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14일 일요일

강준만 인터뷰

강준만 인터뷰

독자는 책의 유저이고 책은 상품일 뿐이다. 
지식을 그렇게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다.
철저한 자기관리를 드러낼 수 있는 취미가 뭘까 고민한 결과가 턱걸이, 오래달리기
강준만은 고립과 중독이라고 말했다. 서울로 상징되는 중심으로부터의 고립과 읽고 쓰기 중독증

담론 공동체는 저절로 굴러가는 자율적인 자기 강화의 힘이 있다. 그거 굴러가게 해서 담론 헤게모니를 갖는데 바쁠 수밖에 없으니, 현실과의 적합성과 구체적인 것까지 미처 신경이 안 간다고 보고 학문에 대한 순수한 열정의 함정에 빠졌다.

학문적 열정은 학문 공동체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는 것 아닌가. 

한국사회 지식인들 중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거의 없다. 지식 생산은 고립과 관련 있다. 
학문이 발전하려면 서울에 있는 대학들을 전국의 군 단위로 뿔뿔이 흩어버리면 고립된 상태에서 뭔가 할 텐데, 서울은 너무 좁다.

기득권. 권력자나 금욕자만 생각하지만 사실 작은 영역에서도 자기 정신과 노력을 투자한 기득권이 있다. 기득권개념을 넓게 쓰면 모두 기득권 싸움을 하는 것 같다. 

다작왕 강준만 선생 머릿속에 구조를 짜고 그다음엔 일사천리로. 애초에 주제 잡는 단계에서부터 안 될 것 같은 상황은 배제하고 시작.

우리가 원하는 세상과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있따. 진보에 대한 가장 큰 불만도 그 지점.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서 운동이건 사회에 대한 주장을 얘기해야 하는데 진보는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위주로 그 얘기만 한단 말이다. 그러고 나서 손을 턴다. 역할을 다 했다고. 비루하고 천박한 세계는 보수에게 다 념겨주고. 

한국 사회에서 강준만만큼 특정 이미지에 갇힌 지식인도 드물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토론과 사유, 언어의 부재를 가져오는 악순환의 근원이자 '고난과 역동의 현대사'를 경험했으면서도 학문이 융성하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생각하는 대로 보지 않고 보는 대로 생각하는 자질은 모두 책이 됐다.

세상 이치가 다 어찌 보면 우연과 운의 산물이라고 봐요. 이렇게 생각하면 상처도 덜하고 사람이 겸손해지죠. 크게 아웅다웅할 것 없이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기회주의자라고 할 수 있어요. 

실제로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들은 처음부터 발굴하고 처음부터 만들어져야 한다. 조한 같은 분들이 하는 이야기가 사람들이 이 땅의 현실을 팽개쳐놓고 엉뚱한 얘기 가져다가 한다는 거 아니에요. 

세상과 거리를 둘 수 있는 자기 몰입 능력과 극한의 성실함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

"왜 한국인은 회식을 좋아할까"

검색어 1위 조현아가 상징하는 한국 사회 전반의 어처구니 없음

<글쓰기의 즐거움>(2006) 읽어보기


"우리는 기록과 평가에 인색하다. 특히 인물의 경우에 그러하다.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공익을 추구한 사람도, 위선과 기만과 변절을 범한 사람의 과거도 우리는 너무 쉽게 잊는다. 그래선 안 된다. 보상과 문책에 철저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공익을 생각하고, 기회주의적 처신을 두렵게 여긴다."

"이제 나는 초당파적 입장에서 정치에 대한 지식을 공급하고 싶다. 누군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식소매상 노릇에 충실하고 싶은 것이다. 대의를 앞세우되 정열에 들떠 독선에 사로잡히고 윤리까지 무시하는 사람들, 탐욕, 무지, 무관심으로 인해 기존 질서를 자연의 법칙인양 간주하면서 변화를 위한 시도를 불순한 음모로 몰아붙이며 떼를 쓰는 사람들, 냉소에 침잠해 모든 사회적 가능성에 닫혀 있는 사람들을 위해 상호소통의 공간을 만들고 싶다."

전라도에 대한 편견에 맞서 싸운 내가 이 지역에서 평판이 극단으로 나뉜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결론은 내가 얘기하는 메시지보다 행태적 싸가지를 문제 삼더라. '지가 뭔데 글로 비판하고 실명 언급하며 비판하냐'는 거다. 그렇게 싸가지 없다고 낙인을 찍으니까 내가 쓴 글을 안 보고 그냥 비판하더라. 이미지가 굳어진 거다. 그런데 역지사지해보면 나도 싸가지 없는 인간을 싫어했던 적이 있다."


왜 우리는 차별에 찬성하는가?

"지금 대학생들은 수능점수의 차이를 모든 능력의 차이로 확장하는 식의 사고를 갖고 있다. 십대 시절 단 하루 동안의 학습 능력 평가 하나로 평생의 능력이 단정되는 어이없고 불합리한 시스템을 문제시할 눈조차 없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점은 본인이 당한 인격적 수모를 보상받기 위해 본인 역시도 이런 방식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더 높은 곳에 있는 학생들이 자신을 멸시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기보다, 스스로 자신보다 더 낮은 곳에 있는 학생들을 멸시하는 편을 택한다. 그렇게 멸시는 합리화된다."

오늘날 이십대는 "부당한 사회구조의 피해자지만, 동시에 가해자로서 그런 사회구조를 유지하는 데 일조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이 모든 게 전적으로 기성세대의 책임이라는 점에서 비교적 편한 시절을 살았던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그들에게 죄스러울 따름이다.

능력주의 논쟁: 미국의 극심한 빈부격차를 정당화하는 주요 이데올로기 "능력에 따른 차별은 정당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다". 능력은 주로 학력과 학벌에 의해 결정된다. 그런데 고학력과 좋은 학벌은 주로 부모의 경제력에 의해 결정된다. 학력과 학벌의 세습은 능력주의 사회가 사실상 이전의 귀족주의 사회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웅변해준다.

한국형 세습 자본주의를 바꾸는 것이 제1의 개혁의제가 돼야 하겠지만, 우리 모두 어느 정도는 갖고 있는 '사소한 차이에 대한 집착'도 성찰의 대상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한국은 평등주의가 강한 사회라곤 하지만, 평등주의는 위를 향해서만 발휘될 뿐이다. 밑을 향해선 차별주의를 외치는 이중적 평등주의를 진정한 평등주의라고 할 수 없다. 이런 이중적 평등주의는 우리 모두를 피해자로 만든다. 

시인 김수영 "왜 나는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라고 물었듯이, 이제 우리도 스스로 물어야 할 때다. 사소한 차이에만 집착하고 그 차이의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것에 분개하는 동안 세상은 점점 더 돌이킬 수 없는 거대한 구조적 불평등과 차별의 나락으로 빠져든다.


조현아와 장그래

"오늘날 우리가 삼성이 이건희의 것이라 해도 조금도 의심하지 않듯이, 대다수 사람들이 왕이 국가의 주인임을 믿어 의심하지 않듯이, 대다수 사람들이 왕이 국가의 주인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생각의 힘은 무서운 것이어서, 철학자들이 왜 국가가 왕의 것인가 묻기 시작했을 때 왕의 절대적 지배도 흔들리기 시작했고, 결국 그 동요는 국가가 모든 국민의 나라가 되기까지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기업을 그렇게 민주화하지 못할 까닭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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