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은 마땅히 폐지돼야 할 악법이다. 그러나 엄존하는 것이 현실이라면, 최소한 법 적용이라도 공정해야 한다. ‘네 편’에는 무시무시한 보안법의 잣대를 들이대면서 ‘내 편’에는 훨씬 가벼운 잣대로 봐준다면 법치라고 부를 수 없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 증거조작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검찰이 법 적용 과정에서 또다시 법치주의를 농락하려는 모양이다. 증거조작 사건의 공범 노릇을 하고도 자성하거나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축소수사를 할 태세다.
검찰은 증거조작 과정에 관여한 국가정보원 협조자 김모씨를 구속하면서 보안법상 날조죄 대신 형법상 모해증거위조죄를 적용했다고 한다. 날조죄와 모해증거위조죄는 성격이 상당히 유사하다. 타인을 형사처벌 받게 하려는 의도로 증거를 없애거나, 숨기거나, 거짓으로 꾸민 경우 처벌 대상이 된다. 보안법은 특별법이고 형법은 일반법이다. 특정 범죄에 대한 규정이 보안법에 존재한다면 우선적으로 보안법을 적용하고, 필요할 경우 보충적으로 형법을 적용해야 한다. ‘특별법이 일반법에 우선한다’는 원칙 때문이다. 하지만 검찰은 모두가 아는 이 원칙을 외면했다.
검찰은 왜 보안법 적용을 피했을까. 무엇보다 ‘보안법’ 자체가 갖는 위력 때문일 터이다. 구속된 김씨에게 보안법을 적용할 경우 추가로 수사선상에 오르는 국정원 간부들은 물론 허위 증거를 법원에 제출한 검사들도 보안법의 사정권에 들어가게 된다. 대공 수사를 담당하는 국정원과 공안검사들에게는 엄청난 치욕이 아닐 수 없다. 형량의 차이도 영향을 미쳤을 법하다. 보안법상 날조죄는 날조의 대상이 된 죄와 똑같은 형에 처해진다. 이번 사건에서 날조 대상이 된 간첩죄의 법정형은 ‘사형 또는 무기징역, 7년 이상 유기징역’이다. 반면 형법상 모해증거위조죄는 최고형이 징역 10년이다. 노골적인 봐주기 의도가 엿보이지 않는가.
우리는 검찰이 최종적으로 내놓을 공소장에 주목하고자 한다. 검찰은 추가 수사를 통해 증거조작에 관련된 국정원 간부와 검사에 대해 보안법을 적용해야 한다. 보안법의 권위자로 인정받는 황교안 법무부 장관도 저서 <국가보안법>에서 ‘미필적 고의’만 있으면 보안법상 날조죄에 해당한다고 밝히지 않았는가. 증거위조에 직접 관여한 인사들뿐 아니라 위조를 의심할 만한 상황에서 의심하지 않은 이들까지 날조죄 처벌이 가능하다는 논리다. 검찰은 보안법의 칼날을 스스로에게 겨누지 않는 한 어떠한 수사 결과도 신뢰받기 어려울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황 장관 또한 전문가로서, 장관으로서 소신을 지키는지 국민이 지켜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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