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원한으로부터의 탈출> 도덕만큼 부도덕한 것은 없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5:3) 기독교의 가치판단은 너무나도 유명한 이 '산상수훈' 속에서 가장 정확하게 드러난다. 약한 자, 즉 가난함·추함·불행 등을 운명처럼 짊어진 자들은 '선한 자'로 간주되고, 반대로 강력함·고귀함·아름다움·행복 등을 거머쥔 강한 자들은 '악한 자'로 분류된다. 즉 기독교는 금욕을 추구하며,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에로스와 쾌락 등을 억누른다.
니체는 이런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노예도덕'으로 부르면서 철저히 부정했다. 삶의 고통을 실제로는 해소할 수 없기 때문에 상상 속의 복수를 통해 위안을 얻으려는 마음의 움직임을 니체는 '원한'이라고 불렀다. 기독교는 이런 원한에 기반해 탄생했으며 유럽에 널리 퍼지게 됐다. 즉 강자에 대한 선망과 복수심에 사로잡힌 대다수의 약자들은 우선 '강자는 악하다'라는 부정적인 가치평가를 내리고, 이런 판단에 의해 '약자야말로 선하다'라는 가치평가를 끌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강함을 긍정(실천)할 수 없는 약자(노예)들의 가치판단이 이런 가치 평가의 근원이다. 이런 기독교 도덕의 영향을 받은 유럽의 윤리학도 기쁨이나 괴로움과 같은 인간의 감정적인 요소를 배제해 버렸다.
이에 반해, 니체는 인간에게 진정한 의미를 지닌 올바른 행위는 감정적인 것, 즉 삶으로부터 실제로 느껴지는 자연스러운 것이어야만 하며, 그 중에서도 '기쁨'을 가져다주는 '힘'의 고양감이야말로 도덕의 본래적인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진정한 올바름에 기반해 행동할 수 있는 자를, 니체는 약자에 대해 강자라고 불렀다. 물론 이것은 사회적인 계급의 차이를 지적하는 말이 아니다. 고귀한 자(강자)는 자신의 삶을 긍정할 수 있는 유형의 인간인 반면, 노예는 이런 긍정할 수 있는 힘을 상실한 인간인 것이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강자는 단순히 이기적인 인간이 아니다. <선악을 넘어서>에서 니체는 "고귀한 인간도 인간을 돕는다. 그러나 그것은 동정 때문이 아니라 힘의 충만함에 따른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기독교 도덕에서는 타인을 돕는 행위가 '이타적으로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는 요청에 기반한 의무적 행위가 되고 말았지만, 고귀한 자에게 그것은 어디까지나 '힘'의 발현에 의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니체는, 자신을 약자로 받아들이고 싶어하는 자의식 과잉의 상태를 버리고 그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켜, 신체로부터 샘솟는 힘(확장된 이성)을 회복하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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