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증거조작 의혹을 수사해온 검찰은 어제 국가정보원 이모 대공수사처장과 이인철 주선양 총영사관 영사를 추가로 불구속 기소하고 권모 과장을 기소중지하는 것으로 수사를 마무리했다. 남재준 원장을 비롯한 국정원 수뇌부와 공판에 관여한 검사들에게는 모두 면죄부를 줬다. 부실수사라는 말로도 부족할 ‘꼬리 자르기’요, ‘제 식구 감싸기’다.
검찰에 따르면 이번 증거조작은 이 처장(3급)의 지시 또는 묵인 아래 권 과장(4급)과 김모 과장(4급·구속기소)이 실무를 주도하고 이 영사(4급)가 가담하는 방식으로 이뤄진 게 된다. 이 처장의 윗선인 대공수사국장과 2차장, 남 원장은 개입하지 않았다는 게 검찰의 결론이다. 사법질서를 뒤흔든 초유의 증거위조 사건을 총지휘한 이가 국정원 3급 직원이라니 지나가는 소도 웃을 일 아닌가. 간첩사건 피고인 유우성씨 재판은 초기부터 여동생에 대한 진술강요 논란으로 주목을 받았다. 이 때문에 국정원은 내부 기획회의까지 하며 증거조작을 시도했고, 증거 확보를 위해 거액의 자금을 집행했다. 상명하복을 생명으로 하는 국정원의 특성상 수뇌부가 이러한 과정을 몰랐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다. 검찰은 지난해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때는 “상명하복 관계의 조직 특성을 감안해” 국정원 직원들을 불기소한 바 있다. 수사대상이 똑같은 국정원인데 검찰의 잣대가 달라진 이유는 뭔가.
유씨 재판에 관여한 검사들에 대한 불기소 처분도 이해하기 어렵다. 검사들이 증거위조를 의심할 만한 정황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국정원이 위조문서에 발신번호가 잘못 찍혔다는 이유로 20분 만에 다시 문서를 보냈는데도 이를 문제 삼지 않고 두 가지 문서를 잇따라 증거로 제출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검사들이 증거조작에 공모하지는 않았다 해도 조작 사실을 인지했을 가능성은 농후하다. 검찰은 그럼에도 당사자들의 진술만 믿고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우리는 간첩 증거조작 사건과 관련해 남재준 국정원장의 사퇴를 거듭 촉구한 바 있다. 동시에 기소와 공소유지의 법적 주체가 검찰임에 비춰볼 때 김진태 검찰총장의 책임도 가볍지 않다고 본다. 유씨 재판 담당 검사가 위조된 ‘허룽시 공안국의 발급사실확인서’를 법원에 낸 것은 지난해 12월5일과 13일이다. 김 총장이 취임한 것은 그 이전인 12월2일이다. 그럼에도 김 총장은 대변인을 통해 “사법절차에 혼선을 초래하고 국민께 심려를 초래한 점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히는 선에서 그쳤다. 직접 대국민 사과를 해도 모자랄 판에 제3자를 통해 “유감”이라니 가당치도 않다. 애당초 수사받아야 할 피의자에 수사를 맡긴 게 잘못이었다. 이제 특별검사를 통한 전면 재수사가 불가피하다. 국회는 즉시 논의에 착수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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