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은 어제 핵안보정상회의 기조연설에서 놀라운 말을 했다. 그는 “영변에 너무나 많은 핵시설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한 건물에서 화재가 발생해도 체르노빌보다 더 큰 핵 재앙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는 끔찍한 피해로 잘 알려져 있다. 직접적인 방사능 누출로 사망한 사람만 56명이며 20만명 이상이 방사선에 피폭되고 이 중 2만50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사고 지역이 ‘죽음의 땅’이 된 것은 물론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러시아에도 방사성물질이 떨어져 심각한 오염을 초래했다.
영변의 5MWe 원자로는 낡고 30년 이상 된 흑연을 감속재로 사용해 안전상의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된 바 있다. 그러나 체르노빌보다 더 큰 핵 재앙을 낳을 것이라는 발언의 근거는 매우 의심스럽다. 박 대통령은 아마 IHS 제인스 디펜스 위클리 1월26일자를 그대로 믿었던 것 같다. 제인스는 서울의 한 교수 말을 인용해 영변 핵이 폭발할 가능성이 높고 폭발하면 평양은 물론 시베리아, 일본 북부, 서울에 심각한 피해를 입힌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의 폭스뉴스는 전문가의 견해를 소개하며 그 가능성이 적다고 보도했다. 사실 많은 전문가들은 영변 원자로가 체르노빌과 같은 방식으로 폭발할 가능성이 적고, 설사 폭발해도 원자로의 규모가 체르노빌보다 작기 때문에 피해 역시 작다고 판단하고 있다. 영변 원자로는 열출력이 체르노빌의 128분의 1에 불과해 방사성물질이 유출된다 해도 200분의 1 이하이고, 서울이 심각하게 오염되는 일도 없다고 설명한다.
아마 박 대통령은 북핵 위험성을 강조하려다 검증되지 않은 소수 견해를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통령은 믿거나 말거나 식으로 발언할 자유가 없다. 더구나 국제회의 석상의 발언이다.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면 정확한 정보와 판단에 기초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통령은 신뢰를 잃고 통치력도 제대로 행사하기 어렵다. 박 대통령은 왜 그런 판단을 했는지 객관적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그동안 북핵 문제에 관한 정부 입장은 북한이 먼저 신뢰성 있는 조치를 취하기 전에는 대화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북핵이 그렇게 위험하다면 이렇게 느긋하고 한가로운 태도는 이해하기 어렵다. 7000만명의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다면 협상 조건을 따질 때가 아니다. 하루빨리 북핵 협상을 하는 게 급하다. 당장 북한에 안전 조치를 위해 필요한 기술과 인력을 지원하겠다고 제안도 해야 한다. 박 대통령은 과연 그런 정책적 전환을 준비하고 발언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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