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지주회사 씨티그룹의 탄생은 이 족쇄로부터의 해방을 뜻했다. 은행이 보험·증권업까지 겸하는 유럽의 ‘유니버설 뱅킹’에 맞선 고육책이었다. 씨티그룹 밑엔 씨티은행·트래블러스보험·살로먼스미스바니증권 등 계열사가 포진했다. 비록 법적으론 별개 회사였지만 내부적으론 한 회사처럼 운영됐다. 은행·보험·증권이란 업종 칸막이를 넘어 소매·도매·관리 부문으로 전 계열사를 해부해 볼 수 있는 통합 전산망이란 비밀병기 덕분이었다. 지주사 회장은 마치 총사령관처럼 계열사를 종으로는 물론 횡으로도 뜯어보며 인력과 실탄을 움직였다. 금융지주가 은행이란 알을 깨고 나와 공룡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덩치를 키운데다 업종 칸막이까지 뛰어넘자 미국 금융지주는 무소불위(無所不爲) 존재가 됐다. 외환위기로 쑥대밭이 된 아시아와 모라토리엄(채무 불이행)을 선언한 러시아는 월가 공룡들의 먹잇감이 됐다. 황금의 유혹에 전 세계 천재가 불나방처럼 월가로 몰렸다. 국내 금융가에 미국식 금융지주가 만병통치약으로 비친 건 당연했다. 2001년부터 국내에서도 미국식 금융지주 베끼기가 유행처럼 번졌다. 우리금융지주에 이어 신한·하나·국민·산업은행과 씨티·SC은행까지 죄다 금융지주로 탈바꿈했다. 한데 국내 금융지주는 겉모양만 흉내 냈을 뿐 속은 미국과 딴판이었다.
국내 금융지주 1호인 우리금융은 설립 취지부터가 달랐다. 한빛은행, 경남·광주은행, 평화은행과 5개 부실 종합금융사를 합친 하나로종금을 한데 모아놓은 부실처리 공장에 불과했다. 각 은행 노조도 통합에 격렬히 저항했다. 경남·광주은행이 최근까지도 우리금융지주 속 ‘섬’으로 고립돼 있다가 매각을 위해 분리됐을 정도였으니 오죽했으랴. 게다가 국내 금융지주는 영업기반의 80%를 은행에 의존하는 기형적 구조를 벗지 못했다. 외환위기를 겪으며 기업금융이나 투자은행 DNA는 잃어버리고 땅 짚고 헤엄치기식 주택담보대출에만 매달리는 초식 공룡으로 퇴화한 결과다. 겸업화를 통한 시너지는 언감생심이 됐다.
게다가 은행에 주인이 없다 보니 낙하산도 줄을 이었다. 가뜩이나 금융지주 회장의 역할이 애매한데 은행장까지 동아줄을 타고 내려오니 회장과 은행장 간에 볼썽사나운 집안싸움이 끊이질 않았다. 최근 전산시스템 교체를 둘러싼 KB금융지주의 내홍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금융지주의 생명력은 업종 칸막이를 뛰어넘는 시너지에서 나온다. 이걸 기대할 수 없다면 지주는 옥상옥(屋上屋)에 불과하다. 차라리 없는 게 낫다. 지금 우리나라에 과거 씨티그룹과 같은 시너지를 기대할 만한 금융지주가 몇이나 될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선뜻 떠오르질 않는다.
하기야 미국에서조차 금융지주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몰고 온 대마불사(大馬不死)의 주범으로 몰렸다. 파생상품 같은 위험한 곳에 투자 못 하게 ‘볼커 룰’이란 족쇄도 다시 채워졌다. 과거처럼 엄청난 덩치를 무기로 돈 놓고 돈 먹기 게임을 벌이던 시대는 끝났다. 한 방을 노리는 헤비급보다 고객의 가려운 곳을 재빨리 긁어줄 줄 아는 라이트급이 생존의 적자가 되는 세상이 왔다.
온라인 중앙일보 · 정경민 경제산업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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