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8일 화요일

중앙_[사설] 나랏빚 1117조, 주범은 공무원·군인·사학 연금

나랏빚이 처음으로 1000조원을 넘어섰다. 정부가 어제 발표한 ‘2013 회계연도 국가 결산’에 따르면 미래에 갚아야 할 빚까지 포함한 나랏빚은 지난해 말 현재 1117조원으로 전년보다 215조원이 늘었다. 이 중 중앙·지방정부가 꼭 갚아야 할 좁은 의미의 국가채무는 482조6000억원이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은 33.8%로 전년보다 1.6%포인트 상승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107.4%에 비하면 아직 양호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안심할 상황은 아니다. 빚이 늘어나는 속도가 빠른 데다 공기업 부채나 연금충당부채를 합할 경우 OECD 평균을 훌쩍 넘기 때문이다. 언제 그리스꼴이 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는 것이다.

 그런 일이 없게 하려면 당장 손봐야 할 것이 연금충당부채다. 지난해 늘어난 나랏빚 215조원 중 대부분은 공무원·군인·사학연금의 연금충당부채가 차지했다. 연금충당부채는 국가의 연금 지급 의무에 따라 미래에 발생할 것으로 예상되는 부채다. 물가상승률·퇴직률·사망률 등에 따라 많이 달라진다. 우리나라처럼 고령화가 빨리 진행되면 연금충당부채도 급격히 늘어나기 쉽다. 지난해 연금충당부채는 596조3000억원으로 1년 새 159조원이 늘었다. 산정기준을 2012년과 다르게 했기 때문이란 게 정부 설명이다. 하지만 앞으로도 상황이 나아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현재의 부채 규모도 국가 재정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게다가 연금충당부채는 이미 국가재정에 직접 부담을 주고 있다. 공무원·군인연금은 진작 기금이 고갈돼 국고로 막고 있다. 사학연금도 20년 뒤면 적자로 돌아설 전망이다. 지난해 공무원연금 적자를 메우는 데만 나랏돈 2조원이 들어갔다. 공무원·군인연금 적자를 보전해주는 데 이 정부에서만 22조원이 필요하다. 이들 연금을 그대로 두고선 나라에 미래가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2월 “3대 공적 연금에 대해 개선 방안을 마련하고 관련 법도 개정하겠다”고 의지를 다졌다. 새누리당도 개혁기구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우리는 그 약속이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여러 차례 주문했다. 그러려면 2009년처럼 공무원들이 주도하는 ‘셀프 개혁’이 되풀이돼선 안 된다. 당시 공무원 연금개혁은 국민연금에 비해 절반 정도만 수령액을 깎은 데다 미래의 공무원에게만 희생을 떠넘긴 ‘꼼수 개혁’이었다. 이번엔 공무원들의 입김을 최대한 배제해야 진정한 개혁이 가능할 것이다.

 아울러 국가 재정에 부담을 주는 정치권의 선심성 법안도 근절해야 한다. 6·4 지방선거를 앞두고 또다시 각종 무상 공약이 판을 치고 있다. 이를 막기 위해 재정 지출이 필요한 법안은 재원 조달 방안을 의무화하는 페이고(pay-go) 제도 도입이 시급하다. 미국처럼 국가부채 상한제를 도입하거나 독일처럼 헌법에 재정 준칙을 반영, 재정 적자가 생기면 어떻게 줄일 것인지까지를 명시하도록 하는 등의 강력한 조치를 강구할 필요도 있다. 물려줄 게 없어 후대에 빚을 물려준 부끄러운 선배가 돼서야 되겠나. 

중앙_[사설] '지방선거 무공천'에서 후퇴한 안철수

새정치민주연합의 안철수 공동대표가 어제 ‘기초선거 무공천’에 대한 입장을 바꿨다. “약속을 지키는 정치를 하겠다. 국민을 믿고 국민의 바다로 나가겠다”며 무공천 소신을 피력하던 그가 하루 만에 “국민 여론조사와 전 당원 투표를 거쳐 결정하겠다”고 한발 물러선 것이다. 기초선거 무공천은 2012년 대선 때 박근혜·문재인·안철수 세 사람 모두 국회의원의 특권을 삭감하고 지방자치를 중앙당의 예속에서 해방시켜 주겠다며 국민에게 약속한 정치분야의 핵심 공약이었다. 이제 안 대표는 더 이상 박근혜 대통령을 거짓말 정치인이라고 비난할 수 없게 됐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두 사람은 오십보백보이기 때문이다. 기초선거 무공천은 안철수 새 정치의 상징이었고 민주당과 합당할 때 내건 가장 큰 명분이었기에 그의 후퇴는 또다시 ‘철수(撤收) 정치’ 논란을 낳고 있다.

 정치인 안철수의 자질 문제와 별도로 지방선거 정국이 무공천을 관철하기 어려운 환경이라는 현실론도 외면할 수 없다. 새누리당은 일찌감치 대선 공약을 못 지키겠다고 나자빠졌고 이미 3000여 명에 이르는 기초단체 선출직 후보에 대한 공천작업에 들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새정치연합만 무공천 당론을 밀고 나갈 경우 야권 성향 후보자들이 난립하거나 야권 지지 성향 유권자들이 혼란을 겪어 선거 패배가 자명하다는 주장이 당내 비주류 그룹에서 확산됐다. 안 대표가 자칫 선거 패배의 책임을 혼자 뒤집어쓰고 호랑이를 잡긴커녕 잡아먹힐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정치 현실이 전개됐던 것이다. 무엇보다 하나의 운동장에서 두 개의 규칙이 작동하는 경기를 진행해야 하는 유례없는 선거상황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기초선거 무공천은 여야가 동시에 실시하고 여러 차례 반복하면 한국 정치 시스템에 일대 혁신을 가져올 이상적인 제도다. 눈앞의 승리가 더 급한 한국의 정당 문화, 혼란을 피하고 싶어 하는 유권자 현실이 그걸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여야가 지방자치를 무슨 중앙당·국회의원 정치의 하수인쯤으로 여겨온 것에 일말의 반성이 있는가.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기초선거 무공천을 위한 입법 논의에 들어가 다음 선거에 적용하길 바란다.

중앙_[사설] 임대소득 세제혜택 늘려야 주택경기 살아난다

정부가 올해 주택 공급량을 37만 가구로 줄이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2022년까지 매년 공급하기로 한 39만 가구보다 2만 가구나 줄어든 것으로, 그대로 시행된다면 주택종합계획을 발표하기 시작한 2003년 이후 가장 적게 주택을 공급하는 셈이다. 이는 주택 공급을 줄여 침체에 빠진 주택시장을 살려보겠다는 의도가 다분하다. 아직 전국에 미분양주택이 6만여 가구나 남아있는 상황에서 주택경기를 살리자면 우선 주택 공급량부터 줄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주택공급 계획을 낮춰 잡는다고 해서 주택시장이 회복될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 주택공급계획 자체가 강제력이 없는 예측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정부의 의지를 반영한 희망사항이라고 보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 지난해에도 주택공급계획은 올해와 마찬가지로 37만 가구로 잡았지만 실제 사업승인이 난 주택물량은 44만 가구에 달했다. 정부가 주택 공급량을 정교하게 통제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따라서 공급물량 조절로는 주택경기를 살려낼 수 없다. 더욱이 지금 주택시장의 발목을 잡고 있는 최대 악재는 공급과잉이 아니라 정부의 주택임대료 과세 강화 방침으로 얼어붙은 수요다. 주택시장 활성화 대책으로 연초부터 모처럼 회복세를 보이던 주택시장은 임대소득 과세를 포함한 정부의 설익은 전·월세 대책 발표 이후 거래가 거의 단절되다시피 하고 있다. 임대소득도 소득인 만큼 세금을 물리는 것이 원칙적으로 마땅하다. 다만 그동안 적당히 눈감아 오다가 하필이면 주택경기가 막 살아나려던 참에 과세를 강화하겠다고 나서니 사달이 난 것이다.

 결국 주택거래를 정상화하기 위해서는 집을 사겠다는 수요를 되살리는 수밖에 없다. 지금 집값 상승을 노린 투기수요가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남은 것은 거주목적의 실수요와 임대목적의 투자수요뿐이다. 그런데 임대소득 과세 방침으로 임대용 투자수요가 끊기고, 덩달아 실수요마저 자취를 감춘 것이다. 이를 바로잡자면, 임대소득 과세유예의 범위와 기간을 확대해 임대사업자에 대한 세제혜택을 오히려 넓혀야 한다. 

조선_[사설] 정부·국회, 景氣부터 살려놓은 다음에 뭘 하든 하라

올 들어 회복의 새싹이 피어나던 부동산 시장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서울 아파트 가격은 지난달 마지막 주에 15주 만에 하락세로 돌아섰고, 이달 첫째 주까지 2주 연속 하락했다. 소비(消費)도 기대만큼 꽃을 피우지 못하고 있다. 소매 판매는 1월엔 설 명절 효과로 반짝 증가하다가 2월에는 3.2% 감소했다. 3월에는 백화점 매출이 0.1% 늘어나는 데 그쳤고 할인점 매출은 3.8% 줄었다. 설비투자는 1~2월 두 달 연속 감소해 기업들이 관망하고 있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유일하게 우리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게 수출이다. 지난달 수출액은 497억6000만달러로 사상 두 번째로 많았다. 스마트폰·반도체·자동차 같은 대기업들의 주력 상품들이 아직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는 덕분이다. 일자리는 1월 71만명, 2월 84만명씩 늘어나 언뜻 보면 훈풍이 부는 듯하다. 그러나 청년층 일자리가 늘기보다는 50대(代) 베이비붐 세대가 퇴직을 늦추거나 재취업하면서 생기는 현상이다.

일자리 시장에서는 오히려 불길한 소식이 확산되고 있다. KT가 8일 대규모 명예퇴직을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직장을 떠날 사람이 수천명에 달할 것이라고 한다. 최근 은행·증권업계에서 불던 정리 해고 바람이 이제 대기업으로 번질 기세다.

이처럼 경기는 봄기운을 느끼지 못하고 있지만 국회는 기업들에 부담을 안기는 법안을 계속 만들어내고 있다. 정년을 60세로 연장하는 법안은 작년 4월 국회를 통과했다. 이어 여야는 국회 환경노동위 소위에서 근로시간을 최대 주당(週當)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단축하기로 합의하고 오는 15일까지 법안을 만들겠다고 하고 있다. 정년 연장, 통상임금 확대, 근로시간 단축까지 기업 부담을 무겁게 만드는 조치가 한꺼번에 겹치고 있다. 기업들이 비용 부담을 줄일 수밖에 없는 처지로 몰리다 보니 투자를 늘리기 힘들고, 결국 경기 회복은 계속 늦어지고 있다.

그런 와중에 현오석 경제팀마저 지난 2월 월세 집주인에 대한 과세(課稅) 강화 방침을 밝히면서 막 기지개를 켜던 부동산 시장에 찬물을 끼얹었다. 월세 소득에 세금을 부과하는 정책은 경기가 회복되는 것을 확인한 후에 해도 될 일이었다.

지금 경기 회복의 온기(溫氣)를 살려내지 못하면 우리 경제는 2012년 이후 3년 연속 불황(不況)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1998년 외환 위기 때나 2008년 금융 위기 때도 1~2년 내에 극복했고, 3년 이상의 장기 불황을 겪어본 적이 없다. 불황이 올 연말 이후 내년까지 지속되면 서민들이 느낄 고통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정부는 규제를 풀어 투자를 이끌어내겠다고 하지만 규제 개혁만으로 경기가 피어오를 수는 없다. 정부와 한국은행은 재정과 금융정책을 총점검해 경기 회복의 전기(轉機)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나 그에 앞서 정부와 국회는 경기 회복의 싹을 짓밟는 일부터 하지 말아야 한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조선_[사설] 결국 야당 내부 싸움 되고 만 '기초 不공천' 문제

새정치연합 안철수 대표가 8일 기초 단체장·의원 불(不)공천 입장을 일단 유보하고 전(全) 당원 투표 및 국민 여론조사 결과로 공천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했다. 안 대표는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밝히고 "불공천 소신은 변함이 없다"고 했다. 앞서 열린 새정치연합 의원총회에서는 "불공천을 관철시키려고 당원 투표, 여론조사를 하자는 것"이라고도 했다. "정치 생명을 건다는 생각으로…"라는 표현도 썼다고 한다.

그러나 어떤 결과가 나오든 논란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안 대표와 김한길 대표는 "불공천 약속을 지키는 정치를 하겠다"며 이것을 합당의 이유로 내세웠었다. 지방선거가 "약속 대(對) 거짓 세력의 대결이 될 것"이라고도 했다. 만약 공천하자는 쪽으로 결론이 나오면 새정치연합의 합당 명분이 사라진다. 반대로 불공천으로 확정돼도 지방선거 파행은 물론이고 야당 내 분란이 당내에 큰 후유증을 낳을 가능성이 있다.

불공천 공약을 파기한 것은 새누리당이지만 그에 따른 갈등은 주로 야당 내부에서 벌어졌다. 야당 내에선 새누리당만 공천할 경우 선거에서 질 것이라며 번복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안 대표가 불공천 입장을 고수할수록 당내 반발은 확산됐다. 이미 새정치연합 내에서는 불공천 고수파와 번복파로 나뉘어 세(勢) 대결 양상까지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다.

기초 공천 문제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오랫동안 의견이 갈려 왔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장점과 함께 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공천을 할 경우엔 정당이 후보를 1차적으로 거르고 책임 정치를 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지방 정치를 중앙 정치에 예속시키는 부작용이 있다. 반면 공천을 하지 않을 경우엔 돈 공천 등의 부작용을 줄일 수 있지만 후보 난립과 지방 토호(土豪)의 전면 등장이란 역효과를 낳을 가능성이 크다. 불공천이 새 정치가 아니라 '반(反)정치'라는 반론이 야권 내에서조차 나오는 게 이런 이유다.

지난 대선에서 여야는 이런 문제들을 제대로 따져보지 않고 '기득권 포기'라면서 함부로 불공천을 공약했다. 그래도 공약은 지켜야 한다. 하지만 공약 내용 자체가 이런 난리를 피울 정도로 심각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안 대표가 '정치 생명'을 입에 올릴 지경까지 된 것은 애초에 공약 자체가 경솔한 것이기도 했지만, 야당이 문제를 정도 이상으로 키운 측면도 크다.

당장 야당 눈앞에 닥친 문제는 불공천 문제이겠지만 실은 국민의 무관심이 더 큰일이다. 국민이 잘 쳐다보지도 않는 정치적 문제를 갖고 몇 달 동안이나 지루하게 논란을 끌어온 야당을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이 어떤 것일지는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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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_[사설] 정부 빚 1117조, 퇴직 공무원 먹여 살리다 나라 거덜 난다

작년 말 현재 회계장부상의 중앙정부 부채 규모가 1117조3000억원으로 1년 새 215조2000억원이나 늘어났다. 무엇보다 퇴직 공무원과 퇴역 군인에게 지급해야 할 연금 충당 부채가 596조3000억원으로 159조4000억원이나 늘었다.

연금 충당 부채는 앞으로 80년간 국가가 지급해야 할 연금액을 현재 가치로 환산한 금액이다. 연금 충당 부채를 국가 부채로 볼 수는 없다는 의견도 있지만 결국 모두 국민 세금에서 나가야 할 돈이다. 대다수 국민은 600조원에 이르는 연금 충당 부채를 보면서 공무원들의 노후(老後) 보장을 위해 세금 폭탄을 맞게 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실제 잇따른 공무원 증원(增員)과 평균수명 연장으로 공무원 연금 적자는 빠르게 늘고 있다. 공무원 연금 적자는 작년에 1조9982억원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고 2020년엔 6조2000억원으로 불어날 전망이다. 그 적자를 메꿔줄 세금 부담도 이명박 정부의 7조6930억원에서 현 정부는 14조9934억원, 다음 정부는 31조4742억원으로 5년마다 갑절씩 늘어나게 된다. 이대로 가면 공무원 연금 적자 메꾸느라 국가 재정이 거덜 날 게 뻔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2월 경제 혁신 3개년 계획을 발표하면서 공적 연금 개선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역대 정권마다 공무원 연금 개혁을 시도했다가 공무원들의 반발에 부딪혀 번번이 실패했다. 이번 정부도 공기업에는 부채를 줄이라고 압박을 가하면서 정작 공무원들의 이해가 걸린 연금 개혁은 미적대고 있다. 공기업 개혁의 추진력을 높이기 위해서도 정부가 먼저 공무원 연금 개혁으로 모범을 보여야 한다.

경향_[사설]정치의 후진성 보여준 기초선거 공천 논란

새정치민주연합 안철수 공동대표가 6·4 지방선거에서의 기초 공천 방식을 여론조사와 당원투표 결과로 결정짓겠다고 했다. 안 대표는 어제 기자회견에서 “당원과 국민의 뜻을 물어 결론이 나오면 최종적 결론으로 알고 따르겠다”고 밝혔다. 기초선거에서 정당공천 여부를 당원투표와 국민 여론조사 결과에 맡기겠다는 것이다. 기존의 기초 무공천 고수 방침에서 한발 물러선 출구 전략으로 풀이된다.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 공약을 파기한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의 요지부동, 당내의 거센 무공천 철회 압력 속에서 고육지책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채 두 달도 남지 않은 지방선거의 기본 규칙조차 확정하지 못해 빚어진 혼돈을 정리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는 다행스럽다.

사실 기초선거 정당공천 여부는 경계가 확연히 나뉘는 선악의 사안이 아니다. 공천을 했을 경우 초래되는 문제와 무공천 시 문제점의 양질을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중앙정치 예속화와 공천비리 등 기초선거 공천의 폐해가 국민에게 더욱 두드러졌고, 그래서 지난 대선 당시 여야의 후보가 공히 ‘공천 폐지’를 공약했을 터이다. 혼돈은 그 공약이 적용되는 지방선거에서 새누리당이 기초 공천을 강행키로 한 것에서 비롯됐다. 새정치연합은 약속대로 기초 무공천을 천명, 결국 한 선거를 두고 두 개의 룰이 작동하는 비정상적 구조가 예고되면서 격렬한 논란과 혼선이 벌어졌다. 유권자 선택의 왜곡 가능성과 함께 종국에는 선거의 정당성에 의문이 제기되는 사태를 초래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기초선거 공천 문제를 둘러싼 논란은 정치의 후진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를 공약한 여당은 이를 파기한 뒤에 변변한 설명과 사과의 절차도 없이 반사이익만을 기대하며 혼선을 즐기는 태도로 일관했다. 특히 공천 폐지 공약의 당사자이면서도 끝내 사과는커녕 입장 표명조차 거부한 박 대통령의 오만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통합신당의 핵심 명분으로 기초 무공천을 내세우고도 안팎의 상황 논리에 휘둘리며 가부간의 결정을 못한 채 질질 끌어온 안철수·김한길 대표의 리더십도 혼선을 키운 책임이 있다.

이제 새정치연합이 실시할 당원투표와 여론조사 결과가 기초선거 공천으로 나오든, 무공천으로 나오든 논란의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정책과 민생을 두고 경쟁이 이뤄지는 선거판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중대한 선거를 앞두고 언제까지 기초 공천 문제로 지새울 텐가. 새정치연합의 결론이 어떤 쪽으로 정리되든 기초 공천을 둘러싼 여야의 잘잘못은 실제 선거에서 국민이 심판할 것이다.

경향_[사설]국정원, 증거조작도 모자라 여론공작까지 했나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의 증거조작 파문이 점입가경이다. 피고인 유우성씨의 법정 증인으로 나선 탈북자 ㄱ씨가 자신의 신변 노출로 북한에 있는 가족과의 연락이 끊겼다며 관련자 처벌을 요구하는 고소장을 검찰에 제출했다. 그는 정보 유출의 배후로 국가정보원을 의심했다. 국정원이 탄원서 내용을 토대로 언론 인터뷰를 주선했다는 사실도 털어놨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국정원이 증거조작으로 코너에 몰리자 자신의 허물을 덮으려고 비공개 증인을 여론공작에 악용한 것이나 다름없다. 

ㄱ씨가 사건에 휘말린 것은 지난해 12월 법정 출석에 이어 올 초 재판부에 낸 탄원서가 발단이다. 그는 유씨의 간첩 혐의를 뒷받침하기 위해 국정원이 증인으로 내세운 인물이다. 그가 낸 탄원서는 “증인으로 나선 사실이 알려져 북한에 있는 자녀가 보위부 조사를 받고 협박당했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탄원서마저 문화일보에 보도된 뒤 가족과의 연락이 아예 두절됐다고 한다. 그는 “비공개 탄원서가 어떻게 유출될 수 있느냐”며 배후로 국정원을 지목했다. 또 “국정원이 탄원서를 토대로 동아일보를 비롯한 여러 언론사와 인터뷰를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했다”고 말했다.

비공개 법정 출석과 탄원서가 외부로 유출된 것은 심각한 사안이다. 비공개 증언은 법정에 출석한 참고인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다. 이런 안전장치가 무용지물이라면 어떻게 공익 목적의 제보나 법정의 진실 규명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재판부에 제출한 탄원서가 언론에 그대로 보도된 것은 특정 목적을 노린 여론공작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가족의 신변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보도한 언론사의 무책임한 행태도 문제지만 이것이 여론공작의 산물이라면 더욱 묵과할 수 없다.

무엇보다 국정원의 일탈행위는 도를 넘었다. 북 보위부 출신의 ㄱ씨는 국정원의 협조자이자 신변보호 대상자다. 아무리 사정이 다급하더라도 신변 노출을 무릅쓰고 여론공작에 활용하려 했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적이다. ㄱ씨가 소송을 준비하자 국정원 직원이 극구 만류했다니 뭔가 켕기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다. 치졸한 여론공작으로 증거조작을 덮을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한심할 따름이다. 국정원은 문제가 불거진 뒤에도 “우리도 피해자”라며 거짓말로 일관해왔다. 더 이상 국정원에 뭘 기대할 수 있겠는가. 검찰의 철저한 수사와 책임자 처벌만이 국정원을 바로 세우는 길이다.

경향_[사설]법원 판결 왜곡한 MBC ‘PD수첩’ 중징계

어떤 문학작품에 “몇몇 표현상의 문제점이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주제의식이나 구성능력 등 작품의 완성도가 탁월하다”는 평가가 나왔다고 하자. 이를 ‘표현법도 모르는 졸작’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아니면 ‘대체로 뛰어난 작품’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상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당연히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그런데 눈썹도 까딱하지 않고 전자의 자세를 보이는 이들이 있다. 법원 판결조차 왜곡하면서 시사프로그램 <PD수첩>의 제작진에게 두번씩 중징계를 내리는 MBC 경영진이 바로 그들이다.

MBC는 엊그제 인사위원회를 열고 2008년 4월 방영된 <PD수첩> ‘미국산 쇠고기, 과연 광우병에서 안전한가’ 편의 제작진 4명에게 정직과 감봉 등 중징계를 내렸다. “허위사실을 방송해 시청자들에게 혼란을 일으키고 회사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이유에서였다. MBC는 2011년 9월에도 같은 이유로 제작진에게 중징계를 내렸다. 당시 처분도 제작진이 대법원에서의 관련 소송에서 모두 승소한 뒤에 내려진 것이어서 안팎으로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제작진은 곧바로 징계무효 소송을 냈고, 사측은 1심에서 패소한 뒤 징계를 취소했다. 지난 1월 2심 재판부도 사실상 제작진의 손을 들어줬는데도 사측은 판결문의 일부 내용을 왜곡하면서 이번에 또다시 징계를 내린 것이다. 

MBC가 징계의 근거로 삼은 2심 법원의 판결을 살펴보자. 재판부는 “(제작진이) 다우너 소를 광우병 소로 지칭하는 등의 내용은 허위이지만 전체 방송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작고 고의도 없었다”고 밝혔다. 또 “특히 지난 10년간 허위보도로 문제가 된 방송의 제작자들에게 감봉 2개월 이상의 처분이 없었다는 점에 비춰봐서도 (정직 처분은) 형평의 원칙에 반하고 사회통념상 현저하게 타당성을 잃었다”고 지적했다. 한마디로 ‘허위보도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미미한 수준이며 사측의 징계처분은 잘못됐다’는 뜻이다. ‘시청자들에게 혼란을 일으키고 회사의 명예를 떨어뜨린 허위보도’라고 해석할 만한 대목이 어디에 있는가.

MBC가 법원 판결과 시민적 상식까지 무시하면서 재차 징계를 강행한 것은 정권에 충성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의도로 비칠 수밖에 없다. MBC는 이러한 행태가 수많은 언론인들이 오랫동안 어렵사리 일궈놓은 공영방송의 가치를 송두리째 허물어뜨리고 있음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아울러 한 움큼의 양심이라도 남아 있다면 이번 징계조처를 철회해야 마땅하다.

한겨레_[사설] 국정원, 증거조작 물타기 하려고 ‘언론 플레이’ 했나

간첩 혐의 사건의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던 탈북자가 ‘재판부에 제출한 탄원서가 유출돼 보도되는 바람에 북한에 남아 있던 가족들의 연락이 끊어졌다’며 이를 유출한 사람들을 처벌해 달라는 고소장을 7일 검찰에 냈다. 이 탈북자는 국가정보원이 탄원서를 특정 신문사에 제공했을 가능성을 강하게 내비쳤다. 사실이라면 국정원이 증거조작 논란을 물타기 하려고 탈북자 가족을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언론 플레이’를 한 것이 된다.
이 탈북자가 기자회견을 통해 공개한 내용은 충격적이다. 그는 지난해 12월6일 간첩 혐의를 받고 있는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씨 사건의 비공개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1월6일, 그는 북한에 있는 딸로부터 “아빠 때문에 국가안전보위부에 가서 조사를 받았는데 거짓말로 겨우 수습하고 나왔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는 1월14일 이런 사실과 함께 “유출자를 찾고 싶지만 자식들 때문에 그렇게 못 한다. 이런 일 다시 없게 해 달라”는 내용의 탄원서를 재판부에 냈다. 그때까지는 증인 출석 사실 정도만 유출된 것 같았는데, 4월1일 탄원서 내용이 사진과 함께 <문화일보>에 보도된 뒤에는 가족과의 연락이 완전히 끊어졌다고 한다. 비공개 재판 내용이 북한 당국으로 넘어갔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재판부에 낸 탄원서가 통째로 유출된 경위는 더욱 심각한 문제다.
이 탈북자는 유출 경위에 대해 “심증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탄원서를 낸 뒤인 2월 국정원 직원으로부터 탄원서 내용대로 <동아일보> 등과 인터뷰를 해 달라는 요청을 여러 차례 받았다고 밝혔다. 국정원이 인터뷰를 요청한 시점은 국정원이 유씨의 재판에서 낸 증거서류가 위조된 것이라는 중국 정부의 회신으로 증거조작 논란이 불붙은 때다. 국정원이 곤경에 처하자 유씨에 대한 의혹을 부풀려 조작 논란을 물타기 하려고 언론 인터뷰를 주선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탄원서 내용이 보도된 4월1일도 증거조작의 구체적 정황이 드러나 국정원 ‘윗선’에 대한 수사 요구가 거세던 즈음이다. 이 탈북자는 당시 자신이 기사가 보도되는 것을 승인했다고 알려준 사람이 있다는 <문화일보> 담당 간부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그의 의심대로 국정원이 그런 말을 한 유출 당사자라면, 우리 정부가 세심하게 보호해온 중요 정보원을 당장 이해에 필요하다고 국정원 스스로 내친 셈이 된다. 그 경위와 책임을 철저히 따져야 한다.
몇몇 신문의 문제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탈북자의 증언대로라면 이들 신문은 국정원의 주선과 정보 제공에 기대, 국정원 주문에 맞춰 기사를 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한겨레_[사설] 기초선거 무공천 철회가 ‘정답’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이 당원투표와 국민 여론조사를 실시해 기초선거 무공천 철회 여부를 결정짓기로 했다. 결과를 확실히 점치기는 어렵지만 당원들 사이의 압도적인 무공천 철회 여론을 고려하면 결국 공천을 하는 쪽으로 최종결론이 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새정치민주연합의 김한길·안철수 공동대표가 그동안의 무공천 강행 소신을 꺾고 출구전략을 마련한 셈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의 ‘회군’은 어느 면에서는 늦은 감이 있다. 한 선거에서 어느 당은 공천을 하고 어떤 당은 공천을 하지 않는 것은 정당 간의 유불리를 떠나 유권자들을 모독하는 일이다. 정치권 한쪽이 선거 규칙 개정을 완강히 반대할 경우 현행 방식대로 가는 게 당연한 상식이기도 하다. 어느 면에서 이 사안은 굳이 여론조사 방식까지 동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이번 결정으로 새정치 의지가 훼손됐다고 비판할 사람도 있겠지만 별로 설득력이 없다. 애초부터 기초선거 정당공천 배제는 새정치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기초선거 공천·무공천은 각기 장단점이 있을 뿐 ‘선과 악’이나 ‘새정치-헌정치’ 따위의 잣대로 재단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게다가 ‘한 선거 두 규칙’으로 정치가 난장판이 되는 상황에서 새정치 타령이나 계속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물론 안철수 대표로서는 ‘약속 파기’라는 비판을 어느 정도 감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대목에서도 안 대표 쪽이 유념할 게 있다. 우선, 지킬 수도 없고 지키는 것이 꼭 좋은 것만도 아닌 약속에 매달리는 것이 꼭 ‘신뢰의 정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게다가 안 대표는 단순한 국회의원이 아니라 거대 야당을 이끌고 있는 지도자다. 당이 처한 극심한 혼란과 불협화음을 그대로 방치하고 약속 준수만을 외치는 것은 정당 지도자의 자격이 의심스러운 치명적인 직무유기다. 안 대표는 이번의 ‘후퇴’를 자신의 정치적 자산 손상으로 받아들일 게 아니라 정치력과 경륜을 쌓아가는 값진 계기로 삼을 필요가 있다.
새누리당은 새정치민주연합의 결정에 이러쿵저러쿵할 자격이 전혀 없다. 여권은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 파기에 대해 지금까지 제대로 된 사과조차 하지 않았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자신들은 약속 파기로 이득을 보면서 상대편은 손해를 보더라도 약속을 지키라고 다그치는 뻔뻔한 모습을 더는 보지 않았으면 한다. 그동안 정치권은 기초선거 무공천 문제를 놓고 너무나 오랫동안 소모적 논쟁을 벌여 왔다. 하루빨리 이런 혼란상에 마침표를 찍고 각 정당이 정책과 인물로 정정당당히 유권자의 심판을 받기 위해 진력하길 바란다.

한겨레_[사설] 금융실명제법 개정안, 의미 크지만 아쉬움도

현행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이하 금융실명제법)이 많이 손질될 모양이다. 금융실명제법의 ‘구멍’이라는 지적을 받아온 차명거래를 줄이는 게 뼈대를 이루고 있다. 몇몇 여야 의원들과 금융당국이 이런 내용으로 법을 고친다는 데 최근 합의했다고 한다. 이르면 4월 안에 개정 법률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리되면 금융거래의 투명성이 높아져 구린 돈을 감추거나 세탁할 때 어려움이 커지기에 의미가 크다. 지하경제의 여지가 줄어들어, 경제부문에서 ‘비정상의 정상화’를 꾀하는 데에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듯하다.
금융실명제가 그동안 우리 사회에 기여한 바는 적지 않다.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전격적으로 도입한 뒤 금융거래에서 도명계좌와 허명계좌를 이용하는 데에 상당한 제약이 가해졌다. 금융 관행이 한 단계 진화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빈틈이 크게 나 있었다. ‘합의 차명’이 가능했던 게 바로 그것이다. 당사자들이 마음만 먹으면 명의를 빌리고 빌려주는 식으로, 차명계좌를 통해 얼마든지 금융거래를 할 수 있었다. 이는 금융질서를 어지럽히는 부정과 부패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재벌그룹 총수나 정치인이 등장하는 대형 금융범죄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금융실명제법이 ‘반쪽짜리’ 법이라는 지적을 받아온 것은 당연하다.
이런 문제는 개정 법률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꽤 줄어들 것으로 기대된다. 무엇보다 불법으로 재산 은닉 등을 하기 위해 차명거래를 하다가 적발되면 무거운 벌이 따르기 때문이다. 명의를 빌리거나 빌려준 사람은 물론, 계좌가 개설된 금융회사 임직원이 5년 이하 징역이나 5000만원 미만의 벌금을 물게 된다. 계좌에 든 돈은, 계좌 명의자의 것으로 본다는 조항 등도 효과가 적지 않을 듯하다. 금융회사의 실명확인 절차가 강화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아쉬운 점이 없지 않다. 지난해 법안이 발의될 때 들어 있던 내용 가운데 일부가 수정된 탓이다. 애초에는 차명거래를 원칙적으로 금하되, ‘범죄 목적’이 아닌 차명계좌에 한해 사전등록제로 허용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그런데 금융당국 등의 현실론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불법 행위를 목적으로 한 차명거래 차단 쪽으로 후퇴했다. ‘불법 행위를 목적으로 한’이라는 단서를 붙였는데, 이를 판단하는 과정에서 당국의 처벌의지가 약화될 수도 있지 않을까 걱정된다. 비자금으로 의심이 가는 차명거래 자체에 대해 단속하는 방안이 빠진 것도 그렇다. 다음 법 개정 때에는 반영되길 바란다.

우리는 왜 버티기를 멈추고 그만두기를 배워야 할까?

우리는 왜 버티기를 멈추고 그만두기를 배워야 할까?


성장과 배움의 기회를 주고 더 소중한 삶의 목표를 찾게 한다.

일,사랑,삶에서 한 패턴에 갇혀  있는 사람을 꺼내어 준다.

예상치 못한 삶의 역경에 대처하고 회복하도록 한다.


당신은 그만두기 유형 중 어떤 스타일?


☆1.게으름뱅이형

상황이 힘들어지거나 자기가 예상했던 것보다 요구되는 게 많은 듯 보일 때 쉽게 손을 놓는 중도포기 스타일...
이런 사람은 어떤 일도 마무리 짓는 경우가 드물다.


☆2.O.K.목장의 결투형

가식적인 그만두기로 그만두는 것을 최대한 미화시키면서,
그만두는 행위를 도덕적 의무나 다른 책무의 일부로 만든다.
유명인의 이혼이 대표적이다.


☆3.사이비형

불완전한 그만두기.
그만두어야 할 필요성과 욕구에 대해 구구절절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으나,그렇다 해도 여전히 그만두지 못한다.
어떤 행동 방침에 전념하지도 못하고 대안도 없어 어정쩡하게 시간을 보낸다.


☆4.협박형

"네가 이걸 안 하면 난 그만두겠어"하는 식의 입장이다.
이 스타일의 그만두기는 직장의 관리자들에게 나타난다.때때로 임금 인상이나 승진을 위한 꼼수로 사용된다.


☆5.잠적형

'잠적'은 슬그머니 사라지는 게 특징인,사실상의 중도포기다.
당사자의 용기부족이나 목적 부재에서 비롯된다.


☆6.빅뱅형

'한계에 다다른' 순간이며,
고도로 반응적이고,계획이나 의식적 생각이 전혀 없고,감정에 휘둘리는 유형이다.
가장 자기 파괴적인 중단스타일이다.


☆7.잠행형

거짓말쟁이 스타일이라고 부를 수 있다.
실제로는 그만둘 거면서 시치미를 뚝 떼고 앞으로 노력하겠다고 약속까지 한다.


그만두기와 체념은
새로운 출발을 위한 것이고,때로는 매몰비용을 포기하는 것이 더 큰 발전을 가져다 준다.


☆ 미국 심리치료 교수인 앨런 B.번스타인외 1인이 쓴 <더 소중한 삶을 위해 지금 멈춰야 할 것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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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2일 수요일 중앙_[사설] "죽겠다는 사람, 어떻게 막아" 인식 바꾸자
“인생은 유희가 아니다. 자기의 의사만으로 그것을 포기할 권리가 없다.” 한국은 톨스토이의 명언이 무색한 사회다. 자살 사망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단연 1위다. 2012년 기준 인구 10만 명당 28.1명이다. OECD 평균의 2.3배다. 증가율도 1위다. 2000∼2010년에 100% 이상 늘었다. 같은 기간에 포르투갈·칠레를 제외한 모든 국가가 감소세를 보였다. ‘자살 대란’이 일어났지만 우리는 국가적 종합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죽겠다는 사람, 무슨 수로 막아’ 하는 안이한 생각이 오늘의 ‘자살 공화국’을 만들어냈다.
 자살 유형은 크게 의학적·사회적·철학적 자살로 나뉜다. 이 중 삶에 대한 궁극적인 회의에서 비롯되는 철학적 자살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든지 있었다. 예방·관리하기 어려운 자살 유형이다. 반면 고립감·스트레스·충격 등이 반복되면서 벌어지는 사회적 자살이나, 육체적·정신적 질병 때문에 일어나는 의학적 자살은 사회 분위기와 정책의지에 따라 상당 부분 막을 수 있다.
 지금까지 자살 원인·유형을 면밀하게 조사한 경우가 드물었다. 그렇다 보니 적확한 대책도 세우기 어려웠다. 1일 보건복지부가 자살 시도자 면접조사와 심리적 부검, 국민 인식조사를 토대로 대규모 실태조사 결과를 내놓은 것은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자살 시도자 1359명의 시도 이유를 조사한 결과 ‘우울감 등 정신과적 증상’이 37.9%로 가장 많았다.‘대인관계 스트레스’(31.2%)가 뒤를 이었고 ‘신체적 질병’(5.7%)도 적지 않았다. 의학적·사회적 자살 유형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흔히 자살연구자는 교통사고와 자살을 비교한다. 1990년 초반, 10만 명당 40여 명이 교통사고로 죽었다. ‘경제가 발전하면 차가 늘고 차가 늘면 교통사고 사망이 늘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교통지옥을 만들었다. 이후 교통인프라를 정비하고 법규를 강화하며 대대적인 교통의식 선진화 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 지금은 10만 명당 10명대로 떨어졌다. 의학적·사회적 자살 역시 확고한 의지만 있으면 확 줄일 수 있음에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인식이 아직 강하다.
 이번 실태조사 결과는 정책방향도 제시해준다. 자살 시도 인구의 자살 사망률은 10만 명당 700명으로 조사됐다. 이는 일반 인구의 25배나 됐다. 단기적으로는 자살 고위험군을 집중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비극적 선택을 의미 있게 줄일 수 있다. 실제로 몇몇 지방자치단체가 자살 시도자에게 정기적인 상담서비스를 제공해 큰 효과를 보기도 했다. 중장기적으로는 우울증 등이 정신이상이 아니라 뇌 질환이라는 인식을 확산시키고 복지·안전망을 촘촘히 짜는 등의 대책이 필요하다. 얼마 전 국회 입법조사처는 매년 자살로 인한 사회경제적 손실이 최대 3조800억원에 이른다는 보고서를 냈다. 막대한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죽겠다는 사람, 수를 쓰면 막을 수 있다’는 사회적 합의가 반드시 필요하다.
 
 
2014년 4월 2일 수요일 한겨레_[사설] ‘자살 공화국’ 오명 벗으려면 사회안전망 강화부터
보건복지부가 1일 자살 시도자 면접조사와 심리적 부검, 국민 인식 조사를 토대로 대규모 실태조사 결과를 내놓았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1위 자리를 9년째 차지하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늦은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앞으로 정책 대안을 마련하는 데 중요하게 쓰일 자료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자살이라는 현상은 심리학의 대상이나 사회학의 대상으로 나눌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심리학적으로 접근하면 자살을 개인 탓으로 돌리는 잔혹한 논리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자살에 대한 사회학적 접근은 통계 수치 속에서 개인이 처한 구체적 삶과 고통을 간과하기 쉽다. 둘 다 경계해야 할 태도다.
그런데 복지부가 내놓은 자살예방 대책은 지나치게 의학적인 치료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듯이 보인다. 사회안전망을 촘촘히 짜겠다는 대책은 눈에 띄지 않고 전국민 정신건강검진을 추진하겠다고만 밝혔다. 정신과 치료를 통해 약물을 복용하고 잠시나마 고통을 잊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사회적 문제는 감춰지고 자살을 유발하는 구조적 문제는 더욱 깊어질 뿐이다. 결국 자살은 마음 약한 개인의 책임으로 돌려지고, 근본적인 문제를 방치한 국가의 책임은 사라진다.
우선은 자살을 야기하는 사회구조를 고치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학교나 직장에서 경쟁에 내몰려 소외되거나 폭력의 희생자가 되는 것을 막아내고, 자살 위험군에 속하는 노인과 빈곤층에 물질적·정신적 지원을 확충하는 게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한국의 자살률이 지금처럼 높았던 때가 있었다. 1960~1970년대 개발독재 시기다. 1965년 인구 10만명당 29.8명이 자살했고, 1975년 자살률은 31.9명이었다. 박정희식 압축 근대화가 기존의 가족·친족·지역 공동체를 와해시켰고 사회안전망 없는 개발이 인간을 절망으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그런 비인간적인 사회구조가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된 지금도 그대로 존속하는 것이다.
그래도 당장 응급조처가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긴급구조망을 연결해줘야 한다. 전북 진안군이 좋은 사례다. 진안군은 2011년 10만명당 자살자가 75.5명으로 전국 최고를 기록했다. 깜짝 놀란 전북도가 전수조사를 통해 자살 위험이 큰 노인 63명을 파악한 뒤 전문가들로 하여금 한 달에 한 번씩 노인들을 찾아가 상담하도록 했다. 2012년 사망률은 21.8명으로 뚝 떨어졌다. 1년 만의 변화다. 누군가가 자기들을 돌봐주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노인들이 많이 줄어든 것이다.
 
 
*뒤르켐의 자살 4유형: 이타적, 숙명론적, 아노미성, 이기적 자살
1) 이타적 자살(사회적): 개인보다는 공동체를 중시하는 사회에서 나타남. 전태일 분신, 국정원 대선개입 분신자살한 50대 남성 등의 자살이 이에 해당한다.
2) 숙명론적 자살(철학적): 개인의 자유와 욕망이 완전히 거부된 사회에서 빈번한 자살.
3) 아노미성 자살(사회적+철학적): 급격한 사회변동으로 사회가 개인의 삶에 필요한 가치와 규범을 제공하지 못하는 상태로 인한 자살.
4) 이기적 자살(사회적): 사회적 지위의 낮음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으로 인한 자살. 경제적 차별, 교육 기회와 정치적 참여의 사회적 제약, 가정 내 폭력 등에 의해 일어난다.
*자살자 사후 심리부검:
1) 심리부검: 신체적 부검과 달리 유가족 등 주변 사람들의 증언과 유서 등을 통해 그 사람이 자살에 이른 이유를 규명하는 것. 자살자의 심리적 부검을 통해 자살위험요인을 실증적으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효과적인 자살예방정책 수립에 활용할 수 있다. 복지부와 지자체에서 적극적으로 시도했지만 활성화되지 못한 이유는 죽음을 터부시하고 자살을 덮으려는 한국인의 정서 때문에 유가족의 협조를 받기 어려웠기 때문
2) 심리적 부검 항목: ▲사망자의 인적 정보 ▲자살 사망자의 사회적 과거력 ▲자살 사망자의 신체적 질병력 및 정신 질환력 ▲자살 사망자의 음주 및 약물 남용 과거력 ▲자살 사망자의 사망 당시 대인관계 등 15개 항목
* 우리나라 자살률: 인구 10만 명 당 32.8%(2009년 기준, 최근 소폭 하락)로 OECD 평균 12.3%를 훨씬 웃돌고 있기 때문에 자살 문제는 현재 한국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시급한 문제. 다른 나라에 비해 특히 한국은 60세 이상 노년층의 자살률이 매우 높으며 지속적으로 증가하는(1989년 전체 자살의 10.3%에서 2008년 32.8% 로 증가)경향을 보였다.
* 자살의 원인: 생물학적, 심리적, 사회적 요인
1) 자살 유발 요인: 가족 안에서의 혹은 사회적 역할의 상실로 인한 자아 존중감 저하, 심신의 건강상태, 배우자 상실, 가족 불화, 경제적 불안정 등. 이러한 요인들은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얽혀 노인 자살을 유발한다. 자살문제는 하나의 개인적인 사건에 의해서라기보다 총체적인 삶과 사회적 상황을 반영함으로써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살은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할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자살률을 중재할 필요가 있다.
2) 자살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차원의 요인
구 분
위험요인
보호요인
개별 요인
연령, 성별
정신질환, 물질남용, 상실
자살시도 경험
성격특성 혹은 성격 장애
감금, 자살수단
종교, 신념, 문화
대처능력이나 문제해결 기술
정신건강과 관계의 유지
레질리언스*, 자존감, 목표, 사명
결정, 인내, 긍정성, 공감력
지적 능력(청소년), 삶의 이유
동료 / 가족
요인
대인폭력, 갈등, 학대 등의 피해경험
자살 생존자, 독신
신체적 정신적 건강관리 문제
자살수단 접근
가족응집력, 사회적 지지감
배우자나 부모와의 결속력
건강관리체계에 대한 접근성
지역사회요인
사회적 고립, 철퇴
신체적정신적 건강관리 자원 부재
스티그마, 자살 생존, 실업
신체적정신적 건강관리 자원
사회적 지지, 가까운 인간관계
도움 요청 행동에 대한 개방성
자살 위험에 대한 인지와 반응
사회적 보호
요인
농촌 / 격리된 지역 거주
문화적 태도와 가치
스티그마, 미디어 영향
알코올 오남용, 사회적 통합의 부재
경제적 불안정
도시 / 도시 근교 거주
신체적정신적 건강관리 자원
생명존중 문화
미디어 영향
* 레질리언스(resilliance): 역경으로부터 다시 일어나 강해지고 자원을 더 풍부하게 할 수 있는 능력. 위기와 도전에 대한 반응으로 인내하고 자정하며 성장해가는 역동적 과정. 경험에 대한 개방성과 타인들과의 상호 의존을 통해 형성. 회복 탄력성과 유사
* 자살예방을 위한 해결책: 지역사회 협력. 자살에 대한 사회적 인식 개선 노력, 사회적 지지 확대, 사회적 네트워크 강화
* 네트워크 이론
1) 1970년대 중반 이후 영국에서 경기침체와 재정 위기로 사회복지 민영화가 추진된 것과 공식적 서비스 기간의 관료화에 대한 비판과 비공식적 네트워크를 활용할 필요가 증대되면서 등장했다. 지역복지에서 네트워크는 지역사회복지 수요자의 복지증진을 위해 사회복지공급주체간의 정보 공유, 서비스의 연결들을 위한 사회복지조직 및 관련 조직들이 유기적 연계 체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활동이다. 우리나라는 민간기관간 네트워크는 이미 이뤄지고 있었으나 제도적 장치가 미흡했다가 참여 정부의 지방분권화 정책으로 2003년 사회복지 사업법이 개정되고, 지방정부 중심의 네트워크 거버넌스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민관 협력 네트워크가 강화됐다.
* 스트레스 취약성 모델
1) 개인적인 특성이 자살률에 미치는 영향은 스트레스 취약성(stress vulnerability) 모델로 설명할 수 있다. 스트레스 취약성 모델은 자살과 같은 이상 행동은 개인이 갖고 있는 취약성과 개인이 경험하는 스트레스의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된다고 설명한다. 예컨대 노인들은 생애 주기 상 스트레스를 더 많이 경험하는데, 여기에는 신체질환, 배우자 사별, 대인관계 축소, 경제적 어려움과 은퇴, 정신질환 등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있다. 게다가 상대적으로 개인적 취약성을 많이 가지고 있어 스트레스에 노출될 경우 자살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사회적 지지가 정신장애를 예방하는 완충역할(buffering effect)을 할 수 있다.
* 사회적 지지: 사회 관계의 여러 가지 측면을 의미하는 다차원적 개념으로서 친구나 이웃, 기타 사람들에 의해 제공되는 여러 가지 형태의 도움과 원조를 말한다. 극도의 스트레스나 상실을 경험할 때 사회적 지지 체계가 충분히 유지되어 있다면 자살률을 감소시킬 수 있다. 또한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외로운 환경에 처한 사람이 사회적으로 잘 통합된 사람보다 자살률이 더 높다.
* 자살예방 지역 네트워크
1) 자살예방을 위한 지역 네트워크를 활성화하기 위한 요소: 지역사회 복지 및 보건 협동체계 개발, 상호작용을 활성화시켜 참여 동기 부여
2) 경기도 ‘무한돌봄 네트워크’: 지역 네트워크의 특징을 잘 살려 자살예방에 기여. 2008년 금융위기의 여파로 우리 사회의 병폐가 드러나면서 이를 타개하기 위해 경기도는 도 차원의 복지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경기도 무한돌봄 네트워크는 시∙군 무한돌봄센터 운영을 지원하며 자살예방 문제 외에도 가정폭력, 약물중독 등의 다양한 위기 관리를 모색하고 있다.기존의 단편적인 서비스 제공 방식의 자살 예방이 아니라 사례 관리 중심의 자살 예방 서비스
<서비스 기관 중심의 자살예방과 사례 관리 중심의 자살 예방 차이>
구분
서비스 기관 중심의 자살 예방
사례 관리 중심의 자살 예방
서비스
제공 방식
기관에서 실시하고 있는 서비스를 자살 위험군 계층에게 제공
예비 자살자나 고위험군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파악해 필요 서비스를 맞춤 연계해 제공
기관 연계
중요하지 않음
대상자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기 때문에 서비스 제공 기관들간의 연계가 중요
문제점
서비스 중복과 사각지대 발생
효과 측정 어려움
서비스 기관 중심 자살 예방의 문제점 해소
성과 분석 가능
4/5 한겨레_[사설] 존재 이유 스스로 부정한 방통심의위
<제이티비시> 중징계 결정으로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통심의위)가 또다시 편파 심의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방통심의위의 존재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방통심의위는 3일 <제이티비시>의 ‘뉴스큐브6’이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의 피고인 유우성씨를 인터뷰한 것이 공정성·객관성 등을 위반했다며 ‘관계자 징계 및 경고’라는 중징계 결정을 내렸다. 여당 추천 위원들이 밀어붙인 이 결정은 합리성도 일관성도 없는 억지 심의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제이티비시 쪽이 유씨 인터뷰를 내보내기 전날인 2월17일에도 검찰 쪽 주장을 보도했고 3월10일에는 검찰 쪽 반론 성격의 대담·인터뷰를 내보냈다고 해명했는데도 여당 추천 박만 위원장은 “공정성은 해당 프로그램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며 징계를 강행했다. 그렇다면 3월10일의 검찰 쪽 단독 인터뷰는 또다른 편향 아니냐는 야당 추천 위원의 반론에 박 위원장은 이 사안과 관련 없다며 피했다. 일관성 없는 행태다.
이전에도 방통심의위는 이중 잣대와 편파 심의로 여러 차례 지탄을 받았다. 지난해 12월에는 제이티비시의 ‘뉴스9’가 통합진보당 해산심판청구에 반대하는 인사만 출연시켰다는 이유로 중징계를 내렸다. 그러나 바로 앞서 <티브이조선>이 성남시장을 종북성향이라고 비난한 정미홍씨를 출연시킨 사안은 가장 낮은 수준인 ‘행정지도’를 내리는 데 그쳤다.
방통심의위가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을 계속하는 것은 이 위원회의 불균형 구조 탓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전체 심의위원 9명 중 여당 추천 위원이 6명이나 되고, 위원장과 부위원장을 모두 이들 중에서 맡다 보니, 야당 추천 위원 3명이 아무리 타당한 주장을 하더라도 다수가 힘으로 밀고 가면 모두 통과되고 마는 것이다.
심의위원들의 자세도 문제다. 아무리 6 대 3의 편향 구조라도 여당 추천 위원들이 공정하고 민주적으로 사안을 심의하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이렇게까지 엉터리 심의가 반복될 리 없다. 심의의 민주성을 확보하겠다면 위원회를 애초의 기구 성격대로 합의제로 운영하면 된다. 최근 통계에서도 입증됐듯이 방통심의위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은 예외 없이 다수결로 밀어붙였다. 방통심의위가 사실상 집권세력의 거수기 노릇만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정치환경이 바뀌지 않는 한 억지 논리와 이중 잣대로 일관하는 방통심의위를 정상으로 돌려놓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런 심의위가 계속 있는 한 여론의 다양성과 건강성은 죽고 진실을 호도하는 선동방송만 활개칠 게 뻔하다. 심의 기능을 방송통제 수단으로 악용하는 방통심의위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방송의 공공성, 정보 통신의 건전한 문화를 창달하며 올바른 이용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설립. 대통령이 위촉한 9명의 심의위원으로 구성한다. 이 가운데 3명은 국회의장이 국회 각 교섭 단체 대표위원과 협의하여 추천한 사람을 위촉하고, 3명은 국회 방송통신특별위원회에서 추천한 사람을 위촉한다. 심의 위원장 1명과 부위원장 1명을 포함한 3명을 상임으로 하고, 상임위원 3명은 호선(互選)한다. 심의위원의 임기는 3년이며, 1회에 한하여 연임할 수 있다.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 방송과 통신에 관한 규제와 이용자 보호 등의 업무를 관장위원은 5인, 대통령이 추천한 2인, 국회 교섭단체에서 추천한 3인[8]을 대통령이 지명한다.상임위원 중 1인은 위원장을 겸임하며, 나머지 4인 중 1인이 부위원장을 겸직한다.
*방송의 공공성? 공정성?
“뉴스는 시리즈물이다. 어제 왼쪽으로 편파적이었고 오늘 오른쪽으로 편파적이면 공정한 것이 뉴스다”.
1) 뉴스가 사회적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가, 보도된 사실들은 실재하는 현실과 부합하는가라는 ‘진리’와 관련된 문제: 인식론차원, 현실반영론 - 사실성 검증과 관련
2) 언론의 보도가 우리 사회의 공동선을 반영하는가, 기자들의 취재와 보도과정이 도덕적으로 정당한가를 묻는 ‘윤리판단’의 문제: 윤리차원
3) 보다 바람직한 사회상(과정적진리): 부당함과 억압이 적은 사회개혁을 지향하는데 언론의 보도가 기여하느냐를 묻는 ‘사회정의’와 관련된 문제 → 언론보도의 공정성을 검증하는 질문
* 편파보도⋯편드는 보도. A후보와 B후보가 대선 후보로 나와서 TV 토론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보도하는 언론이 A후보가 B후보를 일방적으로 이겼다고 했을 때, 왜곡보도는 아니지만 B후보 진영으로부터 항의를 받을 수도 있다.
* 공정보도는 가치판단의 문제가 개입되기 때문에 훨씬 복잡하다. 예를 들어 프랑스 언론(신문)은 대선 선거 과정에서 철저하게 정파적이다. 그런데 방송의 경우 철저히 기계적 중립을 취한다. 우리나라는 의석수에 비례해서 방송시간이 긴 이점이 있다. 기계적 중립이 불공정하다는 문제가 제기됐기 때문이다. BBC는 선거상황이든 뭐든 적절한 균형(적절한 불편부당성-어느 편에도 서지 않겠다는 것. 포클랜드 전쟁에서 BBC는 Our army를 british military라고 표기했다)을 취한다. 그러나 약자들의 목소리도 충분히 실어주는 식으로 하고 있다. 공정성을 해석하는 사회 문화적 차이가 이러한 국가별 공정 보도의 가치판단의 차이를 낳았다. 공정성은 주관적 해석의 가능성이 높다.
* 보도는 공정해야 한다는 측면은 대단히 논란이 있다. 주창 저널리즘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보도는 공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공정성을 사회 정의에서 가져오는데 무엇이 사회적 정의라는 것에 있어서는 윤리적 논의가 계속 된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의 문제는 언론학에서 이미 다뤄지던 문제다. 철학적 기원을 사회적 정의에서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 존 롤스의 사회정의 1) 절차적으로 공정해야 한다.2) 절차 속에 소수자가 가장 큰 수혜를 받을 수 있는 절차를 만들어야 한다.
* 객관성과 비객관성
1) 사실의 관계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 자체가 기자나 뉴스생산자의 선호∙주관이 개입된다. 맥퀘일은뉴스 자체에 일정 정도의 주관성이 개입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반면에 웨스터슈탈은 뉴스는 본래 객관적이라고 전제했다.
2) 비객관성: 당파성, 선정성, 주관성∙선택성으로 구성된다.
3) 객관성의 개념은 철학적으로 굉장히 논란이 되고 있다. 사회과학자들은 객관적 실체에 대한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사회현실도 객관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현상은 고정돼 있는 하나의 자연현상이 아니다. 자연현상과 달리 나의 외부에 존재하는 사회현실은 인정하는 것으로 구성된다는 관점이다. 사회현실은 고정돼 있거나 자연현상처럼 어떤 물질의 형태를 띠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 상상이 개입되기 때문에 사회현실은 고정돼있는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변화한다. 사회가 자기변화하는 것을 설명하는 방식이 구성주의다. 언론은 이 과정에서 사회현실이 특정한 방향으로 재구성되는데 영향력을 행사한다. 언론의 작동이 우리사회를 바람직한 모습으로 재구성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바람직한 모습으로 구성되는 것은 ‘진실에 가까운 쪽으로 구성’되는 것으로 미디어 보도는 사회세력 간의 균형을 위해서 공정하게 보도해야 한다. 설령 미디어 보도가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구성되더라도 이는 진실에 가까운 쪽으로 재귀된다.하지만 진실에 가까운 보도를 하는 것이 언론의 핵심적인 사명이다.
4)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객관성이 존재하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객관성은 자기변화하는 과정에서 자기변시을 한다. 구성돼 갈 때에는 사회의 문화적 배경이나 가치가 바람직하다고 합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갈등이 있을 때 미디어가 갈등을 조정하는 기능은 중요하다. 이 때 필요한 언론보도의 자세는 객관적일 수밖에 없는가. 논리적으로 논변 가능한지 판단해야 한다. 사회현상의 객관적 실재를, 자연과학자들이 이야기하는 객관적 실재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객관성은 사회현실의 객관성이다. 철학적인 개념으로는 합의된 간주관성(누구나 동의하는 inter-subjectivity)다. 주관과 주관이 부딪힐 때 생긴 교집합 부분이 일종의 간주관성의 영역이다. 사회에는 다양한 관점이 존재하고 다양한 시각이 존재한다. 서로간의 합의된 영역으로 서로 인정할 수 있는 부분을 우리는 ‘객관적으로 구성된 진실에 가까운,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객관적인 것’이라고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언론의 객관성은 사회적으로 구성ㆍ합의되는 객관성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철학적인 의미에서는 간주관성이다. 그래서 언론보도는 사회를 합당하고 바람직한 모습으로 구성해내기 위해 객관주의적 저널리즘 태도가 필요하다.
5) 객관주의적 저널리즘은 사회적 진실에 다가가기 위한 실천적 보도행위다. 이 때 중요한 저널리즘의 가치가 공정성, 균형성이다.
***진실한 보도를 위한 불편부당성은 적절히 필요하다***

2014년 4월 7일 월요일

이방인(1942) 알베르 카뮈

이방인(1942) 알베르 카뮈
1. 뫼르소 탐구
알제리에 사는 평범한 월급쟁이. 어머니 장례식 다음날 해수욕을 하고 여자친구와 함께 밤을 지낸다. 희극영화도 본다. 해변가에서 아라비아인을 총으로 4번 쏴 죽이고 잡힌다(불행의 문을 두드린 네 번의 짧은 소리).
왜 죽인 것일까? 뫼르소는 “육체적 요구가 흔히 감정을 방해하는 성질이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감옥에 갇혀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도 있었다. 어머니의 생각도 그랬었다. 어머니는 늘 그랬다. 사람들은 무엇에나 익숙해지는 거라고” 말했다. 감옥에 가두는 것은 자유를 빼앗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내 익숙해져서 다만 시간을 보내는 것이 힘들 뿐이라고 했다.
재판정에서 뫼르소를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그가 가진 특성을 범죄자로 몰아간다. 장례식날 냉정한 뫼르소를 보고 놀랐다는 양로원장이 대표적이다. 재판에서 뫼르소는 완전히 배제됐다. 그에게 다정스러운 태도나 선의를 가질 권리는 없는 것이었다. 그는 ‘모두가 태양 탓’이라는 다소 의아한 자기변론을 했다.
뫼르소는 모든 기성의 가치와 습관에 무관심해져 인생에는 어떠한 의미도 없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은 이미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누구는 사형집행 날짜를 알고, 누구는 모를 뿐이라는 것이다.
뫼르소, 나는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렇게도 오래 전부터 나를 따라다니던 그 소리가 멎을 때가 있었으리라고는 아무리 해도 상상할 수 없었다. 이러다가 신부가 속죄기도를 하자고 했을 때, 묵묵히 듣다가 결국 폭발한다.
“죽음 가까이에서 해방감을 느끼며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마음이 생겼을 것임에 틀림없었다”며 삶에 대한 애착을 다시 가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118p).
뫼르소는 현재의 욕망에 강하게 지배돼 이해타산도 없이 행동에 몰입하는 인간이다. 순진하고 정직한 인간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 1:2-3, 개정). 솔로몬왕이 노년기에 쓴 전도서, 모든 것을 가져본 왕이 모든 것이 헛되다고 고백했다. 다 가져도 정말 내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끝나기 때문에 허전하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카뮈는 허무주의자(니힐리즘*)는 아니다.
“만약 아무 것도 의미를 가진 것이 없다 하더라도, 그것은 옳을 것이다. 그러나 어딘가에 여전히 의미를 가지는 것은 존재한다”
인간은 무관심, 객관, 때때로의 모호함, 그리고 자연적 질서에 의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는, 그러나 예비되고 불안정한 인간의 행동에 의해 창조된 부조리적 세계의 신하라는 실존주의가 자주 취하는 관점을 따르고 있다.
2. 카뮈 탐구(1913~1960)
프랑스의 피에누아르 작가, 저널리스트, 철학자. 아버지는 1차대전에서 사망했고, 어머니는 스페인인으로 문맹이며 청각장애인이다. 스페인을 좋아했고 어머니를 사랑해 공공연하게 알제리 독립 반대의 이유가 어머니의 생활터전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1935년, 맑스주의의 강령에 대한 지지보다는 에스파냐 내전의 원인이 된 스페인의 정치 상황에 대한 관심 때문에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한다. 이후 좀 더 독립적인 성향의 알제리 공산당이 수립되자 카뮈는 알제리 공산당에 가입했고, 이로 인해 트로츠키주의자로 비난을 받으며 1937년 당에서 제명됐다. 그는 공산당의 교조적인 태도를 혐오했다.
이방인에서 뫼르소는 사랑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결혼은 할 거라고 입장을 몇 번이고 밝혔다. 하지만 카뮈 자신은 결혼제도에 대해 극렬히 반대해 몇 차례의 혼외 관계, 불륜을 했다.
카뮈는 반전론자였다. 그리고 독일에 저항했다. 지하에서 신문을 출판하던 레지스탕스 조직 콩바에 가담했다. 후에 이 신문의 편집자가 돼 전투 이후를 보도했다. 1945년 8월 8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에 대한 반대 주장의 논설을 싣기도 했다. 콩바가 상업적인 신문이 되자 1947년 사임했다.
철학자 카뮈.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은 상태, 세계의 의미, 정순함에 대한 우리의 열망의 결과는 부조리를 낳는다. ‘나는 무엇인가’. 이 것도 아니고 저 것도 아니고 그 것도 아니고 그러다 보면 결국 ‘생각하는 나’만 남는다. 노벨 문학상 카뮈. 사형에 반대한 에세이 <단두대에 관한 성찰>로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 인권 운동가 카뮈. 평화주의와 세계 어디에서든 일어나고 있는 사형에 대한 저항을 계속해서 주장했다.
많은 작가들이 개인의 부조리에 대해 정의하고 해석해왔으며, 부조리의 중요성에 관한 그들 나람의 생각에 대해 글을 써왔다. 카뮈는 부조리주의의 창시자가 아니며 부조립주의 철학자로 계속 여겨지는 것을 후회했다. 카뮈는 부조리에 대해 철학적인 설명을 하거나 정의를 내리고 있지 않고, 대신에 부조리의 경험을 투사했다. 이방인은 인간 존재의 삶에 존재하는 부조리에 관한 이야기다.
카뮈는 행복과 슬픔, 어둠과 빛, 삶과 죽음과 같은 이원성에 관해 말했다. 행복이란 무상한 것으로 인간의 상태는 하나의 필멸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분석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우리는 우리의 삶과 존재가 좀 더 위대해지는 데 가치를 둔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언제고 우리가 죽을 것을, 그리고 극단적으로는 우리의 존재가 무의미해 질 것임을 알고 있다. 우리가 이러한 이원성과 함께 사는 한 우리는 우리의 불행한 시기를 받아들일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도한 행복한 경험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동시에 나의 삶은 무가치하다.
*실존주의: 개인의 자유, 책임, 주관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철학적, 문학적 흐름이다. 실존주의에 따르면 각자는 유일하며, 자신의 행동과 운명의 주인이다. 3차례 전쟁(1차, 스페인, 2차)을 겪은 유럽에서는 허무감과 좌절감이 팽배했다. 그 결과 인간의 이성, 역사의 발전, 신의 권능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생겨났다. 허망과 절망이 철학적, 문학적 고찰의 출발점이 됐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절망감을 지성으로 극복하고 논리화하는 과정에서 실존주의 철학이 생겨났다.
우발적이고 허망한 세계에 내던져진 인간은 자신의 자유에 모든 것을 걸고, 이성으로 절망을 인식해야 했다. 이성을 가진 인간과 비합리적인 세계 사이에 있는 모순이 부조리인데, 이것을 논리화하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 긍정하며, 즉 반항하며 허무감을 이겨내고 휴머니즘을 재건하게 된다.
실존주의는 유신론적 실존주의와 무신론적 실존주의 두 가지 형태다. 공통된 사상은 인간에게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는 것, 즉 인간은 주체성으로부터 출발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실존주의는 니힐리즘이 자아를 강조한 나머지 세계를 부정하기에 이르는데 반해, 같은 자아의 실존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어떤 형태로든지 자아와 세계를 연결하려고 노력한다. 즉, 내가 있다고 하는 전제부터 출발해 나를 세계와 연결해 그 전제를 확인하려고 하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말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하는 논리가 역전되고 어떻게 하면 내가 존재한다고 하는 사실을 먼저 파악할 수 있는가가 추구된다.
*허무주의(니힐리즘): 기성의 가치 체계와 이에 근거를 둔 일체의 권위를 부인하고 음산한 허무(니힐)의 심연을 직시하며 살려는 사상적 입장이다.
우주·인생의 진상을 무(無)에서 보려고 하는 사상은 노장(老莊)의 무위자연(無爲自然) 사상이나 불교의 제행무상(諸行無常) 사상에서도 볼 수 있으나, 자각적인 사상으로서의 본래의 니힐리즘은 19세기 중엽 이후로부터 현대에 걸친 서구 사회의 특유한 사상이다. 곧 서구 근대 시민 사회의 가치체계가 붕괴하고 그 후에 올 장래의 가치에 대해 전망할 수 없는 역사의 위기적 전환기에 있어서 소시민층의 세계관의 반영으로서 성립한 것이다.
시민 사회를 역사적 진보의 완성으로 성화(聖化)시키는 헤겔의 절대정신(絶對精神) 철학은 그리스적 지성과 유대적 신앙의 대담한 절충을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이 강제적인 결혼은 중매자인 헤겔의 죽음과 함께 파탄을 일으켰다. 합리적·실증적 정신의 발달에 의해 그때까지 가치 목적을 한몸에 집중시키고 있던 신에의 신앙이 상실되었을 때, 그 후에 남겨진 적나라한 자연의 실상(實相)은 가치의 껍데기라고 할 수 있는 니힐의 모습을 드러내고 사람들을 무한한 불안과 절망의 심연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따라서 헤겔 철학에 반발한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 철학이나 키르케고르의 실존주의 사상에 근대시민들의 생을 잠식하고 있는 니힐한 기분이 짙게 반영되기 시작하였다. 또 헤겔 좌파의 맹장 포이어바흐의 무신론(無神論)을 철저히 밀고 나가 강렬한 에고이즘의 입장을 세운 독일의 '자유파(自由派)' 사상가 슈티르너의 자리를 무(無) 위에 놓음으로써 자기 이외의 어떠한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절대적 자유를 향수하려는 무정부주의적 니힐리즘 철학을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니힐한 시대 풍조는 드디어 러시아의 작가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1861)의 청년 주인공 바자로프에 의해 니힐리스트라는 하나의 인간상으로까지 결정(結晶)되었다. 철저한 과학적 실증주의 입장에서 일체의 기성 질서나 가치의 권위를 부정하는 이 자유주의를 투르게네프가 '니힐리스트'라고 명명한 이래로 니힐리즘이라는 용어가 일반화되었다. 신인(神人) 예수에 대한 소박한 신앙을 거부하고 스스로 인신(人神)의 입장에서 서려고 하는 니힐리스트들의 삶은, 도스토옙스키의 영필(靈筆)에 의해 신을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무서운 인격분열의 절망을 초래하는 것으로서 날카롭게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 사조로서의 니힐리즘의 저류를 철저히 적발하여 이를 명확한 하나의 사상으로 끌어올린 사람은 니체로서, 니체는 힘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지배하고 고귀한 자가 비소(卑小)한 자를 지배하는 것이 본래의 가치 체계라고 하는 권력의지설(權力意志說)의 입장에서 니힐리즘을 분석하여 '수동적(受動的) 니힐리즘'과 '능동적(能動的) 니힐리즘'의 두 유형을 발견한다.
'수동적 니힐리즘'은 약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서 쇠퇴한 니힐의 현실을 직시할 것을 회피하고 찰나적인 향락주의나 무관심한 이기주의 등 퇴폐적 삶에 의해 공허감을 채워보려는 것이다. 여기서 니힐리즘은 잠재적인 형태로 예감될 뿐이며 그 참된 극복은 무한히 연기된다. 이에 대해 소모적인 현실 도피의 삶을 거부하고 니힐의 병근(病根) 한가운데로 적극 개입함으로써 허무의 현실을 초극하려는 것이 '능동적 니힐리즘'이다. 이러한 능동적 니힐리즘의 입장에서 모든 현존하는 가치나 질서가 뽐내는 절대적 권위를 파괴해 갈 때, 거기에 새로운 가치를 자유로이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싹튼다. 우상(偶像)의 가면을 벗기는 이기(利器)로서 무(無)를 내세움으로써 무를 단순한 생의 소모 원리(消耗原理)로부터 생의 적극적인 창조 원리로 전환시켜 나가는 '능동적 니힐리즘'이야말로 니힐리즘의 지배 밑에 있는 현대를 살아가는 당연한 생활 방식이라고 니체는 말한다.
확실히 근대 합리주의의 문화는 여러가지 형태로 '목적과 수단의 가치 전도'를 일으켜서 잠재적인 니힐리즘을 준비하고 있다. 니힐리즘은 이 잠재적 니힐리즘과 성실하게 대결하여 거기에 숨어 있는 우상 숭배적인 태도를 파괴하고 그 폐허 위에 진실한 가치의 탄생을 이룩하려고 한다. 물론 니힐리즘 자체는 환영할 만한 손님은 못되지만 적어도 현실 도피적인 무관심주의나 찰나적인 향락주의보다는 훨씬 진지하고 성실한 생활 태도의 소산인 것이다. 타협을 거부하고 진실하게 살려고 하는 자만이 우상숭배적인 삶의 허망함에 절망할 수 있는 것이다. 허무를 우러르고 허무의 노예가 되는 것보다는 허무를 허무로서 직시하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키에르케고르도 역설한 것처럼 현실의 삶이 허무에 잠식되고 있을 때, 이러한 삶에 대해 절망하지 못한다는 것은 구원할 수 없는 중증(重症)의 절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니힐리즘은 거기에 안주할 서식처는 아니지만, 진실한 삶에 도달하기 위하여 경과해야 할 현대인의 필수적인 운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인생의 전체적 목표와 그 목표 달성을 위한 온갖 부분적 수단의 본말관계(本末關係)를 전도하는 것이 잠재적 니힐리즘의 참된 원인이다. 이러한 가치전도를 바로잡으려는 것이 '생의 철학'이다. 생의 철학에서는 인생을 위한 합리(合理)이지, 합리를 위한 인생이 아니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생의 철학의 주장을 한 걸음 더 진전시켜, 니힐한 현실을 스스로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결단에 의해 허무의 심연을 초극하려는 것이 실존주의이다.
이러한 가치전도를 바로 잡으려는 것이 '생의 철학'이다. 생의 철학에서는 인생을 위한 합리(合理)이지, 합리를 위한 인생이 아니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러한 생의 철학의 주장을 한 걸음 더 진전시켜, 니힐한 현실을 스스로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결단에 의해 허무의 심연을 초극하려는 것이 실존주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