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상을 지키는 남자>
두 겹 비닐이 부딪히는 소리가 우악스럽다. 남자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샛바람도 이보다 강하진 않았다. 강남 한복판 빌딩 계곡 사이를 타고 부는 돌풍이 속초 바닷바람보다 더 거셌다. 머리가 하얗게 샌 남자가 신을 구겨 신고 밖엘 나겠다. 옛 기억을 되짚으며 아버지가 가르쳐주신 방법으로 비닐 천막 위에 노끈을 얼기설기 엮었다. 비닐 부딪히는 소리는 잦아들었지만, 살을 에는 추위는 여전하다. 속눈썹엔 이슬방울이 내려앉았고, 코털마저 차가운 들숨날숨에 얼었다. 그러나 남자는 춥지 않다. 천막 끝에 아기 고드름이 얼어붙어도 남자는 춥지 않다.
살을 에는 한파가 일주일째 계속됐다. 남자의 딸을 형상화한 반도체 소녀상이 비닐 천막 밖을 안 나온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소녀는 세계 일류를 지향하는 재벌기업에서 일했다. 이 기업 총수는 ‘마누라 빼고 모든 것을 바꾸라’는 경영지침으로 유명한 그이다. 소녀가 일한 공장에선 사람냄새가 나지 않는다. 소녀는 생산라인에 들어가기 전, 눈코입만 밖으로 드러나는 방진복을 입어야 했다. 이 공정에서 저 공정으로 옮겨가기 위해선 클린룸이라 불리는 곳에 들어가 온몸으로 바람을 맞아야 했다. 그 곳에서 그녀는 철저히 깨끗해야 했다.
그녀의 몸에선 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공장에서는 온몸의 털을 곤두서게 하는 암모니아 냄새가 났다. 소녀는 정든 회사를 떠나야만 했다. 몸이 아팠다. 한여름에도 으슬으슬 추웠다. 함께 일한 언니도 같은 병으로 회사를 떠났다. 소녀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 같이 일한 언니도 역시 세상에 없다. 소녀를 형상화한 소녀상만이 사람냄새를 없앤 그 기업 본사 앞에 앉아있다. 소녀는 이제 수온주가 깨지는 한파가 와도 춥지 않다. 그녀의 아버지도 춥지 않다. 손바닥만 한 핫팩과 소녀상 곁을 함께 지켜주는 사람들 덕분에 외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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