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5월 27일 화요일

경향_[사설]장롱 현금에 ‘기획 기부’ 의혹까지 받는 총리 후보자

안대희 국무총리 후보자를 둘러싼 도덕성 논란이 점입가경이다. 대법관 퇴직 후 하루 1000만원의 수입을 올려 전관예우 논란을 촉발시킨 데 이어 장롱 현금과 ‘기획 기부’ 의혹까지 꼬리를 물고 있다. 도덕성과 강직함의 아이콘으로 주목받아온 그의 평소 이미지와는 딴판이다. 캐면 캘수록 드러나는 각종 의혹에 실망을 금할 수 없다. 

안 후보자 재산내역 중 눈에 띄는 것은 현금성 자산이다. 본인 명의의 재산 15억4000만원 중 현금·예금 비중이 절반이다. 현금과 수표만 5억1000여만원이라고 신고했다. 수억원의 현금을 집 안에 쌓아둔 것은 일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안 후보자 측은 “사무실을 그만둔 뒤 의뢰인에게 돌려줘야 할 돈”이라고 해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돌려줄 돈이라면 굳이 현금을 고집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혹 자금 추적이나 세금을 회피할 목적이라면 문제가 심각하다.

안 후보자가 낸 기부금의 순수성도 의심받고 있다. 그는 개업 후 5개월간 번 16억원 중 4억7000만원을 기부했다. 이 중 유니세프에 기부한 3억원은 총리 지명 3일 전에 냈다고 한다. 세월호 참사로 정홍원 총리가 사의를 밝힌 뒤의 일이다. 그는 지난 대선 때 박근혜 캠프에서 활동한 뒤 줄곧 총리와 감사원장 후보 물망에 올랐다. 안 후보자 측은 “실제 집행은 정 총리 사의 표명 이후지만 그 이전부터 진행됐던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많은 게 사실이다. 기부행위는 존중받아 마땅하지만 행여 총리 지명을 노린 ‘기획 기부’라면 결코 가볍게 볼 사안이 아니다.

의혹은 이뿐만이 아니다. 안 후보자는 사무실을 개업하면서 전관예우 논란을 의식한 듯 “형사 사건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자제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그는 미국 국적을 가진 대부업체 대표의 형사 사건을 맡아 상고심에서 사실상 승소 판결을 받았다. 4대강 공사에서 입찰담합 혐의로 기소된 대기업 임원의 개인 비리 사건도 맡았다. 전관예우를 의식해 1년간 개업을 미룬 그가 당초 약속과 달리 형사 사건을 맡은 이유가 뭔지 궁금하다.

안 후보자는 세월호 사고에서 드러난 공직사회의 적폐를 청산하는 게 주된 책무 중 하나다. 하지만 그간 제기된 의혹만 갖고도 그의 도덕성은 큰 상처를 입었다. 전관예우 논란이 제기된 11억원을 전액 사회에 환원한다고 문제의 본질이 달라질까. 천만의 말씀이다. ‘관피아’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한 그가 과연 공직자들에게 개혁을 주문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다. 안 후보자의 보다 명확한 해명이 필요한 이유다.

경향_[사설]여당 의원도 ‘사망선고’ 내린 KBS 사장

세월호 참사 등의 보도에서 청와대의 ‘방송장악’을 앞장서서 수행한 것으로 알려진 KBS 길환영 사장은 공영방송 최고책임자로서 지녀야 할 최소한의 권위와 자격도 상실했다고 할 수 있다. 공영방송을 청와대의 부속기관쯤으로 전락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데다 기자들은 물론 보도국 간부, 노조 등 거의 모든 내부 구성원들로부터 철저한 불신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당 국회의원마저 길 사장에게 ‘사망선고’를 내렸다고 한다. 

새누리당 이상일 의원은 26일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미방위)에서 “(길 사장은) 직원과 기자들에게서 이미 불신임을 받았다”며 “현(길환영) 사장 체제의 KBS는 사망선고를 받은 것과 다름없다”고 말했다. 이 의원은 또 “청와대 개입설도 적극 파악해 진실을 가리려는 노력을 해야 하며 안되면 그만둔다는 각오로 눈치 보지 말고 소신 있게 하라”며 미방위에 출석한 최성준 방송통신위원장을 질책했다고 한다. 언론인 출신인 이 의원은 지난 18대 대선 당내 경선에서 박근혜 국민행복캠프 대변인과 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대변인 등을 지냈다. 여러모로 길 사장을 ‘엄호’할 법한 이 의원조차 그에게 ‘사망선고’를 내렸다는 것은 길 사장 체제의 KBS로는 공영방송의 가치를 지킬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세월호 정국’을 책임있게 이끌고 가야 할 여당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때마침 KBS 이사들이 길 사장 해임제청안을 오늘 정기이사회에서 매듭짓는다고 한다. 26일 열린 임시이사회에서 야당추천 이사 4명이 해임제청안을 상정했고, 사흘 동안의 논의를 거쳐 오늘 결론을 내린다는 것이다. 이사진, 특히 여당추천 6명의 이사들은 길 사장을 해임하는 것이 지금의 KBS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첫 단추임을 깊이 인식하고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한다. 이미 기자·PD 중심의 2노조뿐만 아니라 기술직 중심의 1노조까지 이사회가 길 사장을 해임하지 않으면 즉각 총파업에 돌입하겠다고 결의한 바 있다. 길 사장은 이사회에 보낸 서면의견에서 “월드컵·지방선거 등을 앞두고 방송이 정상화돼야 한다”며 자신을 유임해달라고 요청했다지만 바로 그런 이유에서라도 길 사장은 해임해야 마땅하다. 내부구성원 절대다수가 신뢰하지 않는 사장, 여당 의원에게서조차 사실상의 퇴출선고를 받은 사장 아래서 월드컵과 지방선거와 관련한 보도제작인들 제대로 이뤄질 수 있겠는가.

경향_[사설]북한, 일관성 있는 신호를 보내라

북한이 요즘 종잡을 수 없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북한은 지난 22일 서해 북방한계선(NLL) 이남 수역에서 경비 임무 중이던 남측 함정에서 불과 150m 떨어진 곳에 두 발의 포탄을 발사하고는 다음날 남측에 혼란스러운 신호를 보냈다. 하나는 포격 도발이 남측이 꾸며낸 기만극이라며 오히려 남측을 비난한 북한군 서남전선사령부 대변인의 ‘보도’이고, 다른 하나는 9월 인천 아시안게임에 선수단을 파견하겠다는 북한 올림픽위원회의 발표이다.

군사적 도발을 해놓고 그걸 남측에 뒤집어씌우면서 한편에서는 아시안게임에 참석하겠다고 발표하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도 자연스럽지 않다. 북한 올림픽위원회는 “평화와 단합, 친선을 이념으로 하는 아시아 올림픽 성원국”의 자격을 거론했지만, 평화와 단합은 군사적 도발과 잘 어울리는 행동이 아니다. 인천에 올 의사가 분명히 있다면 인천 앞바다에서 포를 쏘는 위험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게 정상이고, 문명사회에서 최소한의 예의이기도 하다. 

그러나 북한은 그런 인식을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북한은 그제 다시 서남전선사령부 대변인을 통해 포격 도발을 부인하면서 “원래 제 집안에서 무슨 일이 터지면 무턱대고 우리를 걸고 드는 것이 남조선 괴뢰들의 체질화된 악습”이라고 역선전을 멈추지 않고 있다. 이런 이중성의 의도가 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렇지 않아도 북한은 김정은 체제 등장 이후 일관성·안정성을 잃고 극과 극을 오가는 불안정한 모습을 자주 드러냈다. 수시로 인사 교체를 하고 군 간부의 계급을 올렸다 내렸다 하는 전례 없는 비정상적 행태를 보였다. 경제정책도 일부는 변화하면서도 과거 답습과 퇴행을 하는 등 진폭이 크다. 그 때문에 대내외 정책에서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하고 이런저런 실험과 시행착오를 반복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이렇게 김정은 정권이 통일성 있는 하나의 온전한 체제인지 의심을 받는 상태라면 북한에도 이로울 게 없다. 북한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슨 행동을 하는지 외부에 정확히 알리지 못하는 의사소통 장애 현상을 바로잡아야 한다. 북한이 대화하자고 할 때 진정 대화하려는 의사를 표출한 것인지, 도발을 예고하는 것인지 헷갈리게 하고, 그 결과 신뢰를 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면 정상적인 관계를 기대하기 어렵다. 북한은 적어도 대외 문제에서만은 합리적이고 일관된 신호를 보내야 한다.

조선_[사설] 與野, '김영란法' 물귀신 작전으로 유야무야시킬 건가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이 27일 국회 정무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를 열어 '김영란법' 적용을 받는 공직자(公職者)의 범위를 공·사립 학교 교사와 모든 언론기관 종사자로 확대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김영란법은 김영란 전 국민권익위원장이 제안한 '부정청탁 금지 및 공직자의 이해충돌방지법'을 말한다. 당초 김영란법은 공직자를 국회의원과 공무원, 공직 유관 단체와 공공기관 임직원으로 국한했다. 정부가 여기에 국·공립 교사를 포함시키자 국회는 사립학교 교사와 언론인까지 집어넣은 것이다. 국회는 이렇게 적용 대상을 확대시킨 안을 놓고 새로 구성되는 후반기 국회에서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

김영란법의 핵심은 공직자가 100만원 이상 금품을 받으면 직무 관련성이나 대가성에 관계없이 3년 이하 징역이나 3000만원 이하 벌금형으로 처벌하는 내용이다. 100만원 미만일 때는 받은 돈의 2~5배 과태료를 물리게 돼 있다. 지금의 뇌물죄로는 공무원이 평소 기업인이나 지역 유지들로부터 촌지와 골프·술 접대를 받으면서 스폰서 관계를 맺어 왔다 하더라도 직무 관련성이나 대가성이 없으면 처벌할 수 없다.

국회의원과 공무원은 연간 수백조원의 예산을 편성·집행하고 인·허가, 감사, 수사, 감독 등 국민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권한을 행사한다. 그래서 공무원들은 부패(腐敗)할 가능성이 있다. 공무원이 부패하면 법 질서가 무너지고 그 피해는 사회 전체가 보게 된다. 세월호 참사는 그 대표적 사례다. 이런 공무원 부패를 막기 위해 국가는 공무원들에겐 특별한 혜택을 제공한다. 형사처벌이나 징계를 받지 않으면 정년 때까지 직장을 보장하고, 20년 이상 근무하면 국민연금의 2~3배 되는 연금도 평생 준다. 뇌물을 받지 말고 맡은 업무에 충실하라는 뜻이다. 따라서 공무원이 금품을 받으면 일반 국민과 다른 잣대로 엄중 처벌하는 것은 당연하다.

국·공립 학교 교사는 공무원 신분이긴 하다. 일부 교사가 학부모들로부터 받는 촌지가 문제가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100만원 이상의 금품이 오가는 사례가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언론사 기자는 예산을 편성·집행할 권한도, 무슨 인·허가를 해줄 권한도 없다. 세금으로 월급을 받는 것도 아니다. 그런 기자들을 공무원과 똑같은 방식으로 규제하겠다니 국가가 기자에게 월급 주고 연금이라도 보장해주겠다는 것인가.

국회는 정부가 작년 8월 제출한 김영란법을 이제껏 내버려두고 있었다. 그러다가 세월호 참사로 공직 부패 척결 여론이 높아지자 뒤늦게 논의에 나서더니 공직자 범위에 교사와 기자들까지 포함시키자고 나왔다. 이 경우 김영란법의 적용을 직접 받는 대상자 숫자가 186만명이나 되고 이들의 가족까지 포함시킬 경우 최소 550만명, 최대 1786만명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국회가 법 적용 대상을 대폭 확대시켜 해당 집단들의 반발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어 김영란법 처리를 유야무야시키자는 속셈으로 볼 수밖에 없다.

김영란법만큼 국민 지지를 받고 있는 법안이 없다. 그런데도 국회의원들이 꼼수를 부리면서 시간을 질질 끄는 것은 이 법을 무산시키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국민이 뽑아준 사람들이 국민 뜻을 정면 거역하고 있는 것이다. 국회의원들 행동은 '우리부터 김영란법을 지킬 자신이 없다'고 인정하고 있는 꼴이다. 대한민국 국회의 윤리(倫理) 수준이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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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_[사설] 정부 조직 개편 성공하려면 대통령부터 달라져야

박근혜 대통령이 27일 이명박 정부 때 없앴던 교육부총리를 다시 두겠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교육·사회·문화를 총괄하는 부총리를 두어서 정책 결정의 효율성과 책임성을 높이고자 한다"며 "총리는 법질서와 공직 사회 개혁, 사회 안전, 비정상의 정상화 국정 어젠다를 전담하고, 경제부총리는 경제 분야를, 교육·사회·문화 부총리는 그 외의 분야를 책임지는 체제를 갖추고자 한다"고 말했다. 청와대는 교육부 장관이 교육·사회·문화 부총리를 겸직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앞으로 내각을 외교·안보, 경제, 교육·사회·문화 세 팀으로 나눠 운영하겠다는 뜻이다.

내각의 팀제(制) 운영은 과거 정부에서도 비슷한 시도가 있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아무리 '내각 중심'을 외쳐도 총리·부총리·장관들은 청와대 눈치를 보면서 청와대의 재가(裁可)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정부 들어서도 '받아쓰기 내각'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청와대 독주(獨走)가 두드러졌다.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더 이상 지난 1년여와 똑같은 방식으로 국정을 운영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대한민국은 대통령 한 사람이 모든 현안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챙길 수 있는 수준의 나라가 아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대통령의 만기친람이 아니라 적절한 권한 위임(委任)과 엄정한 평가 체제를 갖춘 효율적 국정 운영 시스템이고, 이런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인재 발탁이다. 이번 정부 조직 개편은 이런 안팎의 여론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시스템을 갖춰도 대통령이 먼저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면 얼마 안 가서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이번 개편은 교육부총리 자리 하나 늘리고 몇몇 부처를 쪼개고 새로 만든 것으로 끝나게 된다. 박 대통령이 내건 '적폐 청산'과 '국가 개조'도 유야무야될 것이다. 대통령은 곧 있을 개각에서부터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변화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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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_[사설] '官피아 사장' 선거판 넘보니 인천공항 뒷걸음질 당연

인천공항이 27일 서울서 열린 국제공항협의회 세계총회에서 2013년도 세계 공항 서비스 부문 최고 공항으로 선정됐다. 그러나 국제공항으로서 인천공항의 실제 위상(位相)은 그다지 높지 못하다. 인천공항의 국제선 환승객(換乘客) 수는 올 4월 52만5900명으로 작년 8월 67만8000명에서 22%나 줄어들었다. 4월 환승률은 15.0%까지 떨어진 상태다. 전체 승객 가운데 환승 승객 비율을 말하는 환승률은 경쟁력 있는 선진국 공항이 30~40% 선에 이른다. 국제선 이용 여객 규모도 2012년 기준 세계 9위다. 그것도 내국인들의 해외여행 덕분에 버텨나가고 있다.

최근 들어 일본 하네다공항, 중국 상하이 푸둥공항 등은 활주로를 새로 놓고, 지방 공항 연결망과 미주·유럽 직항 노선을 늘려가는 등 경쟁력을 높이려 안간힘을 쏟고 있다. 지금 추세로 몇 년 더 가면 일본·중국 도시에서 인천공항을 거쳐 여행하는 환승객이 크게 줄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작년 6월 낙하산 인사로 인천공항공사 사장에 임명됐던 국토해양부 차관 출신 정창수씨가 취임 8개월 만인 지난 2월 강원도지사 선거에 출마하겠다며 사표를 던지고 나가버렸다. 그는 새누리당 강원도지사 후보 경선에서 탈락했다. 정씨가 사표를 낸 후 인천공항공사 사장 자리는 석 달째 비어 있다. 차관을 지낸 후 공기업 사장으로 임명되는 특혜를 받았으면 인천공항을 세계 수준으로 올리기 위해 자기 능력을 다 쏟아부어야 맞다. 그러나 정씨는 사장 자리를 정치권으로 건너가는 디딤돌 정도로 여겼다. 정부가 이런 인사를 하니 인천공항의 국제 경쟁력이 뒷걸음질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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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_[사설] 공동체·공감 앞세운 민간 주도 ‘세월호 치유’

세월호 참사의 고통과 상처는 그대로다. 참사가 일어난 지 40일이 넘었지만 유가족들과 실종자 가족, 그리고 생존자들은 여전히 피 흘리고 아파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매일같이 이어지는 정부의 어처구니없는 행태와 일부 인사의 비인간적인 망언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통과 상처의 근원은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실종자들이다. 유가족들은 자신의 고통에 앞서 실종자 가족들의 아픔과 절망에 죄스러워하며 가슴이 찢어지고, 생존자들은 희생자 가족들의 비탄 앞에 고개 숙인 채 자신의 상처는 미처 돌아보지도 못하고 있다. ‘처절한 공감’이 아닐 수 없다. 그런 고통은 마지막 한 사람의 실종자가 돌아오는 날까지 온전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고통은 같은 아픔을 겪은 이들이 잘 안다. 세월호의 유족들이 그렇다. 유족들은 서로 챙기며 아픔을 어루만지고, 치유를 주고받고 있다고 한다. 참극의 현장에서 다친 이들이 서로 피를 닦아주고 지혈하며 상처를 감싸는 상황이다. 지금으로선 외부의 다른 어떤 상담자보다 ‘상처 입은 치유자들’인 유족이 서로에게 더 힘이 될 것이다. 아득한 터널같이 계속되는 고통의 나날을 뼈저리게 공감하고 함께 몸 비비며 견디어줄 사람이 우선 유족 자신들인 까닭이다.
그런 마당에 성급하게 치유를 서두른다면 상처만 덧나게 된다. 가족들의 심리적 외상은 현재 진행중이다. 하루하루 더 크게 부어오르고 있다. 외상후 증후군으로 잘못 알고 상처를 치유하겠다고 덤볐다가는 되레 고통이 더 커질 수 있다. 지금은 상처에 메스를 들이대기보다는 함께 울어주고, 함께 분노하고, 함께 일상을 챙겨줄 사람이 더 필요하다고 봐야 한다.
그렇게 세월호 트라우마를 치유하려는 시민사회의 자발적 움직임이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경기도 안산에서 모습을 갖춰가고 있다. 피해자들 가까이에서, 피해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공동체 안에서 아픔을 어루만져 치유하려는 민간 차원의 치유 작업이다. 몇 달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닌 만큼, 안산에서 5년 이상 머물며 유가족·주민들과 긴밀하게 소통해 이들의 일상 복귀를 돕자는 ‘공동체 복원’ 혹은 ‘사회적 치유’ 모델이 추진되고 있다. 세월호 관련 기록을 모아 진상규명뿐 아니라 치유에 활용하고, 미술·건축·공연 등을 통한 다양한 심리치료와 지역 주민들에게 도움이 될 프로그램이 구상되고 있다고 한다. 지금껏 보지 못한 의미있는 시도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은 이들의 손길과 도움이 필요할 터이니 애써 도와야 할 일이다.

한겨레_[사설] ‘신성불가침’ 김기춘 비서실장

세월호 참사 국회 국정조사가 여야의 이견으로 첫발도 제대로 떼지 못한 채 진통을 겪고 있다. 국조계획서에 증인과 참고인을 명시할지, 아니면 계획서를 먼저 채택한 뒤 증인 문제는 나중에 결정할지 등을 두고 의견이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핵심 쟁점은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의 증인 채택 문제다. 새누리당은 “김 실장이 이 문제에 관여한 게 없다”(이완구 원내대표)며 증인 채택을 극구 반대하고 있다.
새누리당의 주장은 출발부터 억지투성이다. 세월호 사건에서 청와대가 어떻게 보고를 받고 상황 판단을 했는지, 이 과정에서 비서실장의 역할이 무엇인지 등을 규명하는 일은 진상조사의 핵심적 내용 가운데 하나다. 그런데 새누리당은 진상조사가 제대로 시작도 되기 전에 김 실장이 세월호 사건에 관여한 바 없다고 결론지었다. 이 원내대표의 말이 사실이라고 해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역사상 유례없는 대형참사가 났는데도 청와대 참모진의 총사령탑은 강 건너 불구경만 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내각 위에 군림하며 모든 국정에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진 김 실장이 유독 세월호 참사에만 관여하지 않은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정신이 제대로 박힌 여당이라면 야당이 요구하지 않아도 청와대 비서실장을 증인으로 불러 꼼꼼히 묻고 책임을 따져야 옳다. 박근혜 대통령이 증인에서 제외된 상황에서 김 실장 증언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게다가 ‘무능하고 소신 없는 청와대 참모진’에 대한 들끓는 여론까지 고려하면 여당이 아무리 청와대에 각을 세워도 지나치지 않은 형편이다. 그런데도 새누리당은 오히려 정반대다. ‘기춘대원군’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지 않을까 두려움에 떠는 것 같다.
김기춘 실장의 위력은 검찰이 구원파 쪽에 대해 ‘김기춘 실장 갈 데까지 가보자’는 펼침막을 철거하라고 계속 종용한 데서도 엿볼 수 있다. 검찰은 “현수막 철거는 법질서의 상징”이라며 얼버무리고 있으나 굳이 몇 차례씩 전화를 해가며 현수막 철거에 집착한 것부터가 매우 이례적이다. 현수막 내용이 불법인지도 의문이지만 불법 현수막 철거에 구청이 아니라 검찰이 나섰다는 이야기도 처음 듣는다. 특히 ‘우리가 남이가’라는 글이 적힌 현수막은 김 실장의 과거 부끄러운 행적을 상기시킴과 동시에 구원파와 김 실장의 관계에 대한 묘한 뉘앙스를 담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나돌던 상황이었다. 검찰이 그처럼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 아닌가.

한겨레_[사설] ‘법피아’ 대표가 ‘관피아’ 척결할 수 있나

안대희 국무총리 후보자는 27일 3억원을 기부한 시점을 둘러싼 논란에 대해 “그런 좋은 뜻을 좋게 받아들여 주시면 감사하겠다”고 말했다. 본인이야 ‘좋은 뜻’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판단은 국민 몫이다. 앞뒤 사정을 살펴보면 꼭 그렇게만 보이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무엇보다 안 후보자가 기부금 4억7000만원 가운데 3억원을 총리 지명이 발표되기 직전에 냈다는 점에서 국회 인사청문회 통과를 염두에 둔 ‘눈치 기부’ 아니냐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 3억원 기부 시점은 5월19일로, 청와대의 총리 후보자 발표 사흘 전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를 발표한 당일이다. 사전 검증에 필요한 절차 등을 고려하면 안 후보자는 이때 이미 자신이 총리로 내정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안 후보 쪽은 그 이전인 4월24일에 유니세프 쪽에 기부 관련 문의를 했다고 하지만 당시도 총리 교체가 기정사실로 굳어진 시점이다. 여러 정황으로 미뤄 기부금 3억원은 총리 지명에 대비한 ‘보험료’ 성격이 짙다.
안 후보자는 기부금의 진정성 문제가 불거지자 이번엔 변호사 활동으로 증식한 재산 11억원의 사회환원 카드를 내놨다. 물론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인사청문회를 거치기도 전에 낙마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에서 나온 것임을 모를 사람은 없다. 곤란한 처지를 모면하려는 궁여지책의 재산 환원은 감동을 줄 수 없다. 오히려 총리라는 직책에 기필코 올라보겠다는 일념 아래, 자신의 오점마저 돈으로 사려 하는 발상 아니냐며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이 적지 않다.
안 후보자가 떳떳하지 않은 돈이라도 토해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도 우려스럽다.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고 대법관 출신으로서 잘못된 전관예우 관행에 일조했다는 본질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더구나 안 후보자 스스로 “내가 생각해도 수입이 많았다”며 재산 증식에 문제가 있음을 고백한 바 있다.
안 후보자가 이번 일을 ‘옥에 티’ 정도로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하루 1000만원’은 역대 인사청문회 사상 최고 액수다. 오죽하면 ‘황제 전관예우’라는 말까지 나왔겠는가. 청와대는 임명동의 요청서에서 안 후보자가 ‘민관유착 적폐 척결’ 적임자임을 내세웠다. ‘전관예우의 최고봉’을 기록한 인물이 전관예우에서 비롯한 악습을 일소하는 데 앞장설 수 없음은 자명하다. 위에서 흙탕물을 흘려보내면서 아랫물이 맑아지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아경_[사설] 공기관 개혁, 성과주의 경계한다

정부가 어제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공공기관 정상화 워크숍'을 열고 공공기관 혁신 방안을 논의했다. 공공기관의 부채 비율을 2017년까지 200% 이내로 낮추고 복리후생비를 20% 이상 축소하는 것 등이 골자다. 오는 9월에 이행 실적을 점검, 부진한 기관은 기관장을 해임하고 임금을 동결하기로 했다. 세월호 참사 여파로 미뤘던 공공기관 개혁의 고삐를 다시 죄기 시작한 것이다.

핵심은 중점관리대상 41개 공공기관의 평균 부채비율을 232%(지난해 말 기준)에서 2017년까지 187%로 줄이는 것이다. 부채규모가 큰 한국토지주택공사(LH), 한국전력공사, 한국수자원공사 등을 중심으로 자산 매각, 해외 사업 축소 등 공공기관 스스로 구조조정에 나서도록 할 방침이다. 과다한 퇴직금과 교육비, 의료비 등 8대 방만 경영 항목을 폐지ㆍ축소해 1인당 복리 후생비도 평균 300만원에서 229만원으로 71만원(23.7%) 감축하도록 했다. 

방만한 공기관 경영의 개혁은 당연하다. 관건은 실현 가능성이다. 역대 정부가 개혁에 나섰지만 부채는 되레 늘어났다. 비효율과 방만 경영도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지난해 공공기관 부채가 총 523조원으로 전년보다 25조원이 늘어난 게 그 방증이다. 기관별 부채 증가와 부실경영의 원인을 제대로 진단하지 않고 목표 수치만 제시하고 밀어부친 결과다. 

공공기관 개혁의 요체는 경쟁력을 키워 자생력 있는 건실한 기관으로 되살리는 일이다. 그러려면 부채 증가와 경영부실의 원인을 제대로 따져봐야 한다. 공공요금을 현실화하지 못했거나 구조적인 적자 요인이 도사린 경우도 있다. 정부가 떠넘긴 국책사업이나 정권의 공약사업을 무리하게 추진하는 과정에서 과다하게 부채를 짊어진 기관도 있다. 전문성 없는 낙하산 인사로 방만 경영과 임직원의 도덕적 해이를 부채질한 공기관 또한 적지 않은 게 현실이다. 

기관별 특성을 고려한 '맞춤형 처방전'이 필요하다. 장기 국정과제로 삼아 문제점을 상시적, 지속적, 근본적으로 고쳐나가는 끈기가 요구된다. 정권 내에 무언가 결과를 보여주겠다는 조급한 성과주의는 위험하다. 박 대통령은 워크숍에서 "이번 정부에서는 공공기관 개혁이 과거처럼 시간이 흐르면서 흐지부지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빈말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아경_[사설] 통일금융, 통화통합 연구하고 준비하자

"남북 화폐의 통합비율이 중요하며, 장기적 안목에서 준비해야 한다." "북한 금융체제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한국 금융기관과 국제 금융기구 간 협업이 필요하다." "북한경제를 발전시키려면 외국자본을 유치해야 하며, 외국인 투자 보호가 필수다." "한반도가 통일되면 많은 국제 금융기관들이 북한에 투자하고, 서울은 국제 금융중심지로 발전할 것이다." 

어제 본사가 '통일, 금융에 길을 묻다'를 주제로 주최한 아시아금융포럼에서 미국ㆍ중국ㆍ유럽 등지의 전문가들이 통일에 대비해 금융 분야에서 우리가 준비해야 할 사항으로 제시한 것들이다. 북한 경제의 재건을 위해선 막대한 자본이 필요하며, 그 투자재원 확보는 금융의 1차적 과제다. 그동안 통일과 관련된 정치ㆍ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논의는 있었지만 통일한국 경제의 디딤돌이 될 금융 문제를 다룬 포럼은 처음이다.

통일 과정에서 북한 지역의 경제 인프라를 재구축하려면 재원 마련이 필수적이고, 그 대부분은 한국과 외국 자본으로 충당해야 한다. 보다 많은 양질의 외국자본을 통일한국에 유치하기 위해서는 투자 리스크를 줄여주고 적절한 수익을 얻도록 해야 할 것이다. 외국인 투자금과 재산을 보호하는 법적 인프라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의 경색된 남북관계를 볼 때 통일에 이르는 과정이 수월하진 않을 것이다. 체제가 다른 두 시스템이 하나로 통합되려면 경제의 핏줄인 금융 시스템이 북한 경제에 얼마나 성공적으로 정착하느냐가 관건이다. 

특히 남북통화 통합에 대한 준비와 연구가 중요하다. 독일의 경우 서독 정부가 독일중앙은행의 반대에도 1대 1 비율의 화폐통합을 서둘렀다가 급격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해 금리를 올려야 했다. 우리도 통화통합 이후 나타날 수 있는 인플레이션이나 신용경색에 대응하는 체제를 갖춰야 한다. 금융시장의 자금중개 기능이 원활하게 작동하도록 지급결제 시스템도 새로 구축해야 할 것이다. 

금융위원회가 어제 첫 회의와 함께 '통일금융 태스크포스'를 출범시킨 것은 의미가 있다. 통일 과정에서 금융의 역할을 정립하고 어떻게 준비할지를 구체적으로 논의하는 장이 되길 기대한다. '통일 대박'이 그냥 올 리 없다. 한국은행과 금융당국, 민간 금융회사가 머리를 맞대고 미리 준비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제21계 매미가 허물을 벗듯 도망가다,금선탈각(金蟬脫殼)

제21계 매미가 허물을 벗듯 도망가다,금선탈각(金蟬脫殼)

매미가 나무가지에 껍데기만 남기고 떠나듯이,
표면적인 현상은 남기고 실제로는 몸은 빼 떠나가는 것을 비유한다.



비지니스 : 홍콩 갑부 이가성

지금은 아시아 최고부자인 이가성이 구룡창고회사가 가진 땅을 개발하면 큰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77년 영국회사인 이화양행이 구룡창고회사의 주식지분이 20%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주식을 분산해 매집하여 차명으로 18%를 확보했다.

주당 10달러에서 30달러가 되고 이화양행이 눈치를 채고 경계를 하게 되었다.
이가성의 자금력은 이화양행에 맞서서는 승산이 없었다.

1978년 이가성은 선박왕 포옥강에게 구룡창의 주식을 전매하였다.

포옥강은 다시 과감하게 주식을 더 사들여 30%를 점하게 되었다.

1979년 초 주가가 이미 50달러에 달하자 이화양행은 속은 것을 깨달았으나 이미 너무 늦었다.


처세 : 왕수인(王守仁)이 남긴 시

명나라 환관 유근이 득세를 할 때
당시 병부주사 왕수인은 어사 대선을 구하는 상소를 하였지만 중간에 유근이 가로채고 오히려 장형 50대에 변방으로 좌천되었다.

하인이 유근이 분이 풀리지 않아 자객을 보내 죽이려 한다는 말을 듣고,
절명시(絶命詩)를 베게 옆에 놓고 오이산으로 잠적했다.

百年臣子悲何極,夜夜江禱泣子胥

"백년 신하 슬픔이 끝이 없고,
밤마다 강 물결은 자서를 그리워 우네"

☆주 : 여기서 "자서"는 오자서를 말하며 오왕 부차 때문에 자결한 후 부차에 의해 시체가 오강에 버려졌다.

하인이 강에 가보니 관모와 신발이 떠있고 건져내보니 왕수인 것이 틀림없다.

죽이려 온 자객도 이 소식을 사실이라 믿고 증거물을 수습하여 수도로 돌아갔다.

생애[편집]

왕양명
여요(餘姚-현재의 저장 성에 속함)의 사람으로 부친은 왕화(華)라고 한다. 1481년(성화 17년)에 진사 제1인에 급제하였고, 벼슬이 남경 이부상서에 이르렀다.
그는 출생 이래로 선병질(腺病質)이어서 청년기에 벌써 폐병으로 피를 토한 일도 있다. 혼미와 번민의 원인은 이 병과, 주자학에서 설명되는 격물치지설이 아무리 하여도 납득되지 않는 점에 그 원인이 있었다. 주자의 이(理)는 사사물물(事事物物)에 즉하여 궁구해야 할 것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때는 뜰의 대나무를 잘라 대의 이치를 파악하려고 한 나머지 병이 나기도 하였고, 또 어느 때는 주자의 독서법을 읽음으로써 그대로 성현의 유교(遺敎)를 읽었으나 도리를 얻지 못하여 신경쇠약에 빠지기도 하였다. 자신은 도저히 성인이 될 만한 그릇이 못된다는 체념이 <오익(五溺)>(임협·기서·난장·신선·불교의 傳習)에 빠지게 하였다고 한다.
35세 때에 중앙정부에 비판적인 정치논문을 상주하여 환관 유근(劉瑾)의 노여움을 삼으로써 귀주(貴州) 용장(龍場-현재의 貴州에 속함)에 유배되었다. 산악부족(山岳部族) 속에서 고독한 생활을 보내고 있던 실의(失意)의 양명(陽明)은 여기서 본래의 깨달음을 얻었다. "성인(聖人)의 도(道)는 나의 성(性)에 구비되고 있다. 지난번에 이(理)를 사물에서 구한 것은 오류였다"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이(理)가 사물에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나의 마음에 있다. <심즉리(心卽理)>의 설이 여기서 확립되어 마침내 양명사상(陽明思想)의 근간이 되었다. <심즉리(心卽理)>라고 하는 것은 선악을 포함한 마음이 이(理)라는 뜻이 아니고, 마음의 발동이 항상 이(理)의 경지를 뜻하는 실천적인 개념인 것이다. 주자(朱子)가 이(理)와 심(心)을 나누어 전자를 형이상적, 후자를 형이하의 음양이라고 한 말과는 크게 다르다. 나의 마음이 발동이 항상 이(理)라고 하는 것은 효(孝)를 아는 것과 효를 행하는 것이 나뉘어 둘인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은 지(知)와 행(行)이 합일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 주자의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대하여 양명이 치지격물(致知格物)을 말한 것도 '양지(良知)를 치(致)한다-치양지(致良知)'라고 한 것도, 요는 마음의 본체로서의 양지 그것으로 되는 경지를 말한 것이다.

사상[편집]

왕양명의 사상에서 주도동기(主導動機)가 되는 것은 인간의 자연적 심정에 대한 신뢰의 정조이다. 주자학에의 회의에서 출발한 그의 사상도 사상의 전체적 구상, 즉 사상의 범주라는 점에서는 도달한 최종단계에서조차 주자의 사상에서 크게 넘어서지 못했다. 그러나 왕양명이 주자학과는 다른 심학의 대성자, 양명학의 시조로 숭앙받은 것은 단적으로 말하면 양자의 인간의 '마음'을 파악하는 방법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주자의 경우는 분석적이며 왕양명의 경우는 직관적이었다. 주자는 인간의 마음을 성(性<本性>:理)과 정(情:현실의 마음의 작용)으로 나누고, 정은 성(性)을 현혹시킬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서 성(理)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을 규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여기서는 현실의 인간 심정은 마이너스로 평가되고 있다. 왕양명은 그것을 플러스로 평가한다. 인간(人間)의 자연적 심정에는 '양지(良知)'가 갖추어져 있으며 그러므로 인간은 자연의 심정에 의거하여 행동한다면 성(理)을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양지라는 것은 《맹자》의 "깊은 궁리를 하지 않고서도 알 수 있는 것이 양지이다. 2, 3세의 어린이도 부모를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는 아이는 없다"라는 글에서 볼 수 있는 말이며 왕양명은 그것을 하늘(天)이며, 천리(天理)인 동시에 인간의 마음의 본체로서 시비선악의 판단을 갖추고 더구나 선천적으로 구비되어 있는 사려(思慮) 이전의 것, 자연스런 것, 오늘날의 말로 한다면 '양심'에 가까운 것으로서 받아들이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자연의 심정 그대로 양심에 따라 살 것을 주장하며, 이는 주자의 실천론에 비하면 자유로운 해방감이 수반되는 것이었다.

영향[편집]

양명의 사상은 행위하는 주체가 항상 이(理)의 체현자일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의 사후, 그의 사상은 여러 방향으로 전개되어 실천하는 주체를 소홀히 하는 관념적·공상적인 이론으로 흘렀는가 하면, 착실한 면학수양(勉學修養)을 경시하는 풍조까지 빚어냈다. 그러나 명대의 사조는 양명사상(陽明思想)의 전개(우파/右派와 좌파/左派로 나뉜다)에서 개성이 발휘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한국에서도 조선(朝鮮)의 중기(中期) 이후의 사조에 큰 영향을 주었다. 왕양명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 인물은 이탁오-본명은 이지, 탁오는 자이다-가 있다. 이탁오의 유명한 저작물은 분서 속 분서가 있다.

왕양명의 생애와 사상 [위의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편집]

왕양명의 이름은 수인[守人]이고 자[字]는 백안[伯安]이다. 양명은 그의 호다. 성화[成化] 8년(1472년) 9월 10일에 절강성 여요에서 태어나서 가정 7년 이향에서 객사하였다. 향년 57세로 타계했다. 연보[年譜]에 따르면, 양명의 조상은 진[晋]나라 광록대부 왕람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산동의 낭야 사람이었다. 유명한 서예가 왕희지는 왕람의 증손이었다. 왕람은 남쪽으로 이주해서 회계의 산음에서 살았다. 그 뒤에 23대의 왕수[王壽]가 거처를 여요로 옮기게 되었다. 6대조 왕강[王綱]은 광동참의가 되어 묘족의 난에서 죽었다. 양명의 고조 왕여준은 [예기] [역경]을 자세히 연구했다. 조부 왕윤 역시 [죽헌고] [강호잡고]를 세상에 간행했다. 부친 왕화[王華]는 자가 덕휘이고 용산공이라 일컬었다. 성화 17년[1481] 진사에 일등으로 올라, 남경이부상서라는 관직을 맡았다. 왕화의 조상들은 나아가 벼슬을 하기도 하고, 물러나 학문이나 문예를 즐기기도 하면서, 지방의 유명한 유지로 생애를 보냈다. 왕화는 조상들이 살았던 산음의 빼어난 경치를 사모하여 다시 회계로 이사 했다. 양명은 10살 이후 이곳을 집안의 고향으로 삼았다. 양명의 호는 이전에 왕화가 집을 증축한 적이 있는 회계의 동남쪽 20여 리에 있는 양명동의 지명을 따서 지은 것이다.

왕양명이 태어난 시기는, 명나라 조정이 일어난 때부터 약 100년이 지난 8대 헌종[憲宗], 성화 8년이었다. 당시에 밖으로는 위라트, 탈탄, 투르번, 묘족과 같은 주변 이민족의 침입이 잦았고, 안으로는 각지의 도적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또한 간신배같은 환관들이 조정에서 부패 정치를 주도 하던 시기였다. 학문, 사상도 마찬가지로 남송 이후 원나라, 명나라를 통해 관학으로서의 지배적 지위를 차지했던 주자학 시대와 나란히 그 생명이 고갈 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야말로 교조화된 것이다.

특히 명나라 초기에 [사서대전] [오경대전]이 편찬되어 과거 시험은 그 범위 내로 출제돼서, 학문, 사상은 고정됐고, 대다수 학자들은 훈고-허망하게 경전의 글자 해석하였다-를 하고, 문장과 시가에 빠져 들어서, 허망한 지식을 갖고 놀며 겉으로만 꾸미려는 일에 노력했다. 이들은 주자학의 근본이 되는 자기 수양을 안했다. 명대의 주자학자 중에는 설경헌, 호경재, 나정암같은 유명인이 있었지만 전반적인 경향은 위축과 침체를 맞이했다. 길전공평에 따르면 주자 후학의 시대가 되면 보편적인 문제로 돌아와, 성인[聖人]의 언행을 상대화하는 것을 잊고 더욱 주자의 말씀을 교조화해서 수용했다. 그야말로 간신배들이 성인의 학문을 왜곡해서 혹세무민하는 일에 주력했다. 따라서 천리[天理]는 불안에 떠는 인간에게 안정된 확신을 제공하긴커녕 실천자의 고정된 리법[理法]으로 썩었다. 주체적인 것이 나타남을 매우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더욱이 정치권력에 옹호됐을 때는 그 고정화가 더 박차를 더하게 된다고 한다. 민중을 등쳐 먹고 기만하는 간신배가 나라를 휩쓸고, 사상이 고정화되고 답습하던 분위기가 팽창하던 시대에 왕양명이 태어 났다.

왕양명의 일생은 대략 다섯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근등강신[近藤康信, 인명임]에 따르면, 첫째, 15~16세까지의 유년 만학 시기, 둘째, 31세까지의 회의와 혼미의 시기, 셋째, 이후 38세까지 작은 깨달음의 자립 시기, 넷째, 38세에서 50세 전까지 개오하여 활약하던 시기, 다섯째, 이후 56세까지 대오하여 완성한 시기다. 근등강신이 이처럼 깨달음의 정도로 양명의 생애를 일별한 것은 매우 독특한 해석이다. 이 해석은 종래에 명유학안[明儒學案]의 견해에 따라 채인후[蔡人厚]가 정리한 이질적인 세 번의 변화가 있다. 첫째는 사장에서, 둘째는 불교와 노장사상-에 드나들다가, 셋째는 용장에서 도를 깨우치는 과정과, 동질적인 발전과 완성으로서 세번의 변화가 있다. 즉 첫째는 묵좌징심[默坐澄心], 둘째는 치양지[致良知], 셋째는 원숙화경[圓熟化境]을 거친 생애로 구분하는 것과는 다르다. 왕양명이 용장에서 도를 깨우치기까지의 다섯 번의 변화를 그의 친구인 담감천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첫째는 임협[任俠]을 익히는 데 빠졌고, 둘째는 기사[騎射]를, 셋째는 사장[詞章]을, 넷째는 신선[神仙]을 익히는 데 빠졌고, 다섯째는 불교에 빠졌다" 이처럼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두었던 양명의 사상은 결국 자신의 "치양지"의 가르침으로 성숙하게 됐다.

다시 연보에 따라 양명의 생애를 살펴보면, 양명은 어렸을 때 가정에서 조부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양명은 5살 때까지 말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11살 때 아버지를 따라 베이징으로 향할 때 금산사를 지나가다가 호기어린 시부를 지었는데, 그 지혜가 타인을 놀라게 했다. 이후에는 주로 숙사에게 배웠다고 한다. 양명은 소년 시절부터 자신만의 눈으로 사물을 보는 비판정신을 갖고 있었다. 그런 정신을 보여주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어느날 12살 때 숙사가, 우리가 책을 공부하는 것은 과거에 급제하려는 것이고 이게 으뜸의 일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양명은 "첫째의 일은 책을 공부해 성인[聖人]이 되는 일"이라 답했다고 한다. 13살 때는 어머니가 베이징에서 병으로 죽자 상을 치르는 동안 양명의 통곡하고 눈물 흘리는 모습이 너무 애처로웠다고 전한다.

양명은 17살 때 부인 제씨[諸氏]를 남창[南昌]에서 맞이했지만 결혼하는 당일에, 집을 나가서 우연히 근처 산중에서 도사[道士]와 양생설을 논하다가 집에 돌아가는 것도 잊고, 앉은 채로 밤 새우기도 하고 상식적인 규범을 벗어난 행동을 했다. 다음날 새벽에 사람들이 찾아내어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해 봄, 신부와 고향으로 돌아와서 변한 태도로 독서와 공부 등, 수양하는 일에 열중했다고 한다. 양명은 배를 타고 돌아오던 중에 강서 광신에서 주자학자인 누량[1422~1491]을 만났다. 누량은 양명에게 송나라 유학자의 격물 학설을 얘기하고, 이렇게 알려 주었다. "반드시 공부해서 성인에 도달할 수 있다" 21세 때는 향시에 합격했으나 회시에는 낙제했다. 그때 경사에서 용산공을 모시고 주자가 남긴 책을 많이 구해서 공부했다. 주자 학설에 따르면 나무 한그루, 풀 한 포기에도 그것 나름의 이치[理]가 있다. 양명은 그 이치를 끝까지 캐묻는 것이 격물궁리[格物窮理]라는 말을 듣고 관서에 있는 대나무를 바라보며 격물을 했다. 7일 동안 이 일을 지속하다가 병이 들어서 그만 두었다고 한다. 이것이 주자학을 불신하고, 환멸감을 느낀 원인이 되었다.

그런 일이 벌어진 후에 양명은 어귀나 문장을 암기하는 사장-문장과 시가-의 학문에 집중하기도 했고, 불교와 노장-노자와 장자-에 빠지기도 했다. 26세 때 베이징에 갔는데, 변경 문제로 인해 시끄러운 시기라서, 양명은 한때 무사-군인의 일-와 병법학에 열중하기도 했다. 그 다음해가 되자, 이제까지 없었던 격한 불안감과 동요가 양명을 엄습했다. 오랫동안 노력해 왔던 시문의 도-時文의 道-는 남자로서 일생을 바쳐 해야 하는 일인가? 무엇이 참된 학문인가? 어떻게 그런 것을 구할 것인가? 나는 성현-성인과 현인-의 자질이 있는가? 이런 부류 의문이었다. 이런 의문에 시달린 후에는 유학을 버리고 산속으로 가서 도가의 양생설을 익히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원인을 사색의 결과로 단순히 보는 것이 종래의 주장이었지만, 아마도 회시 불합격과 건강 문제에 관계돼 있다고 근등강신이 주장했다. 그러는 사이에 마음 자세를 가다듬어 28세에 회시에 합격하여 비로소 관리가 됐다. 최초에는 공부[工部]에 임관됐고, 그 다음해에는 형부 운남 청리사주사를 제수받았다. 30세에는 강북에서 형벌을 받은 죄수를 심의, 기록하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도 승방을 방문하기도 하고, 도사에게 도를 묻기도 했다. 그 다음해 31세 때는 병을 이유로 관직을 그만두고 귀향했다. 양명동에 집을 짓고 도가의 도인술을 수련한 것이 이 시기 였다. 관리 생활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 동료가 도를 추구하는 뜻이 없고 시문-시가와 문장-의 재주를 다투고 있는 것을 보고 분노했던 적도 있었지만, 아마도 회의와 분노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했던 것은 건강 문제가 주요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세속을 떠나 가족과 떨어져서 양명동에서 혼자 생활 하던 동안에 한 번 깨닫게 된다.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생각이 인간 본래의 마음인데, 성인의 가르침은 그 인정[人情]의 자연에 따르지만, 도교나 불교는 그 자연스런 정감을 무리하게 끊고 다만 정신을 갖고 노는 데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서 양명은 다년간 가까이 했던 도교와 불교를 결단하고 떠나서 유학에 복귀했다. 20년 동안 계속됐던 그의 회의와 방황의 시대도 양명동에서의 깨달음을 통해 종지부를 찍었다. 여기서 커다란 하나의 전기를 맞이 했다.

도교와 불교의 허망함을 깨닫고 정신이 안정된 양명은 다음해에 항주의 서호에서 요양하며 가끔 주변의 남병과 호포의 여러 사찰에 놀러가기도 했다. 건강을 회복하고 나서, 관직에 복귀할 걸 결정하고 33세에 베이징으로 돌아갔다. 그 다음해에는 동지를 모아놓고, 성학-聖學-을 강의했다. 유가의 본래 취지를 깨달은 양명의 열정은 회의의 시기가 길었을 뿐, 일시에 들끓어 비약했다. 양명이 급히 유가의 이상을 설명했던 것도 많은 독서인들에게는 특이함을 세워 이름을 좋아하는 것으로 보였는지 모른다. 다만 그 당시에 일찍이 양명을 이해하며 일생동안 충언을 해주었던 선배인 담약수[1466-1560]를 얻은 것은 양명에게 행복이었다. 담약수는 진백사에게 배운 고결한 선비로서 약수의 학문은 자득-自得-을 근본 취지로 해서 선학으로 평가 받기도 했다. 그러나 유가의 이상을 잊은 사람은 아니었다. 양명은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만년에 감천선생을 만난 이후 나의 뜻이 더욱 확고해졌다" 당시에 양명은 유학의 본래 취지에 근본을 두고 학문은 성인이 되려고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정도였다. 아직 독창적인 철학은 없었다. 이른바 양명학의 출현에는 이 시기를 토대로한 더 큰 비약이 필요했다.

용장[龍場]에 유배된 일은 양명이 독창적인 철학을 갖게된 계기가 되었다. 용장에서의 귀양살이는 당시 부패 정치에 대한 양명의 정의심 때문에 초래되었다. 양명의 나이 35세 때, 새로 즉위한 무종에게 간관인 대선과 박언휘는 표를 올려서 수년간 권력을 맘대로 휘두른 환관 유근을 경계했는데, 양명은 그 두사람을 옹호했다. 그러나 천자의 뜻에 거역했다는 명목으로 두 사람은 감옥에 감금됐다. 양명은 그 부당한 일을 좌시할 수 없어서, 감히 붓을 잡고 두 사람의 석방을 탄원했다고 전해진다. 이로써 도리어 자신이 죄를 받게 되어 장형 40대를 받고 죽을 지경에 처하게 됐다. 다행히 소생해서 다시 귀주 용장의 역승에 임명됐다.

양명이 용장에 도착한 것은 다음해 봄, 37세 때였다. 그때까지 약 1년간 출발을 망설이며 고향에 있었다. 그때 자객의 위협을 피해 바다로 도망쳤다가 복건까지 표류했다. 양명은 돌아오던 길에 성경의 산사에서 우연히 철주궁에서, 예부터 알고 지내던 스님의 권유에 따라 임지로 가겠다고 결심했다. 그때의 심경을 시로 표현했다.
"험난하고 평이한 것은 원래 가슴에 걸리지 않는다네
떠도는 구름이 텅빈 하늘을 지나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밤이 고요하니 바다의 파도가 삼만 리구나 달이 밝으니 비석이 천풍을 내리네" 

용장에 도착해 보니 귀주 서북의 온갖 산에 겹겹이 둘러 싸여 있는 변방의 땅이었다. 주민은 굴속에서 사는 만족[蠻族]-오랑캐-아니면 유배되어 도망온 한족이었다. 기후는 불순하고 벌레와 뱀이 우글거렸다. 역승이라는 이름만 있었다. 거처할 집도 없다. 대화 나눌 친구도 없고 공부할 책도 없는 완전한 귀양살이였다. 그런 어쩔 수 없는 고달프고 적막한 변두리에서 생활하며 양명은 사색을 거듭했다. 갑자기 깨달은 것이 있었는데 참으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한몸의 주체인 마음[心]이라는 사실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마음이야말로 모든 일과 이치의 근원이었다. 마음은 모든 사람한테 있는 것이다. "성인의 도는 나의 본성에 이미 넉넉한데, 예전에 외부 사물에서 이치를 구한 시도는 잘못이었다" 양명은 이렇게 깨달았다. 그 후에는 다년간의 의문이 잇달아 풀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격물치지에 대한 주자의 학설은 이치와 마음을 둘로 나누는 잘못을 범했으므로 심즉리[心卽理]라고 수정을 해야 했다. 앎[知]과 실천[行]은 원래 분리할 수 없는 것이므로 지행합일[知行合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후자는 구체적 체험의 지식으로 도달 안하면 천애[天涯]의 고객[孤客]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통감한 것이다. 양명이 그렇게 후련하게 깨달았기 때문에 몸과 마음에 활력이 생겼다. 그래서 3년의 객지 생활을 인내할 수 있었고, 그런 생활을 즐거운 것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무지한 오랑캐도 양명한테 가서 서원[書院]을 건설하는 일에 협력하기도 했다. 가르침까지 받았다. 양명의 이름이 인근에 퍼져서 귀주의 제학부사-지방의 학사를 통괄하는 관리다-석서[席書]가 내방해서 학문을 묻고 새롭게 귀양서원을 수리해서 양명을 학장으로 맞이했다.

그때 양명을 박해하던 유근이 죽자, 드디어 양명은 강서[江西]의 려능[廬陵]의 지현[知縣]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약 10년 동안 양명은 관리로 일하면서 순탄한 길을 걸었다. 남경, 북경, 회계, 제주, 남창, 장주 등 각지로 전임되고 승진했다. 이 시기는 양명이 일생에서 가장 활약했던 득의만만하던 시절이다. 특히 45세부터 3년 동안 강서, 복건의 각지에서 설치던 무장도둑 무리를 토벌하고, 남창에서도 맹위를 떨쳤다. 또한 명나라에 반기를 들었던 영왕[寧王] 신호[宸濠]를 평정한 군사 업무에 힘썼다. 그러나 군사, 정치에 나타난 공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군사 업무 때문에 매우 나쁜 상황에서 공부하는 일과 몸과 마음을 수양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양명은 그 사이에 사상마련-개념을 통해서가 아닌, 실제로 일하는 곳에서도 공부하고, 수양하는 일-을 강의하고, 천리를 간직하고 인욕[人欲](양명의 주체성을 미루어 볼 때필자는 "인욕"은 단순 과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인생철학에 근거하지 않은 충동적 행동이라고도 생각한다 이것은 필자의 주관일 뿐이다)을 제거하라고 주장했다. 양명은 말했다. "도문학[道問學]은 존덕성[尊德性]의 공부이다. 박문[博文]은 약례[約禮]의 공부이다" 양명이 주장한 학설의 정점에 있는 치양지설도 그러한 과정 속에서 무르익어 갔다. 추측컨대 교육자로서 발휘한 양명의 성과가 좋았던 이유는 양명의 학설과 태도와 성격이 주체적이었고 그 자유분방한 매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사제 관계를 그리 따지지 않고 함께 공부하고 즐기는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가득찬 학풍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개 양명선생이 동지[同志]를 점화시키는 것은 많은 경우에 산에 오르고 물에서 노니는 사이에 얻게 되었다" 이렇게 전한다. 스승과 제자가 서로 어울려 자유분방하게 놀고, 야외에서 잔치를 베푼 적이 자주 있었다. 심지어 환성이 울려 퍼지기도 했다고 전한다. 이러한 왕양명 교단의 특이한 분위기는 엄숙함을 위주로 하는 일반적인 주자학의 관점에서 보면 그 자체가 이단의 학문으로 취급되기에 충분했다.

영왕 신호의 난리를 평정한 공로를 시기질투한 환관 허충[許忠], 이태[李泰]의 모함으로 도리어 한때 위협받기도 했다. 소인들, 간신배들의 음모에 대한 양명의 고심은 군사 업무보다 몇 배나 힘들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무종이 죽고 세종이 즉위하자 형세가 완전히 변해서 양명의 공훈이 재평가 되었다. 양명은 신건백[新建伯]에 봉해지고, 남경병부상서[南京兵部尙書]를 겸하게 되었다. 양명의 이 때 나이는 50세였고 가장 괜찮은 시기였다. 그 이듬해에 사태가 또 변해서 양명의 아버지는 죽고, 양명의 공훈을 시기질투하던 사람들 때문에 다시 신변이 위태로워진다. 부하 장졸에 대한 논공행상을 중지한 것, 이설[異設]-양명 자신의 사상-을 주장하고 정설[正說]을 방해한 것, 과거에 응시했던 제자가 고의로 낙제했다는 이런 몇 가지 모함에서 비롯 되었다. 간신배들의 지칠 줄 모르는 이러한 음모 때문에 왕양명은 분명히 고생했을 것이다. 이런 일이 있어서 상기[喪期]-장례, 상을 치르는 동안-를 지난 뒤에도 복직하라는 명이 없었다. 이후 56세까지 6년이라는 세월 동안 고향에서 아무 임무도 없이 지냈다.

그러나 양명은 뜻밖에도 여유롭게 학문을 강의하고 제자를 양성하는 기회를 얻었다. 각지에서 구름처럼 밀려든 제자들이 숙소에 넘치고 강의소에 가득차서 전성기에 이르렀다. 학자, 교육자로서는 오히려 좋은 시기였다. 그 사이에 양지[良知]의 학설을 수립했는데, 인간의 양지는 시비, 선악을 판단하는 주체이므로 천인일리[天人一理] 만물일체의 관념에 근본을 두고 활발하게 천도에 통하는 것이 되었다. 강학에 몰두해서 여념이 없던 양명을 다시 세상사에 빠트리고 비참한 운명으로 이끌은 것은 56세가 되던 5월에 광서의 도적을 토벌하라는 명령이었다. 그보다 앞서 광서의 사은과 전주에서 일어난 대규모로 벌어진 토적의 소란은 극도로 심해서 네군데 성의 군대가 토벌을 시도했지만 패배하고 말았다. 위기에 몰린 조정은 양명이 해냈던 군사적 공훈을 떠올렸다. 조정은 고생해서 사양하는 양명을 무리하게 기용했다. 9월에 출발해서 강서, 광동을 거쳐 광서에 도착하자 아픈 몸으로 무리하게 임무에 열중했다. 양명은 임무를 수행하기 전에 문인[文人] 전덕홍, 왕기와 천천교에서 도를 논하고 "사구교[四句敎]로써 학술의 종지를 개괄했다. 양명은 군사 활동에서 토적-지방의 도둑떼-이 봉기한 원인이 조정의 정책에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무력으로 토벌하는 것보다는 은혜를 베푸는 방법을 서서 토적 무리를 진정시켰다. 배움터를 건립해서 교화 사업을 시작했다. 게다가 양광의순무를 겸하며 7월에는 팔색단등협의 이적을 토벌했는데, 그 소굴을 소탕해서 다년간의 우환을 한방에 제거했다. 그러나 장려의 땅에서 극히 힘든 일에 복무하는 것은 병든 몸에 치명타였다. 병세는 차츰 나빠졌다. 재삼 휴가, 사직원을 올렸으니 불허됐다. 그래서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귀로에 올랐다. 광동성 경계에서 광서로 들어가던 도중에 결국 숙사[宿舍]-숙소-에서 타계했다. 이 때가 가정 7년[1528년] 10월 29일이다. 57세의 나이였는데, 임종의 유언은 다음과 같다. "이 마음이 환히 밝은데 다시 무엇을 말하겠는가"


비지니스나 개인의 일상에서 곤란할 때 당황하지 말고 금선탈각의 계책으로 빠져나와야 한다.


☆중국 유엽 편저,<원전 36계에서 배우는 경영의 지혜>에서...


Pablo Casals plays BACH Cello Solo No 1,BWV 1007 (1954)

15분02초...

파블로 카살스(1876~1973)는 스페인출신,
"성자 첼리스트"로 불리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첼리스트의 한 사람...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1685~1750)는 독일의 작곡가, 오르가니스트...
이 곡은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6곡(작품번호 1007~1012)중 하나이다.

http://m.youtube.com/watch?v=KX1YtvFZOj0#




나훈아의 립스틱 짙게 바르고

3분26초...

http://m.youtube.com/watch?v=iD4FDpt3Vxw#



중국 역대 최악의 황제는?

명나라 주원장은 최고 힘쎈 황제로 평가받기도 한다.
사람을 많이 죽였기 때문에 권력도 컸다.

진시황제(BC 221년 즉위)로부터 마지막 황제 선통제 부의(溥儀, 1911년 퇴위)까지 2132년 동안 중국에는 모두 211명의 황제가 있었다. 평균 재위 기간은 약 10년이며 역대 황제의 평균수명은 42세였다.

금(金)의 마지막 황제 완안승린(完顔承麟)는 옥새를 넘겨 받고 하루 만에 몽고군에게 다시 그 옥새를 내준 반면 청(淸) 건륭제(乾隆帝)는 61년간 재위하며 아들 17명, 딸 10명을 두기도 하였다.

역대 황제들 중에는 유일한 여황제인 측천무후(則天武后), 미소년과의 동성애를 즐겼다는 한(漢) 애제(哀帝), 양귀비와의 스캔들로 유명한 당 현종, 청나라의 전성기를 구가한 부지런한 옹정제(雍正帝), 강희제(康熙帝) 등 다양한 특색의 황제들이 많았다.


▲ 주원장의 각기 다른 초상화. 그에 대한 평가만큼이나 대조적이다. 난징를 둘러싸고 있는 성곽의 전체 윤곽은 못생긴 주원장의 얼굴 형상이라고 한다.
ⓒ2005 김대오
최근 베이징커지(北京科技)신문은 역대 황제 중에서 심리적 소양이 가장 떨어지는 황제로 명(明)나라를 세운 주원장(朱元璋)을 뽑았다.

홍콩 도시 대학의 심리학자 위에샤오동(嶽曉東) 교수는 주원장이 심각한 심리 장애와 인격분열의 정신병 증세가 있었다고 분석했다. 어릴 적 가난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농민반란을 통해 정권을 잡는 과정에서 심한 의심과 방어기제로서의 잔인한 폭력성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주원장은 1368년 10월 21일 안훼이(安徽)성의 가난한 집안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중팔(重八)이었으며 17살에 전염병과 기근으로 부모 형제를 잃고 황각사(皇覺寺)라는 절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절에서 청소와 심부름을 하던 주원장에게 가장 힘든 일이 사천왕상의 다리 사이 먼지를 청소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황제가 되고 난 후 주원장은 모든 절의 사천왕상은 청소하기 좋도록 반드시 한 발을 들도록 명령했다고 하니 이는 사천왕상의 역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 주원장이 승려로 일하던 시절 사천왕상의 다리 사이가 청소하기 힘들어서 자신이 황제가 난 후에는 사천왕상의 한 발을 모두 들게 했다고 한다. 사진은 베이징 근교의 홍루어쓰의 사천왕상이다.
ⓒ2005 김대오
25살에 홍건적의 두목 곽사흥(郭士興)의 군대에 들어가 실력을 인정받으며 무수한 전투를 치르며 세력을 키워 나간 주원장은 16년간의 전쟁 끝에 1368년 난징(南京)에 명나라를 세우고 황제에 등극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 41세였다.

서민이 황제가 된 사례로는 한고조 유방에 이어 두번째인 빈농 출신 주원장의 황제 등극에 대해 농민봉기에 의한 역사적 필연이라고 낮게 평가하기도 하고 농민군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반원투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높게 평가하기도 한다. 어쨌든 여기까지는 주원장에게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황제가 된 후 주원장에게 슬슬 일종의 피해망상증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자신과 함께 나라를 세웠던 개국 공신들이 자신에게 반기를 들 것을 우려하여 재상 호유용(胡惟庸) 등 1만5천여 명을 반역죄로 숙청하고 자신의 출신과 못생긴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에서 기인한 '문자의 옥'으로 또 많은 지식인들을 제거하기도 하였다.

'문자의 옥'이란 주원장이 승려생활 때 머리를 깎은 것 때문에 '광(光)', '독(禿)'자를 쓰거나 '승(僧)'과 발음이 비슷한 '생(生)'을 쓰는 행위, 반란군 출신이란 의미의 '적(賊)'과 발음이 비슷한 '칙(則)'자를 쓰는 행위를 무조건 처벌한 것을 말한다.

한 선비는 "빛이 가득한 천하에 하늘이 성인을 낳아 세상을 위해 법칙을 만들도다(光天之下,天生聖人,爲世作則)"라는 상소문을 올렸는데 대머리의 '광(光)', 스님의 '생(生)', 도적을 나타내는 '칙(則)'이 함께 있었으니 죽음을 면하기 어려웠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당시 관료들은 매일 집을 나서며 가족과 작별 인사를 하고 살아서 집에 돌아가면 껴안고 살아 돌아온 것을 기뻐할 정도였다고 한다.

주원장은 또 <대명법>(大明法)을 제정하여 폐지되었던 잔혹한 형벌을 부활시켰는데 반역죄의 경우 주범이든 동조자든 일률적으로 팔다리, 어깨, 가슴 등을 차례로 잘라 능지처참했으며 만 16세 이상의 모든 가족까지 멸하는 족주(族誅, 가문 몰살)에 처했다. 또 60량 이상을 횡령한 관리에 대해서는 사형한 후 껍질을 벗긴 후 군중들에게 게시하기도 하였다.

주원장의 히스테리칼 한 공포정치는 26명의 아들과 16명의 딸들에게 자신의 권력과 부귀영화를 물려주기 위함이었다. 즉 미천한 출생에서 시작해 최고의 지위인 황제에 오르면서 자신의 권력과 부귀를 보존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정신분열증세로 나타난 것이다.

주원장은 왕위를 물려주려던 아들이 죽자 결국 손자인 건문제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그러자 네 번째 아들이었던 주체(朱棣, 영락제)가 '정난(靖難)의 변'을 일으켜 조카의 권좌를 찬탈하는 골육상잔의 비극이 연출되고 만다.

결국 황제의 무소불위의 권력은 늘 부메랑이 되어 황제에게 되돌아간다. 주원장은 자신이 평생 범한 과오 때문에 자신의 무덤이 파헤쳐질 것을 염려하여 철저한 보안 속에 자신의 묘를 만들도록 하였는데 지금도 주원장의 묘인 효릉(孝陵)의 묘도는 발굴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주원장에 대한 두 장의 초상화가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인자하고 덕 있어 보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야말로 추하고 못생긴 형상이다. 주원장에 대한 역사적 평가도 농민봉기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명왕조의 기반을 다졌다는 긍정적 평가와 극단적인 공포정치를 일삼는 정신분열증세의 폭군이라는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고 있다.


http://me2.do/G7vRVpDP



항상 나로 인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 좋은 글과 음악

2분5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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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초간의 딜레마가 당신의 삶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

http://m.blog.naver.com/oji3638/60184510452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다.
건강에서도 마찬가지다.

몸무게와 허리둘레 사이즈 중
어디에 더 신경을 써야 할까.
사과와 오렌지 중 어느 것이 더 건강에 좋을까?
베이컨과 소시지 중 택일하라면
어느 쪽이 나을까?

2초간의 딜레마가 당신의 삶을 바꿔 놓을 수 있다고
영국 일간지 데일리 메일이 보도했다.

 

당신의 허리둘레는 신체용적지수보다
훨씬 더 나은 심장병 위험 예측변수다.
연구결과들에 따르면 심장과 동맥에 가장 많은

위험을 주는 것은 복부비만이다.
여성들의 경우
허리둘레 32인치 이상부터 건강 위험이
증가하기 시작하며
성들의 경우
35인치 이상이 되면 건강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

과거 40여 년의 연구 검토결과
전동칫솔이 플라크(치태)와
치은염(잇몸이 빨갛게 붓고 아픈 병)
줄이는데 일반칫솔보다
더 효과적인 것으로 조사됐다


진짜 본래의 것을 섭취하는 것이 낫다.
과일주스는 당분이 첨가되는데다
섬유질이 없어지게 된다.


완전히 요리된 베이컨 한 조각은 소시지보다
칼로리 열량이 더 적다.
생 과일의 더 높은 수분함량은 적은 열량으로
더 많은 포만감과 만족감을 준다. 
 
그러나 편리성이나 유통기한면에서
말린 과일을 생과일 대용으로
사용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홍차나 녹차를 선택하라.
 
차는 심장에 좋은 노화방지물질이 풍부해서
건강한 동맥 유지에 효험이 있고
암예방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걷기를
비웃을 수도 있다.

걷기는 진정한 체중 감량으로 이어지는
충분한 열량 연소를 시켜주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러 관련 연구결과들에 따르면
정기적인 걷기 프로그램이
허리둘레를 줄이는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 입증됐다.



마사지의 요체는 피부를 자극하는 것이 아니다.
피부 밑 근육을 풀어주는 것이다.

고통스러울 정도까지 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근육을
충분히 풀어주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수영이 폐와 심장에
훌륭한 운동 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뼈에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물에는 저항력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고령자들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평상적인 운동 10주일은 약물치료보다
우울증세 감소에 있어
20퍼센트 더 효과적인것으로 조사됐다.
그러나 우울증은 운동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지 않기 때문에 의사들은
두 가지 치료법을 병행하라고
권고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혈압상 스트레스 호르몬의 부적정 효과를
줄이는 데 있어 친구관계가 대단히 중요하다.
책보다는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건강에 제대로 투자된 시간이다.


수동변속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에 대한 주된 논거는
칼로리는 연소시키면서 연료는 덜 쓰게 된다는 것이다.

건강에는
운전을 덜 피로하게 해주는
자동변속의 효과가 더 낫다.

 


옛말이 맞다.
노팅엄대학 연구팀 조사 결과,
 
일주일에 5개 이상의 사과를 먹으면
폐 기능을 향상시키고 숨 쉬기
곤란한 것과 천식 같은 증상이
줄어드는 것으로 확인됐다.


현금 vs. 신용카드

정답 = 현금


현금으로 지불하면
식료품 비용을 덜 쓰게 된다.
한 연구팀이 수백 가정을 대상으로 3개월 동안은
식료품 구입을
모두 현금으로만 하도록 하고



신용카드만을 사용하도록 했다.
그 결과 신용카드를 사용하는 경우 식료품 구입에 20~30퍼센트
더 많은 지출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性 스런 유머, 거시기 경매


부인이 남자 물건의 경매가 보통은 10달러,대물은 20달러라 말했다.

남편이 그럼 내 것은 얼마냐고 물으니 대답이 나왔다.

"버리고 간다."


남편이 역공을 한다.

여자 거시기가 경매에서
보통은 천달러,작고 타이트한 것은 2천 달러라 말했다.

부인이 그럼 내것은 얼마냐 물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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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매가 중지 됐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