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12일 목요일

대한민국의 진보를 비판하다.(3)

  고단함이란 생산과정에서 나타나는 문제다.

  억울함은 1차 분배과정의 문제다.

  불안함은 2차 분배과정 곧 재분배의 문제다. 

  이 고단함, 억울함, 불안함은 경제적 차원에서만 발생하는 게 아니다. 남북한의 긴장관계 탓에 고단한 병영생활을 거쳐야 하며, 종교적·양심적 병역거부자는 감옥행이다. 이명박정권하에서 진행된 민주주의 후퇴로 '미네르바' 사건처럼 억울하게 구속되는 일도 발생하고,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처럼 검찰과 법원에서 억울한 처우를 받는 일도 흔하며, 진보개혁세력은 보수수구언론에 의해 억울한 중상모략을 당하기 일쑤다. 

  양극화가 심하고 복지가 취약하니 치안이 불안해 아파트를 선호하고, 고급아파트에선 이중삼중의 안전장치를 마련한다. 부자들도 불안한 것이다. 광우병 같은 일로 인해 먹을거리에 불안을 느끼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왕따나 폭력에 시달릴까 불안하기도 하다. 김대중 노무현정권의 햇볕정책을 걷어찬 이명박정권의 비바람정책으로 인해 남북관계 역시 연평도 포격 같은 준전시사태까지 발생해 국민 전체가 불안함을 떨칠 수 없게 됐다. 

  진보니 보수니 하는 따위의 이념 대립을 넘어서 통합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을 우리는 자주 듣는다. 그러나 진정한 통합이란 차이에 따른 대립을 무조건 덮어버림으로써 가능한 게 아니다. 그것은 기존의 지배질서를 온존시키려는 의도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서로의 대립지점과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고, 양립 가능한 대립과 해소해야 할 대립을 구분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사회의 대립전선을 확인하는 것은 바람직한 선진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과제다. 

  공자는 정치를 하면 무얼 먼저 하겠느냐는 제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겠다.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조롭지 않으며, 말이 순조롭지 않으면 일이 이뤄지지 않는다" 

  재벌. 친북. 종북. 신자유주의. 

대한민국의 진보를 비판한다.(2)

<장하준 비판>

  장하준 교수는 경제현실의 인과관계를 시장만능주의 또는 주주자본주의라는 개념으로 과도하게 단순화해버렸다. 시장만능주의와 주주자본주의를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다룬 셈이다. 그러면서 사실을 자의적으로 왜곡했다. 대중들에 대한 호소력은 커지지만 그건 기만에 가까운 행태다. 모든 것을 좌파 탓으로 돌리는 한국의 한심한 수구적 보수파나, 제국주의의 지배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만사형통이라는 예쩐 종속이론의 오류가 바로 이런 단순논리에 있다. 한국의 진보파들이 신자유주의 반대 타령에 몰두했던 것도 장 교수와 마찬가지 오류였다.

  장 교수는 재벌의 총수체제를 개혁하면 재벌이 주주자본주의의 화신인 외국금융자본에 넘어간다고 한다. 적화통일의 위협으로 박정희 독재체제를 옹호하던 것과 비슷한 논법이다. 재벌개혁이란 총수의 소유권을 무조건 박탈하자는 게 아니다. 총수의 부당한 그룹 지배력 부분을 해소하고, 그걸 국민연금 등 한국의 기관투자가를 통해 보완하면 된다. 그러면 재벌을 외국금융자본에 넘기지 않으면서 개혁을 수행할 수 있다.

  박정희시대의 개발독재 유산을 극복한다고 해서 시장만능주의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 장 교수는 경제개혁론자들을 시장만능주의로 매도한다. 하지만 이는 박정희 식 개발독재 아니면 시장만능주의 밖에 없다고 하는 편협한 사고의 산물이다. 박정희 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국가가 시장에 개입해야 한다. 복지주의적 국가의 역할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중요하다. 금융, 노동, 환경과 관련된 국가의 규제는 과거에 비해 더욱 강화돼야 한다. 중소중견기업을 보호·육성해야 하고, 기초 인프라 발전 차원에서 국가가 연구개발 투자에 나서야 할 경우도 있고, 구조조정 등을 위한 정책금융의 중요성도 사라지지 않았다.

  재벌에 경영권 세습을 인정해주되 그 댓가로 증세하자는 장교수의 제안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재벌들이 콧방귀를 뀌니 가능하지 않다. 또 부당한 경영권 세습마저 인정해 IMF 금융위기 때처럼 경영능력을 검증받지 않은 재벌총수 3, 4세가 기업과 나라 경제를 위태롭게 할 수 있으므로 바람직하지도 않다. 오히려 재벌을 개혁해 재벌의 부당한 사회지배력을 약화시켜, 복지국가를 위한 증세가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진보를 비판한다.(1)

'자본↔노동'의 대립구도에만 주목하는 진보파는 노동자 사이의 차별이나 자본가 사이의 차별 즉 재벌과 중소기업 사이의 억압·수탈관계를 소홀히 한다. 

사회주의를 지향하더라도 민주주의 질서를 위배하지 않는 한 문제될 게 없다. 비록 틀린 꿈이라고 생각할지라도 남에게 꿈을 버리라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 우리 헌법에도 사상과 양심의 자유는 보장돼 있다. 더구나 사회주의의 이상 자체는 아름다운 것이었다. 다만 이들이 주장하는 사회주의가 어떻게 작동 가능한지에 대해 논의를 심화시켜주면 좋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물론 이런 종류의 활발한 토론을 위해선 국가보안법이 개정되거나 철폐되어야 한다.

<NL과 PD의 거듭나기>

  NL과 PD는 이제 변화된 현실에 걸맞게 거듭나야 한다. 그것은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을 재구성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그러려면 NL과 PD의 비합리적 부분은 과감히 버리되 합리적 핵심은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 NL 특히 주사파 NL의 비합리적 부분이란, 북의 항일 무장투쟁 역사에 너무나 감동해서 분별력을 잃고 오늘날 북한체제의 시대착오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PD의 비합리적 부분이란 오늘날 사회주의 혁병의 비현실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반면에 NL의 합리성이란 민족문제에 대한 고민이다. 

  한민족과 미국의 관계에서는 미국의 요구에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자주성을 확대해나가야 한다. 

  PD의 합리적 핵심은 계급과 계층 문제에 대한 고민이다. 자본주의 사회인 이상 자본과 노동 사이의 모순은 필연적이다. 여기에 대해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PD적 문제의식의 표출이다. 또 일터의 노동자만이 아니라, 노동자로 길러지는 양육 및 교육 과정 속의 인력, 일터에서 일시적으로 이탈한 실직자, 경제활동에서 은퇴한 인력에 대해서까지 제대로 배려하는 사회가 되도록 해야 한다. 그게 복지의 확대·강화다. 

  한국사회는 자본과 노동 사이의 모순이라는 원론적 접근만으론 해결할 수 없는 중층적인 모순구조로 신음하고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한편으로 자본 사이 즉 재벌과 중소·중견기업 사이,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 사이 즉 거대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시아에도 심각한 모순구조가 존재하는 것이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성격을 겸비한 수많은 영세자영업자가 과도한 생존경쟁에 내몰리고 있다. 공공부문 노동자의 경우 고용안정성이 높으면서도 그런 점을 제대로 감안하지 않은 높은 임금수준이 유지되는 현실이 사회적 위화감을 증대시킨다. PD적 문제의식의 발전이란 이런 뒤엉킨 모순에 대한 해법을 찾아 실천하는 것이다. 

  급진적 사상들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일제지배나 독재체제로부터 벗어난 뒤에도 과거의 사상들을 그대로 이어갔다는 점이다. 강을 건너는 데 도움을 준 뗏목이 고맙다고, 강을 건너고 나서 뗏목을 짊어지고 가는 것이다. 

  짐에서 해방돼야 한다. 시대착오적이기 때문이다. 다만 NL과 PD의 진보적 사상에는 계승할 부분도 있다. 민족문제와 계급·계층문제에 대한 비판의식이다. 현실에 맞게 응용하되 낡은 사고틀은 과감히 버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