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했지만 의혹은 사실이었다. 허위 자백을 강요한 것도 모자라 조작된 서류로 한 개인을 간첩으로 내몰려 한 공안당국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검찰과 국가정보원이 이른바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공판 과정에 피고인 유우성씨에게 간첩 혐의를 씌우기 위해 조작된 증거자료를 제출한 것으로 밝혀졌다. 군사정부 시절 용공조작의 망령을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다. 자유 민주주의와 법치를 표방한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간첩 조작사건이라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다.
공문서 위조 파문의 핵심은 유씨의 북한 출입경기록이다. 국정원이 유씨의 1심 무죄 판결을 뒤집기 위해 중국 허룽시 공안국을 통해 받은 자료다. 여기에는 유씨가 2006년 5~6월 사이 중국을 통해 두차례에 걸쳐 북한을 드나든 것으로 돼 있다. 유씨가 북한 국가안전보위부에 포섭돼 자신이 관리해온 탈북자 명단을 건넸다는 혐의를 입증할 중요 문건이다. 하지만 국정원·검찰의 증거자료는 모두 조작된 것으로 확인됐다. 중국 정부가 “허룽시 공안국은 문서 발급자격이 없는 데다 공문서 형식이나 도장도 위조됐다”고 한국 법원에 정식 통보했기 때문이다.
검찰이 위조된 공소 서류를 제출한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공신력을 먹고 사는 정부가 증거자료 조작이라니 믿기지가 않는다. 이는 특정 개인의 범죄 혐의 입증을 떠나 공권력의 신뢰와 직결된 중차대한 문제다. 과거 일본 검찰도 이와 유사한 사건 때문에 검찰 총수가 옷을 벗고 검찰 간부들이 줄줄이 구속된 전례가 있다. 공소 유지를 맡은 검찰이 1차 책임을 져야 한다. 국정원이 제출한 문서를 제대로 된 확인절차도 없이 법정에 낸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한 개인의 운명이 걸린 문제를 이토록 허술하게 처리했다는 게 말이 되는가.
누가 보더라도 총체적인 책임은 국정원이다. 수사 부터 혐의 입증까지 모두 국정원이 관여한 사건이다. 1심 재판 때도 증인을 상대로 한 무리한 자백 강요와 허위 자료 제출이 일찌감치 논란이 됐다. 문제가 된 허룽시 공안국의 출입경기록도 국정원이 현지 영사관을 통해 입수한 자료다. 국정원은 “정상적인 경로를 거쳐 확보한 자료”라고 하지만 중국 정부가 “조작된 자료”라고 밝힌 이상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게 됐다. 혹 유씨의 유죄 입증을 위해 무리하게 서류 조작에 관여했다면 국정원의 존립 근거를 뒤흔들 수 있는 문제다.
무엇보다 철저한 진상규명이 우선이다. 사건에 연루된 검찰과 국정원-외교부가 폭탄 돌리기 식으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낯 부끄러운 일이다. 누가 무슨 목적으로 서류 조작에 관여했는지를 밝히는 게 핵심이다. 이에 따라 국정원장과 외교·법무 장관에게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진상조사를 위한 검찰총장 직속의 특임검사나 특별조사본부 설치도 검토해볼 수 있다. 하지만 사건 당사자가 진상규명 대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검찰 자체 조사로는 한계가 있다. 결국 특별검사 임명을 통해 신속하게 이 문제를 매듭짓는 게 최선이라고 본다. 정부 여당도 특검에 반대하거나 망설일 이유가 없다. 불의한 공권력을 방치하는 것은 박근혜 정부의 위기를 자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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