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19일 목요일

측천무후는 중국 유일의 여황제

Entry Of The Gladiators - Julius Fucik

3분06초...

Julius Fucik(1872~1916)는 체코의 작곡가,군악대 지휘자,
이곡은 "검투사들의 입장"이라는 곡으로 1897년 작곡된 군대행진곡이다.

http://youtu.be/_B0CyOAO8y0



국악명상음악 락(樂)-나를 찾아가는 길

3분16초...

http://youtu.be/Sp4T-z1kCOU



측천무후는 중국 유일의 여황제

67세에 황제가 되어 15년간 통치했다.
그의 통치시기는 당 태종의 '정관의 치'에 버금가는
'무주의 치'로 높게 평가받는다.
한의 여태후,청의 서태후,은의 달기와 더불어 중국의 4대 악녀 중 한 명,
죽어서 대형 무자비(글자없는 비석)를 세웠다.

http://me2.do/58SWCcfJ

중국에서 여성으로 유일하게 황제가 되었던 인물로 당(唐) 고종(高宗)의 황후였지만 690년 국호를 주(周)로 고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15년 동안 중국을 통치하였다.
측천무후
출처 : doopedia.co.kr
출생-사망
624 ~ 705.12.16
국적/왕조
중국 당
재위기간
690년 ~ 705년
본명
무조(武曌)
별칭
무후, 무측천, 측천후, 시호(諡號) 측천순성황후(則天順聖皇后)
활동분야
정치
출생지
중국 산시성
성은 무(武), 이름[諱]은 조(曌), 시호(諡號)는 측천순성황후(則天順聖皇后)이다. 중국에서 여성으로 유일하게 황제(皇帝)가 되었던 인물로 무후(武后), 무측천(武則天), 측천후(則天后), 측천제(則天帝), 측천여제(則天女帝), 측천여황(則天女皇) 등으로도 불린다. 측천무후라는 호칭은 당(唐) 고종(高宗)의 황후(皇后)로서의 지위를 나타내지만, 690년 당(唐)의 국호를 주(周)로 고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15년 동안 중국을 통치하였던 사실에 비추어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때문에 중국에서는 ‘무측천(武則天)’이라는 호칭이 더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이름인 ‘조(曌)’는 ‘비출 조(照)’의 뜻을 나타내는 측천문자(則天文字)로서 해(日)와 달(月)이 하늘(空)에 떠있는 모양처럼 세상을 비춘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측천무후는 624년 2월 17일(武德 7년 1월 23일) 당(唐)의 수도인 장안(長安, 지금의 陕西省 西安)에서 당의 건국 공신(功臣)인 무사확(武士彠)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무사확은 병주(幷州) 문수현(文水縣, 지금의 山西省 文水) 출신으로 목재상으로 큰 부자가 된 인물이다. 그는 당 고조(高祖, 재위 618~626) 이연(李淵)이 수(隋) 양제(煬帝, 재위 604∼618)에 맞서 타이위안[太原]에서 반란을 일으킬 때부터 그를 지원하여 당 건국에 큰 공을 세웠고, 당이 건국된 뒤에 원종공신(元從功臣)으로 대우를 받으며 공부상서(工部尙書), 이주(利州, 지금의 四川 廣元)와 형주(荊州, 지금의 湖北 江陵) 도독(都督) 등을 지냈다. 그는 620년에 본처를 잃고 양(楊)씨를 새로 처로 맞이해 세 딸을 낳았는데, 그 가운데 둘째가 무후이다.
무후는 637년(貞觀 11년) 당 태종(太宗, 재위 626∼649)의 후궁으로 입궁하였으며, 4품(四品) 재인(才人)으로서 태종에게 ‘미(媚)’라는 이름을 받아 ‘무미랑(武媚娘)’이라고 불렸다. 649년에 태종이 죽자 무후는 황실의 관습에 따라 감업사(感業寺)로 출가하였다. 그러다 651년 고종(高宗, 재위 649~683)의 후궁으로 다시 입궁하였고, 이듬해에 2품 소의(昭儀)가 되었다. 무후는 고종과의 사이에서 4남 2녀를 낳았으며, 655년 왕황후와 소숙비(蕭淑妃) 등을 내쫓고 황후가 되었다.
황후가 된 무후는 고종을 대신해서 정무(政務)를 맡아보며 태종 때부터 봉직해온 장손무기(長孫無忌, ?~659), 저수량(褚遂良, 596~658), 우지녕(于志寧) 등의 대신들을 몰아내고 신진 세력을 등용해 권력을 장악하였다. 656년 황태자(皇太子)였던 이충(李忠, 643~664)을 폐위시키고 자신의 장남인 이홍(李弘, 652~675)을 황태자로 앉혔고, 664년부터는 수렴청정을 통해 실질적으로 중국을 통치하였다. 675년 고종의 병세가 악화하자 무후는 섭정이 되어 전권을 행사했으며, 그 해 이홍이 죽자 둘째 아들인 이현(李賢)을 황태자로 세웠다. 그러다 680년에는 이현(李賢)을 폐위시키고 셋째 아들인 이현(李顯, 656~710)을 황태자로 세웠다. 683년 고종이 죽자 이현(李顯)이 황제가 되었는데, 당의 4대 황제인 중종(中宗, 재위 683~684, 705~710)이다. 하지만 중종의 황후인 위후(韋后)가 아버지 위현정(韋玄貞)과 함께 정권을 장악하려 하자 684년 중종을 폐위시키고 넷째 아들인 이단(李旦, 662~716)을 황제로 세웠다. 그가 당의 5대 황제인 예종(睿宗, 재위 684~690, 710~712)이다. 그 해 서경업(徐敬業), 서경유(徐敬猷) 형제가 일부 황족들과 연합하여 양주(揚州)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무후는 40일만에 이를 진압하였다. 688년에도 태종의 아들인 월왕(越王) 이정(李貞)이 아들인 이충(李沖)과 함께 박주(博州, 지금의  山東省 濟寧)와 예주(豫州, 지금의 河南省 汝南)에서 무후에 반대해 군사를 일으켰지만 곧바로 진압되었다. 무후는 내준신(来俊臣), 색원례(索元禮), 주흥(周興) 등을 등용해 반대파에 대한 밀고와 감시에 기초한 공포정치를 펼치며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였다.
이처럼 황실 안팎의 반대파를 제거한 무후는 690년 예종을 폐위시키고 자신이 직접 황제가 되어 나라 이름을 ‘대주(大周)’라 하고 수도를 장안에서 신도(神都)라 이름을 바꾼 뤄양[洛陽]으로 옮겼다. 역사가들은 이를 고대의 주(周, BC 1046∼BC 771)와 구분하여 ‘무주(武周)’라고 부른다. 무후는 과거제도를 정비해 적인걸(狄仁傑), 요숭(姚崇), 송경(宋璟) 등의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행정 체계를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다. 무후는 반대파를 매우 엄격히 감시하고 통제하는 공포정치를 실시했지만, 상대적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안정되었다. 그녀의 통치기는 태종이 통치하던 ‘정관의 치’에 버금간다는 평가를 받아 ‘무주의 치'라고 불리며, 이후 당의 전성기인 현종(玄宗, 재위 712∼756) 때의 ‘개원의 치’의 기초를 마련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699년 이후에는 장역지(張易之), 장창종(張昌宗) 형제와 환관(宦官) 설회의(薛懐義) 등의 총신(寵臣)들이 횡포를 부리는 등의 폐단이 발생했다. 결국 705년 무후가 병을 앓아눕자 재상(宰相) 장간지(張柬之, 625~706) 등이 그녀에게 양위를 압박하였고, 무후는 태상황(太上皇)으로 물러나고 698년에 다시 황태자가 되었던 중종(中宗)이 복위되어 당 왕조가 부활하였다. 그리고 무후는 그 해 12월 16일(長安 5년 11월 2일) 황제가 아니라 황후로서 장례를 치르고, 묘비에 한 글자도 새기지 말라는 등의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무후주(武后酒) 소개

무측천이 남성편력과 건강을 위해 먹었다는 술이다.

http://me2.do/FKrX2Nuo

메추리 고기와 하수오, 녹용, 고려인삼으로 담근 약용주.
외래주로 '메추리술'이라고도 한다. 중국 당나라 3대 고종의 황후였던 측천무후(測天武后)는 70세가 넘도록 사랑하는 신하를 곁에 두고 즐겼던 정력이 좋은 여성이었다. 측천무후는 병약한 왕이 죽자 스스로 왕위에 올라 성신(聖神) 황제라 칭하고 나라 이름을 주(周)로 바꿨으며 신하와 미소년은 물론 길거리의 고약장수까지도 침실로 불러들여 여든 살이 넘어서까지 왕성한 정력으로 쾌락에 빠져 지냈다고 한다. 측천무후는 정력보강과 미용을 위해 메추리를 약한 불로 오래 삶은 국을 즐겼다고 하며, 메추리와 하수오(何首烏: 새박덩굴의 뿌리를 말린 것)에 인삼, 녹용, 벌꿀을 넣어 빚은 '암순주'라는 술을 즐겼다고 한다. 메추리로 빚은 술이 정력에 좋다고 하자 당나라 전역에서 메추리 사냥이 성행했고 그 후부터 측천무후의 이름을 따서 '무후주(武后酒)라고 하였다고 한다.
무후주의 재료는 메추리 1마리, 하수오 500g, 녹용 10g, 고려인삼 100g, 소주 1,800mL 이다. 먼저 메추리는 머리, 깃털, 창자를 제거하고 깨끗이 씻고 메추리 고기, 하수오, 녹용, 고려인삼 등의 재료를 그릇에 담고 소주를 재료가 잠길 만큼 붓는다. 약한 불에서 50분 정도 끓였다가 잘 식힌 후 햇빛이 잘 드는 곳에 30분 동안 공기를 쏘였다가 다시 소주를 붓고 30분 동안 달여서 완전히 식힌 후 이것을 단지에 담고 벌꿀을 넣는다. 이것을 밀봉하여 냉암소에서 3개월 동안 두면 숙성된다.
무후주를 하루 3회 소주잔으로 1잔씩 마시면 눈의 피로, 정력감퇴·성기부진을 회복하는데 좋으며, 후두부의 근육 뭉침, 어깨결림에도 좋다.



칭찬은 사람을 다시 만드는 요술이 있다
/ 좋은 글과 음악

4분13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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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으로의 초대!!!

2분38초...

http://m.cafe.daum.net/koreanaairtravelinc/Im8P/25?



유머,못난 아버지를 둔 딸에게 정말 미안하다 합성

34초...

http://me2.do/xeilVMJ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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