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12일 수요일

경향 [사설]법원, 재벌 비리에 온정주의로 돌아서나

경향 [사설]법원, 재벌 비리에 온정주의로 돌아서나

서울고법이 수천억원대 기업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기소된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과 구자원 LIG그룹 회장에게 각각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법원은 이들의 공소사실 대부분을 유죄로 인정하면서도 경제 건설에 이바지했다거나 건강이 나쁘다는 등의 이유로 실형을 면해줬다. 과거 재벌 총수들이 줄줄이 징역 3년·집행유예 5년의 솜방망이 처벌을 받던 데서 유래한 ‘3·5 법칙’이나 ‘정찰제 논란’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경제민주화 요구가 확산되면서 재벌 비리에 ‘불관용’ 입장을 견지하던 법원이 경제민주화 이슈 퇴조와 함께 온정주의로 회귀하는 것 아닌지 우려한다.

재판부는 김 회장에 대한 양형 사유로 “회사 자산을 개인적 치부에 활용한 전형적 (기업범죄) 사안과는 거리가 있다”는 점을 들었다. 사재를 털어 배임·횡령액 등을 변제한 점도 참작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설사 이러한 사유가 타당하다 하더라도 집행유예까지 선고한 것은 대법원 양형기준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양형기준을 보면 김 회장에게 적용된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횡령죄의 경우 액수가 300억원 이상이면 감경하더라도 징역 4~7년을 선고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재판부는 김 회장의 배임액을 1585억원으로 판단하면서도 징역 3년에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대법원은 ‘사후적 경합범’이라는 법리를 들어 이 사건은 양형기준 적용대상이 아니라고 밝혔으나 국민의 법감정과 동떨어진 ‘그들만의 해명’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재판부는 구 회장에 대해서도 “범죄 가담 정도가 중하지만 고령으로 간암수술을 받는 등 건강이 좋지 않은 점을 고려했다”고 양형 사유를 설명했다. 법원이 재벌 총수들을 집행유예로 풀어줄 때마다 판결문에 단골로 등장하던 문구가 되살아난 것이다.

한국의 재벌은 총수 중심으로 경영 체제를 수직 계열화함으로써 적잖은 성과를 내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회장님’ 1인에게 과도하게 권한이 집중돼 경영의 투명성이 떨어지고 비자금 조성과 편법 상속 등 불법·탈법행위가 잇따랐다. 잘못된 관행의 고리를 끊으려면 무엇보다 기업과 기업인들의 대오각성이 절실하다. 재벌 기업들은 준법경영, 윤리경영, 투명경영의 원칙 아래 거듭나야 한다. 동시에 기업의 일탈을 견제할 수 있는 사회적 장치도 필요하다. 법원은 재벌 비리가 더 이상 발붙이지 못하도록 엄정한 심판자의 역할을 다하기 바란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논란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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