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13일 목요일

경향 [사설]무죄 난 강기훈·부림 사건, 조작극 실체 밝혀야

경향 [사설]무죄 난 강기훈·부림 사건, 조작극 실체 밝혀야

진실의 힘은 강했다. 양심과 존엄을 지키려는 지난한 투쟁은 마침내 열매를 맺었다. ‘한국의 드레퓌스’로 불려온 강기훈씨가 ‘유서대필 사건’ 재심에서 23년 만에 누명을 벗었다. 영화 <변호인>의 소재가 된 ‘부림사건’ 관련자 5명도 33년 만에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불의한 권력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무고한 시민을 범죄자로 만든, 부끄러운 역사를 사법부가 바로잡은 것이다. 다만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법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당연한 결과가 나오기까지 너무 오랜 세월이 걸렸기 때문이다.

서울고법 형사10부는 1991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간부 김기설씨의 유서를 대필한 혐의(자살방조)로 기소돼 3년간 옥고를 치른 강씨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사건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이 작성한 필적 감정서에 대해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국과수 감정 결과는 당시 조작 논란에도 불구하고 유죄의 결정적 증거가 됐다. 그러나 국과수가 지난해 말 강씨의 무죄 주장을 뒷받침하는 감정 결과를 새로 내놓으면서 공소사실은 무너지게 됐다. 부림사건 재심을 맡은 부산지법 형사항소2부는 고호석씨 등 5명이 경찰 수사 과정에서 불법 구금된 사실을 인정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강기훈씨가 동료를 죽음으로 몰고간 파렴치범의 오명을 뒤집어쓴 채 모진 삶을 겪는 동안, 유서대필 사건 수사책임자들은 승승장구했다. 당시 김기춘 법무부 장관은 청와대 비서실장에 올랐고, 곽상도 주임검사는 박근혜 정부의 민정수석을 지냈다. 지금의 검찰은 또 어떤가. 강씨에 대한 재심이 진행되는 기간 내내 재판을 지연시키고, 과거 수사를 변호하려는 듯한 행태를 보였다. 법원 역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하면서도 자성이나 사과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죽하면 강씨가 “내가 생각했던 재심이 아니다”라고 탄식했겠는가. 

우리는 재심 무죄가 시작일 뿐이라고 본다. 푸른 청춘의 꿈을 송두리째 짓밟은 거대한 공안조작극의 실체를 낱낱이 밝혀내는 일이 보다 중요한 과제다. 사건을 짜맞추는 데 관여한 인사들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제2, 제3의 강기훈이나 고호석이 나올 수 있다. 공소시효가 끝나 형사적 책임을 추궁할 수는 없다 해도 최소한 정치적·도의적 책임은 지도록 해야 한다. 특히 검찰은 과오를 씻기 위해서라도 재심 결과를 받아들이고 상고를 포기하는 것이 도리다. 만에 하나 검찰이 상고를 강행한다면 대법원이 신속히 재판절차를 마무리해야 할 것이다.

시민들도 각성할 필요가 있다. 황당한 공안조작극이 가능했던 것은 판검사들 외에도 진실에 눈감은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언론과 시민사회도 겁을 먹거나 무력해 아무런 제동을 걸지 못했다. ‘그 시절’로의 회귀를 막으려면 권력이 보여주는 ‘거짓’에 매몰돼선 안된다. 진실이 무엇인지 눈을 부릅떠야만 권력의 불의한 욕망을 견제할 수 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