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침 조선일보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새누리당 이완구 비상대책위원장 겸 원내대표 등을 만나는 사진이 크게 실렸다. 대통령이 여당 지도부를 만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도 이날 만남은 눈길을 끌었다. 박 대통령과 여당 지도부 간의 만남을 공개한 것은 작년 12월 이후 7개월 만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이에도 대통령과 여당 간에는 바깥에 알리지 않은 이런저런 모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위원장이 이날 "앞으로는 다른 여당 의원들에게도 대통령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줬으면 좋겠다"고 건의한 것을 보면 대통령과 여당 간의 관계가 생각만큼 원활한 것 같지 않다.
실제 새누리당 의원들은 요즘 "대통령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자주 하고 있다. 그러면서 대통령이 비선(�線) 조직에 의존하고 있다는 소문이 여당에서부터 번지고 있다. 일부 여권 원로들은 이 문제를 대놓고 제기하기도 했다. 새누리당 상임고문인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한 인터뷰에서 "박 대통령이 공식 채널이 아닌 소규모 비선 라인을 통해 상당히 많은 얘기를 듣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야당은 이 문제를 정치적 스캔들로 작심하고 키울 태세다. 새정치민주연합 박지원 의원은 "문창극 총리 후보자 추천을 비선 라인인 '만만회'에서 했다는 말이 있다"고 주장했다. 박 대통령의 남동생인 박지만씨, 10년 넘게 박 대통령을 보좌해온 이재만 청와대 총무비서관, 한때 박 대통령의 비공식 비서실장 역할을 해 온 정윤회씨 등의 이름 끝 자를 하나씩 모아서 '만만회'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들이 총리 후보 추천을 비롯한 각종 대통령 인사에 어떻게, 어느 정도 개입했는지에 대해선 구체적 증거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현재로선 정치 공세의 측면이 강하다. 청와대도 "답할 가치도 없는 소설 중의 소설"이라고 반박했다.
역대 정권에서도 비선 조직에 관한 소문이 끊이지 않았고, 이 중 일부는 사실로 드러났다. 김영삼 정부 시절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가 이끄는 비선 조직이 정부·여당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부에서도 '대통령의 귀를 비선 조직이 붙들고 있다'는 말이 나왔다.
이번에 비선 조직 소문에 불을 붙인 것은 대통령의 잇단 인사 실패였다. 문제가 된 총리·장관 후보들을 추천한 게 누구인가 하는 것이 비선 논란의 직접적 계기가 된 것이다. 오랜 기간 박 대통령을 도와온 원로들의 모임인 '7인회'에서 문창극 전 후보자를 추천했다는 소문이 한때 돌았지만 당사자들은 강력 부인했다. 적어도 새누리당을 비롯한 공조직에선 누구도 이번 인사와 관련된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러면서 비선 조직을 둘러싼 소문만 커져가고 있다.
박 대통령은 26일 인사 문제를 전담할 인사수석실을 신설했다. 그간 제기된 김기춘 비서실장 책임론에 대응하면서 인사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아예 전담 조직을 새로 만든 것이다. 인사 시스템 정비는 꼭 필요한 조치다. 그러나 인사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대통령이 먼저 달라져야 한다.
박 대통령은 취임 후 특별한 일정이 없으면 각종 보고서를 읽으면서 홀로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함께 지내는 가족도 없다. 외부 인사를 비공식적으로 초대해 식사하는 일도 드물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국정과 관련된 보고서들을 읽는 데만도 하루 24시간이 모자란다고 했다. 이런 박 대통령을 보좌하는 그룹이 국회의원 시절부터 함께해 온 몇몇 청와대 비서관들이다. 새누리당에서조차 이들을 '문고리 권력'이라고 부른다. 대통령의 이 같은 밀폐성 국정 운영 스타일이 여러 소문과 억측을 낳는 토양이 되고 있다. 사실 비선 조직에 관한 소문만큼 솔깃한 얘기도 없다.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대통령의 결정을 가장 그럴듯하게 설명해주는 게 비선 조직 개입설이기 때문이다.
지금 대통령에게 인사수석실 신설보다 더 시급한 과제는 '권력의 닫힌 문'을 여는 일이다. 대통령이 보고서에만 의존하지 말고 사회 각계의 원로와 현장의 전문가들을 직접 만나 의견을 구하고 고언(苦言)을 듣는 것만으로도 이른바 문고리 권력 운운하는 얘기가 쑥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대통령이 여당 지도부를 만난 것 자체가 뉴스가 되는 상황에선 권력과 관련한 부정적인 소문과 억측이 끊이지 않게 된다. 이런 식으로 대통령과 정부·여당이 따로 겉돌게 되면 결국엔 국정 운영의 동력도 점차 위축될 수밖에 없게 된다. 대통령이 청와대 안의 닫힌 공간에서 나와 국민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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