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7일 월요일

이방인(1942) 알베르 카뮈

이방인(1942) 알베르 카뮈
1. 뫼르소 탐구
알제리에 사는 평범한 월급쟁이. 어머니 장례식 다음날 해수욕을 하고 여자친구와 함께 밤을 지낸다. 희극영화도 본다. 해변가에서 아라비아인을 총으로 4번 쏴 죽이고 잡힌다(불행의 문을 두드린 네 번의 짧은 소리).
왜 죽인 것일까? 뫼르소는 “육체적 요구가 흔히 감정을 방해하는 성질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감옥에 갇혀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도 있었다. 어머니의 생각도 그랬었다. 어머니는 늘 그랬다. 사람들은 무엇에나 익숙해지는 거라고” 말했다. 감옥에 가두는 것은 자유를 빼앗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내 익숙해져서 다만 시간을 보내는 것이 힘들 뿐이라고 했다.
재판정에서 뫼르소를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그가 가진 특성을 범죄자로 몰아간다. 장례식날 냉정한 뫼르소를 보고 놀랐다는 양로원장이 대표적이다. 재판에서 뫼르소는 완전히 배제됐다. 그에게 다정스러운 태도나 선의를 가질 권리는 없는 것이었다. 그는 ‘모두가 태양 탓’이라는 다소 의아한 자기변론을 했다.
뫼르소는 모든 기성의 가치와 습관에 무관심해져 인생에는 어떠한 의미도 없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은 이미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누구는 사형집행 날짜를 알고, 누구는 모를 뿐이라는 것이다.
뫼르소, 나는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렇게도 오래 전부터 나를 따라다니던 그 소리가 멎을 때가 있었으리라고는 아무리 해도 상상할 수 없었다. 이러다가 신부가 속죄기도를 하자고 했을 때, 묵묵히 듣다가 결국 폭발한다.
“죽음 가까이에서 해방감을 느끼며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마음이 생겼을 것임에 틀림없었다”며 삶에 대한 애착을 다시 가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118p).
뫼르소는 현재의 욕망에 강하게 지배돼 이해타산도 없이 행동에 몰입하는 인간이다. 순진하고 정직한 인간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 1:2-3, 개정). 솔로몬왕이 노년기에 쓴 전도서, 모든 것을 가져본 왕이 모든 것이 헛되다고 고백했다. 다 가져도 정말 내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끝나기 때문에 허전하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카뮈는 허무주의자(니힐리즘*)는 아니다.
“만약 아무 것도 의미를 가진 것이 없다 하더라도, 그것은 옳을 것이다. 그러나 어딘가에 여전히 의미를 가지는 것은 존재한다”
인간은 무관심, 객관, 때때로의 모호함, 그리고 자연적 질서에 의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는, 그러나 예비되고 불안정한 인간의 행동에 의해 창조된 부조리적 세계의 신하라는 실존주의가 자주 취하는 관점을 따르고 있다.
2. 카뮈 탐구(1913~1960)
프랑스의 피에누아르 작가, 저널리스트, 철학자. 아버지는 1차대전에서 사망했고, 어머니는 스페인인으로 문맹이며 청각장애인이다. 스페인을 좋아했고 어머니를 사랑해 공공연하게 알제리 독립 반대의 이유가 어머니의 생활터전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1935년, 맑스주의의 강령에 대한 지지보다는 에스파냐 내전의 원인이 된 스페인의 정치 상황에 대한 관심 때문에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한다. 이후 좀 더 독립적인 성향의 알제리 공산당이 수립되자 카뮈는 알제리 공산당에 가입했고, 이로 인해 트로츠키주의자로 비난을 받으며 1937년 당에서 제명됐다. 그는 공산당의 교조적인 태도를 혐오했다.
이방인에서 뫼르소는 사랑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결혼은 할 거라고 입장을 몇 번이고 밝혔다. 하지만 카뮈 자신은 결혼제도에 대해 극렬히 반대해 몇 차례의 혼외 관계, 불륜을 했다.
카뮈는 반전론자였다. 그리고 독일에 저항했다. 지하에서 신문을 출판하던 레지스탕스 조직 콩바에 가담했다. 후에 이 신문의 편집자가 돼 전투 이후를 보도했다. 1945년 8월 8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에 대한 반대 주장의 논설을 싣기도 했다. 콩바가 상업적인 신문이 되자 1947년 사임했다.
철학자 카뮈.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은 상태, 세계의 의미, 정순함에 대한 우리의 열망의 결과는 부조리를 낳는다. ‘나는 무엇인가’. 이 것도 아니고 저 것도 아니고 그 것도 아니고 그러다 보면 결국 ‘생각하는 나’만 남는다. 노벨 문학상 카뮈. 사형에 반대한 에세이 <단두대에 관한 성찰>로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 인권 운동가 카뮈. 평화주의와 세계 어디에서든 일어나고 있는 사형에 대한 저항을 계속해서 주장했다.
많은 작가들이 개인의 부조리에 대해 정의하고 해석해왔으며, 부조리의 중요성에 관한 그들 나람의 생각에 대해 글을 써왔다. 카뮈는 부조리주의의 창시자가 아니며 부조립주의 철학자로 계속 여겨지는 것을 후회했다. 카뮈는 부조리에 대해 철학적인 설명을 하거나 정의를 내리고 있지 않고, 대신에 부조리의 경험을 투사했다. 이방인은 인간 존재의 삶에 존재하는 부조리에 관한 이야기다.
카뮈는 행복과 슬픔, 어둠과 빛, 삶과 죽음과 같은 이원성에 관해 말했다. 행복이란 무상한 것으로 인간의 상태는 하나의 필멸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분석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우리는 우리의 삶과 존재가 좀 더 위대해지는 데 가치를 둔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언제고 우리가 죽을 것을, 그리고 극단적으로는 우리의 존재가 무의미해 질 것임을 알고 있다. 우리가 이러한 이원성과 함께 사는 한 우리는 우리의 불행한 시기를 받아들일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도한 행복한 경험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동시에 나의 삶은 무가치하다.
*실존주의: 개인의 자유, 책임, 주관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철학적, 문학적 흐름이다. 실존주의에 따르면 각자는 유일하며, 자신의 행동과 운명의 주인이다. 3차례 전쟁(1차, 스페인, 2차)을 겪은 유럽에서는 허무감과 좌절감이 팽배했다. 그 결과 인간의 이성, 역사의 발전, 신의 권능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생겨났다. 허망과 절망이 철학적, 문학적 고찰의 출발점이 됐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절망감을 지성으로 극복하고 논리화하는 과정에서 실존주의 철학이 생겨났다.
우발적이고 허망한 세계에 내던져진 인간은 자신의 자유에 모든 것을 걸고, 이성으로 절망을 인식해야 했다. 이성을 가진 인간과 비합리적인 세계 사이에 있는 모순이 부조리인데, 이것을 논리화하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 긍정하며, 즉 반항하며 허무감을 이겨내고 휴머니즘을 재건하게 된다.
실존주의는 유신론적 실존주의와 무신론적 실존주의 두 가지 형태다. 공통된 사상은 인간에게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는 것, 즉 인간은 주체성으로부터 출발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실존주의는 니힐리즘이 자아를 강조한 나머지 세계를 부정하기에 이르는데 반해, 같은 자아의 실존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어떤 형태로든지 자아와 세계를 연결하려고 노력한다. 즉, 내가 있다고 하는 전제부터 출발해 나를 세계와 연결해 그 전제를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말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하는 논리가 역전되고 어떻게 하면 내가 존재한다고 하는 사실을 먼저 파악할 수 있는가가 추구된다.
*허무주의(니힐리즘): 기성의 가치 체계와 이에 근거를 둔 일체의 권위를 부인하고 음산한 허무(니힐)의 심연을 직시하며 살려는 사상적 입장이다.
우주·인생의 진상을 무(無)에서 보려고 하는 사상은 노장(老莊)의 무위자연(無爲自然) 사상이나 불교의 제행무상(諸行無常) 사상에서도 볼 수 있으나, 자각적인 사상으로서의 본래의 니힐리즘은 19세기 중엽 이후로부터 현대에 걸친 서구 사회의 특유한 사상이다. 곧 서구 근대 시민 사회의 가치체계가 붕괴하고 그 후에 올 장래의 가치에 대해 전망할 수 없는 역사의 위기적 전환기에 있어서 소시민층의 세계관의 반영으로서 성립한 것이다.
시민 사회를 역사적 진보의 완성으로 성화(聖化)시키는 헤겔의 절대정신(絶對精神) 철학은 그리스적 지성과 유대적 신앙의 대담한 절충을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이 강제적인 결혼은 중매자인 헤겔의 죽음과 함께 파탄을 일으켰다. 합리적·실증적 정신의 발달에 의해 그때까지 가치 목적을 한몸에 집중시키고 있던 신에의 신앙이 상실되었을 때, 그 후에 남겨진 적나라한 자연의 실상(實相)은 가치의 껍데기라고 할 수 있는 니힐의 모습을 드러내고 사람들을 무한한 불안과 절망의 심연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헤겔 철학에 반발한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 철학이나 키르케고르의 실존주의 사상에 근대시민들의 생을 잠식하고 있는 니힐한 기분이 짙게 반영되기 시작하였다. 또 헤겔 좌파의 맹장 포이어바흐의 무신론(無神論)을 철저히 밀고 나가 강렬한 에고이즘의 입장을 세운 독일의 '자유파(自由派)' 사상가 슈티르너의 자리를 무(無) 위에 놓음으로써 자기 이외의 어떠한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절대적 자유를 향수하려는 무정부주의적 니힐리즘 철학을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니힐한 시대 풍조는 드디어 러시아의 작가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1861)의 청년 주인공 바자로프에 의해 니힐리스트라는 하나의 인간상으로까지 결정(結晶)되었다. 철저한 과학적 실증주의 입장에서 일체의 기성 질서나 가치의 권위를 부정하는 이 자유주의를 투르게네프가 '니힐리스트'라고 명명한 이래로 니힐리즘이라는 용어가 일반화되었다. 신인(神人) 예수에 대한 소박한 신앙을 거부하고 스스로 인신(人神)의 입장에서 서려고 하는 니힐리스트들의 삶은, 도스토옙스키의 영필(靈筆)에 의해 신을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무서운 인격분열의 절망을 초래하는 것으로서 날카롭게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 사조로서의 니힐리즘의 저류를 철저히 적발하여 이를 명확한 하나의 사상으로 끌어올린 사람은 니체로서, 니체는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지배하고 고귀한 자가 비소(卑小)한 자를 지배하는 것이 본래의 가치 체계라고 하는 권력의지설(權力意志說)의 입장에서 니힐리즘을 분석하여 '수동적(受動的) 니힐리즘'과 '능동적(能動的) 니힐리즘'의 두 유형을 발견한다.
'수동적 니힐리즘'은 약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서 쇠퇴한 니힐의 현실을 직시할 것을 회피하고 찰나적인 향락주의나 무관심한 이기주의 등 퇴폐적 삶에 의해 공허감을 채워보려는 것이다. 여기서 니힐리즘은 잠재적인 형태로 예감될 뿐이며 그 참된 극복은 무한히 연기된다. 이에 대해 소모적인 현실 도피의 삶을 거부하고 니힐의 병근(病根) 한가운데로 적극 개입함으로써 허무의 현실을 초극하려는 것이 '능동적 니힐리즘'이다. 이러한 능동적 니힐리즘의 입장에서 모든 현존하는 가치나 질서가 뽐내는 절대적 권위를 파괴해 갈 때, 거기에 새로운 가치를 자유로이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싹튼다. 우상(偶像)의 가면을 벗기는 이기(利器)로서 무(無)를 내세움으로써 무를 단순한 생의 소모 원리(消耗原理)로부터 생의 적극적인 창조 원리로 전환시켜 나가는 '능동적 니힐리즘'이야말로 니힐리즘의 지배 밑에 있는 현대를 살아가는 당연한 생활 방식이라고 니체는 말한다.
확실히 근대 합리주의의 문화는 여러가지 형태로 '목적과 수단의 가치 전도'를 일으켜서 잠재적인 니힐리즘을 준비하고 있다. 니힐리즘은 이 잠재적 니힐리즘과 성실하게 대결하여 거기에 숨어 있는 우상 숭배적인 태도를 파괴하고 그 폐허 위에 진실한 가치의 탄생을 이룩하려고 한다. 물론 니힐리즘 자체는 환영할 만한 손님은 못되지만 적어도 현실 도피적인 무관심주의나 찰나적인 향락주의보다는 훨씬 진지하고 성실한 생활 태도의 소산인 것이다. 타협을 거부하고 진실하게 살려고 하는 자만이 우상숭배적인 삶의 허망함에 절망할 수 있는 것이다. 허무를 우러르고 허무의 노예가 되는 것보다는 허무를 허무로서 직시하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키에르케고르도 역설한 것처럼 현실의 삶이 허무에 잠식되고 있을 때, 이러한 삶에 대해 절망하지 못한다는 것은 구원할 수 없는 중증(重症)의 절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니힐리즘은 거기에 안주할 서식처는 아니지만, 진실한 삶에 도달하기 위하여 경과해야 할 현대인의 필수적인 운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인생의 전체적 목표와 그 목표 달성을 위한 온갖 부분적 수단의 본말관계(本末關係)를 전도하는 것이 잠재적 니힐리즘의 참된 원인이다. 이러한 가치전도를 바로잡으려는 것이 '생의 철학'이다. 생의 철학에서는 인생을 위한 합리(合理)이지, 합리를 위한 인생이 아니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생의 철학의 주장을 한 걸음 더 진전시켜, 니힐한 현실을 스스로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결단에 의해 허무의 심연을 초극하려는 것이 실존주의이다.
이러한 가치전도를 바로 잡으려는 것이 '생의 철학'이다. 생의 철학에서는 인생을 위한 합리(合理)이지, 합리를 위한 인생이 아니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생의 철학의 주장을 한 걸음 더 진전시켜, 니힐한 현실을 스스로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결단에 의해 허무의 심연을 초극하려는 것이 실존주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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