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비선 실세 의혹이 일파만파로 번지면서 온갖 추측과 각종 ‘설’들이 난무하고 있다. 의혹의 당사자인 정윤회 씨가 그간 베일에 묻힌 삶을 살았던데다 사건의 성격 역시 온갖 내용의 음모론을 양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니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려는 한 노력으로서 언론이 보도하고 있는 수준에서 사건을 재구성해보는 것도 필요하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사건에 한 걸음 더 다가가야 의미있는 대안을 도출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쟁점 하나, 정윤회가 비선으로 국정에 개입했다는 문건의 신빙성은?
먼저 가장 큰 쟁점은 정윤회 씨가 비선으로서 국정 개입을 했느냐 여부다. 이와 같은 의혹은 그 이전부터 이런 저런 경로를 통해 풍문처럼 나돌았으나 <세계일보>가 지난 28일 청와대 문건 내용을 단독보도하면서 엄청난 사건이 됐다. 일반적으로 보도되는 정치권 인사들의 반응은 문건 자체의 내용에는 신뢰성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세간에 회자되는 소위 ‘십상시’의 명단 자체가 끼워맞춰진 측면이 있는데다 그 정도의 인원이 특정 공간에 모여 한 달에 한 두차례씩 모임을 갖는다는 건 비현실적이라는 게 근거다. 일부 언론의 경우 실제 정윤회 씨와 측근들이 모임을 가졌다는 식당을 방문해본 결과 그 정도의 인원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 | ||
▲ 정윤회 씨. (연합뉴스) |
문건을 작성한 박관천 경정에 대한 신뢰도에 의문을 갖는 언론도 있었다. <조선일보>는 이번 사태를 다루면서 박관천 경정이 이전에도 불확실한 정보를 보고해 문제가 된 일이 있다는 점을 보도했다. <동아일보>도 3일자 1면에서 박관천 경정이 특정 인사에 대한 부정확한 내용의 보고서를 작성해 문제를 일으킨 바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박관천 경정의 ‘윗선’이었던 조응천 전 공직기강비서관의 주장은 다르다. 조응천 전 비서관은 <조선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문건 내용의 신빙성은 6할 이상”이라고 주장했다. 언론들의 보도에 따르면 ‘6할 이상’이라는 표현은 첩보 수준을 넘는 상당히 신뢰도 있는 정보라는 뜻이다. 조응천 전 비서관은 박관천 경정을 두고 “나의 가장 날카로운 이빨이었다”고 회고하며 긍정적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앞서의 <조선일보> 및 <동아일보>의 보도와는 차이가 있는 부분이다.
정윤회 씨의 경우 지난 1일 <중앙일보> 인터뷰를 통해 박근혜 대통령 취임 이후 ‘문고리 권력 3인방’과 만난 일이 없다고 주장했는데 조응천 전 비서관은 이에 대해서도 반론을 제기했다. 조응천 전 비서관에 따르면 지난 4월 청와대가 소위 ‘박지만 미행 사건’에 대한 내사를 진행하던 시기 3인방의 한 사람인 이재만 총무비서관이 조응천 전 비서관에게 정윤회 씨의 전화를 받을 것을 종용했다. 이 사건을 통해 조응천 전 비서관은 정윤회 씨가 ‘3인방’을 통해 국정에 관여하고 있다는 추측을 상당 부분 사실로 굳히게 된 것으로 보인다.
쟁점 둘, 문건 작성의 시발점은 무엇인가?
청와대가 정윤회 씨에 대한 문건을 작성한 배경에 대해서도 정반대의 관점이 보도되고 있다. 정윤회 씨 측은 ‘개인적 욕심’이 있었던 조응천 전 비서관이 ‘3인방’과 청와대 내에서 마찰을 빚다 ‘3인방’의 뒤에 실세 비선인 정윤회 씨가 있다는 오해(?)를 하게 된 게 감찰보고서를 작성하게 된 발단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정윤회 씨는 ‘박지만 미행 사건’에서 박지만 EG회장의 주변 인물들이 정윤회 씨가 박지만 회장에 대한 견제를 주도하고 있다는 잘못된 정보를 주입해 사태가 악화됐다고도 주장하고 있다. 즉, 조응천 전 비서관과 ‘3인방’의 갈등이 자신과 박지만 회장 측의 갈등으로 확대 재생산된 측면이 크다는 것이다. 조응천 전 비서관은 박지만 회장과 오랜 기간 친분을 이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조응천 전 비서관의 주장은 다르다. 조응천 전 비서관은 자신을 ‘감시견’으로 자처하면서 박지만 회장의 지시를 받아서가 아니라 그저 자신이 할 일을 충실히 했을 뿐이라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3인방’과의 갈등에 대해서는 공직기강비서관의 업무 특성상 인사에 대한 부정적 의견을 내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정권에서 인사를 사실상 좌지우지하는 ‘3인방’의 입장에서는 이를 부담스러워해 종종 공직기관비서관의 업무가 무력화되는 상황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즉, 자신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3인방’에 의해 사실상 내쳐졌다는 게 조응천 전 비서관의 주장이다.
쟁점 셋, 문건 유출은 어떻게, 누구에 의해 이뤄졌나?
청와대 문건들의 유출 경위에 대해서도 언론의 보도 관점들이 대립한다. <조선일보>는 문건의 작성자인 박관천 경정을 범인(?)으로 사실상 지목하고 있다. <조선일보>의 보도를 종합하면 박관천 경정은 청와대 파견이 끝난 후 서울지방경찰청 정보1분실장으로 발령이 날 것을 기대하고 업무에 참고하기 위해 청와대 문건들을 갖고 나왔다. <조선일보>는 일부 정보계열 경찰관들이 이 문건들을 복사해 가방에 넣고 다녔다는 의혹 또한 보도해 상황의 신뢰성을 높였다.
반면, <중앙일보>는 제3자가 자신의 서랍에서 해당 서류들을 꺼내 복사한 후 유출한 것이라는 박관천 경정의 주장을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조응천 전 비서관도 애초 청와대가 문건 유출 사실을 파악해 박관천 경정을 범인으로 지목한 것은 사실이나 이후 올라간 보고서에는 제3자가 범인으로 돼있다는 주장을 펴며 박관천 경정의 주장을 옹호했다. 정윤회 씨는 자신을 음해하기 위해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문건을 조작해 유출시켰다고도 주장하고 있다.
문제는 어떤 경우를 가정하더라도 ‘3인방’과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의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이다. <세계일보>는 3일자 1면에 지난 5월 박지만 회장이 민정수석실에서 유출된 100여장의 문건을 확보했고 이를 심각한 보안사고로 판단해 청와대와 국정원에 보안감사 등을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이와 같은 요구는 세월호 참사 이후 남재준 국정원장이 전격 경질되면서 이뤄지지 못했다. 박지만 회장은 유출된 문건들의 일부에 대통령의 친인척인 자신의 언동 등을 문제삼는 부분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자신을 견제하기 위해 문건이 유출된 것으로 파악했다고 주장했다.
![]() | ||
▲ 정윤회씨 국정개입에 관한 청와대 내부 문건 유출을 수사하고 있는 검찰이 3일 유출 의혹을 받고 있는 박모 경정이 근무하는 서울 도봉경찰서 정보과 사무실에 대해 압수수색을 실시했다. (연합뉴스) |
쟁점의 결론들과는 상관 없이 책임은 무조건 김기춘 실장과 '문고리 3인방'이 져야 한다
하지만 <세계일보> 보도에 따르면 박지만 회장의 이와 같은 요청에 대해 김기춘 비서실장은 “누가 무고를 하는가”라면서 오히려 화를 냈다. 즉, 어떤 형태로든 청와대 문건이 유출된 데 대해 청와대 실무의 총책임자로서 김기춘 비서실장이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했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김기춘 비서실장이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한 원인은 문건 유출과 관련한 사태가 대통령의 친인척과 정권 실세로 표현되는 이들의 알력다툼 한가운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문건 유출’과 ‘권력암투 및 국정농단’을 분리해서 문제제기하려는 움직임도 보이지만 위의 맥락에서 보면 결국 이 두 사안은 동전의 양면이다. '박지만-정윤회' 유력자 2인으로 대변되는 어떤 흐름에서 알력다툼이 발생했고 문건의 유출은 이 결과에 불과하다. 결국 문건이 유출된 이유는 박지만 회장을 견제하기 위한 술수이거나 정윤회 씨를 위시한 ‘3인방’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거나 실세들의 국정농단을 자신의 출세에 이용해보기 위한 수작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대통령이 이 사태에서 취할 조치가 무엇인지는 이 대목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논란이 이 이상 확대되지 않도록 인적청산을 단행해야 한다. 조응천 전 비서관과 박관천 경정은 이미 청와대를 나갔고 박지만 회장과 정윤회 씨는 청와대 내의 공식적 직함이 없으니 ‘3인방’과 이 알력다툼을 사실상 방관한 김기춘 비서실장만 정리하면 1차적인 인적청산은 완료된다. 물론 청와대 비서진들의 대대적 교체와 전면적 개각과 같은 수를 고려해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박근혜 대통령의 커다란 수첩에 충분한 숫자의 사람 이름이 이미 적혀 있어야 할 터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