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자동차업계가 통상압력 수위를 높이는 모양이다. 압력이 너무 잦아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구체 사안을 보면 한국을 얕잡아 보지 않고서는 꺼낼 수 없는 무리한 내용투성이여서 불쾌하기 짝이 없다. 일부 사안의 경우 눈앞의 이익에 급급한 한국 업체까지 가세하고, 정부가 이를 규제완화란 이름으로 풀어줄 조짐까지 보이고 있다.
주한미국상공회의소는 최근 한국 정부에 서한을 보내 자동차 이슈 16가지를 문제 삼았다고 한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연비 표기 규정 완화 요구다. 한국 정부는 올해부터 연비 사후검증 시 허용오차 범위를 놓고 국토부(5%)와 산업부(3%) 간에 이견이 있는 상황에서 미국(5%)까지 끼어들어 우왕좌왕하고 있다. 뻥연비를 앞세워 일본차에 거액의 과징금을 부과했던 미국의 이런 요구는 자가당착이다. 온실가스 배출량 충족기준 완화 요구도 어이없다. 미국차는 한·미 FTA에 따라 ‘연간 4500대 판매업체’에 한해 기존 규제에서 19% 완화된 조건을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FTA로 미국산 차의 국내 판매가 늘게 되자 예외 인정기간을 늘려달라고 요구 중이다. 이렇게 되면 한국차가 역차별을 받게 된다. 이산화탄소 배출이 많은 차에 부담금을 물리고 배출이 적은 차에는 보조금을 주는 ‘저탄소차 협력금 제도’는 아예 고사 직전이다. 탄소량을 관리하고, 친환경 차량 보급을 활성화하자는 ‘착한’ 제도지만 대형차가 많은 미국 차업계가 제동을 걸었다. 중·대형차 판매에 목을 매는 현대·기아차도 이에 동조하면서 산업부는 물론 결국 법을 만든 환경부까지 업체 의견을 수렴하겠다는 쪽으로 후퇴했다. 한국은 에너지의 97%를 수입하고, 에너지소비증가율이 세계 최고 수준이다. 세계 차업계는 고연비·친환경차 개발에 올인하고 있다. 눈앞의 이익에 집착할 경우 경쟁력 후퇴는 뻔하다.
우리는 그동안 정부가 다국적 기업의 압력에 법과 제도 수정을 강요당하며 휘청거린 것을 수없이 목도해왔다. 한·미 FTA 직후 우정사업본부가 우체국보험의 가입 한도를 늘리려 했지만 미국 측 보험사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올 초 카드사의 개인정보 유출 당시 전화영업원에 대한 영업금지 조치 철회도 전화영업원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외국계 금융사의 압력에서 비롯됐다. 한국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협상 참여 관심 표명으로 미국의 통상압력은 더욱 거세질 게 뻔하다. 미국의 압력과 소비자 사이에 정부가 서야 할 자리가 어디라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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