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키 아키타카(齊木昭隆)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이 엊그제 서울을 찾아 조태용 외교부 제1차관을 만났다. 양국이 외교 차관급 대화를 가진 것은 작년 7월 이후 8개월 만이다. 사이키 차관은 이날 만찬을 함께 하고 서울에서 1박(泊)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일정을 바꿔 고위급 대화가 끝나자마자 돌아갔다.
사이키 차관은 아베 내각의 진심이 담긴 어떤 메시지도 가져오지 않았다. 이번에도 '조건 없는 한·일 정상회담의 필요성'을 강조했다고 한다. 일본 언론은 사이키 차관 방한 날 아침 일본 정부가 오는 24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핵안보정상회의에서 한·미·일 3국 정상회담을 추진 중이라고 보도했다. 우리 정부는 이를 즉각 부인하면서 일본 측이 한·미·일 3국 정상회담을 기정사실화하듯 '언론 플레이'를 했다고 불쾌해했다.
사이키 차관은 일본군위안부 강제 동원을 인정한 고노담화를 계승하는 문제에 대해 "아베 내각은 역대 내각의 역사 인식을 계승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아베의 최측근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은 이날도 "(위안부) 강제 연행은 없었다"고 했다.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부인하는 것은 고노담화를 뒤집겠다는 뜻이다. 어렵게 재개된 한·일 고위급 대화가 진행되는 와중에 나온 일본 관방장관의 발언은 결국 일본이 한·일 대화에 아무 관심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아베 내각은 '고노담화를 재검증하겠다'면서도 '담화를 수정(修正)하겠다는 것은 아니다'는 식의 말장난부터 그만둬야 한다.
이번 한·일 고위급 대화는 일본 측의 요청으로 이뤄졌다. 일본은 오는 4월로 예정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한국·일본 순방을 앞두고 한국과 대화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한·일 고위급 대화를 제의했을 것이다. 일본이 입만 열면 주장하는 '조건 없는 정상회담' 역시 회담 성사 자체에 목적이 있다기보다는 미국을 향한 제스처에 가깝다. 일본은 지난해 12월 아베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이후 미국 조야(朝野)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아왔다. 미국은 한·일 양국이 관계 개선에 나설 것을 거듭 주문하고 있다. 그러자 일본이 미국을 쳐다보면서 한국과는 대화·협상하는 시늉을 하는 외교적 촌극(寸劇)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고노담화 계승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에 참여한 일본 학자가 1300명을 넘었다. 아베 내각은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말장난이나 다름없는 자신들의 주장과 일본 내 양심의 목소리 중 어느 쪽에 더 귀 기울일 것인지 깊이 고민해야 한다. 아베 내각의 근본적 변화 없이는 한·일 관계 정상화는 불가능하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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