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2일 수요일

임금 노동과 자본 - 맑스

  고전 경제학은 어떤 상품의 가치가 그 것에 들어있는, 그것의 생산에 요구되는 노동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노동의 가치는 어떻게 결정되는가? 예컨대 노동자가 노동을 하면 6마르크가 생긴다. 이 가운데 3마르크는 자본가가, 3마르크는 노동자가 챙긴다. 노동자의 노동으로 2개의 가치가 창출되는 것이다.

  맑스는 그의 노동이 실제로 시작되자마자 그것은 이미 그에게 속하지 않으며, 따라서 더 이상 그에 의해 판매될 수 없다고 말한다. 노동력은 아주 특수한 상품으로 그것은 가치를 창출한다는, 가치의 원천이 된다는 툭수한 속성과 힘을 가지고 있다. 적절히 다루면 그것 자체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가치의 원천이 된다는 속성 또한 가지고 있다.

  자본가들은 전쟁을 벌인다. 이 전쟁이 지닌 특징은 아래와 같다. 자본가들의 전투는 노동자 군대의 징집을 통해서가 아니라 퇴역을 통해서 승리를 거둔다. 사령관인 자본가들은 누가 가장 많은 산업 병사들을 떠나게 할 수 있을까를 놓고 고심하며 가장 많이 떠나게 한 자본가가 승리한다.

  자본이 급속히 성장하면,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더 급속히 성장하며, 다시 말해 노동자 계급을 위한 고용수단, 생산수단은 더욱 감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급속한 성장이 임금 노동에게 가장 유리한 조건인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자본주의는 완전한 모순 덩어리다.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속하지 않는다. 자신의 노동력을 응당 바라는 기준에 못 미치게 지불하는 자본가에게서는 떠나면 그만이다. 그런데 자본가 계급에는 속한다. a자본가에게서 떠나도 b자본가 아래 속해야 하는 것이 노동자의 숙명이다. 단순 노동력의 생산 비용은 노동자의 생존 비용과 번식비용을 더한 값이다. 이는 임금의 최소치다.

  생산적 자본이 성장하면, 노동에 대한 수요가 성장한다. 노동의 가격, 즉 임금이 상승하게 된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생산적 자본의 성장은 기술 혁신을 비롯한 노동력의 소외를 전제로 가능하다. 때문에 자본가들은 노동자를 퇴역시키고,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고 떼 지어 부유한다.

  소외된 노동은 인간에게서 자연을 소외시키고, 그 자신을 즉 그의 고유한 능동적 기능을 소외시켰다. 맑스의 현실 비판은 소외의 극복에서 시작됐다. 노동자가 새로 생산한 가치 가운데 일부는 임금으로 노동자에게 돌아가고 나머지는 자본가에게 돌아간다. 맑스는 훗날 노동자들이 생산했으나 임금으로 지불하지 않은 가치를 '잉여가치'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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