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9일 월요일

제29법칙 끝까지 치밀하게 계획을 짜라

제29법칙 끝까지 치밀하게 계획을 짜라


끝이 가장 중요하다.
따라서 끝까지 치밀하게 계획을 짜라.
그러면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놀라지 않을 것이고,언제 그만두게 될지를 알게된다.


법칙 준수 사례

1863년 프로이센의 총리 비스마르크는 유럽의 정황을 살펴보았다.
영국,프랑스,오스트리아가 주요세력이었고,
프로이센은 독일 연방 중의 하나였고,오스트리아가 이 연방의 지배세력이었다.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의 종노릇만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비스마르크는 우선 작은 나라 덴마크와 전쟁을 시작했다.

이어서 1866년 프로이센 왕 빌헬름을 설득하여 독일연방을 탈퇴했고,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였다.

프랑스와 영국은 비스마르크가 유럽전역을 손아귀에 넣으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두려워하게 되었다.

1870년 프랑스와 전쟁으로 몇 달만에 프랑스는 박살이 났다.

이제 온 유럽이 프로이센의 철혈재상의 다음 움직임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1871년 비스마르크는 독일 제국을 건설했고,프로이센의 왕은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았다.

다른 유럽열강은 다른 대륙에서 식민지를 확보하는데 열을 올릴 때 그는 더 많은 영토가 아니라 더 충실한 안보를 원했다.

모두들 비스마르크가 나이가 들어 약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원래 세워놓았던 계획의 제일 마지막을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해석

비스마르크는 통일된 독일을 완성하자 거기서 멈추었다.

권력의 유지에는 미리 목표를 정해놓고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


☆주석 :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

http://me2.do/GsJF5OM1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

독일통일의 완성(1861년 ~ 1871년)

독일황제로 추대된 빌헬름 1세의 즉위식.
프랑스의 자랑인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가운데 흰 옷의 비스마르크가 보인다.
독일은 중세 이래로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이름 아래 서유럽에서 가장 큰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사실은 크고 작은 연방 국가의 연합체에 지나지 않았고, 19세기에 이르러서도 통일 국가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독일 내부에서는 활발하게 독일 통일 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는데, 그 결과 독일 통일의 앞날에 두 개의 길이 열렸다.
그 하나는 '소독일주의'로서, 다수의 다른 민족, 곧 슬라브인과 마자르인 및 이탈리아인 등을 포함하고 있는 오스트리아를 제외하고, 북독일의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순수한 독일 민족 국가를 건설하는 길이었다. 다른 하나는 오스트리아를 주체로 하여 신성 로마 제국의 전 영토를 통합하는 이른바 '대독일주의'를 구현하는 길이었다.
1861년 빌헬름 1세(재위 1861~1888)가 프로이센 왕위에 오르면서 적극적으로 독일 통일 사업에 착수하였다. 그는 다음해 비스마르크(1815~1898)를 수상으로 등용하고, 몰트케(1800~1891)를 참모총장으로 임명하였다. 빌헬름 1세가 군비확장 문제로 의회와 대립하고 있을 때, 비스마르크는 의회에 출석하여 군비 확장 없이는 독일의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른바 '철혈(鐵血) 연설'이었다.
"독일이 기대하고 있는 것은 프로이센의 자유주의가 아니라 그 실력입니다······ 프로이센의 국경은 건전한 국가 생활을 하기에 합당하지 못합니다. 당면한 큰 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이것이 1848년 및 1849년의 과오였습니다-에 의해서가 아니라, 쇠(鐵)와 피(血)에 의해서만 그 문제는 해결되는 것입니다."
수상에 취임한 비스마르크는 즉시 군대 개혁을 단행하였다. 의회의 기능을 4년 동안 정지시키고, 국민에게 무거운 세금을 물렸다. 그의 노골적인 오스트리아 배척 정책과 철혈 정책은 오스트리아 및 남독일 연방을 크게 자극하여 충돌은 시간 문제였다. 사태는 점점 악화되어 1866년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전쟁에 돌입하였다.
비스마르크는 개전에 앞서 뛰어난 외교 수완을 발휘하였다. 우선 이탈리아에 대해서는 오스트리아 영토인 베네치아의 점령을 인정하여 공수 동맹을 맺고,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에 대해서는 라인 강 왼편 땅의 병합을 묵인하기로 약속했으며, 러시아에 대해서는 폴란드 문제에 협력하기로 약속하는 것으로 주변 정지 작업을 완벽하게 끝냈다.
프로이센 군은 주위 국가들이 중립을 지키는 가운데 참모총장 몰트케의 뛰어난 작전에 의해, 오스트리아를 돕고 있는 남북 독일 연방들을 정복하고, 주력 부대로 쾨니히그뢰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군 거의 전부를 섬멸하였다. 오스트리아는 개전해서 겨우 7주간을 버티다 프로이센에 항복하였다. 프로이센 · 오스트리아 전쟁은 달리 '7주 전쟁'이라고도 한다.
7주 전쟁의 결과 프라하 강화 조약에서 오스트리아는 독일 연방에서 탈퇴했고, 대신 프로이센이 북독일 연방을 조직하기로 하였다. 다음해인 1867년에 프로이센은 북독일의 하노버와 그 근방 지역을 병합하였다. 이리하여 독일의 통일은 그 반이 달성되었다.
그 무렵 프로이센의 이웃나라인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 3세가 영토 확장에 힘쓰고 있었다. 그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지배하는 정도의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우선 베네치아를 점령하고, 뒤이어 분열되어 있는 이탈리아 땅을 조금씩 잠식해 들어갔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용사 가리발디(1807~1882)가 1천 명의 붉은 셔츠 부대를 이끌고 남이탈리아를 평정하여 이탈리아 통일의 길로 가는 것을 보고 이탈리아에 대한 침략을 단념하였다. 또한 프랑스는 미국이 남북 전쟁을 하는 동안 멕시코를 차지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그러나 미국의 강한 경고를 받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나폴레옹 3세는 땅에 떨어진 권위를 다시 세우기 위해 1867년, 파리에서 만국 박람회를 열었다. 이 박람회에는 세계에서 많은 사람이 참가하였다. 귀빈 중에는 영국의 황태자 에드워드, 독일의 프로이센 왕과 비스마르크 재상,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2세, 그리고 오스만의 군주도 있었다.
파리 박람회가 있고 나서 2년 후인 1869년에 지중해와 인도양을 잇는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었다. 나폴레옹의 힘으로도 불가능했던 이 운하는 그 후 기술의 발달로 프랑스인 레셉스(1805~1894)에 의해 완성된 것이다. 이 운하의 완성에 15년의 세월이 소요되었다.
수에즈 운하의 개통식 때 이집트 왕은 그 개통을 축하하기 위해 카이로에 극장을 새로 지었고, 개막 프로그램으로 이탈리아의 베르디에게 오페라 '아이다'를 작곡하게 하여 화려한 공연을 가졌다. 이 개막식에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및 네덜란드에서 황제와 황태자가 직접 참석하였다. 이때가 나폴레옹 3세로서는 최고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다.
파리의 만국 박람회에서 두터운 우의를 과시했던 나폴레옹 3세와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는 1870년에는 서로 적이 되어 전쟁을 하였다. 비스마르크가 독일의 통일 사업을 완수하기 위해 오스트리아를 다시 공격하려 하자, 독일이 더 이상 강해지는 것을 원치 않는 나폴레옹 3세가 오스트리아 편을 들었기 때문이다.
먼저 선전 포고를 한 쪽은 프랑스였다. 1870년 7월 17일에 시작된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전쟁은 외교 공작과 군비에서 뒤떨어진 프랑스의 패배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나폴레옹 3세는 유럽 여러 나라가 앞다투어 구매하던 크루프의 4만㎏짜리 대포를 사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1871년 1월 29일에 파리는 함락되고 말았다.
이 전쟁의 결과 베르사유 가조약에서 프랑스는 알자스 로렌 지역을 할양하고, 보상금 50억 프랑을 지불하기로 약속하였다. 파리 입성에 앞서 1871년 1월 18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연방 군주는 만장일치로 프로이센 왕 빌헬름 1세를 독일 제국의 세습 황제로 추대했고, 이로써 19세기 최대의 현안이었던 독일 통일이 완성되었다. 여기서 오스트리아는 제외되었다.
같은 해에 독일 제국 새 헌법이 개정되었고, 통일의 공로자 비스마르크는 독일 제국 제1대 수상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 입헌군주제는 국민의 민주적 권리를 인정한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겉보기만의 입헌군주제였다. 황제가 대원수로서 독재적 대권을 장악하는 체제였던 것이다.
독일의 통일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나폴레옹을 타도하기 위해 해방 전쟁에 종군한 독일의 젊은 학생들 속에 통일 독일을 조국으로 그리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검은색과 붉은색 및 황금색으로 이루어진 삼색기를 통일 깃발로 하여 통일 운동을 추진하였다. 게다가 산업의 발달과 사회의 발전에 부응하여 국민 전체가 통일을 원하게 되었다. 이때 등장한 것이 빌헬름 1세와 비스마르크였다. 그 결과 마침내 독일 제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동일한 언어와 동일한 생활 습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통일된 국가를 이루려 하는 것을 가리켜 '내셔널리즘'이라 한다. 독일 통일 이후로 이 내셔널리즘은 세계 각지에 큰 영향을 주었다.


누가 돈과 영광을 차지할 것이냐 하는 것은 마지막에 결판이 난다.

당신은 늘 마지막 모습을 분명히 그리고 있어야 한다.


☆로버트 그린의 <권리의 법칙>에서...


PSY - HANGOVER feat. Snoop Dogg M/V

5분08초...

싸이의 신곡으로 6월9일 유튜브에 오픈되었다.
Fearturing한 Snoop Dogg은 미국의 rapper,배우로 3천만장이상의 앨범을 판 가수다.

http://youtu.be/HkMNOlYcpHg



(꽃) Andrea Bocelli and Hayley Westenra의 Vivo Per Lei

5분19초...

안드레아 보첼리는 1958년생 이탈리아의 테너이자 팝페라 가수...
Vivo Per Lei는 영어로 I live for her로 보첼리가 1995년 이탈리아의 여자 가수 Giorgia Todrani(1971년생)와 녹음했으나 그 후 많은 여자 가수들과 불렀다.
Hayley Westenra는 1987년
뉴질랜드 출신 가수...

http://m.youtube.com/watch?v=WdxRmcgsKDQ#



(윙크)퓨전국악,홀로아리랑

4분25초...

http://youtu.be/NTt5mPygMEU



(딸기)배려와 촉촉한 인심이 있는 삶
/ 좋은 글과 음악

2분17초...

 http://m.blog.naver.com/potoi/120212328097



(해)아시아 최고 부자 이가성의 돈버는 비결

"100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도
나는 200의 노력을 들여 일을 한다."

http://me2.do/53PzI7vA



(해)호두로 건강한 혈관 만들기

혈관이 확장돼 혈액순환이 개선되고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어 준다.

http://m.cafe.daum.net/oksnh/T6SY/125



(메롱) 유머,여자 말을 들어야!
Road kill

뚱뚱한 남자가 비좁은 산길을 자동차로 오르고 있다.

앞에 오는 여자 운전자가 소리쳤다.

"큰 돼지!"

남자가 열받아 창문을 열고,

"야! 이 나쁜 X야~~~"

씩씩거리고 모퉁이를 돌아섰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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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가운데 거대한 돼지와 부딪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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