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21일 금요일

경향 [사설]‘오 대위 사건’ 증거 조작 의혹 전면 재수사해야

1999년 개봉된 할리우드 영화 <장군의 딸>은 군대 내의 성폭행과 이를 은폐하려는 군 조직의 음모를 다룬 작품이다. 미 육군의 엘리트 장교인 엘리자베스 캠벨 대위는 육사 생도시절 동료 남자생도들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했으나 아버지인 조지프 캠벨 장군은 자신과 군의 명예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오히려 이를 은폐·조작한다. 존경의 대상이었던 아버지에게 배신당한 딸은 아버지의 측근 장교들과 차례로 육체관계를 맺는 방법으로 항거하다가 결국 살해된다. 

지난해 10월 직속상관에게 성추행을 당하고 성관계를 요구받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른바 ‘오 대위 사건’의 처리과정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새삼 이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피해자인 오 대위는 주변의 그 누구도 자신을 보호하지 않으려 하자 죽음을 통해 이에 항거했고, 군은 가해자인 노모 소령의 혐의를 입증할 증거를 은폐·조작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오 대위의 부대 출입기록은 그에게 성행위를 요구하다 거절당한 노 소령이 부당한 초과근무를 지시한 사실을 입증할 주요 증거였다. 그런데도 오 대위의 소속 부대는 군사법원 재판부가 출입기록을 제출하라고 명령하자 “위병소 출입관리 체계상의 계정 삭제로 기록이 없다”며 거부하다가 자신의 말을 뒤집고 출입기록을 제출했다. 이 기록에는 오 대위가 성행위 요구를 받던 시점에도 대부분 정상 퇴근한 것으로 돼 있었다. 피해자 오 대위 측의 주장이 사실이 아님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족들이 오 대위가 실제로 초과 근무를 한 사실이 수록된 ‘진짜’ 출입기록을 확보해 제출하자 그제서야 “담당 장교의 실수로 백업 파일이 있는 줄 몰랐다”며 유족들이 입수한 것과 같은 내용의 기록을 제출했다고 한다. 처음엔 증거를 은폐하고, 그 다음엔 가해자에게 유리하게 조작했다가, ‘진짜’가 나오니까 어쩔 수 없이 꼬리를 내렸다고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군 수사당국은 이번 사건을 백지상태에서 다시 수사해야 한다. 가해자 노 소령 측이 제출한 허위 출입기록의 작성경위와 출처, 자료 제출 거부의 경위 등을 낱낱이 파헤쳐 범법사실이 드러나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법에 따라 처벌해야 한다. 이미 김상희 여성가족위원장 등 국회의원 25명까지 나서서 재수사를 촉구한 상황이다. 철저하게 진상을 규명하고, 관련자들을 일벌백계하는 것만이 끝없는 절망감 속에서 죽어간 오 대위에게 조금이나마 사죄할 수 있는 길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