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27일 화요일

제21계 매미가 허물을 벗듯 도망가다,금선탈각(金蟬脫殼)

제21계 매미가 허물을 벗듯 도망가다,금선탈각(金蟬脫殼)

매미가 나무가지에 껍데기만 남기고 떠나듯이,
표면적인 현상은 남기고 실제로는 몸은 빼 떠나가는 것을 비유한다.



비지니스 : 홍콩 갑부 이가성

지금은 아시아 최고부자인 이가성이 구룡창고회사가 가진 땅을 개발하면 큰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77년 영국회사인 이화양행이 구룡창고회사의 주식지분이 20%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주식을 분산해 매집하여 차명으로 18%를 확보했다.

주당 10달러에서 30달러가 되고 이화양행이 눈치를 채고 경계를 하게 되었다.
이가성의 자금력은 이화양행에 맞서서는 승산이 없었다.

1978년 이가성은 선박왕 포옥강에게 구룡창의 주식을 전매하였다.

포옥강은 다시 과감하게 주식을 더 사들여 30%를 점하게 되었다.

1979년 초 주가가 이미 50달러에 달하자 이화양행은 속은 것을 깨달았으나 이미 너무 늦었다.


처세 : 왕수인(王守仁)이 남긴 시

명나라 환관 유근이 득세를 할 때
당시 병부주사 왕수인은 어사 대선을 구하는 상소를 하였지만 중간에 유근이 가로채고 오히려 장형 50대에 변방으로 좌천되었다.

하인이 유근이 분이 풀리지 않아 자객을 보내 죽이려 한다는 말을 듣고,
절명시(絶命詩)를 베게 옆에 놓고 오이산으로 잠적했다.

百年臣子悲何極,夜夜江禱泣子胥

"백년 신하 슬픔이 끝이 없고,
밤마다 강 물결은 자서를 그리워 우네"

☆주 : 여기서 "자서"는 오자서를 말하며 오왕 부차 때문에 자결한 후 부차에 의해 시체가 오강에 버려졌다.

하인이 강에 가보니 관모와 신발이 떠있고 건져내보니 왕수인 것이 틀림없다.

죽이려 온 자객도 이 소식을 사실이라 믿고 증거물을 수습하여 수도로 돌아갔다.

생애[편집]

왕양명
여요(餘姚-현재의 저장 성에 속함)의 사람으로 부친은 왕화(華)라고 한다. 1481년(성화 17년)에 진사 제1인에 급제하였고, 벼슬이 남경 이부상서에 이르렀다.
그는 출생 이래로 선병질(腺病質)이어서 청년기에 벌써 폐병으로 피를 토한 일도 있다. 혼미와 번민의 원인은 이 병과, 주자학에서 설명되는 격물치지설이 아무리 하여도 납득되지 않는 점에 그 원인이 있었다. 주자의 이(理)는 사사물물(事事物物)에 즉하여 궁구해야 할 것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때는 뜰의 대나무를 잘라 대의 이치를 파악하려고 한 나머지 병이 나기도 하였고, 또 어느 때는 주자의 독서법을 읽음으로써 그대로 성현의 유교(遺敎)를 읽었으나 도리를 얻지 못하여 신경쇠약에 빠지기도 하였다. 자신은 도저히 성인이 될 만한 그릇이 못된다는 체념이 <오익(五溺)>(임협·기서·난장·신선·불교의 傳習)에 빠지게 하였다고 한다.
35세 때에 중앙정부에 비판적인 정치논문을 상주하여 환관 유근(劉瑾)의 노여움을 삼으로써 귀주(貴州) 용장(龍場-현재의 貴州에 속함)에 유배되었다. 산악부족(山岳部族) 속에서 고독한 생활을 보내고 있던 실의(失意)의 양명(陽明)은 여기서 본래의 깨달음을 얻었다. "성인(聖人)의 도(道)는 나의 성(性)에 구비되고 있다. 지난번에 이(理)를 사물에서 구한 것은 오류였다"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이(理)가 사물에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나의 마음에 있다. <심즉리(心卽理)>의 설이 여기서 확립되어 마침내 양명사상(陽明思想)의 근간이 되었다. <심즉리(心卽理)>라고 하는 것은 선악을 포함한 마음이 이(理)라는 뜻이 아니고, 마음의 발동이 항상 이(理)의 경지를 뜻하는 실천적인 개념인 것이다. 주자(朱子)가 이(理)와 심(心)을 나누어 전자를 형이상적, 후자를 형이하의 음양이라고 한 말과는 크게 다르다. 나의 마음이 발동이 항상 이(理)라고 하는 것은 효(孝)를 아는 것과 효를 행하는 것이 나뉘어 둘인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은 지(知)와 행(行)이 합일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 주자의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대하여 양명이 치지격물(致知格物)을 말한 것도 '양지(良知)를 치(致)한다-치양지(致良知)'라고 한 것도, 요는 마음의 본체로서의 양지 그것으로 되는 경지를 말한 것이다.

사상[편집]

왕양명의 사상에서 주도동기(主導動機)가 되는 것은 인간의 자연적 심정에 대한 신뢰의 정조이다. 주자학에의 회의에서 출발한 그의 사상도 사상의 전체적 구상, 즉 사상의 범주라는 점에서는 도달한 최종단계에서조차 주자의 사상에서 크게 넘어서지 못했다. 그러나 왕양명이 주자학과는 다른 심학의 대성자, 양명학의 시조로 숭앙받은 것은 단적으로 말하면 양자의 인간의 '마음'을 파악하는 방법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주자의 경우는 분석적이며 왕양명의 경우는 직관적이었다. 주자는 인간의 마음을 성(性<本性>:理)과 정(情:현실의 마음의 작용)으로 나누고, 정은 성(性)을 현혹시킬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서 성(理)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을 규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여기서는 현실의 인간 심정은 마이너스로 평가되고 있다. 왕양명은 그것을 플러스로 평가한다. 인간(人間)의 자연적 심정에는 '양지(良知)'가 갖추어져 있으며 그러므로 인간은 자연의 심정에 의거하여 행동한다면 성(理)을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양지라는 것은 《맹자》의 "깊은 궁리를 하지 않고서도 알 수 있는 것이 양지이다. 2, 3세의 어린이도 부모를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는 아이는 없다"라는 글에서 볼 수 있는 말이며 왕양명은 그것을 하늘(天)이며, 천리(天理)인 동시에 인간의 마음의 본체로서 시비선악의 판단을 갖추고 더구나 선천적으로 구비되어 있는 사려(思慮) 이전의 것, 자연스런 것, 오늘날의 말로 한다면 '양심'에 가까운 것으로서 받아들이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자연의 심정 그대로 양심에 따라 살 것을 주장하며, 이는 주자의 실천론에 비하면 자유로운 해방감이 수반되는 것이었다.

영향[편집]

양명의 사상은 행위하는 주체가 항상 이(理)의 체현자일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의 사후, 그의 사상은 여러 방향으로 전개되어 실천하는 주체를 소홀히 하는 관념적·공상적인 이론으로 흘렀는가 하면, 착실한 면학수양(勉學修養)을 경시하는 풍조까지 빚어냈다. 그러나 명대의 사조는 양명사상(陽明思想)의 전개(우파/右派와 좌파/左派로 나뉜다)에서 개성이 발휘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한국에서도 조선(朝鮮)의 중기(中期) 이후의 사조에 큰 영향을 주었다. 왕양명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 인물은 이탁오-본명은 이지, 탁오는 자이다-가 있다. 이탁오의 유명한 저작물은 분서 속 분서가 있다.

왕양명의 생애와 사상 [위의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편집]

왕양명의 이름은 수인[守人]이고 자[字]는 백안[伯安]이다. 양명은 그의 호다. 성화[成化] 8년(1472년) 9월 10일에 절강성 여요에서 태어나서 가정 7년 이향에서 객사하였다. 향년 57세로 타계했다. 연보[年譜]에 따르면, 양명의 조상은 진[晋]나라 광록대부 왕람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산동의 낭야 사람이었다. 유명한 서예가 왕희지는 왕람의 증손이었다. 왕람은 남쪽으로 이주해서 회계의 산음에서 살았다. 그 뒤에 23대의 왕수[王壽]가 거처를 여요로 옮기게 되었다. 6대조 왕강[王綱]은 광동참의가 되어 묘족의 난에서 죽었다. 양명의 고조 왕여준은 [예기] [역경]을 자세히 연구했다. 조부 왕윤 역시 [죽헌고] [강호잡고]를 세상에 간행했다. 부친 왕화[王華]는 자가 덕휘이고 용산공이라 일컬었다. 성화 17년[1481] 진사에 일등으로 올라, 남경이부상서라는 관직을 맡았다. 왕화의 조상들은 나아가 벼슬을 하기도 하고, 물러나 학문이나 문예를 즐기기도 하면서, 지방의 유명한 유지로 생애를 보냈다. 왕화는 조상들이 살았던 산음의 빼어난 경치를 사모하여 다시 회계로 이사 했다. 양명은 10살 이후 이곳을 집안의 고향으로 삼았다. 양명의 호는 이전에 왕화가 집을 증축한 적이 있는 회계의 동남쪽 20여 리에 있는 양명동의 지명을 따서 지은 것이다.

왕양명이 태어난 시기는, 명나라 조정이 일어난 때부터 약 100년이 지난 8대 헌종[憲宗], 성화 8년이었다. 당시에 밖으로는 위라트, 탈탄, 투르번, 묘족과 같은 주변 이민족의 침입이 잦았고, 안으로는 각지의 도적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또한 간신배같은 환관들이 조정에서 부패 정치를 주도 하던 시기였다. 학문, 사상도 마찬가지로 남송 이후 원나라, 명나라를 통해 관학으로서의 지배적 지위를 차지했던 주자학 시대와 나란히 그 생명이 고갈 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야말로 교조화된 것이다.

특히 명나라 초기에 [사서대전] [오경대전]이 편찬되어 과거 시험은 그 범위 내로 출제돼서, 학문, 사상은 고정됐고, 대다수 학자들은 훈고-허망하게 경전의 글자 해석하였다-를 하고, 문장과 시가에 빠져 들어서, 허망한 지식을 갖고 놀며 겉으로만 꾸미려는 일에 노력했다. 이들은 주자학의 근본이 되는 자기 수양을 안했다. 명대의 주자학자 중에는 설경헌, 호경재, 나정암같은 유명인이 있었지만 전반적인 경향은 위축과 침체를 맞이했다. 길전공평에 따르면 주자 후학의 시대가 되면 보편적인 문제로 돌아와, 성인[聖人]의 언행을 상대화하는 것을 잊고 더욱 주자의 말씀을 교조화해서 수용했다. 그야말로 간신배들이 성인의 학문을 왜곡해서 혹세무민하는 일에 주력했다. 따라서 천리[天理]는 불안에 떠는 인간에게 안정된 확신을 제공하긴커녕 실천자의 고정된 리법[理法]으로 썩었다. 주체적인 것이 나타남을 매우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더욱이 정치권력에 옹호됐을 때는 그 고정화가 더 박차를 더하게 된다고 한다. 민중을 등쳐 먹고 기만하는 간신배가 나라를 휩쓸고, 사상이 고정화되고 답습하던 분위기가 팽창하던 시대에 왕양명이 태어 났다.

왕양명의 일생은 대략 다섯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근등강신[近藤康信, 인명임]에 따르면, 첫째, 15~16세까지의 유년 만학 시기, 둘째, 31세까지의 회의와 혼미의 시기, 셋째, 이후 38세까지 작은 깨달음의 자립 시기, 넷째, 38세에서 50세 전까지 개오하여 활약하던 시기, 다섯째, 이후 56세까지 대오하여 완성한 시기다. 근등강신이 이처럼 깨달음의 정도로 양명의 생애를 일별한 것은 매우 독특한 해석이다. 이 해석은 종래에 명유학안[明儒學案]의 견해에 따라 채인후[蔡人厚]가 정리한 이질적인 세 번의 변화가 있다. 첫째는 사장에서, 둘째는 불교와 노장사상-에 드나들다가, 셋째는 용장에서 도를 깨우치는 과정과, 동질적인 발전과 완성으로서 세번의 변화가 있다. 즉 첫째는 묵좌징심[默坐澄心], 둘째는 치양지[致良知], 셋째는 원숙화경[圓熟化境]을 거친 생애로 구분하는 것과는 다르다. 왕양명이 용장에서 도를 깨우치기까지의 다섯 번의 변화를 그의 친구인 담감천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첫째는 임협[任俠]을 익히는 데 빠졌고, 둘째는 기사[騎射]를, 셋째는 사장[詞章]을, 넷째는 신선[神仙]을 익히는 데 빠졌고, 다섯째는 불교에 빠졌다" 이처럼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두었던 양명의 사상은 결국 자신의 "치양지"의 가르침으로 성숙하게 됐다.

다시 연보에 따라 양명의 생애를 살펴보면, 양명은 어렸을 때 가정에서 조부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양명은 5살 때까지 말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11살 때 아버지를 따라 베이징으로 향할 때 금산사를 지나가다가 호기어린 시부를 지었는데, 그 지혜가 타인을 놀라게 했다. 이후에는 주로 숙사에게 배웠다고 한다. 양명은 소년 시절부터 자신만의 눈으로 사물을 보는 비판정신을 갖고 있었다. 그런 정신을 보여주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어느날 12살 때 숙사가, 우리가 책을 공부하는 것은 과거에 급제하려는 것이고 이게 으뜸의 일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양명은 "첫째의 일은 책을 공부해 성인[聖人]이 되는 일"이라 답했다고 한다. 13살 때는 어머니가 베이징에서 병으로 죽자 상을 치르는 동안 양명의 통곡하고 눈물 흘리는 모습이 너무 애처로웠다고 전한다.

양명은 17살 때 부인 제씨[諸氏]를 남창[南昌]에서 맞이했지만 결혼하는 당일에, 집을 나가서 우연히 근처 산중에서 도사[道士]와 양생설을 논하다가 집에 돌아가는 것도 잊고, 앉은 채로 밤 새우기도 하고 상식적인 규범을 벗어난 행동을 했다. 다음날 새벽에 사람들이 찾아내어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해 봄, 신부와 고향으로 돌아와서 변한 태도로 독서와 공부 등, 수양하는 일에 열중했다고 한다. 양명은 배를 타고 돌아오던 중에 강서 광신에서 주자학자인 누량[1422~1491]을 만났다. 누량은 양명에게 송나라 유학자의 격물 학설을 얘기하고, 이렇게 알려 주었다. "반드시 공부해서 성인에 도달할 수 있다" 21세 때는 향시에 합격했으나 회시에는 낙제했다. 그때 경사에서 용산공을 모시고 주자가 남긴 책을 많이 구해서 공부했다. 주자 학설에 따르면 나무 한그루, 풀 한 포기에도 그것 나름의 이치[理]가 있다. 양명은 그 이치를 끝까지 캐묻는 것이 격물궁리[格物窮理]라는 말을 듣고 관서에 있는 대나무를 바라보며 격물을 했다. 7일 동안 이 일을 지속하다가 병이 들어서 그만 두었다고 한다. 이것이 주자학을 불신하고, 환멸감을 느낀 원인이 되었다.

그런 일이 벌어진 후에 양명은 어귀나 문장을 암기하는 사장-문장과 시가-의 학문에 집중하기도 했고, 불교와 노장-노자와 장자-에 빠지기도 했다. 26세 때 베이징에 갔는데, 변경 문제로 인해 시끄러운 시기라서, 양명은 한때 무사-군인의 일-와 병법학에 열중하기도 했다. 그 다음해가 되자, 이제까지 없었던 격한 불안감과 동요가 양명을 엄습했다. 오랫동안 노력해 왔던 시문의 도-時文의 道-는 남자로서 일생을 바쳐 해야 하는 일인가? 무엇이 참된 학문인가? 어떻게 그런 것을 구할 것인가? 나는 성현-성인과 현인-의 자질이 있는가? 이런 부류 의문이었다. 이런 의문에 시달린 후에는 유학을 버리고 산속으로 가서 도가의 양생설을 익히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원인을 사색의 결과로 단순히 보는 것이 종래의 주장이었지만, 아마도 회시 불합격과 건강 문제에 관계돼 있다고 근등강신이 주장했다. 그러는 사이에 마음 자세를 가다듬어 28세에 회시에 합격하여 비로소 관리가 됐다. 최초에는 공부[工部]에 임관됐고, 그 다음해에는 형부 운남 청리사주사를 제수받았다. 30세에는 강북에서 형벌을 받은 죄수를 심의, 기록하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도 승방을 방문하기도 하고, 도사에게 도를 묻기도 했다. 그 다음해 31세 때는 병을 이유로 관직을 그만두고 귀향했다. 양명동에 집을 짓고 도가의 도인술을 수련한 것이 이 시기 였다. 관리 생활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 동료가 도를 추구하는 뜻이 없고 시문-시가와 문장-의 재주를 다투고 있는 것을 보고 분노했던 적도 있었지만, 아마도 회의와 분노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던 것은 건강 문제가 주요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세속을 떠나 가족과 떨어져서 양명동에서 혼자 생활 하던 동안에 한 번 깨닫게 된다.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생각이 인간 본래의 마음인데, 성인의 가르침은 그 인정[人情]의 자연에 따르지만, 도교나 불교는 그 자연스런 정감을 무리하게 끊고 다만 정신을 갖고 노는 데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서 양명은 다년간 가까이 했던 도교와 불교를 결단하고 떠나서 유학에 복귀했다. 20년 동안 계속됐던 그의 회의와 방황의 시대도 양명동에서의 깨달음을 통해 종지부를 찍었다. 여기서 커다란 하나의 전기를 맞이 했다.

도교와 불교의 허망함을 깨닫고 정신이 안정된 양명은 다음해에 항주의 서호에서 요양하며 가끔 주변의 남병과 호포의 여러 사찰에 놀러가기도 했다. 건강을 회복하고 나서, 관직에 복귀할 걸 결정하고 33세에 베이징으로 돌아갔다. 그 다음해에는 동지를 모아놓고, 성학-聖學-을 강의했다. 유가의 본래 취지를 깨달은 양명의 열정은 회의의 시기가 길었을 뿐, 일시에 들끓어 비약했다. 양명이 급히 유가의 이상을 설명했던 것도 많은 독서인들에게는 특이함을 세워 이름을 좋아하는 것으로 보였는지 모른다. 다만 그 당시에 일찍이 양명을 이해하며 일생동안 충언을 해주었던 선배인 담약수[1466-1560]를 얻은 것은 양명에게 행복이었다. 담약수는 진백사에게 배운 고결한 선비로서 약수의 학문은 자득-自得-을 근본 취지로 해서 선학으로 평가 받기도 했다. 그러나 유가의 이상을 잊은 사람은 아니었다. 양명은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만년에 감천선생을 만난 이후 나의 뜻이 더욱 확고해졌다" 당시에 양명은 유학의 본래 취지에 근본을 두고 학문은 성인이 되려고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정도였다. 아직 독창적인 철학은 없었다. 이른바 양명학의 출현에는 이 시기를 토대로한 더 큰 비약이 필요했다.

용장[龍場]에 유배된 일은 양명이 독창적인 철학을 갖게된 계기가 되었다. 용장에서의 귀양살이는 당시 부패 정치에 대한 양명의 정의심 때문에 초래되었다. 양명의 나이 35세 때, 새로 즉위한 무종에게 간관인 대선과 박언휘는 표를 올려서 수년간 권력을 맘대로 휘두른 환관 유근을 경계했는데, 양명은 그 두사람을 옹호했다. 그러나 천자의 뜻에 거역했다는 명목으로 두 사람은 감옥에 감금됐다. 양명은 그 부당한 일을 좌시할 수 없어서, 감히 붓을 잡고 두 사람의 석방을 탄원했다고 전해진다. 이로써 도리어 자신이 죄를 받게 되어 장형 40대를 받고 죽을 지경에 처하게 됐다. 다행히 소생해서 다시 귀주 용장의 역승에 임명됐다.

양명이 용장에 도착한 것은 다음해 봄, 37세 때였다. 그때까지 약 1년간 출발을 망설이며 고향에 있었다. 그때 자객의 위협을 피해 바다로 도망쳤다가 복건까지 표류했다. 양명은 돌아오던 길에 성경의 산사에서 우연히 철주궁에서, 예부터 알고 지내던 스님의 권유에 따라 임지로 가겠다고 결심했다. 그때의 심경을 시로 표현했다.
"험난하고 평이한 것은 원래 가슴에 걸리지 않는다네
떠도는 구름이 텅빈 하늘을 지나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밤이 고요하니 바다의 파도가 삼만 리구나 달이 밝으니 비석이 천풍을 내리네" 

용장에 도착해 보니 귀주 서북의 온갖 산에 겹겹이 둘러 싸여 있는 변방의 땅이었다. 주민은 굴속에서 사는 만족[蠻族]-오랑캐-아니면 유배되어 도망온 한족이었다. 기후는 불순하고 벌레와 뱀이 우글거렸다. 역승이라는 이름만 있었다. 거처할 집도 없다. 대화 나눌 친구도 없고 공부할 책도 없는 완전한 귀양살이였다. 그런 어쩔 수 없는 고달프고 적막한 변두리에서 생활하며 양명은 사색을 거듭했다. 갑자기 깨달은 것이 있었는데 참으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한몸의 주체인 마음[心]이라는 사실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마음이야말로 모든 일과 이치의 근원이었다. 마음은 모든 사람한테 있는 것이다. "성인의 도는 나의 본성에 이미 넉넉한데, 예전에 외부 사물에서 이치를 구한 시도는 잘못이었다" 양명은 이렇게 깨달았다. 그 후에는 다년간의 의문이 잇달아 풀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격물치지에 대한 주자의 학설은 이치와 마음을 둘로 나누는 잘못을 범했으므로 심즉리[心卽理]라고 수정을 해야 했다. 앎[知]과 실천[行]은 원래 분리할 수 없는 것이므로 지행합일[知行合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후자는 구체적 체험의 지식으로 도달 안하면 천애[天涯]의 고객[孤客]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통감한 것이다. 양명이 그렇게 후련하게 깨달았기 때문에 몸과 마음에 활력이 생겼다. 그래서 3년의 객지 생활을 인내할 수 있었고, 그런 생활을 즐거운 것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무지한 오랑캐도 양명한테 가서 서원[書院]을 건설하는 일에 협력하기도 했다. 가르침까지 받았다. 양명의 이름이 인근에 퍼져서 귀주의 제학부사-지방의 학사를 통괄하는 관리다-석서[席書]가 내방해서 학문을 묻고 새롭게 귀양서원을 수리해서 양명을 학장으로 맞이했다.

그때 양명을 박해하던 유근이 죽자, 드디어 양명은 강서[江西]의 려능[廬陵]의 지현[知縣]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약 10년 동안 양명은 관리로 일하면서 순탄한 길을 걸었다. 남경, 북경, 회계, 제주, 남창, 장주 등 각지로 전임되고 승진했다. 이 시기는 양명이 일생에서 가장 활약했던 득의만만하던 시절이다. 특히 45세부터 3년 동안 강서, 복건의 각지에서 설치던 무장도둑 무리를 토벌하고, 남창에서도 맹위를 떨쳤다. 또한 명나라에 반기를 들었던 영왕[寧王] 신호[宸濠]를 평정한 군사 업무에 힘썼다. 그러나 군사, 정치에 나타난 공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군사 업무 때문에 매우 나쁜 상황에서 공부하는 일과 몸과 마음을 수양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양명은 그 사이에 사상마련-개념을 통해서가 아닌, 실제로 일하는 곳에서도 공부하고, 수양하는 일-을 강의하고, 천리를 간직하고 인욕[人欲](양명의 주체성을 미루어 볼 때필자는 "인욕"은 단순 과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인생철학에 근거하지 않은 충동적 행동이라고도 생각한다 이것은 필자의 주관일 뿐이다)을 제거하라고 주장했다. 양명은 말했다. "도문학[道問學]은 존덕성[尊德性]의 공부이다. 박문[博文]은 약례[約禮]의 공부이다" 양명이 주장한 학설의 정점에 있는 치양지설도 그러한 과정 속에서 무르익어 갔다. 추측컨대 교육자로서 발휘한 양명의 성과가 좋았던 이유는 양명의 학설과 태도와 성격이 주체적이었고 그 자유분방한 매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사제 관계를 그리 따지지 않고 함께 공부하고 즐기는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가득찬 학풍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개 양명선생이 동지[同志]를 점화시키는 것은 많은 경우에 산에 오르고 물에서 노니는 사이에 얻게 되었다" 이렇게 전한다. 스승과 제자가 서로 어울려 자유분방하게 놀고, 야외에서 잔치를 베푼 적이 자주 있었다. 심지어 환성이 울려 퍼지기도 했다고 전한다. 이러한 왕양명 교단의 특이한 분위기는 엄숙함을 위주로 하는 일반적인 주자학의 관점에서 보면 그 자체가 이단의 학문으로 취급되기에 충분했다.

영왕 신호의 난리를 평정한 공로를 시기질투한 환관 허충[許忠], 이태[李泰]의 모함으로 도리어 한때 위협받기도 했다. 소인들, 간신배들의 음모에 대한 양명의 고심은 군사 업무보다 몇 배나 힘들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무종이 죽고 세종이 즉위하자 형세가 완전히 변해서 양명의 공훈이 재평가 되었다. 양명은 신건백[新建伯]에 봉해지고, 남경병부상서[南京兵部尙書]를 겸하게 되었다. 양명의 이 때 나이는 50세였고 가장 괜찮은 시기였다. 그 이듬해에 사태가 또 변해서 양명의 아버지는 죽고, 양명의 공훈을 시기질투하던 사람들 때문에 다시 신변이 위태로워진다. 부하 장졸에 대한 논공행상을 중지한 것, 이설[異設]-양명 자신의 사상-을 주장하고 정설[正說]을 방해한 것, 과거에 응시했던 제자가 고의로 낙제했다는 이런 몇 가지 모함에서 비롯 되었다. 간신배들의 지칠 줄 모르는 이러한 음모 때문에 왕양명은 분명히 고생했을 것이다. 이런 일이 있어서 상기[喪期]-장례, 상을 치르는 동안-를 지난 뒤에도 복직하라는 명이 없었다. 이후 56세까지 6년이라는 세월 동안 고향에서 아무 임무도 없이 지냈다.

그러나 양명은 뜻밖에도 여유롭게 학문을 강의하고 제자를 양성하는 기회를 얻었다. 각지에서 구름처럼 밀려든 제자들이 숙소에 넘치고 강의소에 가득차서 전성기에 이르렀다. 학자, 교육자로서는 오히려 좋은 시기였다. 그 사이에 양지[良知]의 학설을 수립했는데, 인간의 양지는 시비, 선악을 판단하는 주체이므로 천인일리[天人一理] 만물일체의 관념에 근본을 두고 활발하게 천도에 통하는 것이 되었다. 강학에 몰두해서 여념이 없던 양명을 다시 세상사에 빠트리고 비참한 운명으로 이끌은 것은 56세가 되던 5월에 광서의 도적을 토벌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보다 앞서 광서의 사은과 전주에서 일어난 대규모로 벌어진 토적의 소란은 극도로 심해서 네군데 성의 군대가 토벌을 시도했지만 패배하고 말았다. 위기에 몰린 조정은 양명이 해냈던 군사적 공훈을 떠올렸다. 조정은 고생해서 사양하는 양명을 무리하게 기용했다. 9월에 출발해서 강서, 광동을 거쳐 광서에 도착하자 아픈 몸으로 무리하게 임무에 열중했다. 양명은 임무를 수행하기 전에 문인[文人] 전덕홍, 왕기와 천천교에서 도를 논하고 "사구교[四句敎]로써 학술의 종지를 개괄했다. 양명은 군사 활동에서 토적-지방의 도둑떼-이 봉기한 원인이 조정의 정책에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무력으로 토벌하는 것보다는 은혜를 베푸는 방법을 서서 토적 무리를 진정시켰다. 배움터를 건립해서 교화 사업을 시작했다. 게다가 양광의순무를 겸하며 7월에는 팔색단등협의 이적을 토벌했는데, 그 소굴을 소탕해서 다년간의 우환을 한방에 제거했다. 그러나 장려의 땅에서 극히 힘든 일에 복무하는 것은 병든 몸에 치명타였다. 병세는 차츰 나빠졌다. 재삼 휴가, 사직원을 올렸으니 불허됐다. 그래서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귀로에 올랐다. 광동성 경계에서 광서로 들어가던 도중에 결국 숙사[宿舍]-숙소-에서 타계했다. 이 때가 가정 7년[1528년] 10월 29일이다. 57세의 나이였는데, 임종의 유언은 다음과 같다. "이 마음이 환히 밝은데 다시 무엇을 말하겠는가"


비지니스나 개인의 일상에서 곤란할 때 당황하지 말고 금선탈각의 계책으로 빠져나와야 한다.


☆중국 유엽 편저,<원전 36계에서 배우는 경영의 지혜>에서...


Pablo Casals plays BACH Cello Solo No 1,BWV 1007 (1954)

15분02초...

파블로 카살스(1876~1973)는 스페인출신,
"성자 첼리스트"로 불리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첼리스트의 한 사람...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1685~1750)는 독일의 작곡가, 오르가니스트...
이 곡은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6곡(작품번호 1007~1012)중 하나이다.

http://m.youtube.com/watch?v=KX1YtvFZOj0#




나훈아의 립스틱 짙게 바르고

3분26초...

http://m.youtube.com/watch?v=iD4FDpt3Vxw#



중국 역대 최악의 황제는?

명나라 주원장은 최고 힘쎈 황제로 평가받기도 한다.
사람을 많이 죽였기 때문에 권력도 컸다.

진시황제(BC 221년 즉위)로부터 마지막 황제 선통제 부의(溥儀, 1911년 퇴위)까지 2132년 동안 중국에는 모두 211명의 황제가 있었다. 평균 재위 기간은 약 10년이며 역대 황제의 평균수명은 42세였다.

금(金)의 마지막 황제 완안승린(完顔承麟)는 옥새를 넘겨 받고 하루 만에 몽고군에게 다시 그 옥새를 내준 반면 청(淸) 건륭제(乾隆帝)는 61년간 재위하며 아들 17명, 딸 10명을 두기도 하였다.

역대 황제들 중에는 유일한 여황제인 측천무후(則天武后), 미소년과의 동성애를 즐겼다는 한(漢) 애제(哀帝), 양귀비와의 스캔들로 유명한 당 현종, 청나라의 전성기를 구가한 부지런한 옹정제(雍正帝), 강희제(康熙帝) 등 다양한 특색의 황제들이 많았다.


▲ 주원장의 각기 다른 초상화. 그에 대한 평가만큼이나 대조적이다. 난징를 둘러싸고 있는 성곽의 전체 윤곽은 못생긴 주원장의 얼굴 형상이라고 한다.
ⓒ2005 김대오
최근 베이징커지(北京科技)신문은 역대 황제 중에서 심리적 소양이 가장 떨어지는 황제로 명(明)나라를 세운 주원장(朱元璋)을 뽑았다.

홍콩 도시 대학의 심리학자 위에샤오동(嶽曉東) 교수는 주원장이 심각한 심리 장애와 인격분열의 정신병 증세가 있었다고 분석했다. 어릴 적 가난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농민반란을 통해 정권을 잡는 과정에서 심한 의심과 방어기제로서의 잔인한 폭력성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주원장은 1368년 10월 21일 안훼이(安徽)성의 가난한 집안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중팔(重八)이었으며 17살에 전염병과 기근으로 부모 형제를 잃고 황각사(皇覺寺)라는 절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절에서 청소와 심부름을 하던 주원장에게 가장 힘든 일이 사천왕상의 다리 사이 먼지를 청소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황제가 되고 난 후 주원장은 모든 절의 사천왕상은 청소하기 좋도록 반드시 한 발을 들도록 명령했다고 하니 이는 사천왕상의 역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 주원장이 승려로 일하던 시절 사천왕상의 다리 사이가 청소하기 힘들어서 자신이 황제가 난 후에는 사천왕상의 한 발을 모두 들게 했다고 한다. 사진은 베이징 근교의 홍루어쓰의 사천왕상이다.
ⓒ2005 김대오
25살에 홍건적의 두목 곽사흥(郭士興)의 군대에 들어가 실력을 인정받으며 무수한 전투를 치르며 세력을 키워 나간 주원장은 16년간의 전쟁 끝에 1368년 난징(南京)에 명나라를 세우고 황제에 등극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 41세였다.

서민이 황제가 된 사례로는 한고조 유방에 이어 두번째인 빈농 출신 주원장의 황제 등극에 대해 농민봉기에 의한 역사적 필연이라고 낮게 평가하기도 하고 농민군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반원투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높게 평가하기도 한다. 어쨌든 여기까지는 주원장에게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황제가 된 후 주원장에게 슬슬 일종의 피해망상증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자신과 함께 나라를 세웠던 개국 공신들이 자신에게 반기를 들 것을 우려하여 재상 호유용(胡惟庸) 등 1만5천여 명을 반역죄로 숙청하고 자신의 출신과 못생긴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기인한 '문자의 옥'으로 또 많은 지식인들을 제거하기도 하였다.

'문자의 옥'이란 주원장이 승려생활 때 머리를 깎은 것 때문에 '광(光)', '독(禿)'자를 쓰거나 '승(僧)'과 발음이 비슷한 '생(生)'을 쓰는 행위, 반란군 출신이란 의미의 '적(賊)'과 발음이 비슷한 '칙(則)'자를 쓰는 행위를 무조건 처벌한 것을 말한다.

한 선비는 "빛이 가득한 천하에 하늘이 성인을 낳아 세상을 위해 법칙을 만들도다(光天之下,天生聖人,爲世作則)"라는 상소문을 올렸는데 대머리의 '광(光)', 스님의 '생(生)', 도적을 나타내는 '칙(則)'이 함께 있었으니 죽음을 면하기 어려웠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당시 관료들은 매일 집을 나서며 가족과 작별 인사를 하고 살아서 집에 돌아가면 껴안고 살아 돌아온 것을 기뻐할 정도였다고 한다.

주원장은 또 <대명법>(大明法)을 제정하여 폐지되었던 잔혹한 형벌을 부활시켰는데 반역죄의 경우 주범이든 동조자든 일률적으로 팔다리, 어깨, 가슴 등을 차례로 잘라 능지처참했으며 만 16세 이상의 모든 가족까지 멸하는 족주(族誅, 가문 몰살)에 처했다. 또 60량 이상을 횡령한 관리에 대해서는 사형한 후 껍질을 벗긴 후 군중들에게 게시하기도 하였다.

주원장의 히스테리칼 한 공포정치는 26명의 아들과 16명의 딸들에게 자신의 권력과 부귀영화를 물려주기 위함이었다. 즉 미천한 출생에서 시작해 최고의 지위인 황제에 오르면서 자신의 권력과 부귀를 보존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정신분열증세로 나타난 것이다.

주원장은 왕위를 물려주려던 아들이 죽자 결국 손자인 건문제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러자 네 번째 아들이었던 주체(朱棣, 영락제)가 '정난(靖難)의 변'을 일으켜 조카의 권좌를 찬탈하는 골육상잔의 비극이 연출되고 만다.

결국 황제의 무소불위의 권력은 늘 부메랑이 되어 황제에게 되돌아간다. 주원장은 자신이 평생 범한 과오 때문에 자신의 무덤이 파헤쳐질 것을 염려하여 철저한 보안 속에 자신의 묘를 만들도록 하였는데 지금도 주원장의 묘인 효릉(孝陵)의 묘도는 발굴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주원장에 대한 두 장의 초상화가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인자하고 덕 있어 보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야말로 추하고 못생긴 형상이다. 주원장에 대한 역사적 평가도 농민봉기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명왕조의 기반을 다졌다는 긍정적 평가와 극단적인 공포정치를 일삼는 정신분열증세의 폭군이라는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고 있다.


http://me2.do/G7vRVpDP



항상 나로 인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 좋은 글과 음악

2분56초...

http://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lqa&logNo=20186700378&categoryNo=0&isFromSearchAddView=true&pushNavigation=false



2초간의 딜레마가 당신의 삶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

http://m.blog.naver.com/oji3638/60184510452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다.
건강에서도 마찬가지다.

몸무게와 허리둘레 사이즈 중
어디에 더 신경을 써야 할까.
사과와 오렌지 중 어느 것이 더 건강에 좋을까?
베이컨과 소시지 중 택일하라면
어느 쪽이 나을까?

2초간의 딜레마가 당신의 삶을 바꿔 놓을 수 있다고
영국 일간지 데일리 메일이 보도했다.

 

당신의 허리둘레는 신체용적지수보다
훨씬 더 나은 심장병 위험 예측변수다.
연구결과들에 따르면 심장과 동맥에 가장 많은

위험을 주는 것은 복부비만이다.
여성들의 경우
허리둘레 32인치 이상부터 건강 위험이
증가하기 시작하며
성들의 경우
35인치 이상이 되면 건강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

과거 40여 년의 연구 검토결과
전동칫솔이 플라크(치태)와
치은염(잇몸이 빨갛게 붓고 아픈 병)
줄이는데 일반칫솔보다
더 효과적인 것으로 조사됐다


진짜 본래의 것을 섭취하는 것이 낫다.
과일주스는 당분이 첨가되는데다
섬유질이 없어지게 된다.


완전히 요리된 베이컨 한 조각은 소시지보다
칼로리 열량이 더 적다.
생 과일의 더 높은 수분함량은 적은 열량으로
더 많은 포만감과 만족감을 준다. 
 
그러나 편리성이나 유통기한면에서
말린 과일을 생과일 대용으로
사용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홍차나 녹차를 선택하라.
 
차는 심장에 좋은 노화방지물질이 풍부해서
건강한 동맥 유지에 효험이 있고
암예방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걷기를
비웃을 수도 있다.

걷기는 진정한 체중 감량으로 이어지는
충분한 열량 연소를 시켜주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러 관련 연구결과들에 따르면
정기적인 걷기 프로그램이
허리둘레를 줄이는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 입증됐다.



마사지의 요체는 피부를 자극하는 것이 아니다.
피부 밑 근육을 풀어주는 것이다.

고통스러울 정도까지 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근육을
충분히 풀어주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수영이 폐와 심장에
훌륭한 운동 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뼈에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물에는 저항력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고령자들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평상적인 운동 10주일은 약물치료보다
우울증세 감소에 있어
20퍼센트 더 효과적인것으로 조사됐다.
그러나 우울증은 운동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지 않기 때문에 의사들은
두 가지 치료법을 병행하라고
권고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혈압상 스트레스 호르몬의 부적정 효과를
줄이는 데 있어 친구관계가 대단히 중요하다.
책보다는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건강에 제대로 투자된 시간이다.


수동변속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에 대한 주된 논거는
칼로리는 연소시키면서 연료는 덜 쓰게 된다는 것이다.

건강에는
운전을 덜 피로하게 해주는
자동변속의 효과가 더 낫다.

 


옛말이 맞다.
노팅엄대학 연구팀 조사 결과,
 
일주일에 5개 이상의 사과를 먹으면
폐 기능을 향상시키고 숨 쉬기
곤란한 것과 천식 같은 증상이
줄어드는 것으로 확인됐다.


현금 vs. 신용카드

정답 = 현금


현금으로 지불하면
식료품 비용을 덜 쓰게 된다.
한 연구팀이 수백 가정을 대상으로 3개월 동안은
식료품 구입을
모두 현금으로만 하도록 하고



신용카드만을 사용하도록 했다.
그 결과 신용카드를 사용하는 경우 식료품 구입에 20~30퍼센트
더 많은 지출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性 스런 유머, 거시기 경매


부인이 남자 물건의 경매가 보통은 10달러,대물은 20달러라 말했다.

남편이 그럼 내 것은 얼마냐고 물으니 대답이 나왔다.

"버리고 간다."


남편이 역공을 한다.

여자 거시기가 경매에서
보통은 천달러,작고 타이트한 것은 2천 달러라 말했다.

부인이 그럼 내것은 얼마냐 물으니,

*

*

*

*

*

"경매가 중지 됐단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