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은 24일 밤(한국 시각) 헤이그 핵안보정상회의에서 각국에 핵 테러 방지 조치들을 촉구할 예정이다. 22일 정홍원 총리는 그 전에 우리 국회가 원자력방호방재법을 통과시켜야 국제 망신을 사지 않는다고 야당에 법 처리를 호소했다. 그러나 야당은 "당초 합의대로 (민영 방송에 노사 동수 편성위원회 설치를 의무화한) 방송법 개정안도 함께 처리하지 않으면 협조해 줄 수 없다"고 거부했다. 윤병세 외교장관과 김관진 국방장관은 21일 국회를 찾아가 지난 1월 미국과 합의한 한·미방위비분담금협정 비준 동의안의 처리를 요청했지만 야당은 부정적이다.
과거 과반(過半) 의석을 가진 여당은 국회의장의 직권 상정 제도를 활용해 야당이 반대하는 쟁점 법안들을 통과시키곤 했다. 그러나 2012년 새누리당이 주도해 만든 국회선진화법은 직권 상정을 천재지변, 전시(戰時) 등에만 가능하도록 제한했다. 쟁점 법안 통과 기준도 의원 50% 이상 찬성에서 60% 이상 찬성으로 바꿨다. 현재 새누리당 의석은 156석(52%)이다. 따라서 새누리당이 야당이 반대하는 안건을 처리할 수 있는 길은 없다. 원자력법의 경우 소관 국회 상임위의 여야 의원 수가 같기도 하지만, 지금 야당이 여론의 비판에 귀 막고 원자력법과 방위비협정 처리를 막고 있는 건 근본적으로 선진화법을 방패막이로 삼고 있는 것이다.
2년 전 이런 사태에 대한 우려가 쏟아졌는데도 새누리당이 선진화법을 주도적으로 만든 명분은 폭력 국회를 막고 대화 정치를 되살리겠다는 것이었다. 2000년 16대 국회 이후 12년 동안 국회에서 벌어진 여야 폭력 육탄전만 31건이었다. 등장한 장비도 쇠사슬, 해머, 배척, 징, 자전거 체인, 소화기 등 무시무시했다. 국제적 놀림감이 됐다. 선진화법이 생긴 뒤 이런 물리적 극한 충돌은 사라졌다. 입법 성과도 법 시행 첫해인 지난해 국회를 통과한 법안이 676건으로 노무현 정부 첫해나 이명박 정부 첫해에 비해 두 배 이상 많았다.
선진화법으로 '타협 정치'의 씨앗이 뿌려졌다고 할 수 있지만 아직은 연약한 씨앗이다. 가뜩이나 정치권 안팎에선 '선진화법 때문에 국회가 식물(植物) 상태'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야당은 위헌 요소까지 있는 방송법을 관철하겠다며 국익(國益)이 걸린 원자력법과 방위비분담협정에 제동을 걸고 있다. 야당은 지난해에는 정부 구성과 아무 상관없는 '방송 공정성 보장'을 요구하며 정부조직법 개정을 막는 데 선진화법을 이용하기도 했다. 국회 윤리위에서 욕설·막말 의원과 불법·부정 경선을 저지른 통합진보당 의원들의 징계를 막는 데도 선진화법을 동원했다. 연말 국회에선 국정원 댓글 사건 특검을 해야 한다며 역시 선진화법을 활용해 예산안과 민생 법안들을 끝까지 붙잡아 놓기도 했다.
야당의 이 힘은 국민이 표(票)로 준 것이 아니다. 국민은 야당에 40%를 갓 넘는 의석만 주었다. 그런데도 야당은 50% 이상의 의석을 가진 것처럼 모든 안건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순전히 선진화법에서 나온 권력이다. 정당은 국민이 준 힘을 사용할 때도 자제해야 한다. 하물며 국민이 위임한 것 이상의 힘을 쓸 때는 더 그래야 한다.
야당이 절제하지 않고 지금처럼 선진화법을 정파적으로 남용·악용한다면 이 상황은 민주주의 원칙에 위배된 것으로 규정할 수밖에 없다. 국민의 인내는 한계에 이를 수밖에 없고, 선진화법을 무효화하려는 여당 일각의 목소리엔 더욱 힘이 실리게 될 것이다. 그 결과가 무엇이겠는가. 지금 야당이 나중에 집권했을 때 그때의 야당이 똑같이 선진화법을 악용하면 그 결과는 또 무엇이겠는가. 정치 선진화는 물 건너가고 말 것이고, 국민은 선진화법을 악용한 횡포(橫暴)를 심판하게 될 것이다. 야당의 절제와 지혜가 절실하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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