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달 유망종목이 아니라는 이유로 태릉선수촌 인근 분식집과 모텔에서 숙식을 해결했다는 국가대표 여자 컬링팀 선수들이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선전을 펼쳤을 때 많은 이들이 진심 어린 박수를 보냈다. 그런데 이러한 성원의 물결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얼마 전에 발생했다. 국가대표로 활약한 경기도청 여자 컬링팀 선수들이 ‘코치로부터 성추행을 당하고 기부금을 강요받았다’며 한꺼번에 사표를 낸 것이다. 컬링팀 파문이 채 진정되기도 전에 이번에는 여자 빙상팀에서 불상사가 생겼다. 소치올림픽 쇼트트랙 3관왕 박승희 선수가 소속돼 있는 경기 화성시청 여자 빙상 선수 2명이 전임 감독 ㄱ씨를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것이다.
ㄱ씨는 부인하고 있다지만 선수들의 주장이 매우 구체적인 데다 일관성이 있어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경찰이 본격 수사에 나서면 진상이 밝혀질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코치나 감독이 선수들에게 가하는 폭력이나 폭언, 성추행 등의 반인권적 행태들이 몇몇 종목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체육계 전반에 만연해 있다는 사실이다. 중·고교와 대학 스포츠팀은 물론이고, 국가대표팀에서도 지도자들이 성추행과 폭력 등의 이유로 불미스럽게 물러나거나 사법처리 대상이 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현장 지도자들의 반인권적 행태가 불식되지 않는 까닭은 절차나 과정을 무시한 채 메달 획득과 순위 경쟁에만 집착하는 체육계의 성과지상주의와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지도자들은 관행에 젖어 성추행과 폭력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선수들은 자신들의 미래 때문에 입을 다물며, 협회는 협회대로 쉬쉬하는 사이에 고질병으로 굳어졌던 셈이다. 이러한 인권 불감증은 악순환될 수밖에 없다는 데 더욱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학교 운동팀이나 국가대표팀에서 지도자들의 폭력에 순응하고 이를 내면화하는 선수들이 뒷날 지도자가 되었을 때 제자들에게 이 같은 폭력성을 고스란히 발현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올림픽이 열릴 때마다 수십개의 메달을 따내는 명실상부한 스포츠 강국이다. 그러나 전 세계에 자랑하는 스포츠 역량의 이면에 성추행이나 폭력 등의 반인권적 행태가 똬리를 틀고 있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일이다. 체육계는 지금이라도 현장에서의 인권 감수성을 획기적으로 키울 수 있는 특단의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인권 불감증의 토대 위에 세워진 스포츠 강국은 사상누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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