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어제로 22일이 지났다. 이제는 이런 사고가 또다시 벌어지지 않도록 근원적 대책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할 때다. 이 나라가 중진국 문턱을 넘어선 1990년대 이후에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인재(人災)에 가까운 대형 사고가 발생했다. 1993년 서해훼리호 침몰, 1994년 성수대교 붕괴,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가 이어졌고 올해 초에도 경주 마우나오션리조트 체육관이 무너져 대학에 갓 입학한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유엔이 전쟁이나 분쟁 등 물리적 폭력뿐만 아니라 기아, 빈곤, 환경 파괴, 재난 등으로부터 개개인의 안전을 지키는 문제도 중요하다며 '인간 안보(human security)'를 내건 게 1994년이다. 선진 각국은 이때부터 국민의 안전 문제를 인간 안보 차원에서 다뤄왔지만 대한민국은 거꾸로 달려왔다. 이번 세월호 참사는 이런 한국 사회를 향해 지금껏 걸어왔던 그 길을 앞으로도 계속 갈 것인지를 묻고 있다.
국가의 틀은 물론이고 국민 의식까지 모두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가 개조(改造)'까지 외치고 있다. 그러나 정작 누가 이 막중한 일을 해야 하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선 아무도 뚜렷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 일은 국회밖에 할 곳이 없다. 이 조사는 세월호 침몰부터 초기 대응, 부처 간 혼선과 갈등, 세월호의 편법과 위법을 묵인해 온 업계와 감독 기관의 유착 문제 등을 조사해야 한다. 그 조사는 비단 해운(海運) 분야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도사린 위험 요소를 다 짚는 것으로 이어져야 한다. 최종적으론 국가 개조와 국민 의식 변화까지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한다.
국가 개조와 국민 의식 변화는 모든 사람이 수긍하고 자발적으로 참여할 때만 이뤄질 수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정치적으로 극심하게 갈라져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만약 어느 한쪽에 의한 조사라면 다른 한쪽의 거부를 부를 수밖에 없는 구조다. 결국 정파(政派)를 뛰어넘은 초당적 접근이 필수적이다. 국회가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다. 국회가 아니면 이 일은 참사를 부른 당사자 중 하나로 지목되는 관료 집단 손에 넘어갈 수밖에 없다. 문제를 일으킨 사람에게 해법까지 내놓으라고 주문하는 것이 된다. 선진 각국이 의회 주도로 주요 사건 조사위원회를 꾸리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러나 많은 국민은 국회의 세월호 국정조사에 선뜻 동의하지 않는 게 현실이다. 국회가 그간 해왔던 수많은 국정조사가 그런 불신(不信)을 쌓았다. 우리 국회의 국정조사는 진상 규명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TV 카메라 앞에서 증인들에게 호통을 치고 상대를 망신주기 위한 정치 쇼에 불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국회가 이번에도 그런 조사를 할 요량이라면 지금 국정조사 생각을 접는 것이 옳다. 그것은 억울하게 숨진 희생자들과 유가족, 가슴을 졸이고 기적을 기원해 온 국민에 대한 더할 수 없는 배신(背信)이다.
미국은 2001년 9·11 테러를 비롯해 각종 재난과 사건·사고에 대한 의회(議會)의 사후 정밀 조사가 확고한 문화로 정착된 나라다. 미국은 1년여 협의를 거쳐 9·11 테러 진상조사위원회를 여야 동수(同數)로 구성했다. 이 위원회는 20개월에 걸쳐 10개국에서 1200명을 직접 인터뷰하거나 조사했고, 250만쪽에 달하는 정부 문서를 검토했다. 위원회가 조사한 사람은 사고 현장 건물 관리인부터 전·현직 미국 대통령·부통령이 모두 포함됐다. 미국 의회는 19일에 걸쳐 청문회를 열었고 증인 160여명이 출석했다. 이 과정을 거쳐 41개 항목의 건의 사항이 담긴 600쪽에 이르는 보고서가 나왔다. 미국 정부가 국토안보부를 새로 만드는 대대적 정부 개편 작업에 나선 것도 바로 이 위원회의 조사 활동을 통해 무엇이 문제였고, 어느 부분을 바로잡아야 하는가에 관한 윤곽이 잡힌 뒤였다.
지금 정부의 신뢰는 땅에 떨어져 있다. 그러나 국회에 대한 신뢰는 그보다 더 낮다. 국회가 정부를 대신해 이 중대한 과업을 맡게 된다면 그 이유는 국회가 미더워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여야가 더 잘 알 것이다. 한 달도 남지 않은 6월 지방선거와 7월 국회의원 재·보선 등 선거판에 이 문제를 악용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그러나 만약 이번마저 국회가 국민의 기대를 저버린다면 존재 이유를 추궁당하는 상황까지 맞을 것이다.
8일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은 앞으로 1년간 국회 사령탑을 맡을 새 원내대표를 뽑았다. 새누리당 이완구, 새정치연합 박영선 신임 원내대표가 당적(黨籍)을 잊고 나라의 틀을 바꾸겠다는 결의 속에 머리를 맞댈 수 있을까. 회의적인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이번만큼은 국회와 여야가 나라의 명예를 걸고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대한민국 안전 보고서를 써주기 바란다. 이것이 기적을 바라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기적이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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