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우와 유방의 대결
진시황의 진제국은 천하통일 후 불과 15년만에 막을 내렸다.
초한전쟁(BC206~BC202)은 항우와 유방이 3년에 걸쳐 한 싸움이다.
☆초반에 우세했던 항우가 패배한 이유?
첫째,유방은 우세한 항우 군대에 대항하여 포위망을 만든 전략전술의 승리다.
둘째,유방의 모략공작으로 항우의 군사들을 이간질하여 군신간의 신뢰를 무너뜨렸다.
셋째,유방의 군대는 물자가 원활히 보급되었다.
넷째,유능한 인재가 있었다.
장량의 전략전술,
소하의 군량조달과 보급로 확보,
한신의 지휘능력...
☆유방이 부하를 다스리는 특징
첫째,부하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고,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어떠냐,어떻게 하지(하여-何如)?"
둘째,공적을 세우면 그에 합당한 보상을 내렸다.
☆항우는 대조적이었다.
유방은 패현출신의 백수건달이고,
항우는 귀족 출신이다.
자신의 능력에 자부심이 컸다.
초반에 싸움에 연승을 올렸으며 게다가 20대로 젊었다.
훌륭한 참모 범증 등 부하의 의견을 무시하고 항상 독단적으로 행동했다.
더욱이 전리품이 생기면 혼자서 차지했다.
유방이 조직의 힘을 잘 활용했으나 항우는 그러지 못했다.
후일을 도모하지 않고 "해하전투"에 패해 31세의 나이에 자결을 했다.
항우와 유방에 대한 글 모음
☆항우와 유방 - 어떻게 사람을 얻는가?
http://me2.do/5ujf347u
☆유방과 항우
http://me2.do/GTLHB3rc
유방과 항우
劉邦和項羽
진승과 오광의 봉기가 일어나자 각지의 백성들이 호응해 봉기를
일으켰다. 농민 봉기의 폭풍은 단번에 중국 전역을 휩쓸었다. 남방 회계군에서도 강대한 농민 봉기가 일어났는데 주동자는 항량(項梁)과 그의 조카
항우(項羽)였다. 항량은 초나라 대장군 항연의 아들이었다. 아버지 향연은 진나라 대장 왕전이 초나라를 멸망시킬 때 싸움에서 패하고 자살했는데,
항량은 이 원수를 갚고 초나라를 재건하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조카 항우는 몸이 웅장하고 힘이 장사였으며 항량을 따라다니며 많은 무예를
배웠다.
항량은 원래 하상(下相, 강소성 숙천현 남부) 사람인데 남과 원수진 일이 있어서 회계군 오중(吳中)으로 피신해 있었다. 항량은 문무를
겸비하였기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그를 형님으로 대접하며 따랐고, 그는 병법과 무예를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 이때 진승이 봉기를 일으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항량은 위훈을 세울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젊은이들을 데리고 관가로 쳐들어가 군수를 죽이고 회계군을 점령했다. 그리고 며칠 만에
8천 명이나 되는 봉기군을 조직했다. 이 봉기군은 그곳의 젊은이들로 구성되었기에 ‘자제병(子弟兵)’이라고 불렸다. 항량과 항우는 8천 자제병을
거느리고 장강을 넘어 광릉군(廣陵郡, 강소성 양주시)을 점령하고 이어서 회하를 건너 북으로 전진했다. 도중에 각지의 봉기군들이 찾아와 항량의
군대에 가담했다. 이듬해에 유방(劉邦)도 1백여 명의 봉기군을 데리고 항량의 군대에 가담했다.
유방
유방은 패현(沛縣, 강소성 패현) 사람인데 진나라 때 정장(亭長)이라는 작은 벼슬을 지냈다. 열 개의 리가 한 정(亭)이었으니, 정장은 열
개의 리를 관할하는 관리였다. 그런데 어느 날 유방에게, 여산(驪山)으로 갈 민부들을 압송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민부들을 압송하여 여산으로
향하는데 도중에 매일 몇 명씩 도망을 쳤다. 유방은 막을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여산에 도착하면 그 책임을 져야만 했고, 엄격한 진나라
법에 의하면 살 가망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방은 민부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여산에 가면 매를 맞아 죽지 않으면 일에 지쳐서 죽고 말
것이다. 가령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고 해도 언제 집으로 돌아갈지 아무도 모른다. 지금 너희를 다 놓아주겠으니 각자 제 살길을
찾아가라.”
민부들은 모두 유방에게 감사를 드렸다. 그리고 수십 명은 유방을 따라가겠다고 나섰다. 유방은 그들을 데리고 망탕산(芒碭山)으로 들어가
숨었다. 패현 현청의 아전인 소하(蕭何)와 옥지기인 조삼(曹參)은 유방의 인품이 좋다는 것을 알고 일찍부터 친분을 맺었으며 왕래가 잦았다.
진승이 진현을 점령하자 소하와 백성들은 패현 현령을 죽이고 사람을 망탕산에 보내어 유방을 데려왔다. 사람들은 유방을 패현의 수령으로
올려놓았으며, 그를 ‘패공(沛公)’이라고 불렀다. 얼마 지나 장량(張良)도 유방을 찾아와 대오에 가담했다.
사수정(泗水亭)
지금의 강소성 패현(沛縣)에 있다. 『패현지』에 따르면 유방은 사수의 정장을 지냈다고 한다.
지금의 강소성 패현(沛縣)에 있다. 『패현지』에 따르면 유방은 사수의 정장을 지냈다고 한다.
항량은 유방을 인재라고 여기어 그에게 군사를 나누어주었다. 이렇게 해서 유방은 항량의 수하가 되었다. 이때 각지 봉기군의 영도권은 모두
전국시대 6국의 귀족들 손에 들어갔다. 그들은 자기의 기반을 닦느라고 끊임없이 서로 공격했다. 진나라 대장 장한(章邯)과 이유(李由)는 이
기회를 타서 봉기군을 각개 격파하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항량은 설성(薛城)에서 봉기군을 재정돈했으며, 호소력을 높이기 위해 모사
범증(範增)의 말을 좇아 회왕의 손자를 초나라 왕으로 세웠다. 초나라 사람들은 전국시대 말기에 초나라 회왕이 진나라의 꾀임에 빠져 진나라로
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죽은 일에 여전히 분개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회왕의 손자를 그냥 회왕이라고 불렀다.
☆항우와 유방의 전쟁
http://me2.do/x5A3EoEs
항우와 유방의 전쟁
초한전-楚漢戰
"강을 등지고 진을 치는 배수진 또한 병법에 있는 것이오. 여러분들이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오. 병법에는 죽을 곳에 빠뜨린 뒤라야
비로소 살게 할 수 있고, 망할 곳에 둔 뒤라야 비로소 멸망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 있지 않소? 또 내가 평소부터 사대부를 길들여 따르게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고, 시장 바닥에 있는 사람들을 몰아다가 싸우게 한 것과 같소. 이런 형국이므로 이들을 죽을 땅에 두어 저마다 자신을 위하여
싸우게 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곳을 준다면 모두 달아날 것이데, 어떻게 이들을 쓸 수 있겠소?"1)
-한신, 『사기』 「회음후열전」 중에서
-한신, 『사기』 「회음후열전」 중에서
중국 역사를 들여다보면 매우 두드러진 특징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중국사가 '통일→분열→재통일→재분열'을 수없이 되풀이해 온
역사라는 것이다. 현대 중국조차도 국민당과 공산당 간 내전, 즉 공산당의 '통일 전쟁'에 의해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중국 공산당
정부가 대만문제나 티베트·위구르의 독립운동, 한반도 통일 이후 만주(동북3성) 정세의 급격한 변화에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도, 역사가
그들에게 중국에서 '통일국가'를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이었던 진(秦)은 춘추전국시대의 '분열'을 통과해서 탄생했지만, 20년도 채 못 되어 진시황의 아들인 제2대
황제 호해에 이르러 무너졌다. 진(秦) 제국이 무너지면서 중국은
다시 '분열의 늪'에 빠지게 되었다. 이 분열의 늪을 건너 탄생한 제국은 유방이 세운 한(漢)나라이다. 그러나 유방은 '역발산 기개세'의 영웅 항우와 초한전(楚漢戰)이라는 전대미문의 대전쟁을 치러야 했다.
초한전(楚漢戰)은 진(秦)이 세운 제국을 양분한 항우와 유방, 두 진영이 치른 전쟁이었던 만큼 그 규모와 양상이 예전 전쟁과는 사뭇
달랐다.
예전에는 천자 대 제후국, 제후국 대 제후국, 제후국 연합 대 제후국, 제후국 연합 대 제후국 연합의 형태로 전쟁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중국
전체가 전쟁에 휩싸이지는 않았다. 진시황도 제후국들을 각개 격파하거나 혹은 제후국 연합을 상대로 통일 전쟁을 벌였으므로, 중국의 전 영토가
동시에 전쟁 상태에 있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초(楚)나라 왕 항우와 한(漢)나라 왕 유방이 겨룬 초한전(楚漢戰)은 진시황이 세운 진(秦)
제국을 양분한 상태에서 '통일전쟁'을 치렀기 때문에 당시 전 영토가 전쟁의 참화에 휩싸였다고 할 수 있다.
한신(韓信)
중국 역사에 등장했던 숱한 통일 전쟁 가운데 일반인들에게 가장 드라마틱하게 다가오는 전쟁은 한(漢) 제국 멸망 이후 유비의 촉(蜀)나라와 조조의 위(魏)나라 그리고 손권의 오(吳)나라가 천하 대권의 향방을 두고 치열하게 다툰
'삼국 전쟁'일 것이다. 그 인기의 비결은 단연 소설 『삼국지』(나관중의 『삼국지연의』) 때문이다. 이들 삼국의 통일 전쟁
못지않게 드라마틱한 또 다른 통일 전쟁을 꼽으라면 필자는 단연코 초나라 항우와 한나라 유방이 겨룬 초한전(楚漢戰)을
추천하겠다.
이 초한전(楚漢戰)은 불세출의 영웅인 '역발산기개세(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뒤덮다)'의 항우, 시정잡배에서 천하의 주인인 황제의
지위에까지 오른 수수께끼 같은 인물 유방, 여황제(女皇帝)나 다름없는 권력을 휘두르며 한나라 창업의 일등공신 역할을 한 유방의 처 여태후, '바짓가랑이 고사'의 주인공에서 백만 대군을 호령하는
대장군이 된 한신, '패왕별희'로 널리 알려진 항우와 우미인의 비극적 사랑 등 인기 드라마적 요소를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초한전의 두 주인공인 항우와 유방은 모든 면에서 극과 극의 대조를 이루고 있는 인물이다. 먼저 항우는 초(楚)나라의 명문 장군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초(楚)나라를 호령한 명장들을 배출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명문 장군 집안의 자식답게 "글을 배워보았자 자신의 이름
석자를 쓸 때나 도움이 될 뿐이고, 검술을 익혀도 사람 한 명을 상대할 수 있을 뿐이다. 만인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을 배우고 싶다"2)는 원대한 포부를 품고
있었다. 반면 유방은 보잘것없는 집안 출신으로 시정잡배나 다름없는 젊은 시절을 보냈다. 부모의 이름조차 확실하게 전해오는 것이 없고, 유방도
황제가 된 이후에 비로소 붙여진 이름이다.
또 항우는 '역발산기개세'의 천하장사답게 대장부의 풍모를 지녔고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카리스마를 갖추고 있었지만, 타고난 성격이 의심이
많고 도량이 좁아 아랫사람들을 잘 다루지 못했다. 반면 유방은 특별한 재주도 없고 인물도 뛰어난 편이 못되었지만 스스로 평가하는 것처럼 사람을
다루는 재주가 남달랐다. 유방이 항우와 자신을 평가하면서 두 사람의 운명을 가른 가장 큰 요인이 바로 사람을 다루는 재주와 능력에 있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자신이 지닌 장점을 명확히 이해하고 천하를 얻는 데 이를 적극 활용했으리라는 걸 쉽게 짐작해볼 수 있다. 남다른 재주와 능력을
지니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명확하게 깨닫고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이 중국 역사상 최초의 평민 출신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그만의 에너지였을
것이다.
초한전(楚漢戰)이 진행되는 양상과 전개과정을 볼 때, 유방이 중국의 주인이 된 것은 정말 수수께끼 같은 일대 사건이었다. 유방은 결코
항우와 대적할 수 없었던 인물이었다. 실제 유방은 항우와 싸우는 족족 참패했다. 그런데 유방에게는 불행 중 다행히도, 항우는 사람들을 다루는
재주만 형편없었을 뿐만 아니라, 도대체 정치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아니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는 인물이었다. 좀 혹독하게 말하면 항우는 '정치적
무뇌아'였다. 이런 유형의 인물은 '전투에서는 백 번 싸워 백 번 모두 이길 수 있는 재주와 능력을 지녔지만 전쟁을 승리로 이끌 재주와 능력'은
도대체 없는 것이다.
반면 유방은 사람을 다루는 재주와 능력도 출중했지만, 권력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본 마음을 숨기고 몸을 낮출 줄 아는 정치적
교활함과 '토사구팽의 고사'가 증명해 보이듯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손발 노릇을 해온 측근이라도 가차 없이 제거하는 정치적 잔인성을 함께
갖추고 있던 인물이었다. 유방은 마키아벨리가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해 군주에게 반드시
필요하다고 한 덕목(?), 즉 '여우의 교활함과 사자의 잔인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인물이었다고 하겠다. 이런 유형의 인물은 평소에는 납작
엎드려 있다가도 기회가 찾아오면 절대로 놓치지 않는 인간으로서, '전투에서는 백 번 싸워 백 번 모두 져도 전쟁을 승리로 이끌 재주와 능력'을
갖추고 있다. 앞으로 자세하게 나오겠지만, 항우와 유방이 보여준 이러한 차이가 한신에 대한 두 사람의 '판단과 입장'이 그토록 확연하게 달랐던
이유를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항우가 얼마나 정치적으로 무뇌아였고 반면에 유방이 얼마나 정치적으로 치밀하고 교활했던가는 진(秦)제국을 멸망시킨 후 그들이 보여준 국가
설계도(국가 건설 전략)를 보면 알 수 있다.
한(漢)나라 고조(高祖) 유방
항우는 진(秦)제국을 결정적으로 무너뜨린 '거록 전투'의 승리 이후 스스로 서초패왕에 올랐다. 그리고 (마치 황제가 된 것처럼) 19명의
제후왕들을 봉했다. 유방도 이때 항우에 의해 남정을 수도로 하는 한중 땅을 분봉 받아 한(漢)왕이 되었다. 항우는 예전의 주(周)왕조가 그랬듯
당시 중국 천하를 자신이 세운 서초(西楚) 왕국의 통치 밑에 두고자 했다. 그가 조금이라도 정치적 식견이 있었다면 진시황이 왜 주나라와
춘추전국시대의 분봉제와 제후제도를 없애고 황제 중심의 중앙집권제와 군현제를 실시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고, 천하의 권력이 자신의 수중에
들어온 바로 그 시점에 진시황의 설계도에 따라 국가체제를 정비했어야 했다.
그런데 오히려 그는 과거 춘추전국시대의 질서, 즉 패왕의 정치(제후의 우두머리가 시행한 정치)로 돌아가는 참으로 어리석은 짓을 했다.
항우는 천하의 주인이 되어 모든 제후왕들 위에 군림하고자 했으나, 제후왕들은 과거 춘추전국시대의 제후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봉해진 영토에
대해서는 하나의 독립국가로 이해했다. 또한 항우는 춘추전국시대처럼 제후왕들의 상호간 영토전쟁과 반란을 피할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실제 항우가
19개의 왕국을 봉하자마자, 제후의 자리를 둘러싼 '분열과 반란'의 조짐이 곳곳에서 발생했다. 결국 항우는 자신의 권력과 권위를 지키기 위해,
제후국의 분열과 반란행위를 토벌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 토벌 전쟁은 악수(惡手)가 되어, 항우의 군대를 지치고 힘들게 했을 뿐 아니라 유방에게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이 모든 위기 상황은 정치적 무뇌아였던 항우가 자초한 것이었다.
반면 유방은 치밀하고 교활한 만큼 또한 민첩했다. 그는 항우가 스스로 불러들인 위기 상황을 십분 활용했다. 즉 항우가 귀족들의 반란에 대한
'토벌 전쟁'을 벌이느라 동분서주하고 있을 때 재빨리 관중지역을 되찾고, 항우가 봉한 몇몇 제후 왕들을 제거하고 그 영토를 점령해버렸다. 그후
유방은 장량·진평과 같은 참모의 계략과 한신·팽월·경포와 같은 명장들의
도움으로 마침내 항우를 제압하고 '통일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그리고 권력이 확실히 자신의 수중에 들어오자, 진시황이 실시한 군현제에 따라
직할 영토는 군으로 나누어 중앙에서 임명한 지방장관을 보내 통치했다. 또한 제후왕에 봉한 통일전쟁의 일등 공신 7명 중 장사왕 오예를 제외한 6명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자신의 아들들을 대신
앉혔다. 한(漢)나라 왕실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체제를 확고하게 다져나간 것이다.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권력을 얻게 되자 유방은 항우와는 전혀
다르게 주나라와 춘추전국시대의 국가 질서가 아닌 진시황이 세운 국가 질서에 따라 국가 설계 전략을 짜 나갔던 것이다.
그건 그렇고, 초한전에서 패배한 항우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항우는 '패왕별희의 고사'처럼 '역발산기개세'의 힘과 포부를 가졌음에도
자신이 사랑한 한 여인조차 지키지 못한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며 자신이 평생 사랑했던 오직 한 여인 우희(우미인)와 함께 오강(烏江)에서 자결하고
만다. 『사기』 「항우본기」에는 모든 것을 다 잃고 오강까지 쫓겨온 항우에게 '강을 건너 후일을 도모하라'는 촌로의 충언과 함께 항우의 대답이
기록되어 있다. 그 대답은 항우가 죽음을 앞에 두고 남긴 마지막 말 가운데 하나인데, 그가 지닌 '영웅의 기개'를 충분히 전달하고도
남는다.
거록(鉅鹿) 전투
항우가 진(秦)나라의 정예부대 50여만 명을 무너뜨린 전투이다. 항우는 이 전투에서 진나라 군대를 하루 만에 아홉 차례 공격하여 모두
승리했다. 진나라에 저항하여 봉기한 저항 세력들이 승리의 기세를 장악한 중요한 전투였다. 이 전투의 패배로 진나라는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반면 항우는 각지에서 봉기한 군웅들을 제압하고 저항 세력의 수장(首將)으로 급부상했다.
『사기(史記)』 「항우본기」
사마천은 항우를 본기(本紀)에 넣어 황제 대우를 했다.
사마천은 항우를 본기(本紀)에 넣어 황제 대우를 했다.
"나는 몸소 강동 자제 8,000명을 이끌고 장강을 건너 서쪽을 정벌했는데 지금 단 한 사람도 남지 않았다. 강동의 원로들이 여전히 나를
아껴 아무 원망도 하지 않고 왕으로 모신다 해도 내가 무슨 낯으로 그들을 볼 것인가."3)
항우가 귀족들의 반란을 토벌하느라 동분서주하고 있을 때, 유방은 좀 나쁘게 말하면 항우의 공백을 노려 '쥐새끼' 마냥 다른 제후왕들의
영토를 야금야금 먹어 치우고 있었다. 그리고 내친 김에 항우의 수도 팽성까지 공격하여 함락시켰다가, 항우의 뒤늦은 반격에 백 번 싸워 백 번
모두 졌다. 그런 유방이 어떻게 항우를 일거에 제압할 수 있었을까? 그 해답은 유방에게 있지 않았다. 그것은 한신에게 있었다.
항우
項羽
요약 중국 진(秦)나라 말기에 유방(劉邦)과 진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차지하기
위해 다툰 무장. 진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봉기하여 진군을 도처에서 무찌르고 관중으로 들어갔다. 진을 멸망시킨 뒤 서초 패왕이라 칭했으나 해하에서
한왕 유방에게 패배하자 자살했다.
- 출생-사망
- BC 232 ~ BC 202
- 본명
- 적
- 국적
- 중국 진
- 활동분야
- 군사, 정치
- 출생지
- 중국 임회군 하상현
- 주요업적
- 진나라 멸망
이름은 적(籍), 우(羽)는 자이다. 임회군 하상현(臨淮郡 下相縣, 현재는 江蘇省) 출생.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 항우에 관한 기록이 전한다. 항우의
할아버지는 항연(項燕)이라는 사람으로 초나라 대장군을 지내 인물이며, 진나라와 전투에서 패해 자결하였다. 항우가 태어난 시기는 전국시대였으며
그가 장성하였을 때는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고 이후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였다.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서 부모를 잃고 삼촌 항량(項梁)에게 맡겨져 가난하게 자랐다. 젊은 시절 키가
8척에 이르렀고 큰 솥을 들어올릴 정도로 힘이 장사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문자는 제 이름을 쓸 줄 알면 충분하고, 검술이란 1인을
상대할 뿐인 하찮은 것'이라 하여 공부를 하지않았는데 오로지 병법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항우는 이미 검술과 전투에 능했으며
각종 병장기를 잘 다루었다고 전한다. 삼촌 항량이 살인을 저질러 가족 모두가 회계(會稽, 현재의 쑤저우 蘇州)로 달아나 그곳에 정착하였다. 마침
회계군으로 행차하는 진나라 시황제의 성대한 행렬을 보고 '내가 저 녀석을 물리치고 황제
자리를 대신해 줄 테다'라고 호언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진나라에 반발하여 전국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나고 있었는데 그중 BC 209년 진승(陳勝)·오광(吳廣)의 난으로 진나라가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항우도 숙부 항량(項梁)과 함께 봉기하여 회계군 태수를 참살하고
인수(印綬)를 빼앗은 것을 비롯하여 진나라 병사를 휘하에 모아 세력을 형성하였다. 항량과 항우가 거병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도처에서 호걸들이
모여들었다. 진승과 오광이 내부 반란자에게 피살되자 더욱 세력이 확장되었고 책사
범증(范增)의 건의로 초나라 왕족 웅심(熊心:초나라 회왕의
손자)을 추대하여 봉기의 명분과 민심을 얻게되었다. 항량이 진나라와 전투에서 사망하고 진나라 장수 장한의 공격으로 진승, 오광 등이 차례로 죽자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초나라 송의가
최고 사령관을 맡아 지휘하였지만 진군하지 않자 항우는 송의를 죽이고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항우는 거록의 전투에서 앞장서 진나라 장한의 군사를 격파하고, 진나라 정예병을 패퇴시켰다. 항우는
거록의 전투에서 대대적인 승리를 거두며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보여주며 가장 강력하고 유력한 인물로 떠오르게 되었다. 항우는 연전연승을
거두며 동쪽 성문인 함곡관[函谷關]을 넘어 관중(關中, 현재 산시성 위수)으로 쳐들어갔다. 항우는 진나라 시황제의 무덤을 파괴하며 황궁을 약탈하였고 이것으로
진나라는 멸망하였다.
하지만 항우에 앞서 관중에 들어와 있던 유방(劉邦) 군사의 저항을 받았지만 함곡관에서 이를 물리치고
관중으로 진격했다. 하지만 홍문(鴻門)에서 유방을 만나 그의 사죄를 받고 오히려 그의 계략에 속아
놓아주고 말았다. 항우는 유방을 가소롭게 여기고 진나라 왕 자영(子拏)을 죽이고 도성
함양(咸陽)을 불사른 뒤에 팽성(彭城:徐州)에 도읍하여 스스로 서초(西楚)의 패왕(覇王)이라 칭하였다. 그리고 진나라 멸망을 위해 함께 싸운
장수들의 공로에 따라 분봉하여 18명의 제후를 임명하였다. 이때 유방에게 한중땅을 주고 한왕(漢王)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항우를 따라 전투에서 공훈을 세우고도 봉토를 받지 못한 장수들의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항우의 실패 원인은 자신의 최대 정적이었던 유방을 가소롭게 생각하였고 휘하의 제후들에게 봉토를
나누어주면서 공정하게 처리하지 못했다. 이때문에 항우 진영에서 이탈하는 부하들이 생겨나고 이들을 통솔하지 못하여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항우는 유방과 중국 천하를 두고 경쟁하였는데 팽성전투에서 고작 5만
명의 군사로 56만 명의 유방 군사를 무찔렀다. 하지만 수하의 장수들이 항우의 노여움을
두려한 나머지 한왕 유방에게 투항하는 일이 생겼고 유방은 주변 세력을 연합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이때문에 항우는
점점 고립되기 시작했다. 적과의 전투에서 단 한번도 패하지 않았지만 그의 마지막 전투인 해하(垓下, 해하의 결전)에서 한왕(漢王) 유방과 명장 한신(韓信)에게 포위되어 자살하였다. 이때 그가 사랑했던 여인
우희(虞姬)와 헤어지는 모습을 두고 패왕별희(覇王別姬)라는 고사가 전해진다. 항우를 두고 후대의 사람들은 항우는 병법에 뛰어나고 힘이 장사였지만
정치적으로는 미숙한 인물로 평가하였다.
☆항우
http://me2.do/xr83R7nu
장기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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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과 경영자가 유방과 항우로부터 배워야 할 점은 전략전술,용병술,성과보상,겸손,경청,인내심 등으로 유방은 창업까지는 성공적인 경영자라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대국 창업의 아버지 유방의 리더십을 배우겠습니다. 오늘도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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