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정치와 더불어 가장 현실적이다. 그때그때 현실에 매우 민감한 반응을 나타낸다.
권력이 독재적 성향을 띨 적에 어느 권력이고 독재를 하겠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우선 국가적 사명이 중대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언론에 대해서는 책임과 의무를 강조한다.
정치는 현실의 상황변화에 따라서 적절하게 국민을 지도하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그것을 정치권력을 유지하는 데 효율적으로 이용한다.
오늘날 권력이 정치발전과 언론자유를 내세우고 있다. 그런데 언론은 여기에 덩달아 권력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고 있다. 권력이 언론의 국가적 사명이다, 책임이다, 윤리라는 것을 강조하고 독재를 할 때 언론은 자유를 내걸고 투쟁하고 저항해야 한다. '언론의 자유와 책임보다는 언론의 독립이 더 중요하다.'
지금은 결코 책임을 강조할 때가 아니다. 자유를 강조할 시기이며 따라서 신문의 날 표어로 자유와 책임을 내세운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언론의 독립이다. 우리 언론은 지난 10여년 간 제도적, 구조적으로 권력과 기업에 완전히 예속돼 있었다.
언론의 독립을 위한 참된 길
편집권의 독립은 제도적으로 구체적인 보장이 필요한데 나는 언론기업을 특수법인체화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본다. 언론사주가 '나는 바지사장이냐'는 반발을 할 수도 있지만 가당찮은 소리다. 언론이나 교육사업은 그 사업 자체에 막중한 국가의 공공성이 있기 때문에 기업시, 사물시해서는 안된다.
독재자: 으레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도 책임을 지지 않는 정치 집단.
권력자는 반드시 자유를 내세우면서 책임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자유행사를 견제하자는 데 뜻이 있는 것이다.
언론의 책임은 지난 몇년 동안 억압당하거나 외면 당한 공중의 절규를 듣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이 이상도 이 이하도 아니다.
직필과 곡필
언론인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자랑스러워 할 수 없는 하찮은 직업이다. 옳은 기자 노릇하기가 어렵다. 글 쓰는 생활이란 참으로 책임이 무거운 직업이라는 것을 느낀다. 비단 우리 사회에서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그러하다.
지식인들의 활동은 언제나 공개된 곳에서 행해진다.
신문기자는 활동이 활자로서 오래도록 남기 때문에 절대로 속일 수 없고 음성적으로 할 수도 없다. 그만큼 미치는 영향 또한 크다.
신문기자는 언제나 반드시 자기의 믿는 바에 따라 글을 써야 하며 어떤 다른 사정에 의해 마음에도 없는 글을 쓰는 일이 없어야 한다.
일시적 필요에 의해 글을 어떤 방편으로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 글은 활자로 후세에 남는다.
감출 수도 속일 수도 없다. 자기의 글에 대해서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한다.
그때그때 시대적 여건을 무시하고 소신대로만 글을 쓸 수도 없다. 옳은 말을 한 글을 정론이라고 하고, 시대에 아부한 글을 곡학아세한 글이라고 욕하고 비웃는다.
청사에 빛날 정론을 춘추직필이라고 하고 시대에 아부한 글을 곡필이라고 욕한다. 그리고 정론은 언제나 건설적이며 곡필은 불건전하고 파괴적 글인 것으로 생각한다.
정론은 반드시 건설적이고 긍정적이며 곡필은 반드시 파괴적이며 부정적이라고 단순히 생각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정론은 표면상 부정적이며 따라서 그 시대에서 볼 때 파괴적인 듯 보이며 곡필이야말로 자신을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것처럼 자처한다.
정론을 펴고자 하는 사람은 부조리하고 부패한 정치를 반대하고 새 질서를 주장한다. 정론이 파괴, 부정적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 시대를 긍정하고 현상 유지하고자 하는 언론은 따라서 자연 부정적이기를 기피한다.
정론과 곡필의 관계는 이와 같이 일반적 생각과는 달리 오히려 정론이라 일컬어지는 언론일수록 부정적, 파괴적인 듯이 보이며
곡필이라 일컬어지는 언론일수록 일견 긍정적, 건설적 양상을 나타낸다. 따라서 정론은 항상 소수의견이고 곡필일수록 다수의견인 듯이 보인다.
글과 생활의 일치
글 쓰는 사람은 절대로 기분에 따라 이렇게 혹은 저렇게 횡설수설해서는 안 된다. 글에는 논리가 일관돼 있어야 하고 전에 쓴 글과 다음에 쓴 글 사이에 모순이 없어야 한다. 어떤 때는 이런 소리를 하고 어떤 때는 또 저런 소리를 하는 식의 글을 써서는 안 된다. 글은 사람의 인격표현이라고 했다. 내용에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글의 내용이 자기의 숨김 없는 생각을 나타내지 않고 어떤 필요에 의해 자기 생각과 다른 말을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글 쓰는 사람은 독자에 의해 글에 따라 하나의 상이 그려진다. 한 줄의 글도 마음에 없는 글을 무책임하게 쓰는 일이 없어야 한다.
글 쓰는 사람은 글의 내용과 자기의 생활에 모순이 있어서는 안 된다. 글로써는 부정부패를 증오하는 듯이 주장하면서도 실제 생활은 글 내용과 전혀 다른 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다. 부패의 지탄을 받는 인사가 부패를 가장 증오하는 듯한 글을 쓰는 것은 사람을 웃긴다.
글과 사람과는 모순이 있어서는 안된다. 일제 때 아부하고 자유당 때 아부하며 바람 부는 대로 자신과 민족을 더럽힌 인사가 나라를 걱정하고 부정부패를 규탄하고 지조를 운위하는 것은 가소롭기 비할 바 없다. 글의 내용과 자기의 생활 사이에는 큰 모순이 없어야 한다. 평소 부정과 부패를 지탄하는 글을 쓰면서 자기 자신 남한테 지탄받을 생활을 한다면 큰 모순이다 .
사회의 부정, 부패 , 그 밖의 각종 악과 싸우는 언론인들은 우선 자신의 생활부터 모범적이 되어야겠다. 언론인은 떳떳해야 한다. 정치인이 국민에 이것저것 공약을 했으면 꼭 지켜야 하듯이 언론인도 독자 앞에 어떤 주장을 했을 때 그런 생각과 최소한 모순되는 생활을 하지 말아야 한다. 글과 생활을 한 인간의 인격을 통일시켜야 한다.
곡필의 논리
직필하기가 얼마나 어렵고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가에 대해서는 그다지 깊은 검토가 없는 듯하다. 현실을 지배하는 것은 대부분 조소의 대상인 바로 그 '곡필'이며 당연한 것처럼 생각되는 '직필'은 놀랄 만큼 읽어보기가 어렵다.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점은 곡필은 그 자신이 결코 곡필이라고 정체를 드러내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곡필일수록 '대국'을 논하고 '민족'과 '국가'를 걱정하고 때로는 '민주주의'와 '헌법'과 사회의 안녕질서와 반공을 내세우기를 잘한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곡필의 근거는 반민주부패권력이다.
곡필은 어떤 의미에서 볼 때 현실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곡필도 논리를 갖추고 있다.
곡필의 위장논리를 폭로하는 곳에 직필의 임무가 있다. 조선민족은 독립할 필요가 없고 일본에 예속돼 있어야 한다는 매신의 망국론이나 4.19의 학생데모를 끝내 폭동으로 일관 주장한 당시의 서울신문 논조도 매우 이로정연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바야흐로 이 나라 언론계가 위기에 빠진 오늘 지난날의 '훌륭한' 곡필들을 검토해ㅐ보는 것도 결코 무의미하지는 않을 듯하다. 서명곡필은 일절 인용을 보류했음을 밝혀둔다.
'보도'가 내포하는 의미
기자라는 직업은 '있는 그대로' 국민에게 알려주고 해설해주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라는 표현은 흔히 생각되듯 객관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고 높은 차원에서의 주관적 존재라는 점을 깨달아야 하겠다. 저널리즘이 '객관적 사실'을 주관적 요소가 끼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의미한다고 주장하게 된 것은 일반적으로 19세기 이후의 일로 알려져 있다.
신문의 판매정책상 커다란 변화가 생기면서 객관성, 공정성을 따지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는 어느 특정계층 사람만이 신문을 읽어왔으나 사회가 근대화, 대중화되면서 위에서 말한 것처럼 특정계층 사람만을 독자로 상대할 수 없게 됐다. 모든 독자에 다같이 만족을 주는 신문을 만들어야 하게 된 것이다. 공정, 객관성 개념은 저널리즘의 본질이 아니라 신문사상 일정단계의 역사적 산물이라는 사실이다.
사안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는데, 그 사건 또는 그 문제에 대한 입장, 즉 이해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국가이익, 집단이익, 심지어는 개인이익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문제에 대한 보는 눈이 달라지는 것이다. 즉 자기의 입장에서 자기의 이익에서 보기 때문에 달라지는 것이다. 이것을 저널리즘의 이데올로기성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신문학과의 문제점: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영화, 게임, 마케팅, PR관련 수업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사회 인문과학에 속하는 강좌는 8,9개에 지나지 않는다.
신문학과 강의의 목적은 사회와 인간을 보는 눈을 기르는 것이 돼야 한다. 한데 우리나라 대학 신문학과는 매스 미디어에 관한 전문적 교수만으로써 족하다고 믿고 있다.
언론인이란 사회과학적 눈(내용)과 신문학적 눈(형식)을 겸비한 사람이 아니면 안된다.
3분의 2를 사회과학강좌로 채워야 한다. 역사, 경제, 법률, 사회학, 철학 이밖에 많은 사회과학 계통의 강좌를 선택과목으로 해서 사회를 보는 전문적 안목이 상당히 높도록 양성해야 한다. 전문선택과목제를 활용해서 전문화의 교육을 했으면 한다.
언론인의 기본자세
한국신문윤리실천요강 "사실은 부분만이 아니라 그 전모와 의의를 포괄적으로 보도해야 한다". 즉 정확한 보도를 하는 데 있어 먼저 필요한 것은 사실이 가지는 이른바 전모와 의미란 무엇이냐가 먼저 구명되지 않으면 안된다. 전모와 의미를 알리는 보도는 먼저 사실의 구조가 다원적 존재라는 점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외부의 바람 속에서 언론의 순수성을 지킨다는 것은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바람에 따라서 방풍의 길도 다를 것이다. 어떤 바람은 방풍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방풍하기 힘들 것이다. 이러한 바람 속에서 지난 몇 해 동안 언론계의 양상은 많이 변했다. 이 변화에 적응하는 일이 힘들다. 살기가 힘들다.
언론인이 순수성을 잃으면 안된다. 순수성이란 오로지 기자로서의 직무에 충실하다는 것이다. 직무에 충실하다는 것은 행동과 주장을 신뢰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신뢰란 어떤 일관성을 의미하며 때와 장소에 따라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주장하지 않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기사는 기자의 양식과 사상의 소산이다. 기자의 활동에도 일관성이 있어야 하고 지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언론이 나아갈 길
첫째, 무엇보다 시급한 것이 언론기업이 정치, 경제적인 독립을 확보하는 일이다.
둘째, 언론을 규제하는 모든 악법을 철폐해야 한다.
편집권을 사주가 독점적으로 가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신문은 어느 개인이 이용할 수 없고 이용해서도 안된다. 모든 사원이 공동으로 가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편집강령을 내걸자. 사시는 무어니 해서 표어를 내걸지 말고 신문의 제작방침을 구체적으로 밝히자는 것이다. 그러면 정치적으로 어떤 노선을 따라서 어느 단체를 지지하고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으로는 어떤 방침이라는 것을 다 알게 된다.
김수환 추기경 "민주화를 위해선 개헌보다 언론자유의 실현이 더욱 선결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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