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14일 일요일

모든 비판은 자기 변화로만 가능하다

이제까지 철학자들은 다양하게 세계를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세계를 변화시키는 데 있다

<포이에르바하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프리드리히 엥겔스

내 기억이 거짓은 아니지만 경험은 과거에 대한 선택적 해석이다. 맥락이 의미를 규정한다. 
고전은 무식의 면죄부다. 아무 때나 인용하고 표기 그대로 오해해도 된다는 허가증이므로 고전으로 간주되는 책들은 태생부터 반동적이며 동시에 해방구다.

비판이란 무엇인가. 해석은 곧 변혁이므로 나만의 언어를 갖는 것에 몰두했다. "서구 철학은 플라톤의 주석"이라는 표현을 조롱했지만, 근대 이후 서구 철학이 맑스의 주석임을 부정하기 힘들다. 현실과 현실의 재현과의 관계, 즉 사회 변화에서 언어의 역할은 영원한 논쟁거리다. 이 격렬한 구절은 숭배받았고 또 그만큼 비판에 시달렸다.

"이제까지의 모든 철학은 ~ ". 과거와 완전한 단절을 선언하는 이 관용구의 운명은 자기 논리에 의해 자신도 부정된다. 파생된 것은 바다를 이루고 파도가 되어 기원을 삼켜버리기 마련이다.

해석과 변혁은 분리되지 않으며 다르게 해석하는 행위가 곧 변혁이다. 신앙을 포함 모든 철학은 변화를 위한 것이다. 해석이 곧 실천임은 당연한 이야기고 문제는 누구의 해석이냐, 그것을 누가 대표로 말할 수 있는가다. 

언어는 사용하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에 소통 과정에서 변형된다. 투명한 언어는 없다. 사실 인간은 언어로 말하지도 않는다. 소통에서 말이 차지하는 비율은 3~7%, 나머지는 몸이 말한다.

변화는 곧 비판이며 비판은 곧 저항이고 저항은 무조건 올바르다고 생각했다. 비판, 저항, 방어(자기 합리화)가 모두 같은 행위였으니 끔찍한 일이다. '변화시켜야 할 대상'은 마치 분노처럼, 타인을 향할 때 폭력이고 나를 향할 때 우울이다. 그래서 나는 젊은 날엔 폭력적이었고 지금은 우울한 것인가.

푸코는 '비판이란 무엇인가'에서 "비판은 자신이 명확히 알지도 못하고, 또 스스로 그렇게 되지도 못할 미래 혹은 진실을 위한 수단이자 방법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왜 존재 자체를 수용하지 못했을까. 그것은 동사인 것을. 움직이는 것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단 말인가.

비판이라는 실천은 푸코의 작두 위에서 춤추는 일이다. 다행인 것은 모든 비판은 자기 변화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나는 모든 비판자들을 존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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