 10% 가구의 평균소득은 497만원으로 집계됐다. 상ㆍ하위계층의 소득격차가 무려 30배에 달한다.

문제는 이 같은 불평등 심화 추세가 반전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경제가 저성장국면에 돌입한 상태에서는 재산형성과정에 상속과 증여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부의 쏠림 현상이 더 심해질 가능성이 높다. 이 같은 상황이 지속되면서 지난해 우리나라 중산층 100명중 11명이 저소득층으로 추락했다는 조사결과도 나왔다. 중산층이 줄어든다는 것은 사회적 완충지대가 엷어지면서 계층 갈등을 유발해 궁극적으로 민주주의를 위협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뜻이다. 남미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해법은 두 갈래다. 양질의 일자리 제공이 소득 불평등 개선책으로는 최선이다. 일정 수준의 노동개혁이 뒷받침돼야 하는 이유다. 또 하나는 분배구조를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복지 사각지대를 줄이는 정책과 적극적인 세제개편 등이 병행돼야 한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올해 초 밝힌 파격적인 중산층 육성방안을 참고할 만하다. 일정 수준 이하 임금소득 가계의 소득세율을 낮추고, 보육과 교육비 지원, 공공서비스 이용료 보조 등의 복지개선과 함께 자본소득세에 대한 세율을 인상하는 정책이다.

2015년 12월 8일 화요일

편향동화 biased assimilation

편향동화 biased assimilation

자신의 생각과 다른 글은 어리석고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치부하고, 자신의 생각과 같은 주장은 현명하고 논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결국 자신의 기존 입장을 더 강화시킨다.


근본주의 fundamentalism

근본주의 fundamentalism

  원리주의라고도 불리는 근본주의는 어느 종교에나 있고, 나타나는 양상도 거의 비슷하다. 우선 종교의 경전을 자구 그대로 따라야 한다는 엄정한 입장을 취하며(순결성), 금욕에 가까운 엄격한 윤리를 내세우고(도덕성), 다른 종교는 물론 같은 종교의 다른 종파에 대해서까지도 적대적이거나 배타적인 태도를 보인다(편협성).

  사실 근본주의라면 이슬람교보다 그리스도교가 선배다. 제 나라에 살 때는 애국심이라는 걸 몰랐어도 외국에 나가 살게되면 과장된 애국자가 되게 마련이다. 일제강점기에 친일 행위를 했던 자들이 해방 직후 친일과 색출에 더 열성을 보이는 것처럼, 19세기 초 미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그리스도교 근본주의 운동이 그랬다.

  근본주의자들은 다른 종파에 대해 전투적이고 호전적인 자세로 일관하면서 각종 사회적 문제와 정책 결정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사이비 예언으로 여론몰이를 하는 전략은 포기했으나, 냉전시대에 극우적인 반공주의로 대중을 호도한다든가 진화론을 비난하고 성서에 입각한 창조론을 정식 교육과정에 포함시키려 하는 등 파괴적인 책동을 서슴지 않았다.

  이슬람 근본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1948년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 공화국이 세워진 사건을 계기로 강력해졌다. 이슬람 세력권인 중동의 심장부에 다른 종교(그것도 배타적인 유대교)의 국가가 탄생한 것도 논란거리였지만, 그보다 더 심한 것은 이스라엘 때문에 팔레스타인에 살던 주민들이 수천 년동안 살아온 고향을 빼앗기고 졸지에 난민이 되어버린 사실이었다.

  이스라엘의 건국은 연합국 측이 전후의 어수선한 틈을 타 전쟁 지원의 보상으로 유대인들의 요구를 들어준 결과였다. 비록 유대인들은 3천 년 전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 민족의 국가가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내세웠지만, 그 황당한 명분의 배후에는 힘의 논리가 숨어 있었따. 그 논리대로라면 미국도 불과 수백 년 전까지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땅을 유럽계 백인들에게 빼앗긴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돌려줘야 하지 않을까?

*벨푸어 선언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부패하고 무능한 이슬람 정권이 이슬람권의 위기를 초래했다고 비난하면서 코란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는 새로운 이슬람 국가를 수립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이 주적으로 삼은 것은 이스라엘 공화국의 탄생을 지원한 그리스도 문명권이었고, 그 중에서도 핵심인 미국이었다. 여러 차례에 걸친 중동 전쟁에서도 이스라엘을 몰아내지 못하자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전쟁보다 테러의 방식을 택했다. 그들은 군대를 조직해 이스라엘과 크고 작은 싸움을 벌이는 한편 이스라엘의 강력한 지지자인 미국을 대상으로 세계 각지에서 테러를 일으켰다. 그 결과가 2001년 9.11 사태였다.

  문제는 테러로 해결될 게 아니고, 더욱이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은 해결의 주체가 될 수 없지만, 중동에 최종적인 평화가 오기까지 테러는 끊이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중동 문제로 노벨 평화상이 주어진 것은 세 차례나 되지만 분규가 해결될 전망은 여전히 요원하다. 앞으로 이 지역이 얼마나 많은 노벨평화상을 양산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중동 분쟁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인물들
1) 1977년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 2) 동년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수상 3) 1961년 다그 함마르셸드

니체 원한으로부터의 탈출

니체 <원한으로부터의 탈출> 도덕만큼 부도덕한 것은 없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5:3) 기독교의 가치판단은 너무나도 유명한 이 '산상수훈' 속에서 가장 정확하게 드러난다. 약한 자, 즉 가난함·추함·불행 등을 운명처럼 짊어진 자들은 '선한 자'로 간주되고, 반대로 강력함·고귀함·아름다움·행복 등을 거머쥔 강한 자들은 '악한 자'로 분류된다. 즉 기독교는 금욕을 추구하며,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에로스와 쾌락 등을 억누른다.

  니체는 이런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노예도덕'으로 부르면서 철저히 부정했다. 삶의 고통을 실제로는 해소할 수 없기 때문에 상상 속의 복수를 통해 위안을 얻으려는 마음의 움직임을 니체는 '원한'이라고 불렀다. 기독교는 이런 원한에 기반해 탄생했으며 유럽에 널리 퍼지게 됐다. 즉 강자에 대한 선망과 복수심에 사로잡힌 대다수의 약자들은 우선 '강자는 악하다'라는 부정적인 가치평가를 내리고, 이런 판단에 의해 '약자야말로 선하다'라는 가치평가를 끌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강함을 긍정(실천)할 수 없는 약자(노예)들의 가치판단이 이런 가치 평가의 근원이다. 이런 기독교 도덕의 영향을 받은 유럽의 윤리학도 기쁨이나 괴로움과 같은 인간의 감정적인 요소를 배제해 버렸다.

  이에 반해, 니체는 인간에게 진정한 의미를 지닌 올바른 행위는 감정적인 것, 즉 삶으로부터 실제로 느껴지는 자연스러운 것이어야만 하며, 그 중에서도 '기쁨'을 가져다주는 '힘'의 고양감이야말로 도덕의 본래적인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진정한 올바름에 기반해 행동할 수 있는 자를, 니체는 약자에 대해 강자라고 불렀다. 물론 이것은 사회적인 계급의 차이를 지적하는 말이 아니다. 고귀한 자(강자)는 자신의 삶을 긍정할 수 있는 유형의 인간인 반면, 노예는 이런 긍정할 수 있는 힘을 상실한 인간인 것이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강자는 단순히 이기적인 인간이 아니다. <선악을 넘어서>에서 니체는 "고귀한 인간도 인간을 돕는다. 그러나 그것은 동정 때문이 아니라 힘의 충만함에 따른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기독교 도덕에서는 타인을 돕는 행위가 '이타적으로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는 요청에 기반한 의무적 행위가 되고 말았지만, 고귀한 자에게 그것은 어디까지나 '힘'의 발현에 의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니체는, 자신을 약자로 받아들이고 싶어하는 자의식 과잉의 상태를 버리고 그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켜, 신체로부터 샘솟는 힘(확장된 이성)을 회복하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파리 테러 생각 정리

<파리 테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시오>
 
파리 테러는 억눌린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폭발이다. 억누른 주체는 프랑스다.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였다.
 
 
근본주의자들에게는 무질서와 절대 진리 양자만이 존재한다. 그들에게 질서가 아닌 것은 무질서일 뿐이며, 절대 진리가 아닌 것은 진리가 아닌 것이다.
 
파리테러 핵심 포인트 8가지
 
13일 불특정 다수를 향한 동시다발 총격 테러 127명 사망.
샤를리 엡도 테러는 무하마드 풍자 만화에 대한 맞춤형 보복 테러. 이번 테러는 불특정 다수가 있는 곳에서 일반적인 파리지앵들을 대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한 테러.
 
테러범들은 알라후 아크바르(알라신은 위대하다)라고 외쳤다.
유럽 극우 세력은 이번 테러를 반긴다. 프랑스의 국민전선도 그렇고, 독일에서는 페기다(우럽의 이슬람화를 반대하는 애국적 유럽인들)가 지속적으로 무슬림의 축출을 주장해왔다. 그들에게 이번 테러 이상의 호재가 있을까. 만약 이번 테러가 IS나 현지 무슬림 거주자들이 한 것. 극단주의자들은 통한다. 서로 이익을 보는 것이다. 정치적 목적을 함께 드라이브 걸 수 있는 상황이 됐다.
 
절대 다수 아랍과 무슬림들은 테러를 규탄한다. 하지만..IS 세력과 알카에다 세력들이 목소리를 내고 만행을 저지르게 만든 원인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고 있어 불편해하고 있다.
 
한국이 특별히 테러에 위험하다고 말할 근거는 없다.
한국에 대규모의 무슬림 공동체가 있는 것도 아니고, 특정 공동체가 정치적으로 탄압을 받고 있지도 않다. 런던이나 파리같이 같은 커뮤니티에 살고 있는 로컬 세력이 테러를 일으킬 가능성도 적다. 다만 서울도 대도시이고, 한국이 중동에서 다양한 활동들을 하고 있기 때문에 폭넓은 대처는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도 위험하다’, ‘IS 잠입 세포가 있다고 말하는 순간, 이것이 외국인 혐오로 갈 위험이 있다. 혹시라도 이번 일을 계기로 파리와 우리의 상황을 등치시켜서 우리도 배타적인 인종혐오 등 극우주의로 나가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면 답이 없다.”
 
시리아의 경우, 아사드 정권이 4년동안 2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죽였다. 우리에겐 IS가 더 잔인하다는 생각이 있는데, 그렇지 않아. IS가 외국인들, 특히 백인 앵글로 색슨을 참수하는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에 그런 모습이 외부에 있는 우리를 공격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직접 위협으로 느껴졌던 것. 아사드 정부는 더 잔혹했다. 아사드 정부가 25만 명을 죽일 때는 국제사회가 아무 것도 한 게 없었는데, IS에 대해 방방 뛰니까 그 이중적인 면모에 대해 불편해하는 것.
 
#PRAY_FOR_PARIS
 
샤를리 에브도 사건 때 12명이 죽자 전 세계 지도자들이 손을 잡고 나타나 행진했다. 그 곳에는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까지 나타났다. 25만 명이 죽을 때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던 그들인데... 아랍이 더 분노하는 건 러시아다. IS도 궤멸해야 하지만, 아사드를 좀 어떻게 하라는 목소리를 아랍인들이 내고 있다.
 
민족자결주의..민족 집단이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그 귀속과 정치 조직, 정치적 운명을 결정하고, 타민족이나 타국가의 간섭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는 집단적 권리를 말한다.
 
학자적 자질을 가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국회에 제출한 연두교서에서 밝힌 <14개조(Fourteen Points)>는 그 정신이나 내용이 승전국이나 패전국측 모두에게 적합하다고 판단하고 이를 수용하였다.
 
그 내용은 일반론 5개조, 국제연맹안을 포함한 특수문제 9개조로 되어 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약소민족(또는 점령지역)의 독립 및 복귀와 관련된 내용이 7~8개 항에 달하며, 그 기본 정신은 '민족자결의 원칙'(Principle of National Self-determination)이 반영된 것이었다. , “피지배민족(식민지나 점령지역)에게 자유롭고 공평하고 동등하게 자신들의 정치적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자결권(自決權)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전후 유럽에서의 국경·영토 조정에 많이 적용하였다.
 
이러한 정신은 전 세계로 확산되어,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식민지 상태의 약소민족들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기본권임과 동시에 그 정당성을 주장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한국의 3·1운동도 그러한 세계적 추세와 정신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신은 꾸준히 계승되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식민지 민족의 독립에 영향을 주었고, 유엔 헌장, 인도차이나 문제에 관한 제네바협정(1954), 식민지독립선언(1960 유엔 총회) 등에 포함되어, 민족자결주의는 오늘날 모든 민족이 스스로 정치적 선택을 결정짓는 국제법상의 하나의 확고한 원칙이 되었다. 그러나 그 정신은 어디까지나 원칙일 뿐, 강대국의 정치적 군사적 힘 앞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존재하는 사례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1차 대전 끝날 무렵 미국이 모든 나라를 앞섰고, 세계의 혼란을 건지려는 것처럼 보였다. 우드로 윌슨은 레닌에 맞서 개혁주의적 호소를 하였다. 민족 자결주의는 레닌에 대한 반격이었다. 윌슨의 미국의 국제연맹가입을 의회가 거부하고 레닌의 국제주의도 실패한다. 국제 정세는 오히려 복고주의적인 성향을 나타내었다.
 
애국법*: 미국의 법. 일반 시민 통신기록의 대량 도감청을 허용하는 애국법 효력이 201561일 만료됐다. 그 대체 법안으로 자유법이 이틀 뒤 통과됐다. 자유법이 시행되면, NSA의 대테러 첩보활동은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시민의 통신기록은 원칙적으로 통신회사만 보유하고, 정보기관은 집단이 아닌 개별 통신기록에 대해서만 법원 영장을 발부 받아 접근. NSA9.11 테러 후 도입된 애국법 215를 토대로 미국 시민 수백만 명의 통신기록을 한꺼번에 수집해 5년간 보관하는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또 휴대폰을 자주 바꾸며 이동하는 테러 용의자도 법원에서 영장을 발급받지 않고 임의로 감청해오기도 했다.
 
미국자유법은 그러나 이동장비를 이용해 움직이는 테러 용의자를 추적도청하거나, ‘외로운 늑대로 불리는 자생적 테러 용의자에 대한 감시추적을 허용하는 애국법 조항은 그대로 유지했다.
 
상원 표결 직후, 오바마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 미국자유법이 미국 시민의 자유권과 국가 안보를 동시에 지켜줄 것이라며 법안에 바로 서명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인권을 위해 도감청 범위를 엄격히 제한하는 자유법이 애국법을 대체하더라도 국가 안보의 허점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미국자유법은 하원에서는 민주공화당의 합의를 거쳐 일찌감치 통과됐으나 상원에서는 애국법 원안 연장을 고수한 공화당 지도부의 반대로 난항을 겪어왔다. 그러나 랜드 폴 상원의원의 예상치 못한 필리버스터’(의사진행방해)로 애국법 215조 효력이 시한 종료로 정지되면서 상황이 반전했다. 정보 당국의 활동이 중단되면서 테러 위협에 대한 우려가 증폭되고, 하원 지도부가 미국자유법 원안 통과를 강력하게 요구함에 따라 상원 지도부도 이날 원안 그대로 표결 처리했다.
 
이날 법안 통과는 공화당이 장악한 의회에 미국자유법안의 처리를 압박해온 오바마 대통령으로서는 모처럼 귀중한 정치적 승리로 평가된다. 2013NSA 요원인 에드워드 스노든의 폭로로 이 기관의 무차별 도감청 실태가 드러난 직후, 오바마 행정부가 민주당과 함께 주도적으로 자유법안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오바마 대통령에 맞서 미치 매코널(켄터키) 원내대표를 비롯한 공화당 상원 지도부는 자유법안이 NSA의 기능을 위축시켜 국가안보를 해친다며 애국법 연장을 추진한다는 입장이었다. 이 법이 없으면 공인된 외국 테러 조직과 연계돼 있지 않은 자생적 테러조직에 대한 감시능력이 약화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시민을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 이민자나 이슬람계엔 가혹. 기본권 침해 등 위헌 소지도 있다.
 
 
테러의 정의: 특정 집단의 목적을 위해서 군중들에게 가해지는 위협, 공포, 약탈, 살인 등 다양한 폭력을 동반한 행위.
 
태초에 테러가 있었다. 테러는 질서를 유지하느냐 파괴하느냐의 문제와 깊은 연관이 있어보인다. 질서와 무질서, 유지와 파괴, 유지하려는 자와 파괴하려는 자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에 테러라는 문제의 복잡성이 있다. 테러는 양면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인류 문명은 자연이라는 카오스 위에 건설된 것이며 이 과정에 포함된 조직적 폭력 없이는 그 결과를 한탄하는 현재의 생태주의 전사들 역시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테러는 인류 문명에서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문명을 위한 파괴와 정복이라는 성격을 지닌다는 점에서 지금까지의 역사에서는 그런 측면이 있었다. 창조와 파괴, 생명과 죽음, 긍정과 부정이 늘 함께 한다. 어느 한 면만이 존재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테러는 양면적이면서 모순적인 성질을 지닌 것이다.
 
법의 제정자가 그것의 위반자이기도 하다. 법치제 자체가 최초의 정복과 혁명, 침략과 전복을 통해 세워졌기 때문이다.”
 
국가와 권력의 양면성에 대해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한 그들 역시 폭력적인 테러의 한 축이 될 수 있다. 성스러운 테러의 저자 이글턴에 따르면 문명. 국가. 권력. 자본주의는 파괴와 건설의 양면성을 지닌 테러의 산물이며, 테러를 통해 유지된다는 이면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테러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테러를 어떻게 다루든 혹은 테러를 어떻게 이용하든 문명 속에 나름의 자리를 가지고 있는 테러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경외심과 공포, 조심성이 필요하다. 테러를 제대로 이용하려면 우선 그것의 양가성을 인정해야만 한다.
 
‘sacer’라는 단어는 축복과 저주, 성과 속 모두를 의미한다.
창조적인 테러와 파괴적인 테러, 생명을 부여하는 테러와 죽음을 불러오는 테러가 동시에 존재한다. 신성한 것은 위험한 존재로서 유리 상자보다는 우리에 가둬져야 할 무엇이었다.
 
하나의 과잉(아나키)이 또 다른 과잉(독재)를 낳는다.
 
나쁜자유. 자유.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의도적으로 행해지는 자살테러는 조용히 혼자서 목숨을 버리는 자살과는 다르다. 테러에는 의도가 있다. 자살테러의 의도는 죽는 것이 아니라 죽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키는 것이고 대체로 그 의도는 부당한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게 살기 위한 것이다. 어쨌든 대체로 그 의도는 자유로운 삶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자살하는 것도 자유이고 자살하도록 만드는 것도 자유이고 그것에 맞서 자살테러를 하는 것도 자유이고 자유로운 삶을 위한 것이다.
 
자유는 어디까지일까. 어디까지가 좋은 자유일까. 이글턴은 절대 자유를 구속하려는 것은 바람을 동아줄로 묶어두려는 시도와 같아서 만약 묶인다면 그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자유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헤겔은 절대자유라는 파괴적 자유에 상응하는 것은 일종의 공허와 무, 한계를 가진 모든 실정적 존재들의 잠재적 욕망 내지 환상이라서 자신의 세계를 폐허로 만드는 이런 종류의 자유는 결국 자기 자신 역시 파괴하고 말 것이고 그래서 절대자유는 나쁘다고 봤다.
 
이글턴은 어떠한 경계도 인정하지 않으며 완전하고 절대적인 것을 추구함으로써 결국 파괴를 통해 공허와 무”, “순수하고 맹목적인 부정상태에 이르게 되는 나쁜자유인 절대자유주의자의 예로 근본주의자, 허무주의자를 언급한다. 이글턴이 탈레반 출신이든 텍사스 출신이든 근본주의자와 허무주의자를 나쁜 자유주의자로 규정하는 이유는 그들이 1원칙에 근거하지 않은 것들을 거부하고 배제한다는 것이다. 예외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파괴적이라는 것.
 
근본주의자들에게는 무질서와 절대 진리 양자만이 존재한다그들에게 질서가 아닌 것은 무질서일 뿐이며, “절대진리가 아닌 것은 진리가 아닌 것이다. 이글턴이 보기에 이들의 문제점은 자신들 기준에 부족한 것은 무엇이든 무질서로 명명하는 자기만족적 명제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무정부상태와 절대주의는 동전의 앞뒷면에 불과하다
자살테러범 역시 비참한 삶보다 죽음이 낫다고 주장하며, 스스로에게 폭력을 가함으로써 자신의 적이 그들에게 늘 가해왔던 바로 그 폭력을 가시화한다. 해서 그들의 죽음은 자신의 존재 상황에 대한 하나의 해결인 동시에 그것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존재의 무화를 받아들임으로써 그는 더 커다란 무언가가 되기를 기도한다. 또한 다른 비극의 주인공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자신의 죽음에 얼마나 많은 무고한 생명의 희생이 동반되는지 개의치 않는다. 그는 다른 사람의 손에 굴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자신을 (살해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그는 찰나 동안이나마 자유로운 주체의 지위를 향유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상처도 불안도 모르는 무소불위의 존재로 만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야 말로 진정 삶다운 삶이라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이글턴은 말했다.
 
절대자유를 추구하는 이들의 자유가 나쁜자유였던 이유는 자유를 구속하는 질서의 내용을 문제 삼으면서 그 내용을 변화시킴으로써 자유로워지려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질서를 이루기 위해 질서자체를 거부함으로써 양보와 타협에 이르지 못하고 자신만 아니라 타자를 파괴하게 되는 파괴성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제거해야 할 존재들은 언제나 존재한다. 비존재는 파괴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에는 언제나 또 다른 유대인과 이슬람인, 동성애자 및 여성들, 그리고 또 다른 종류의 비-인간들이 계속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지옥의 영원한 지속이란 바로 이런 상황을 지시하는 것일 뿐... 다시 말해 파괴함으로써 살아 있다고 느끼는 악에 의해서 영원히 지속되는 지옥이 현실인 것. 해서 지옥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목숨을 건 희생은 불가피한 것.
 
파괴함으로써만 살아 있다고 느끼는 에 의해 영원히 지속되는 지옥이 현실이다. 해서 지옥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목숨을 건 희생은 불가피한 것이다. 순교자들은 함께 살기위해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현실을 지옥으로 만드는 악에 대응한다.
 
현실에는 여러 형태의 자유의지를 가진 선과 악이 존재한다. 악이 없으면 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악은 선을 파괴함으로써만 존재한다. 더 나아가 악은 파괴할 선을 필요로 한다. 악이 선을 만들어 낸다고도 할 수 있다.
 
이글턴은 희생양을 무고한 범법자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폭력이 개인적 잘못이 아니라 일반적 상황으로서 구조적으로 그 안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자신들 개신으로서는 무구한 존재지만 커다란 착취구조의 악취가 그들에게 선명하게 배여 있다는 점에서 무구한 범법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박탈당한 자들의 상징으로서 희생양은 이 왜곡된 상황 자체의 죄를 자신 안에 각인하고 있는 범법자가 된다.
 
 

2015년 12월 7일 월요일

디지털 미디어 시대 뉴스의 진화 - 두이린투

"저널리즘은 이제 뉴스의 성격만 띠어서는 안 된다"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11/27/2015112702962.html


  뉴스는 이제 할리우드 콘텐츠, 각종 엔터테이닝 요소들과 경쟁해야 한다. 전쟁·분쟁 탐사보도 매체 바이스 미디어를 예로 들었다.

  미국 저널리즘은 위기에서 탈출하는 단계다. 2005~2014년 미국 언론 종사자 수십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하지만 위기를 겪으며 저널리즘 환경은 크게 바뀌었다. 과거 저널리즘은 신문과 방송 등 한정된 방법으로만 구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아이폰의 스냅챕 앱을 가리키며) 이것이 바로 저널리즘이다. 여기 보듯이 스냅챕을 통해 뉴스를 접할 수 있다. 많은 일자리가 사라진 만큼 새로운 공간과 일자리가 생겨났다. 앞으로 더 많이 생길 것이다. 

TV 대신 페이스북, 트위터로 뉴스를 접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 심지어 온라인 비디오 게임에서도 뉴스가 제공된다. 디지털 뉴스 스타트업들이 계속 생겨나고 있다. 전통 미디어가 고전하고 있지만, 미디어 산업 전체를 보면 위기라고 볼 수 없는 이유다. 위기는 미디어의 ‘비전’ 유무에 달려 있다."

*쿼츠의 뉴스 큐레이션 서비스는 독자에게 필요한 뉴스를 적절히 제공한다. 웹 페이지는 단신, 추천 기사, 인기 기사, 이슈 크게 네 가지 섹션으로만 구성된다. 

*바이스 미디어

미디어 기업의 목표는 크게 두 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