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문 사설 - 편집 읽기의 열쇠
어느 신문도 독자들에게 단순한 객관적 보도나 광고 전달 기능에만 머물고 있지는 않다. 독자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칠 사건이 일어났다고 가정해보자. 현장 사실을 최대한 객관적 시각으로 취재해 기사화하고 이를 1면 머리기사로 다듬어 편집하게 된다. 동시에 그 사실과 관련한 분석이나 해설기사는 3면 종합 해설면의 머리기사로 편집한다. 기사는 기자 자신의 주관은 최대한 절제해 작성하는 것을 미덕으로 하고 있다. 신문이란 그 자체가 공적 매체이므로 취재에서 편집까지 기자 자신의 주관이 무분별하게 드러나는 것은 설득력도 떨어질뿐더러 바람직하지도 않다.
엄밀한 의미의 객관보도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보도의 객관성을 주장하는 것은 '부르주아적 위선'이라고 통렬히 논박하고 있기도 하다. '가진 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면서 그것을 객관 보도라는 형식으로 위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논란과 별개로, 기자 자신이 기사를 통해 자신의 설익은 개인적 의견을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을 위해서라도 삼갈 필요가 있다. 어떤 사건이나 사실을 가능한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이를 바탕으로 튼튼한 논리를 전개해 현실을 깊이 있게 보여주는 것이 기사 작성과 표제 구성의 원칙이다. "연필을 뾰족하게 깎아서 써라."
그런데 기사나 편집과 달리 특정한 사안에 대한 가치판단이 강렬하게 나타나는 것을 오히려 미덕으로 하는 지면이 있다. 사설이 곧 신문사의 시각을 확연히 드러내는 영역이다. 사설은 어느 신문이든 그 지면에서 '특별대우'를 받는다. 종합해설면에 가거나 맨 끝 면에 자리하거나, 아무튼 독자들의 눈길이 많이 가는 곳에 자리한다. 신문의 사설을 주의 깊게 읽고 난 뒤 어떤 사회적 문제에 대해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는 독자들이 상당수에 이른다. 신문들의 사설이 지닌 영향력은 정부의 정책을 좌지우지할 만큼 크다.
사설이란 말 그대로 신문사의 설, 곧 주장이다. 객관적 형식을 중요시하는 신문 편집과는 전혀 다른 영역이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독자적인 것은 또 아니다. 신문이 편집되는 가치판단의 기준이 과연 무엇인가. 가치판단의 기준은 곧 신문의 편집 철학이라 할 수 있다. 그 방향이 농축된 것이 바로 신문의 사시다. 사시란 어느 신문이든 자신들이 지향하는 목표를 대내외적으로 공포한 것이다.
조선일보: 1)불편부당 2)산업 발전 3)문화 건설 4) 정의 옹호
동아일보: 1)민족의 표현 기관으로 자임함 2)민주주의를 지지함 3)문화주의를 제창함
중앙일보
1)사회정의에 입각하여 진실을 과감 신속하게 보도하고 당파를 초월한 정론을 환기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밝은 내일에의 희망과 용기를 갖도록 고취한다.
2)사회복지를 증진시키기 위해 경제후생의 신장을 적극 촉구하고 온갖 불의와 퇴영을 배격함으로써 자유언론의 대경대도를 구축한다.
3) 사회공기로서의 언론의 책임을 다함으로써 이성과 관용을 겸비한 건전하고 품위 있는 민족의 목탁이 될 것을 자기한다.
한국일보: 1)춘추필법의 정신 2)정정당당한 보도 3)불편부당한 자세
사시로만 본다면 우리 사회에서 발행되는 모든 신문들이 진실만을 추구하고 보도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사실상 사시는 그냥 '모양 갖추기'일 뿐 사시로서 제구실을 전혀 못하고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사설을 통해 신문사의 편집 방향을 읽는 것은 비단 독자들만의 신문 독법에 그치지 않는다. 기사를 쓰고 표제를 작성하는 일선 기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기잗들 또한 사설 읽기를 통해 자신이 몸담고 있는 신문사가 특정 사안에 대해 갖고 있는 관점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사설은 편집 읽기의 열쇠가 된다.
3. 사설 바로 보기
논실위원들은 신문 편집국과는 별도 조직인 논설위원실 소속이다. 어느 면에서는 그 사회의 지성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우리 사회가 은연중 기자에게서 지사의 모습을 기대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장지연이 쓴 시일야방성대곡이었던 점을 되새겨보면, 논설위원과 그들이 쓴느 사설에 대한 우리 사회의 시각이나 기대가 어떤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창간 이후 오랫동안 사설이 1면에 위치해있었다. 신문이 주장을 그만큼 강조했고 그것이 독자들에게 주는 메시지의 무게도 컸다. 그러나 사설이 한 신문사의 의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상식이 조금씩 확산되면서, 사설을 바라보는 시각이 상당히 객관화됐다.
신문 지면이 대부분 회의를 통한 공동작업이듯이 신문 사설 역시 예외가 아니다. 대체로 사설의 주제가 회의를 통해 결정되기는 하지만, 주필의 의사가 거의 그대로 관철된다고 봐도 무방하다. 따라서 논설위원들 개개인의 소신이 그대로 사설에 나가는 것은 차라리 드물다고 보아야 한다. 논설주간이나 주필에 의해 얼마든지 첨삭이 이뤄지고 주필이 요구하는 대로 사설을 쓰지 않았을 때 논조까지 재조정되는 예가 허다하다.
사설은 신문사의 의견이나 주장이므로 형식적으로도 개개인의 의사를 넘어서있다. 논설위원들의 개인 의견을 털어놓는 지면은 칼럼이다. 신문사의 주장을 써야 하는 사설과 달리 칼럼에서는 얼마든지 개인 주장을 담을 수 있다. 하지만 논설위원이 쓰는 칼럼의 경우도 주필이나 논설주간이 데스크를 보고 있다. 칼럼은 일반 논설위원들의 집필에도 영향을 끼칠 뿐 아니라 기자들은 물론 편집국장의 지면 구성에 큰 변수가 된다.
사설은 속보성을 다투지 않기에 거의 바꾸지 않는 게 일반적이지만 2002년 12월 19일 16대 대통령선거가 있던 날 아침 조선일보는 밤사이에 사설을 전격 교체했다. 2002년 12월 18일 밤 10시 20분 정몽준이 노무현 후보 지지를 철회하는 성명을 발표하자 이를 긴급히 사설에 반영한 것이다. 조선일보가 밤사이에 나라의 명운 결정짓는 날 사설을 정몽준, 노무현 버렸다 사설로 바꿨다. 독자들로부터 이회창 후보를 위해 편파보도를 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올 때마다 언제나 불편부당을 내세웠던 신문이 선거날 아침에 아예 내놓고 이 후보에 투표하라면 유권자들을 선동한 것이다.
사설의 배경에는 신문사의 사익이 원천적으로 가로놓여 있다. 사설은 이미 사설이 아니다. 신문을 사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특정 사기업, 그것도 그 기업을 족벌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특정 개인의 사설로 전락한 것에 다름 아니다.
4. 신문사주와 편집 주체
신문사는 일반 회사와는 달리 기업으로서의 이윤 추구보다는 전체 국민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공공기관이라고 믿고 있다. 주식회사 형태로 되어 있음에도 우리 신문들의 소유 구조는 상당히 독특하다. '사주'에 의해 철저히 전제적인 경영이 이뤄지고 있다. 편집인과 편집국장이 기자로서 아무런 경험도 없는 언론사주의 입김에 좌우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요인이 있다. 사주들에 의한 편집 개입은 점점 노골적으로 잦아지고 있다.
사주들의 일차적 관심사는 두말할 나위 없이 이윤이다. 신문 편집의 궁극적 주체가 사주들이므로 대부분 우리 신문들의 편집 방향이나 사설 논조가 친자본이고 노동자들에 적대적인 것은 필연이다. 독자들은 여기서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과연 그래도 되는 것일까? 사설을 비롯한 모든 신문 지면의 편집 주체가 결국 사주이어도 그것은 그저 어쩔 수 없는 일일까. 물론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의 대답은 부정적이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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