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 않기로 했다. 또 하나의 약속이다.
아빠가 가출했다. 5년 전 가을이었다. 자동차 열쇠는 TV 옆에 놓여있었고 까만색 그랜저도 주차장에 그대로 서 있었다. 멀리 가지 못하셨으리라. 빠른 걸음으로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집 가까이에 있었지만 졸업하곤 발길이 닿지 않았던 초등학교에 가봤다. 크게 변한 것은 없었다. ‘사랑과 지혜로 꿈을 키우는 어린이’, 구령대 위에 쓰여 있는 표어도 그대로였다. 텅 빈 운동장 한가운데에 섰다. 내가 커진 건지 운동장이 작아진 건지 넓디넓었던 운동장이 좁아진 느낌이다. 그때 구령대 옆 의자에 앉아있는 컸지만 작아진 한 남자가 내 시야에 들어왔다. 반질반질한 머리를 가리기 위해 털모자를 쓰고 있는 내 아빠가.
운동장 가장자리를 돌아 아빠 옆에 가서 앉았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단다. 미웠다. 아빠가 돼서 아들한테 죽고 싶단다. 한참동안 정적이 흘렀다. 슬쩍 아빠 얼굴을 봤다. 두 볼에 눈물자국이 있었다. 갑자기 목이 먹먹해지고 어깨가 들썩거렸다. 이내 내 볼에도 눈물이 흘렀다. “딸꾹!” 그런데 갑자기 딸꾹질이 났다. 목구멍으로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으며 숨죽여 울다가 딸꾹질을 한 것이다. 그런데 다 큰 21살 사내놈이 울다가 딸꾹질이라니, 갑자기 웃음이 났다.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털 난다” 살고 싶지 않다던 아빠가 농담을 했다. 그리고 울지 말라고, 엄마랑 영배 앞에서는 절대, 울지 말라고 했다. 다 큰 남자 둘이 어린아이처럼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아빠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추운 겨울도 지나갔다. 다시 싹이 트기 시작하던 2010년 봄, 아빠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춘천으로 갔다. 소양강 처녀가 치마를 흩날리고 서 있는 소양대교를 넘어 102보충대대로 갔다. 국가가 나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사단 군악대의 입대 축하 공연이 끝나고 행사 진행 장교가 입대 장정들은 행사장 앞쪽으로 나오라고 했다. 진행 장교는 입대 소감에 대해 말할 장정은 손을 들라고 했다. 손을 들고 단상 위로 뛰어 올라갔다. 마이크를 잡고 딱 두 마디 했다. “아버지 건강하세요. 나라 잘 지키다가 건강하게 돌아가서 집 잘 지키겠습니다” 박수를 치는 사람들 가운데 아빠가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봤다. 목이 메었다. 22개월 동안 집 생각에 어깨가 들썩거리기도 했지만 그 뿐이었다. 그리고 건강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아빠는 내 머리가 길어져 군인티를 벗을 즈음 다시 머리를 밀어야 했다. “아들, 아빠 머리 밀어주라” 3년 만에 다시 이발기를 잡고 아빠 머리를 밀었다. 집을 나서기 전 아빠는 전화번호 2개가 적힌 쪽지를 주셨다. 이종란 노무사와 공유정옥 의사의 번호였다. 그때는 그 번호가 뭔지 잘 몰랐다. 넷이 손을 잡고 기도한 후 집을 나섰고 가족 모두 집에 함께 있었던 적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태풍 볼라벤이 한반도를 휘몰아쳤던 2012년 8월 30일, 빗속을 뚫고 영배가 병원으로 왔다. 나라 지키는 군인이 운다. 간호사 선생님은 정해진 면회시간이 아니라서 들여보내줄 수 없단다. 전투복을 입고 온 동생을 보자 마음이 흔들렸는지 중환자실 출입문에 카드키를 대고 문을 열어줬다. 동생과 함께 주치의에게 목 인사를 하고 아빠를 보러 들어갔다. 아빠는 인공호흡기를 달고 자고 있었다. 일주일째다. “아빠, 나 왔어요, 눈 좀 떠봐요” 영배가 울부짖었다. 주치의가 이제는 수면 약물을 줄여서 깨워도 의식이 없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볼라벤이 소멸된 새벽, 아빠의 심장도 멈췄다. 인공호흡기 때문에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 하기는 했지만 심장박동을 표시하는 모니터에는 굴곡 없는 선 하나가 지나갈 뿐이었다.
“누나, 나는 성배차 타고 갈게” 성배차? 장례식 내내 아빠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울음을 꾹 참고 있었다. 조문객을 맞이하다가 쓰러진 엄마를 119 구급대가 데려가서 홀로 남아 빈소를 지켰을 때도, 고모들이 영정사진 앞에서 엉엉 울며 나를 붙잡아도, 불교집안으로 시집가 교회에 가본지 오래라는 막내이모가 아빠를 위해 무릎을 꿇고 하나님, 예수님하며 기도를 해도 꾹 참았다. 그러나 막내삼촌이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결국 나를 무너뜨렸다. 까만색 그랜저, 8년간 아빠의 출퇴근길을 함께 했고 우리 가족과 희로애락을 함께 한 아빠차를 막내삼촌이 성배차라고 불렀다. 나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 중후한 자동차가 이제는 내 차란다. 내게는 너무 무거운 그 자동차의 운전대를 잡고 집에 오는 내내 소리 없이 울었다.
추모의집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희뿌연 연기가 나오는 공장이 보였다. 아빠가 8년간 다니던 직장이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그 공장에 다니는 아빠가 자랑스러웠다. 그 공장 덕분에 아빠는 장학금 한번 받은 적 없는 두 아들의 등록금을 내줄 수 있었다. 직원 할인으로 최신형 벽걸이 TV를 거실과 안방에 각각 한 대씩 장만해 놓을 수 있었다. 팔다리에 기운이 빠지기 전까지 한 달에 20만 원짜리 고급 헬스장을 단돈 1만원에 다닐 수 있었다. 애증의 그 공장 앞을 아빠 없는 하늘 아래에서 산지 1년여 만에 다시 찾았다. 반도체 노동자들의 직업병 인정을 위해 법원에 제출할 성명서 서명을 받기 위해서였다. 파란색 목줄을 맨 노동자들이 내 앞을 오갔지만 그 누구도 서명을 해주지 않았다. 단지 아빠의 목숨을 앗아간 공장 옆에 새로운 공장을 짓고 있는 건설 노동자들만이 관심을 가질 뿐이었다. 속으로 울었다.
지난 3월 6일은 고 황유미 누나의 7주기 추모제가 있었던 날이다. 갓 전역한 동생과 함께 퇴근길 만원버스를 타고 강남역 8번 출구로 갔다. 입춘이 이틀이나 지났는데도 거대한 빌딩이 만들어내는 칼바람은 매서웠다. 가족 잃은 슬픔 있는 사람, 자본권력에 분노하는 서비스센터 노동자들, 또 하나의 약속 영화 관계자 등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황유미 누나의 아버지 황상기 아저씨가 앞에 나와 마이크를 잡았다. 아저씨는 누나가 왜 아팠는지, 왜 죽을 수밖에 없었는지 밝혀주겠다는 약속을 했단다. 아저씨는 딸과의 약속을 잘 지키고 있다. 나도 아빠랑 약속을 했다. 부녀간의 약속과는 다른 부자간의 또 하나의 약속을. 아빠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그날 이후에는 울지 않았다. 오늘도 내일도 가슴 속에서 눈물이 삭는다.
글을 보면 각 장면이 압축되어 있다.
답글삭제바꾸어 말해,
머리를 미는 장면이 있는데 항암제의 부작용으로 머리가 빠져 아들이 머리를 깎아주는 과정에 항암치료의 부작용과 고통을 독자들과 공유해야 하는데...메시지 전달에 보완이 필요하고...
등장 장면이 너무 많아 기승전결의 핵심이 흐트러졌고...
생로병사의 인생에서 테마를 부자간의 정,또는 투병생활의 고통과 애환,또는 삼성전자 희생자나 환우들의 고통을 알리는 것.,.
어떤 것이 Main인지 너무 산만하고 독자들의 수준은 전문가가 아니고 아주 펑범하고 쉬운 말과 상황으로 끌고가야지...
손성배가정사를 다른 사람들이 알 필요가 없고,
손성배의 가정사를 상황으로 일반인들이 동의하거나 감동받을 애환을 전달할 수 있어야...
참고가 되는지 모르겠다만,
독자의 수준,요구에 맞추어 글을 써야 한다.
독자의 필요는
답글삭제감동이나 재미,
사회고발,또는 Whistle Blower,양심고백은 일반 대중의 호응을 얻기가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