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물질로 인한 사고는 예고 없이 불쑥 찾아온다. 그런데 일단 발생했다 하면 확산 속도가 빠르고 치명적이라는 특성이 있다. 얼마 전 있었던 구미의 불산 누출사고가 그렇고 가습기 살균제 피해사건이 그렇다. 화학물질의 유출을 미연에 막아 사고를 예방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이들 사건은 일깨워준다.
정부가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과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이란 이름의 법률을 만든 이유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런 환경유해물질로부터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화학물질에 대한 촘촘한 관리시스템의 필요성은 지난해 5월 이 법안이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통과될 때만 해도 이의가 없었다. 그런데 엊그제 환경부가 입법예고한 화평법과 화관법의 하위법령안을 보면 갑자기 그런 공감대가 어디로 사라졌나 하는 의문이 든다. 하위법령의 조항들이 곳곳에서 모법의 취지를 무력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격이다.
화학물질을 관리하려면 그 물질의 성질을 파악하고 있어야 할 터이다. 그런데 문제의 하위법령안은 화학물질의 성분이나 함량에 대한 정보는 물론 유통 과정에 대한 정보까지 영업 비밀로 간주하고 있다. 취급하는 업체에서 당국에 정보 제공을 하지 않아도 그만인 것이다. 화학물질의 사용·판매·제조·수입량에 관한 정보도 업체 판단에 따라 생략할 수 있다고 한다. 화학물질은 매일같이 새로운 게 만들어지고 유통되는데 그에 대한 정보가 깜깜한 상태에서 눈감고 관리하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사고를 내거나 법을 어긴 업체에 최대한 관용을 베푸는 것도 문제다. 정부의 예고안은 위법이 적발된 업체에 먼저 계도를 하고, 이어 경고 및 개선명령을 한 다음 그래도 안될 때 영업정지를 내리지만 이 또한 약간의 과징금으로 갈음할 수 있도록 돼 있다. 과징금을 매길 때도 전체 매출액이 아니라 사고가 난 사업장 혹은 그 공정의 매출액을 기준으로 한다. 예를 들어 연 매출 10억원인 사업장에서 아무리 중대한 사고가 나더라도 최대 5000만원의 과징금만 내면 공장을 계속 돌릴 수 있다는 뜻이다. 징벌적 배상은커녕 처벌이라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의 솜방망이 제재다. 이런 법령으로 준법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정부가 예고한 하위법령안은 결국 사고를 예방하는 제도적 장치가 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환경부는 당초의 입법 취지를 살려 법령을 새로 만들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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