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 않기로 했다. 또 하나의 약속이다._2교_16.7매
아버지가 가출했다. 아버지는 조혈모세포 이식을 받고 감정기복이 심해지셨다. 어머니와의 말다툼도 잦아졌다. 그 날도 으레 하루 한차례씩 있었던 의견다툼인 줄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현관문이 세게 닫히는 소리가 났고, 어머니는 거실에서 울고 계셨다.
“네 아빠 집 나갔다”
5년 전 가을이었다. 자동차 열쇠는 TV 옆에 놓여있었고 까만색 그랜저도 주차장에 그대로 서 있었다. 멀리 가지 못하셨으리라. 집 가까이에 있었지만 졸업하곤 발길이 닿지 않았던 초등학교에 가봤다. 크게 변한 것은 없었다. 텅 빈 운동장 한가운데에 섰다. 그때, 구령대 옆 의자에 털모자를 쓰고 앉아있는 남자가 보였다. 아버지다.
아버지 옆에 가서 앉았다. 더, 살고 싶지 않단다. 미웠다. 아버지가 돼서 아들한테 죽고 싶단다. 한참동안 정적이 흘렀다. 슬쩍 아버지 얼굴을 봤다. 조혈모세포 이식 부작용으로 얼룩덜룩해진 두 볼 위에 눈물이 지나간 흔적이 있었다. 갑자기 목이 먹먹해지고 어깨가 들썩거렸다. 이내 내 볼에도 눈물이 흘렀다. “딸꾹!” 그런데 갑자기 딸꾹질이 났다. 목구멍으로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으며 숨죽여 울다가 딸꾹질을 한 것이다. 그런데 다 큰 21살 사내놈이 울다가 딸꾹질이라니, 갑자기 웃음이 났다.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털 난다”
살고 싶지 않다던 아버지가 농담을 한다. 그리고 울지 말라고, 엄마랑 영배 앞에서는 절대, 울지 말라고 한다. 다 큰 남자 둘이 어린아이처럼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추운 가을과 겨울이 지나갔다. 그리고 2010년 봄, 군대 영장이 나왔다.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춘천으로 향했다. 소양강 처녀가 치마를 흩날리고 서 있는 소양대교를 넘어 102보충대대로 갔다. 행사 진행 장교가 입대 장정들을 행사장 앞쪽으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입대 소감을 말할 장정을 따로 단상 앞으로 불렀다. 손을 들고 단상 앞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마이크를 잡고 딱 두 마디 했다.
“아버지 건강하세요. 나라 잘 지키다가 건강하게 돌아가서 집 잘 지키겠습니다”
박수를 치는 사람들 가운데 아버지가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봤다. 목이 메었다. 22개월 동안 집 생각에 어깨가 들썩거리기도 했지만 그 뿐이었다. 그리고 건강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 머리가 길어져 군인티를 벗을 즈음 다시 백혈병에 걸렸다. 아버지는 다시 머리를 밀어야 했다.
“아들, 아버지 머리 밀어주라”
3년 만에 다시 이발기를 잡고 아버지 머리를 밀었다. 병원을 가려고 집을 나서기 전 아버지는 전화번호 2개가 적힌 쪽지를 주셨다. 이종란 노무사님과 공유정옥 선생님의 번호였다. 그리고 넷이 손을 잡고 기도한 후 병원으로 출발했다. 가족 모두 집에 함께 손을 잡았던 것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2012년 8월 30일, 동생 영배가 군 복무 중에 휴가를 내서 병원으로 왔다. 병원 문에서부터 울고 있었다. 간호사 선생님은 정해진 면회시간이 아니라서 들여보내줄 수 없단다. 전투복을 입고 온 동생을 보자 마음이 흔들렸는지 중환자실 출입문에 카드키를 대고 문을 열어줬다. 동생과 함께 주치의에게 목 인사를 하고 아버지를 보러 들어갔다. 아버지는 인공호흡기를 단 채 자고 있었다. 일주일째다.
“아버지, 나 왔어요, 눈 좀 떠봐요”
영배가 울부짖었다. 주치의는 이젠 수면 약물을 줄여서 깨워도 의식이 없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아버지의 심장이 멈췄다. 심장박동을 표시하는 모니터에는 굴곡 없는 선 하나가 지나갈 뿐이었다.
“누나, 나는 성배차 타고 갈게”
성배차? 까만색 그랜저, 8년간 아버지의 출퇴근길을 함께 했고 우리 가족과 희로애락을 함께 한 아버지차를 막내삼촌이 성배차라고 불렀다. 무심코 던진 그 한마디에 울음이 터졌다. 발인 전날에 조문객을 맞이하다가 쓰러진 엄마를 119 구급대가 데려가서 홀로 빈소를 지킬 때도, 장례식 내내 고모들이 영정사진 앞에서 엉엉 울었을 때도, 불교 집안으로 시집 가 교회에 가 본 지 오래라는 막내이모가 아버지를 위해 무릎을 꿇고 하나님, 예수님하며 기도를 했을 때도, 나는 울지 않았다. 그러나 막내삼촌이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결국 나를 무너뜨렸다. 나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 중후한 자동차가 이제는 내 차란다.
내게는 너무 무거운 그 자동차의 운전대를 잡고 추모의집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희뿌연 연기가 나오는 공장이 보였다. 아버지가 8년간 다니던 직장이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그 공장에 다니는 아버지가 자랑스러웠다. 그 공장 덕분에 아버지는 장학금 한번 받은 적 없는 두 아들의 등록금을 내줄 수 있었다. 직원 할인으로 최신형 벽걸이 TV를 거실과 안방에 각각 한 대씩 장만해 놓을 수 있었다. 팔다리에 기운이 빠지기 전까지 한 달에 20만 원짜리 고급 헬스장을 단돈 1만원에 다닐 수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1년여 만에 그 공장 앞을 다시 찾았다. 반도체 노동자들의 직업병 인정을 위해 법원에 제출할 성명서 서명을 받기 위해서였다. 파란색 목줄을 맨 수많은 노동자가 반올림(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활동가들 앞을 오갔다. 그러나 그 누구도 서명을 해주지는 않았다.
‘아버지, 아버지도 아프기 전에는 반올림과 나 같은 젊은이들을 외면하셨나요?’
회사 아저씨들은 관리직이었던 아버지는 반도체 공정 클린룸에 들어간 적조차 없다며 아버지의 고장 난 몸이 공장 작업환경과는 무관하다고 했다. 아버지는 분명히 현장에 자주 들어갔다고 했는데. 성명서를 받는 날에도 파란 목줄 노동자들은 지독히도 무관심했다. 단지 아버지의 목숨을 앗아간 공장 옆에, 새로운 공장을 짓고 있는 건설 노동자들만 관심을 보였다.
지난 3월 6일에는 황유미 누나의 7주기 추모제가 있었다. 누나는 꽃다운 스물셋에 세상을 떠났지만 살아있었으면 나보다 네 살 누나니까 누나다. 누나는 아버지와 다른 생산라인에서 다른 일을 했다. 하지만 같은 공장에서 일을 했고 같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누나와 아버지, 그리고 떠난 반도체 노동자들을 추모하려 갓 전역한 동생과 함께 강남역 8번 출구로 갔다. 입춘이 이틀이나 지났는데도 칼바람은 매서웠다. 가족 잃은 슬픔 있는 사람, 자본권력에 분노하는 서비스센터 노동자들, 또 하나의 약속 영화 관계자 등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황유미 누나의 아버지 황상기 아저씨가 앞에 나와 마이크를 잡았다. 아저씨는 누나가 왜 아팠는지, 왜 죽을 수밖에 없었는지 밝혀주겠다는 약속을 했단다. 아저씨는 딸과의 약속을 잘 지키고 있다. 나도 아버지랑 약속을 했다. 그리고 약속을 지키면서 싸우고 있다. 근로복지공단에서 내 아버지는 개인적, 유전적으로 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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