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거조작 사건을 수사해온 검찰 증거조작 수사팀은 어제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검찰은 앞서 구속 기소했던 국정원 김모 과장과 협조자 김모씨에 이어 이날 이모 대공수사국 처장과 이모 중국 선양총영사관 영사를 모해증거위조 등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자살 기도 후 병원 치료 중인 권모 선양총영사관 부총영사는 시한부 기소중지를 결정했다. 검찰에 따르면 이 처장 등은 간첩사건 피고인인 화교 유우성씨가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뒤 항소심에서 유죄를 입증하기 위해 유씨가 중국과 북한을 오간 출입경 기록 등 증거서류 3건을 위조하는 데 관여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남재준 국정원장과 수사 및 공소유지를 담당한 검사 2명에 대해선 “혐의를 입증할 증거를 찾지 못했다”며 불기소 처분을 했다. 다시 말해 국정원 윗선이나 검찰의 개입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직의 규율이 센 국정원의 특성상 윗선 지시 없이 실무자들끼리 증거를 조작했다는 건 선뜻 믿기지 않는다. 검찰 발표가 사실이라면 국정원 조직의 내부 통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검사들 역시 증거조작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그동안 국정원 수사팀에 휘둘려온 셈이 된다.
더 큰 문제는 이번 증거조작으로 인해 중국에서 비밀리에 활동해온 요원들과 협조자들의 신원이 노출됐다는 데 있다. 27년 경력의 베테랑 수사관이었던 권 부총영사 등의 요원 생명은 이미 끝난 상태다. 서류 위조에 동원됐던 중국 협조자들도 검찰에 구속되거나 중국 현지에서 잠적했다. 이 와중에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출신 탈북자가 유씨 재판에서 비공개 증언을 한 사실과 법원에 보낸 탄원서 내용이 유출되기도 했다. 국정원 요원의 실명과 활동 내용을 함부로 언급한 일부 국회의원의 책임도 작지 않지만 국정원 수사팀이 증거조작에 손을 댄 것에서 비롯된 일들이다.
2003년 미국에서는 중앙정보국(CIA) 비밀요원의 신원이 유출된 사건이 있었다. 이른바 ‘리크 게이트(leak gate)’였다. 특검 수사 끝에 루이스 리비 당시 부통령 비서실장이 위증 등 혐의로 기소돼 징역 2년6월과 함께 벌금 25만 달러, 보호관찰 2년을 선고받았다. 연방법원의 중형 선고엔 정보기관 요원의 신원 노출이 당사자 안전은 물론이고 국가 정보망에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는 판단이 담겨 있었다. 이번 증거조작과 요원·협조자 신원 유출은 대북(對北) 정보망에 심각한 타격을 줄 가능성이 크다. 이제 누가 사지(死地)에서 목숨을 걸고 나라의 이익을 지킬 것인가.
이번 사건은 국정원 개혁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달 10일 검찰에 철저한 수사를 지시하면서 “수사 결과 문제가 드러나면 반드시 바로잡을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남재준 원장은 국정원의 총체적 문제에 책임을 지는 자세로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할 것이다. 서천호 2차장이 지휘책임을 지고 물러났지만 그의 사퇴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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