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 대공수사팀 직원들이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씨 간첩 사건 증거 조작 의혹과 관련해 출국 금지를 당하고 검찰 조사도 받게 됐다. 국가 최고 정보기관이 가짜 증거로 사법부를 속이려 한 혐의로 수사 대상이 된 것이다.
이제 남은 문제는 국정원이 협력자 김모씨가 증거 문건을 위조한 사실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알았다면 위조 지시까지 했는지 여부다. 국정원은 시종일관 "몰랐다"고 한다. 그러나 김씨는 검찰 수사에서 "국정원도 위조 사실을 알았을 것"이라고 진술했다. 그는 자살을 기도하면서 쓴 유서에 "지금의 국정원은 국조원"이라고 적기도 했다. '국조원'이란 '국가조작원'의 줄인 말로 보인다. 국정원이 증거 위조를 지시했다면 30~40년 전에나 있을 법한 일로 조직의 존재 이유까지 의심받을 사건이다.
아직은 국정원이 위조를 지시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김씨가 가져온 다른 문건 중에 가짜로 드러난 것에 대해선 국정원이 대가 지불을 거절했다는 얘기도 있다. 재판에서 모두 공개되고 상대방에 의해 검증될 수밖에 없는 문서를 위조하라고 지시한다는 것이 상식에 맞지 않기도 하다. 국정원이 실제 위조를 지시했다면 김씨를 검찰에 출두시키는 모험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란 관측도 있다. 철저한 수사로 진실을 가려야 한다.
그러나 설사 국정원이 위조를 지시하지 않았다고 해도 책임은 결코 가벼워지지 않는다. 국정원은 지난달 14일 중국 정부가 "(국정원 제출) 문건은 위조"라고 발표했는데도 자체 확인 없이 위조 문건을 가져온 김씨에게 위조 여부를 물었다. 도둑에게 '도둑질했느냐'고 물었더니 '아니다'고 해서 그냥 믿었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거짓말이거나 무능이다. 국정원이 그동안 내세워 온 '50년 대공(對共) 수사 노하우'의 실상이 이것이라니 정말 충격적이다.
국정원이 정상적 조직이라면 국정원 문서가 '위조'라는 중국 측 발표에 발칵 뒤집혀 스스로 진상을 조사했어야 한다. 그랬다면 위조 사실을 밝혀내는 데는 며칠도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국정원의 누구도 검증하자는 건의를 하지 못했다면 이 조직은 무능한 차원을 넘어서 위험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국정원이 왜 이렇게 됐느냐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가장 궁금한 것은 남재준 국정원장이다. 남 원장이 문서 위조를 몰랐다면 다른 누구보다 앞서서 문서 검증을 지시했어야 한다. 지금까지 국정원의 태도를 보면 그런 사실이 없는 것 같다. 오히려 '국정원 고위층이 대공(對共) 수사권을 지키기 위해 유씨 사건에 대한 새 증거를 확보하라고 부하들을 심하게 압박했을 것'이란 관측이 적지 않다.
남 국정원장은 지난 1년 동안 정치권의 국정원 개혁 요구에 맞서 '자체 개혁'을 강조해왔고 성과도 있다고 해 왔다. 실제 '남재준 국정원'은 북한 장성택 숙청 사실을 포착하고, 통진당 이석기 의원의 내란 음모 사실을 적발해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아냈다. 지금 남 원장의 국가 안보에 대한 신념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신념'이란 합리적 판단과 엄격한 자기 통제라는 다른 수레바퀴와 함께 굴러가야만 한다. 그렇지 않은 과잉 신념은 반드시 큰 화(禍)를 부르게 돼 있다. 국정원장의 과잉 신념은 국가의 위기까지 부를 수 있다. 남 국정원장은 작년 7월 여야의 NLL 공방 와중에 야당을 비난하는 국정원 성명을 발표하게 해 정쟁(政爭)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앞뒤 가리지 않고 자기 신념만 내세운 전형적인 사례다. 당연히 역효과만 불렀다. 지금 국정원 관련 모든 문제의 바탕엔 무절제한 신념이 어른거리고 있다.
이번 증거 위조 파문도 국정원 지휘부의 간첩 색출 신념에 자극받은 수사팀이 적법(適法) 절차의 철칙을 간과한 데서 비롯된 사고일 가능성이 있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유씨가 실제 간첩이라면 남 국정원장과 국정원이 놓아준 것이나 마찬가지가 됐다. 간첩이 아니라면 무고한 사람에게 엄청난 누명을 씌운 것이다. 검찰 수사 결과와 관계없이 남 국정원장이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이 순리(順理)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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