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26일 정홍원 현 총리를 그대로 유임시키겠다고 밝혔다. 청와대 홍보수석은 "국정 공백과 국론 분열이 매우 큰 상황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어서"라고 했다. 정 총리가 세월호 참사의 책임을 지고 사의를 밝힌 지 60일 만이다. 그 사이 두 명의 총리 후보자가 낙마했다. 정 총리는 "저는 고사(固辭)의 뜻을 밝혔으나 중요한 시기에 장기간의 국정 중단을 막아야 한다는 대통령님의 간곡한 당부가 계셨다"고 했다.
경질하겠다던 총리를 유임시키는 것은 헌정(憲政) 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정 총리는 세월호 참사 11일 만인 4월 27일 사퇴 회견에서 "국무총리로서 응당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5월 19일 담화에서 "이런 상황에서 개혁을 이루지 못하면 대한민국은 영원히 개혁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고, 사흘 뒤엔 안대희 전 대법관을 총리 후보로 지명했다. 당시 청와대 대변인은 "우리 사회의 잘못된 관행과 적폐를 척결하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위한 국가 개조를 추진하기 위해"라고 했다. 6월 10일 문창극 전 후보자를 지명할 때도 청와대는 똑같은 얘기를 했다.
이렇게 국정 혁신의 첫 단추로 새 총리에 대한 기대감을 키워온 것은 다름 아닌 청와대이고 대통령이다. 세월호 참사에 엄청난 자괴감을 느낀 국민도 그런 방향 설정에 많은 기대를 해왔다. 그러나 정 총리를 유임시키기로 결정함으로써 대통령의 국가 개조 약속은 시작부터 허언(虛言)이 되고 말았다. 적폐 청산이나 관피아(관료 마피아) 척결도 모두 허사(虛事)가 되고, 결국엔 세월호 참사 이전으로 되돌아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지난 60일 동안 가시방석에 앉아 떠날 준비를 해 왔던 정 총리가 마음을 다잡고 일을 한다고 한들 과연 국민의 믿음을 다시 끌어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이번 결정으로 총리의 역할과 기능을 평가절하해버린 꼴이 됐기 때문이다.
사실 총리 후보자가 두 번이나 국회 청문회에 가보지도 못하고 낙마한 상황에서 또다시 새 사람을 찾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적임자를 찾는다 해도 정상 절차를 밟으면 빨라야 8월 이후에야 새 총리가 취임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되면 장기간 총리 부재(不在) 사태가 이어질 것이고 그때까지 정 총리를 계속 붙들고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현실적 어려움 때문에 정 총리 유임이 차라리 낫다고 봤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청와대가 총리 교체를 비롯한 인사 쇄신을 통해 국정을 혁신하겠다는 약속을 내팽개치는 것은 국민에 대한 기본 예의가 아니다. 청와대 대변인이 25일 개혁성과 청문회 통과 가능성을 기준으로 빨리 총리 후보를 지명하겠다고 했다가 하루 만에 유임 결정을 한 것을 보면 처음부터 새 후보를 찾을 의지가 있었는지도 의심스럽다. 무엇보다 청와대 홍보수석을 통해 총리 유임 사실을 발표하고 끝내는 것도 성의가 없어 보인다. 박 대통령이 직접 국민에게 정 총리를 유임시킬 수밖에 없는 배경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것이 순리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