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그 시대의 산소여야 합니다. 산소라는 뜻은 진실과 순수를 말하는데 시대가 갖고 있는 모순과 갈등, 비인간적인 것들을 고쳐나가는 역할을 바로 산소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작가는 반드시 현실참여를 해야 합니다. 현실참여라는 건 공동의 이익을 위해 작가가 희생하고 손해를 봐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권력에 편승해서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현실참여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작가는 계속 그 어느 시대의 권력이나 기득권에 대해 끊임없이 저항해야 합니다. 그래서 작가는 외로운 존재입니다. 기자 또한 마찬가지 아닙니까. 기자가 비판정신을 잃어버리면 그것은 이미 기자이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기자도 어떤 어려움이 오거나 고통이 오더라도 정의와 올바른 것, 인간적인 것을 향해 줄기차게 나가야지 그 신문사의 권력을 이용해 자기의 이익을 챙기거나 잘못된 권력에 편승하거나 하면 안 됩니다.
원로작가의 이런 질책이 수구기득언론과 그 기자들에겐 '언론윤리 강령' 속에 잠자고 있는 한낱 형식적인 수사로만 들릴지도 모르겠다.
초록은 동색인가?
그렇다면 진보언론 기자들은 이 질책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못하다. 특히 자기(언론) 문제에 직면해서는 수구기득언론과 다름없는 행태를 보였다. 취재지원시스템 선진화방안이 어디 수구기득언론과 한 목소리고 "군사정권보다 더 심한 언론탄압"이라고 외칠 사안이었나? 새로 마련한 브리핑룸 출입을 거부한 채 "기자들이 모두 길바닥으로 쫓겨났다"며 촛불 켜고 항의할 일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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