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왜 헛발질만 하는가
<머리말>
악한 이들의 거친 아우성보다 선한 이들의 지독한 침묵이 더 큰 비극
살아가면서 우리는 의식하든 의식치 않든 몇 가지 믿음을 부여한다.
그러나 대한민국호는 우리가 믿고 우리를 맡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마틴 루터킹
“역사는 이렇게 기록할 것입니다. 세상이 바뀌어야 할 때 빚어지는 가장 큰 비극은 악한 이들의 거친 아우성이 아니라 선한 이들의 지독한 침묵이었다고.”
저널리즘은 저널리스트의 세상을 보는 방식, 즉 세계관이고 저널리스트의 삶이어야 한다. 저널리스트는 자신의 기사와 논설 속에 생각과 시각으로서가 아니라 ‘존재’로서 담겨 있어야 한다.
<권력자는 왜 헛발질만 하는 걸까>
왜 지도자들은 아무리 여론이 따가워도 자기가 잘해냈다고 철석같이 믿는 것일까?
1) 자기과신효과
자신의 성공 가능성을 비판적으로 점검하지 않고 정책을 밀어붙이는 경향 강해. 지금까지 성공해 온 것은 자신의 머리와 추진력 덕분이라고 착각하기 때문.
2) 패이싱 효과
자신이 말을 많이 하면 할수록 의미 있는 만남이었고 상대방과 소통이 잘 됐다고 착각하는 상태. 자기가 말을 많이 해 만족스러우면 당연히 상대는 말도 못하고 듣기만 해 만족스럽지 못한 게 뻔한데 이를 간파하지 못하고 착각하는 현상
3) 쿠키 테스트
대학생들에게 토론을 시켜놓고 그 중 한 명을 리더로 지목. 리더에게는 누가 토론을 잘하고 못 했나 판정하는 강력한 권한을 줬다. 과자를 접시에 담아뒀는데, 가장 많이 먹은 사람은 역시 판결권을 가진 리더였다. 리더가 되기 전과 비교해 태도가 완전히 달라지는 현상을 보였다.
권력을 주면 3가지 변화가 발생한다.
1)자기가 하고 싶었던 것에 집중한다. 2)아래 사람들이 원하는 것에 둔감해진다. 3)자신은 규율을 지키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잘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도자가 권력을 쥐면 빠지는 심리적 함정이다.
송나라 역사를 기록한 송사의 유일지전에 나온 말. “천하의 다스림은 군자가 여럿이 모여도 모자라지만, 천하를 망치는 것은 소인 하나면 족하다”
왕의 덕목 중 하나가 인재를 가려 쓰는 것이었다.
간신을 분별하는 기준인 ‘변간법’이라는 충고가 존재.
육도나 여씨춘추에 보면 못된 신하를 가려내기 위한 관찰법 내지 시험법 등장
1) 몰래 사람을 보내 그 성실함을 살핀다
2) 그가 어떤 사람을 추천하고 데려다 쓰는지 살핀다
3) 실의에 빠졌거나 좌절했을 때 그의 지조를 살핀다
4) 권세를 누릴 때 어떤 사람을 접촉하는지 살핀다
5) 돈과 관련된 일을 줘서 청렴함을 살핀다
6) 술에 취하게 해서 솔직한 모습을 살핀다
7) 여자를 붙여줘 그 단정함을 살핀다
8) 위급한 상황을 알려 그 용기를 살핀다
9) 가난할 때 그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는지 살핀다
가까이 둬선 곤란한 신하의 특질이다.
다시 번지는 21세기의 메카시즘.파시즘
적성국의 간첩을 적발하고 검거하는 데 협조하는 건 시민의 책무다. 문제는 ‘간첩같다’가 아니라 진보이념을 종북으로 몰고, 더 나아가 의도적인 간첩 신고가 집단행동화하는 현상이다. 민주 사회에서 사상의 자유는 기본이고 사회주의에 대한 진지한 토론과 연구도 필요한 것인데 좌파.사회주의.맑스라는 글자만 들어가도 좌빨, 종북으로 오해받고 준간첩처럼 인식되는 쪽으로 우리 사회가 가고 있다.
메르켈-기독민주당- 총리의 성공 요인
기독민주당은 보수당이다. 그러나 정책은 조리를 잘 따져서 정하고 행한다.
1. 권력을 과시하지 않지만, 정책은 힘있다. 메르켈리즘.국민은 메르켈 총리를 무티mutti라고 부른다. 어머니라는 뜻이다.
2. 독일 이웃 나라에서 메르켈의 별명은 ‘프라우 나인’이다.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확실히 버틴다는 의미로 안 돼요 부인이라는 별명을 붙인 것.
3. 인간적으로 매력이 있다. 잘난 척하지 않아 좋다고 한다.
4. 과학자답게 연구하고 분석해 결론을 내리는 스타일이다.
5. 정치지도자로서 성공을 우선시한다. 대부분 거물 정치인들은 권력을 목표로 한다. 메르켈은 이와 달리 통일된 독일의 자유민주주의와 부흥이 자기의 성공이라고 여기고 이 둘을 일치시킨다.
메르켈의 정치 리더십은 ‘화합과 통합’이다. 독일을 사회적 합의와 융합으로 이끌면서 유럽 최강국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 국민 통합을 내세온 박 대통령은 어떤가. 간단히 요약하면 아버지 따라하기와 MB이어받기, 그리고 그 두 가지로부터 적당히 거리두기 사이에서 갈팡질팡.
박 대통령, 시대의 격변으로 고통은 당했지만 시대의 해법을 놓고 고민해 본 경험은 부족. 아버지는 식민의 설움과 분노를 넘어서는 강한 자아 성취 욕구로 지배국 일본군의 장교가 되고, 그 시각으로 시대를 바라본다. 해방의 격변 후에는 좌익의 자리에서 뒤집어 보고, 다시 우익 쿠데타로 권력을 쥐고 통치자가 됐다.
위기란 어려움에 봉착하는 게 위기가 아니다. 되돌아가지 못하는 것이 큰 위기다. 다시 설명하면 물에 빠졌기에 죽는 것이 아니라 나오지 못해 죽는 것이다. 약점이란 약한 곳을 고치지 않기에 약점으로 굳어지는 것이다. 더구나 지도자는 자신의 뒤에서 냉철한 판단과 방향 제시를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지도자가 자기를 혁파하면 뒤를 따르는 이들도 쇄신에 임할 것이고 그들의 힘이 모여 국가는 개조된다. 국가 개조는 그렇게 이루는 것이다.
법대로 하자가 가장 흉포해
국민의 세금으로 존재하고 임금을 받는 경찰 등 국가기관이 국민에게 손해배상을 물려야 하나? 이제부터 경찰을 상대하는 모든 국민 개개인은 경찰에게 공손히 대해야 한다. 누구든 경찰에 손실을 입히면 소송일 테니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걸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수단이라고 부른다. 법은 효과를 위해 만든 것이 아니다. 헌법으로 노동 3권을 보장하고 노동법으로 노동자에 대한 보호 장치를 마련한 국가적 취지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볼 일이다. 이렇게 적군을 소탕하듯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을 흩어버리는 것이 국격인가?
노조의 쟁의에 대처하는 것과 노조를 말살하려 하는 것은 다르다. 정부와 사법부가 이 정도를 구분 못하고 법의 취지를 이해 못하리라 생각지 않는다. 결국 뻔히 알면서도 법을 악용하는 것이고, 법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무책임함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적 경험을 토대로 우리는 이 말이 변하지 않는 진리임을 되새기며 분노한다. ‘힘을 가진 자가 법대로 하자고 하는 것이 가장 교활하고 잔인한 때라고….’
나무는 쓰러진 뒤에야 그 크기를 알게 된다. 권력의 최고 정점에 올라 있을 때야 누구나 허리를 굽히고 옳소이다, 외치니 그 사람의 진정한 가치와 덕망을 헤아리기 어렵다. 하지만, 내려오거나 죽고 난 뒤엔 제대로 된 평가들이 모습을 드러낸다는 뜻일 게다.
텍사스 명사수의 오류
심리학에는 텍사스 명사수의 오류라는 것이 있다. 언제나 과녁 한가운데만 맞추는 명사수가 있다. 어떻게 가능할까? 그것은 쏘고 난 다음에 가서 과녁을 그리는 것이다. 우연히 발생한 사건을 놓고 적당한 이야기들을 주위에 그려나가면서 커다란 의미를 부여할 때 오류가 생긴다는 연구다.
아포페니아: 관련없는 현상이나 정보에서 연관성을 찾아내고 의미 부여하는 경향
파레이돌리아: 우연한 형상이나 소리에서 의미를 발견하려고 기를 쓰는 심리현상
오류의 착각에 빠져 살다간 한 방에 훅 간다
인간의 의식은 혼란을 피하기 위해 어떻게든 원인을 찾아내려 하고, 그런 것을 근거로 일정한 패턴을 만들어 불안한 내일을 예견해보려 한다. 심리학에서는 귀인현상이라고 부른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생각하고 싶은 대로만 생각하고 나머지는 외면하는 ‘확증편향의 오류’에 빠질 수도. 자신이 어쩔 수 없는 것인데도 조종이나 영향력이 가능하다고 믿는 걸 ‘통제력 착각’이라고 한다.
유대인들은 남의 나라 떠돌이 신세였지만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나 전통을 지키면서 살아남기 위해 똘똘 뭉치고 악착같이 벌었다. 화교나 우리 교민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구촌엔 그들이 음모를 꾸미는 흉물이나 악다구니처럼 소개된다. 그런 편견은 그 사람들을 더욱 똘똘 뭉치게 만든다. 우리의 영호남 지역갈등과 지역주의도 그 뿌리는 결국 이런 오류와 편견의 구조화다.
종편채널들은 이미 스스로가 ‘통제력 착각’에 빠져 있다. 자기네 신문과 방송에서의 조작질 정도면 우리 사회를 이념 대결의 수렁으로 밀어넣어 수구 장기집권을 꾀할 수 있다고 자만하고 있는 것이다. 대형 신문과 방송을 갖고 있으니 그 능력이 클 수도 있다. 하지만 능력이 큰 만큼 오류도 크고 종말은 더 처참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기모노에 얽힌 내 안의 전봇대>
수학여행은 기원은 유럽 귀족 자제들이 유럽 대륙 순회 여행을 벌인 것에서 유래했다는 것. 그러나 엄선된 특권층 자제들이 1년씩 심신을 수양하는 여행을 한 것과 오늘 우리의 수학여행 모습은 차이가 크다.
일본 근대화 과정에서 생겨나 우리에게 전해졌다는 설, 메이지 유신 이후에 수학여행이라는 걸 만들어 조선이나 만주, 중국을 다녀오는 보름 가까운 여행수업. 엄격한 통제 아래 규율 잡힌 집단생활을 익히는 게 주된 목적.
일본의 성문화는 개방적이다 못해 우리와는 몹시 달라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많다. 요타카란 옛날 먹고 살기가 어려울 때 깊은 밤에 가난한 여성들이 밤거리로 나가 성매매를 해 목숨을 부지하던 풍습이다. 아주 어린 소녀부터 노인까지 성매매에 나섰다고 하는데 따로 방이 마련된 것이 아니니 바깥 어디서나 성매매가 이뤄졌고 손님을 끄는 데 입을 옷을 빌려주는 전문대여업이 생겨났다 한다.
와카모노렌주는 청년들이 단합해 일하고 공동체를 이끌던 마을 모임인데 마을 여성을 공동재산으로 삼으면서 다른 마을 청년들에게는 배타적이었다는 풍습이다. 이밖에도 마을에서 소년이 성년이 될 때 성매매 여성에게 데려가 성을 가르치는 풍습도 있었다 한다. 우리 사회도 일제강점기에 이것을 그대로 배웠는지 ‘딱지 떼 준다’는 명목으로 성매매를 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러고 보면 좋지도 않은 일제의 잔재를 꽤나 끈질기게 보존하고 있는 셈이다. 근거도 없이 기모노를 흉보기보다는 우리 안에 잔존하는 흉한 일제 잔재부터 털어버려야겠다.
룸살롱의 정치학
2013년 국회기재위에서 국세청의 법인 접대비 지출현황이 공개됐다. 최근 5년 간 접대비로 지출한 금액은 37조 원. 룸살롱 등 유흥업소 접대비가 7조 1천585억 원. 반면 문화 접대비는 181억 원으로 전체 접대비의 0.05%였다.
일제 강점기에 친일파가 총독부 등 일본 측 갑을 접대한 곳이 요정이고, 해방 후엔 군정을 맡은 미군을 불러 접대했다. 5.16 군사 쿠데타 이후엔 군사정권이 즐기고 국가적 돈벌이와 비자금 통로로 이용했다. 이런 요정이 비즈니스 호화 룸살롱으로 발전해 대통령 측근과 재벌 총수가 만나 즐기며 우애를 돈독히 했다는 의혹이 터지기에 이른 것이다.
한국 사회의 특징 중 하나가 밀실 문화다. 중앙 정치권력, 자본권력, 언론권력, 지방자치단체와 토호세력 등이 투명하고 공정한 시스템, 공공제도에 의해 움직이지 않고 별도의 꿍꿍이 내막들에 의해 움직인다. 그래서 자기들끼리 은밀히 만나야 하고 갑을 관계에서 접대도 해야 한다. 은밀한 접대는 밀실이 필요하고 보안과 방음이 잘 된 밀실을 룸살롱이 제공한다. 룸살롱의 가장 큰 장점은 그런 밀실을 음습하지 않게 화려하고 우아하게 꾸몄다는 점이다. 또 도우미의 성 접대를 함께 받으며 공범의식을 통해 서로를 더 친밀한 관계로 이끌어주는 장점(?)도 있다. 거기에다 룸살롱에서의 접대는 조직과 사회에서 업무 수행으로, 관행으로 인정해준다.
정도전은 “처가살이 혼속 때문에 여자들이 자기 부모 세력을 믿고 남편을 무시하고 교만하게 군다”면서 중국과 같은 친영제-시집살이로 결혼제도를 바꿀 것을 주장했고 왕들도 외척들의 세도를 누르기 위해 솔선수범했다.
17세기 중반 이후로 접어들면 시집살이가 확실히 대세로 자리 잡고 여성의 지위도 하락했다. 재산도 아들에게만 칼 같이 상속되고 그것도 장자, 장손 위주로 굳어진다. 여기에서 남아선호사상이 시작되고 고부갈등이 사회적 전통이 된다. 여성에게는 거대한 벽 같은 가부장제지만 400년밖에 안 된 전통이다.
한국 사회에서 결혼은 특히 중요하다. 가족을 단위로 하고 가족을 중심으로 꾸려온 사회이니 그렇다. 결혼이라는 걸 표현할 때도 시집, 장가 이런 식으로 집과 가족을 붙여 표현하지 않는가. 그렇게 결혼은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그 사람을 판별하는 강력한 기준이 된다. 기혼, 미혼으로 구분해 부르는 것도 결혼했다, 아직 안 했다가 아니라 엄밀히 따지면 ‘해야 할 결혼을 한 사람’ ‘해야 할 결혼을 아직 못한 사람’이라는 규범의 뜻을 담고 있기도 한 것이다.
가족의 재구성
텔레비전을 통해 즐겨 보던 만화를 떠올려 보자. 1960~1970년대 만화 주인공은 가족이 온전치 못하다. 그러나 반드시 가족이 중요한 만화의 구성 요소로 들어가 있다. 캔디, 그레이트 마징가(철이는 고아), 플란다스의 개(네로는 할아버지랑 산다), 은하철도 999(주인공 철이가 엄마를 찾아 우주를 헤맨다), 엄마 찾아 삼만 리(주인공 마르코의 엄마 찾기), 요괴인간(요괴가 주인공이지만 남과 여, 꼬마가 등장하는 가족 구성), 타이거마스크(고아원 아이들을 돕는 레슬러)...주로 일본 만화들이었지만 한국과 일본이 근대화 과정에서 공통의 경험이 많아 모두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1980~90년대에도 가족이 등장하는데 전쟁의 상처와 빈곤을 극복해낸 안정된 가족이 등장한다. 달려라 하니, 영심이, 피구왕 통키, 아기공룡둘리, 요술공주 밍키, 개구리 왕눈이... 상당히 건강해진 가족 구성이다. 20세기 말에 접어들어 만화영화는 다시 달라진다. 텔레토비, 뽀로로, 뿡뿡이, 기관차 토머스...이들 만화영화에는 부모형제라는 가족 개념이 등장하지 않는다. 친구와 동료가 등장할 뿐이다.
버려진 아이를 선진 외국으로 보낸다는 인도적 차원 말고 다른 측면에서 비판적 시각으로 따지면 해외입양은 국가가 기획한 사회적 실종이다. 우리가 낳은 아기들을 우리가 키우지 못하고 해외에 수출하듯이 내보내는 것이 OECD 선도국가, G20 의장국, 녹색성장 선도국가라고 자랑할 수 있을까?
저출산.고령화 사회의 본질은 아이를 낳지 않아서가 아니라 키울 사람들은 낳지 않고, 키울 수 없고 책임 못 질 사람들이 계속 낳는 게 또 다른 문제일 수 있다. 입양아 생모의 90%는 미혼모인 것이 이를 반증한다. 미혼모 문제의 해결은 교육, 청년고용, 부의 양극화 해소, 보편복지의 확대와 맞물려 있다. 결국 우리나라는 출산율이 최저가 아니라 자신들의 아이를 책임지는 사회의 육아책임비율이 최저인 것이다.
<빛과 소금이 되랬더니 소금 쳐야 할 판>
교회 세습을 생각해보자. 교회를 아들에게 물려주는 세습 풍조가 어디서 왔을까? 재벌들이 편법으로 재산을 상속하는 과정 그대로다. 우리가 흔히 봐 온 재벌들이 편법 상속 행태로 자식을 고속으로 승진시켜 사장으로 만드는 방법, 돈을 빼내 문화예술 공익재단을 만들어 가족들을 앉히는 방법, 계열사를 떼어주거나 협력기업을 만들어주고 특혜수의계약 등으로 키우는 방법 등을 떠올릴 수 있다.
교회에 깊게 뿌리 내린 ‘천민자본주의’
교회도 마찬가지다. 담임 목사가 카리스마를 발휘해 비판 여론을 무시하고 교회를 직접 물려주기도 하고, 물려주기 곤란하면 재정을 지원해 새로 만들어주기도 하고, 복지재단을 만들어 가족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고, 일간 신문사를 만들어 교회가 지원해 키운 뒤 회장·사장 자리를 물려주는 방법 등 대기업의 행태를 그대로 추종하고 있다.
담임 목사만 우대해 원로 목사제를 두고 은퇴 후에 퇴직금, 승용차, 주택까지 지원하지만 전도사는 어느 때고 고용과 해고가 가능한 비정규 계약직으로 불안한 신분에 묶어두고 있다. 담임 목사에게 쓰이는 일부를 떼어 부교역자들의 안정된 자립을 넉넉히 지원할 수도 있건만 저임금 보조 역할로 떠밀어 놓는 것도 자본주의 속에서의 고용차별 체제와 흡사하다.
대물림되는 가난과 질병, 그리고 죽음
경제개발연구원에서 한국 노인의 사중고, 원인과 대책이라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4중고는 병고, 빈고, 고독고, 무위고다. 이 사중고는 각각의 고통이 아니라 이어져 있다. 가난하니 사는 게 힘들고, 사는 게 힘드니 건강이 나빠지며 병에 걸리고, 대물림된 가난 때문에 자식의 보살핌을 끝까지 받지 못해 고독사로 생을 끝내는 것이다.
우리 사회 계층에 따른 건강 불평등은 어느 수준일까? 국제구호개발기구 월드비전의 최근 발표를 보면 전 세계 176개국의 ‘건강불평등 격차’에서 우리나라는 33위 차지. 일본은 17위. 유럽 복지국가들의 성적이 역시 좋다.
‘부유하면 수명이 길고 가난하면 짧다’로만 볼 것이 아니라 불평등 역시 수명이 짧아지는 원인이 된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불평등 1위인 포르투갈 사람들이 수명이 짧은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불평등은 비만과 정신질환을 높인다. 마약도 불평등한 나라가 많다. 호주에 마약이 많고 일본.스웨덴.핀란드는 역시 적다. 돈과 재산을 남들에게 과시하고 그것에 가치를 두는 사회에서 개인은 더 우울하고 불안하고 인격 장애를 겪는다. 미국 비만율은 30%, 일본은 2.4%다.
리처드 윌킨슨은 평등이 답이다라는 저서에서 세계 각국의 사례에 대한 연구 결과를 내놓는다. 결론은 불평등이 커질수록 경쟁이 커지고 불평등은 사회정책에서 더 확대되는데 사회적 약자에 대한 예산을 줄이면 사회적 약자는 자존심이 손상되고 자신보다 더 낮은 계층을 차별할 위험이 커지며 사회가 위험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다.
공정한 경쟁, 기회의 균등, 각종 차별의 감소,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할 수 있는 소통 채널의 확보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국가와 사회가 맡아 처리할 시급한 과제다. 가난한 이의 질병, 건강의 불평등은 우리 사회에서 상식의 문제로 볼 게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양식의 문제다.
세월호 사고로 2014년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은 장애인 인권을 위한 큰소리 한 번 외치지 못한 채 지나갔다. 시설에 가두고 줄로 묶고 그래도 밖으로 나와 ‘여기 사람이 있다’고 외치는 장애인이 있다면 그들을 맞이하는 건 경찰이 쏜 최루탄과 폭언이다. 차가운 대한민국이다.
<장애등급은 운명의 등급이 아니다>
볼라드bollard는 자동차가 인도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차도나 인도 경계면에 세워 둔 구조물을 가리킨다. 우리말로 바꾸자면 보호기둥이다. 볼라드의 기원은 배를 묶어 두기 위해 부두에 설치한 기둥이다. 볼라드의 간격은 휠체어가 다닐 수 있도록 1미터 50센티미터 이상 너비를 둬야 하고, 볼라드 전방 30센티미터에는 시각장애인이 알아차릴 수 있도록 점자형 블록을 설치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만나는 볼라드들은 돌이나 금속으로 만든 것이 많고 볼라드 앞에 점자형 블록을 둬 시각장애인을 보호하는 건 보기 드물 정도다. 모두 위법한 볼라드들이다.
장애인 차별의 문제.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최단 거리로 이동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장애인이 멀리 돌아가거나 다른 출입구를 찾느라 헤매게 하는 것은 불평등의 조장이다. 다음은 장애인의 불편을 없애기 위해 도로 턱을 없애고 계단을 경사로로 바꾸는 마당에 진로를 막고 시각장애인의 사고위험을 높이는 것 역시 불평등의 조장이고 시대적 역행이다.
장애 이웃들이 가야할 곳에 가지 못하도록, 누려야 할 자유와 권리에 접근 못하도록 막아선 볼라드들은 사회 곳곳에 무수히 꽂혀 있다. 그리고 이런 볼라드에 관심 두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도 망가진 볼라드로 굳어버릴지 모른다.
<브레이크를 밟을 때가 됐다>
환경부가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 5차 보고서의 내용을 공개했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는 1988년 유엔 세계기상기구와 유엔 환경계획이 지구의 기후변화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각국의 기상학자, 해양학자, 빙하 전문가, 경제학자 등 3천여 명의 전문가로 구성한 협의체다.
기후변화가 아니라 기후붕괴 수준
IPCC는 7년마다 보고서를 제출하는데 2014년 보고서는 2007년 4차 보고서보다 그 내용과 양에 있어 큰 차이를 보인다. 간단히 표현하자면 이번 보고서는 요약본에만 ‘위험’이란 단어가 230번 들어갔을 정도로 상황이 나빠졌다. 7년 전 발표된 보고서 요약본에는 ‘위험’이란 단어는 40번이었다.
기후변화로 인해 가뭄이 심해지고, 폭우가 쏟아지고, 뜨거운 열파와 산불이 강해지고, 빙하와 빙상이 줄면서 영구동토층이 녹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후변화가 아니라 기후붕괴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을 정도다.
가장 주목할 대목은 ‘바닷물이 육지로 올라오고 있는데 점점 빨라진다’는 것과 ‘지구의 평균기온도 계속 상승하고 있다’는 것. 이대로 계속 올라 평균기온이 2도만 높아져도 그로 인한 피해는 1천500조원이 될 거라는 추산이다.
문제는 미국의 보수정치와 대기업의 로비다. 2008년 4월 지구의 날 연설에서 부시는 ‘지금 온실가스를 당장 줄이려 하지 말고 2025년부터 온실가스 증가율을 줄여 나가자’고 천연덕스럽게 주장했다. 다수 언론과 여론은 ‘지구가 해물찜이 된 다음 온실가스를 줄이자는 거냐’라며 맹공을 퍼부었다.
지구온난화 대책을 늦추며 흔히 내세우는 명분은 당장의 경제성장과 일자리의 감소다. 인류의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해서는 지금도 늦었다. 본격적인 실천이 이뤄지고 초기의 결과가 나와봐야 식량위기, 에너지위기, 경제위기, 기후위기를 균형을 맞추며 동시에 해결하는 새로운 길도 모색할 수 있다. 브레이크는 앗 하는 순간에 밟는 것이지 두루두루 따져보고 밟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자살과 폭력, 문제는 해결하려는 의지>
자살은 개인의 정신적 문제이고 폭력은 개인의 윤리적 결함 때문이다.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 우리 모두는 그것만은 아니라고 여길 것이다. 비슷한 형태의 사건이 반복되며 전염병처럼 번진다면 그것은 사회구조적 원인이 있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감기야 언제고 존재하지만 유행성 독감이 번지는 것은 다른 문제인 것과 같다.
일본에서는 ‘에타’와 ‘히닌’이라는 신분이 있었다 한다. ‘에타’는 더럽다는 뜻이고 ‘히닌’은 사람도 아니라는 뜻이다. 이것은 농민사회에서 번졌던 풍습이다. 농민보다 아래인 천민집단이 에타와 히닌이 된다. 무사계급에게 착취와 핍박을 받던 농민들이 자기들보다 더 아래 계급인 에타와 히닌이란 천민계급을 두고 그들을 괴롭히면서 대리만족했던 것이다.
자살 중에는 죄의식으로 자기가 자기를 꾸짖고 수치심을 못 이겨 저지르는 자살이 있다. 수치심을 남에게 떠넘기고 싶지만 자신의 죄의식은 그런 공격을 강하게 차단하고 끝내 자신에게 터뜨리는 것이다. 더 헝클어지면 남을 죽이고 자신도 목숨을 끊는 경우도 발생한다.
원인과 이유가 파악이 되는데 해결이 진척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회구조적으로 너무 복잡하게 얽혀 풀기가 어려운 경우도 있다. 한편으론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폭력을 발생시키는 제도와 문화를 바꿔야겠다는 정치적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람들을 강한 수치심과 모욕감에 노출시키는 제도와 정책들은 열패감과 열등감을 조장하며 타인을 무시하고 경멸하도록 부추긴다. 어떤 제도가 필요하고 어떤 제도가 고쳐져야 하는지는 누구나 생각해 보면 알 일이다. 문제는 그래서 정치적 의지인 것이다.
<식탁 위의 정치>
우리 음식조리문화는 푹 삶거나, 뜨거운 열로 고거나, 증기로 찐다. 그리고 효모로 띄우는 방식이 많다. 조리방식상 느림의 습식문화다. 반면에 서구식 조리방법은 센 불로 빠르게 구워서 내놓거나 튀기거나 연기로 씌우거나 태우는 방식이다. 속도를 빨리하는 건식문화다.
세상의 과학기술들은 돈벌이 또는 힘을 목표로 개발된다. 그러다 부작용이 커지면 그때서야 인간을 생각한다. 인간을 위해 개발된 기술도 돈벌이와 힘을 위해 쓰이면서 인간을 다시 위협한다. 전쟁은 중요한 원인 중 하나다. 전쟁으로, 전쟁 후의 가난으로 아빠 엄마 모두 집을 비워야 하니 아이들을 위해 빠르고 쉽게 만들 수 있는 음식이 필요해졌다.
냉동햄버거, 냉동감자칩이 나오고 적군 비행기를 탐지하는 레이더라는 전쟁기술을 빌려다 전자레인지를 개발했다. 그 외에도 항공모함에서 전투기를 덮어씌워 소금기와 습기로부터 보호하던 비닐물질은 식품포장용 랩이 됐고, 원자폭탄을 만들던 원자로를 포장하던 테프론은 프라이팬 코팅물질이 되기도 했다.
위험한 물질에 의존하는 우리의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하는 것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익과 편리만 따진다. 이익과 편리를 위해 사람 몸에 화학물질을 섞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물질로 가득한 공장에서 일하다 노동자는 병을 얻는다. 이런 비극에서 벗어나는 길은 ‘식탁이 정치외교이며 윤리의 문제’라는 인식이 우리 사회에 보편적으로 통용될 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젊은 노인, 끈질긴 청춘이 세상을 바꾼다>
미국의 포춘지가 미국의 권력자 서열을 꼽았다. 거기서 2위는 전미퇴직자협회의 사무총장이다. 직장을 그만둔 나이 50세 이상의 고령자가 가입하는 미국퇴직자협회는 회원 수가 거의 4천만 명에 이른다. 미국 최대의 이익단체다. 별명이 ‘미국의 회색거인’이다. 미국의 정치인들 누구도 퇴직자협회를 무시하지 못한다. 퇴직자협회는 막대한 재정을 바탕으로 로비스트를 고용해 미국의 정책을 움직인다. 절대 노인에게 불리한 법이나 정책이 만들어지지 못한다.
미국은 공식적인 정년퇴직이 없다. 그러다보니 직장인 평균퇴직연령이 65.8세다. 유럽은 61.8세이고 우리나라는 53세다. 간호사라는 직업을 예로 들면 평균 연령은 45~50세라고 알려져 있다. 60세 넘어 간호학을 공부해 취업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 병원도 싫어하지 않는다. 숙련된 간호사들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누가 정년을 없애버렸을까? 바로 미국퇴직자협회다. 퇴직자협회는 1978년 <고용에 있어서 연령차별금지법>을 뜯어고쳐 ‘살아있는 한 정년은 없다’로 바꿔 버렸다.
왜 미국 정치인들은 불타는 청춘들에게 집중하지 않고 냉정한 노인들에게 집중했을까? 다시 강조하지만 그것은 바로 투표 때문이다. 젊은이들은 거리로 뛰쳐 나가 외친 결과가 바로 나오지 않으면 포기하고 중단하는 경향이 강하다. 불신과 자괴감, 냉소주의가 빨리 번진다. 그러나 노인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끈질기게 관심을 갖고 투표를 한다. 그렇게 ‘은발의 거인’이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정치적 시각을 남녀노소의 구분에서 넓히기를 권하고 싶다. 반값 등록금은 20대를 위한 정책이고 기초연금은 노인우대정책이라고 여기는 건 적확하지 않다. 등록금이 내리면 대학생 자녈르 둔 50대 60대에게도 짐을 더는 좋은 소식이다. 기초연금제도는 지금의 40대 50대에게는 곧 만나게 될 제도다. 노년층 일자리가 늘어나도 노인을 필요로 하는 직종과 청년을 원하는 직종은 크게 겹치지 않기에 청년 일자리를 빼앗는다고만 울상 지을 일이 아니다.
남은 문제는 뭘까? 약속하고도 지키지 않고,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유권자로부터 응징되지 않는다는 불편한 사실이다.
<세습 공화국, 돈과 지배 권력의 사회학>
빈부격차와 불평등이야 어느 나라나 있다. 미국, 스웨덴만 해도 계층 간 소유자산의 쏠림과 불균형이 우리보다 심하다. 그런데 왜 우리는 더 답답하고 속이 부글거릴까? 그것은 땀 흘리지 않고 부자가 된 비율이 상대적으로 훨씬 높아서다.
미국의 400대 부호 중 70%는 스스로 돈을 번 자수성가형 부자다. 우리는 개인재산 1조 원을 넘는 부자 25명 중 19명이 재벌가 후손들이다. 세습 부자인 것이다.
워렌 버핏의 아들 피터 버핏 “아버지는 아무 대가 없이 부를 물려주는 건 젊은이의 열망과 열정을 고갈시키며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부적절한 선물이라고 여겼다.”
한국개발연구원의 연구 결과를 보면, 부모의 월 소득이 100만 원 많으면 대학수학능력시험 영어 점수 백분위가 2.9단계 올라간다. 자녀의 토익 점수가 16점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재산의 세습은 신분의 세습이고 우리 사회 모든 기득권세력의 특권세습체제를 구축하는 기반인 것이다.
통계청 조사에서 ‘일생 동안 노력하면 본인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아질 가능성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국민 10명 중 6명이 “가능성이 낮다”고 답했다. “가능성이 높다”고 답한 사람은 28.8%였다. 자녀 세대에 대해서도 가능성이 낮다는 답변이 42.9%, 가능성이 높다는 답변은 41.7%였다.
노력해봤자 소용없고 내 자식까지도 소용없다고 느끼는 사람이 점점 늘어 70%, 80%가 된다면 우리 사회는 어떤 모습이 될까? 불평등이 깊고 양극화된 사회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 없이 사는 사람이 늘어난다면 경멸과 분노가 커질 것은 분명하다.
인간이 드러내는 욕망 중에 정복이 있고 독점이 있다. 그러나 인간은 유한한 존재다. 주체하기 어려울 만큼 가지면 멈춰야 하고, 늙으면 일을 접고 물러나 쉬어야 한다. 권력과 재산이 자기 대에서 끝난다면 그리할 가능성은 높다. 그러나 권력과 재산을 자손 대대로 물려줄 것으로 여긴다면 욕망은 쉬거나 멈춰야 할 한계선이 사라진다. 사회가 세습의 욕망을 누르고 접게 만들어야 욕망도 멈추고 사회가 평등한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 또한 그 욕망의 뿌리를 뽑거나 잘라줘야 할 책임은 우선 정부에 있다. 법과 제도로 세습을 강하게 통제해야 사회에서 얻은 부가 사회로 환원될 것이다.
끝없는 욕심과 권력의 쇠사슬
명예란 강물과 같다 한다. 가볍고 속이 빈 인간은 위로 띄워 남들 눈에 띄게 하고 무겁고 충실한 인간은 바닥에 가라앉혀 놓는다는 옛 교훈이다. 결국 쉽게 딴 명예박사 학위를 이름 위에 띄우는 행위부터가 경박함의 표식이 되어 버릴 수 있는 것이다. 명예란 법과 절차의 상위에 있다. 법대로 절차대로 명예박사 학위가 주어지고 명성이 주어진다 해도 명예롭지 못하면 거절하는 것이 명예를 아는 이의 행동일 것이다.
<구부러진 한국경제>
1원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1원이면 새우깡이 0.08그램, 우유로는 0.4밀리리터, 택시로는 두 바퀴도 채 못 간다. 그러나 1원이라 새겨진 뒷면을 보면 그곳에는 장엄하게도 무궁화가 새겨져 있다.
현대건설은 6.25전쟁이 휴전에 접어들고 국토 재건이 시작되자 1958년 한강인도교 복구공사를 당시 1원에 낙찰 받아 이름을 알렸다. 비록 한강인도교는 1원이었지만 현대건설은 이후 정부발주공사를 거의 독점하며 재벌그룹으로의 성장기반을 다졌다.
극동건설은 삼성동 54층 무역센터 건물을 1원에 수주했다. 항우연 위성카메라 납품 입찰엔 삼성항공이 1원을 적어내 사업을 따냈다.
루마니아 독재자 차우셰스쿠는 중공업으로 세계 강국을 만들겠다며 과감히 조선업에 뛰어든 뒤 세계 최대 크기의 골리앗 크레인을 설치. 그러나 배 만들어달라는 주문이 없어 세계 최대의 골리앗 크레인은 단돈 1달러에 팔렸다. 낙찰받은 기업은 한국 울산에 자리한 현대중공업.
1원 낙찰의 선두주자는 건설업계다. 정부 조달청 입찰에서 1원으로 성의를 보이면 다음번 큰 공사 입찰에서 배려를 해줄 것을 기대하고 1원을 써냈다. 그러다 정부가 덤핑 입찰을 규제하고 나서면서 불이익을 주자 1원 낙찰은 건설업계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나서 1원 착찰은 전자 등 새로운 분야로 옮겨갔다.
전국민 가난뱅이 만드는 교육
캠퍼스 푸어. 학자금 대출을 못 갚아 법적 조치를 당한 사람이 2011년 1천 12명 69억 원에서 2012년 1천 807명 111억 원으로 늘었다. 우리 젊은이들은 캠퍼스 푸어에 스펙 쌓느라고 돈을 쏟아 부어야 하는 스펙 푸어까지 이중고를 짊어지고 있다. 미국과 달리 부모가 결혼까지 책임지는 풍토에서 그 부모들도 캠퍼스 푸어, 에듀 푸어다. 사람을 키우는 교육체제가 가난뱅이를 만들어내는 구조인데 그 구조는 놔둔 채 녹색이 어떻고 창조가 어떻고 하니 답답한 일이다.
대학 개혁이 시급하다. 지방 국공립대 지원을 강화해 수준과 규모를 늘려야 한다. 정원이 많아 북적대더라도 빚지지 않고 대학을 졸업하고 싶은 사람은 국공립대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사립은 비싼 등록금을 허가해 수요자가 선택할 수 있게 하고 비리투성이에 부실한 사학은 더 과감히 정리해야 한다. 규제완화는 혁신과 함께 하는 것이어야 한다. 개혁과 쇄신 없이 규제완화 일변도라면 결국 기득권과 담합의 이익을 보장해주기 십상이다.
제주도, 중국 영토 되나
제주도는 중국자본의 고용유발 등의 효과는 크지 않고 이익이 지역사회로 돌아가는 몫도 너무 적다고 지적된다. 리조트에 제주사람들이 일자리를 잡아도 대부분 일용직 노동자이고 자본의 이익은 중국으로 날아가는 게 현실이다.
어떤 경우이든 땅이 중국자본에 계속 팔려나가면 제주도민들은 제주도를 떠나야 한다. 제주도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은 줄어들고 실질적인 지배권은 중국인들에게로 점점 기울 것이다.
테마주와 보물선, 웃기는 소리하네
테마주는 시대가 어수선한 격변기, 시장의 침체로 탈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 특히 기승을 부린다. 해당 기업의 실적이나 관련 산업의 비전을 엄밀히 따지며 투자해도 어려운데 소문과 풍문, 바람에 휩쓸려 테마주에 투자한다는 건 위험천만하다. 더구나 정치인의 이름을 걸고 무조건으로 등장하는 테마주의 종말은 그 최후가 불 보듯 뻔하다.
의료민영화는 부자가 부자 되게 하는 지름길
의료민영화가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 명확한 개념규정은 없다. 다만 공공의 성경이 강한 의료분야에서 정부의 책임과 역할을 줄이고 대신 시장에 그것을 맡기는 것을 가리킨다. 이를 위해 의료시장에서 벌어지는 투자와 영리추구를 법과 제도로 보장해나가는 것까지 포함해 의료 민영화라 부른다. 결국 의료민영화에는 의료상업화, 의료사유화, 의료시장화 등의 여러 과정이 포함돼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병원을 경영하는 법인은 영리법인이 아닌 비영리병원법인이다. 삼성의료원과 현대아산병원은 삼성이나 현대 소유가 아니다. 사회공헌을 위해 설립된 공익재단이고 비영리법인이니 돈을 벌어도 주주들에게 배당하지 않는 구조다. 물론 비영리법인이 세운 병원도 수익을 올리려 애를 쓴다. 하지만 비영리법인의 병원이니 환자진료로 번 돈은 병원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다. 의료업을 위해 다시 투자돼야 한다. 지금의 병원들은 비영리법인의 틀 속에 있는 영리병원인 셈이다.
병원이 영리를 목적으로 뛰면 비영리병원보다 비용 효율성이 높다고 하지만 미국의 US News&World Report가 매년 발표하는 좋은 병원 랭킹의 1~20위 목록에는 영리병원이 없다.
영리병원을 이용하는 미국은 의료비 지출로 oecd국가 중 1위이고 gdp의 17%에 달한다. 그러나 영아사망률은 천 명당 6.5명이나 된다. 의료비가 gdp 대비 미국의 절반도 안 되는 우리나라의 2배 수준이다.
미국의 의료비와 의료현실을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은 하나뿐이다. 바로 ‘불평등’이다.
연봉의 사회학
다음은 우리 직장인들의 연봉 수준이다. 고액 연봉자는 계속 늘어 2012년 기준으로 1억 원 이상 억대 연봉자가 41만 명을 기록했다. 회사원 1천 명 가운데 26명이 억대 연봉을 받고 있는 셈이다. 10억 원 이상도 1천 명이 넘는 걸로 나타났다.
공무원만 따지면 월급에 초과근무수당을 합쳐 5천 220만 원 선. 반면 전체 근로자의 평균 연봉은 2천 960만 원이었다. 그리고 4명 가운데 1명은 1천만 원 벌이도 못했다.
연봉은 직장인에 자존심이다. 그런데 오르는 건 더디고 후배의 연봉은 쫓아오는 건 왜 그럴까? 기업은 불황이나 경영상의 이유로 노동자의 임금을 억제하고 줄인다. 다시 회복할 때나 공채 시에는 우수한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연봉을 높여 좋은 인재를 끌어들이려 한다. 이 과정에서 역전도 발생하는 것이다.
최근 직장인의 급여는 즉시 지급의 방향으로만 치닫고 있다. 경영 성과를 위해 일한 만큼 그때그때 지급하는 걸로 끝내고 싶어 한다. 그래서 호봉제는 연봉제로 바뀌고, 정년보장은 계약제로 바뀌고, 정규직은 비정규직으로 내려앉는다. 그 끝에는 아르바이트 인생이 기다린다.
그러나 일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노동은 축적이다. 일을 해가면서 숙련과 경륜이 더해진다. 가족의 삶이 노동 속에 점점 무겁게 담겨진다. 그래서 노동의 가치는 결국 국민의 가치가 된다.
더디 가는 것처럼 보여도 노동의 가치를 존중하고 그것에 근거해 우리 사회의 발전을 이뤄가는 것이 정도임은 분명하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경영자뿐 아니라 노동하고 연봉을 받는 사람들의 의식이 먼저 굳건해야 한다. 모두의 노동을 동일한 가치로 봐야 하고 직업의 귀천이 없음을 무겁게 인식해야 한다. 노동의 가치는 곧 사람의 가치인 것이다.
‘복권 당첨’ 왕의 뜻인가, 신의 뜻인가
세계에서 가장 쓸데없는 돈 낭비가 뭘까. 미국 포춘지는 1위에 현금자동인출기 수수료, 3등에 고급 커피 마신다고 커피숍 가는 것을 꼽았다. 그 다음은 담배, 홈쇼핑 충동구매 등의 순. 자, 그럼 2등은 뭘까? 바로 복권을 사서 긁는 것이다. 미국 내 복권판매액이 700억 달러다. 재미삼아 사지만 나중에 복권에 쏟은 돈을 계산해보면 꽤 큰돈임을 알 거라는 충고다. 2002년 12월 2일 로또복권이 발행된 이후 국민 1인당 평균 73만 원어치를 샀다고 한다.
동양에서는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위해 복권을 팔았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3세기의 일이다. 로마 때도 경품 뽑기가 있었는데 복권의 원시적 모습으로 보기도 한다. 번호가 적힌 현대식 복권은 네덜란드, 이탈리아를 거쳐 영국, 미국으로 자리 잡았다.
영국은 엘리자베스 여왕 이전까진 복권이 금기였다. 복권의 기본 개념은 제비를 뽑아서 결정하자는 것이고, 이것은 곧 신의 뜻에 맡긴다는 것인데 신의 뜻을 돈놀이에 쓸 수 없다는 종교적 해석이 깔려 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여왕은 국고확충을 위해 1569년 복권을 허용했다. 자본주의를 번성시키고 새로운 국민국가를 형성하려니 돈이 필요했던 것이다.
19세기 초 미국과 영국에서 비리와 사기범죄가 횡행해자 복권 발행이 중단됐었다. 그러다가 미국은 1960년, 영국은 1990년대 발행을 재개했다.
일상생활에 복권이 가장 깊숙이 뿌리 내린 나라는 일본이다. 우리나라는 1947년 14회 런던올림픽 참가경비를 위해 복권을 처음으로 발행했다. 1969년 정부의 주택복권이 시작됐고 그 다음이 올림픽복권이다.
복권은 국가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쓸 재정을 마련하고자 세금을 대신해 마련한 재정확충방안이다. 그러니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 수익이 많이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그 돈 자체가 가난한 사람들의 호주머니에서 더 쥐어짜 나오는 돈이라면 그 의미는 무엇일까? 소득이 올바로 재분배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재분배되는 소득역진성을 갖고 있는 셈이다.
정부의 복권수익률은 40퍼센트가 넘는다. 저소득층을 위해 쓰기도 하고 공공사업도 하지만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몫이 저소득층을 위해 쓰여야 한다.
미국 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은 “복권은 고통 없는 세금이고 아주 이상적인 재정 수단”이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사회에 가난한 사람이 넘치면 사회에서 어느 정도 이상 혜택을 입은 부유층이 세금으로 그 불균형을 떠안아야 하나 이것을 복권으로 바꿔 저소득층·중산층에게 대박을 사라며 슬그머니 떠맡기는 건 조세정의에도 어긋나는 행위다.
사회가 불평등하고 정의롭지 못하면 국민은 정치적으로 각성하고 힘을 모아 정치와 정책을 바꿔야 한다. 사회정의를 향한 국민의 투쟁이 필요하다면 들고 일어서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선거가 치러지면 나서서 투표를 하고 정치인들을 물갈이해야 한다.
국민의 정치의식은 ‘한방에 인생역전’이라는 복권의 마사지에 희석되고 만다. 땀 흘리고 물건을 만들고 먹을거리를 길러내고 정당한 보수를 받아 경제에 합류하는 것이 생활의 가치다. 그러나 복권열풍은 일상생활과 생업의 숭고한 가치를 일확천금의 환상으로 흔들어버린다.
복권을 사기 전에 분명히 되새겨보자. 사회의 정당한 부의 재분배가 중요하고, 양극화가 해소되는 쪽으로 정책이 움직여야 하고, 복지제도가 더 많이 마련돼 빈부격차를 줄여야 한다. 그리고 복권수익은 지금보다 몇 배 더 저소득층을 위해 쓰여야 한다. 대박 행복을 기대하며 긁는 복권이 우리의 정치의식을 무디게 할 수도 있음을 놓치지 말자.
초콜릿, 제2의 피의 다이아몬드
초콜릿 중독을 초코홀리즘이라고 부른다. 국가별로는 미국이 세계 초콜릿 소비량의 3분의 1을 먹어치워 단연 1위, 그 다음이 유럽이다. 그러나 연간 1인당 소비량은 아일랜드, 영국, 오스트리아, 스위스, 벨기에 순이다. 미국은 1인당 소비량에서 벨기에의 절반쯤. 우리나라는 미국의 4분의 1, 스위스의 10분의 1 수준이다.
최근 텔레비전에서 초콜릿 광고가 크게 늘어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유럽 경제위기와 관련이 있다. 유럽 경제위기로 인해 세계 초콜릿산업이 불황에 시달리고 있다. 유럽코코아협회는 코코아에 대한 수요가 전년 대비 20퍼센트 가까이 급감했다고 밝히고 있다. 특히 포르투갈과 이탈리아 초콜릿 시장이 위기상황이라 전해지고 있다. 미주, 아시아, 동부유럽 시장은 현상유지를 하고 있다.
초콜릿은 ‘제2의 피의 다이아몬드’라고도 불린다. 카카오 농장에서의 어린이 노동, 노동착취와 인신매매, 부당한 처우 등이 개선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소비자로서 힘을 보태려면 초콜릿 구매에 신중한 선택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공정무역 초콜릿을 사먹는 것으로 할 일을 했다고 여기는 것도 적절치는 않다. 시장의 공정함과 환경, 카카오 재배농민의 권리, 생산국의 민주주의까지 살펴보고 자기가 할 수 있는 행동을 하는 것이 지구촌 시민의 책무 아닐까.
<일본의 극우와 특공아줌마 콤플렉스>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인 1923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학생들에게 병식교련을 실시했다. 이 병식교련은 박정희 대통령 집권 때인 1969년 고교 필수과목 ‘교련’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대학은 교련과 병영집체훈련이 필수가 됐다.
정규 교과과목이 아닌 학생병영캠프는 미국에서 시작됐다. 처음에는 효과가 있다고 붐이 일었으나 막대한 투자에도 병영캠프가 다른 교정 방식에 비해 재범을 줄이는 데 월등한 효과는 없는 것으로 평가를 받았다. 우리 사회를 봐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자기한계를 넘어서는 혹독한 군사훈련과 외부로부터 격리된 집단 수용생활이 인간을 절제와 협동심, 인내심, 자기성찰로 이끄는 효과가 뛰어나다면 남성 대부분이 군복무를 한 우리나라는 품격 있는 신사로 가득 찼어야 했다.
군사문화의 뿌리는 프로이센+사무라이
우리가 군사문화를 답습한 일본은 19세기 중반까지는 프랑스 스타일로 자리 잡아가다가 프로이센 스타일로 군 체계를 바꿨다. 프로이센 스타일은 군대의 정신전력과 일체감을 극도로 강화해 전투력을 뽑아내는 방식이다. 나치 역시 프로이센 방식의 군사문화를 도입한 뒤 군과 국민에게 전파해 파시즘을 구축했다.
일본은 프로이센 스타일의 정신무장을 강조하는 군사문화에 일본 전통의 사무라이 문화를 접목시키며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종교성까지 곁들인 독특한 군사문화를 선보였다. 상관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죠우칸메이레이, 일본 왕을 살아있는 신으로 간주해 천황이라 칭하고 ‘천황의 군대는 신의 군대이니 후퇴·항복·포로가 있을 수 없다’는 옥쇄항전, 반자이 돌격, 카미카제 자살공격 등 인간의 존엄이 함몰된 군사문화와 전투 방식이 생겨난 것이다.
‘하라면 해, 군대에서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현실적으로 부조리하고 적절치 않은 것을 무조건 해내라는 소위 군대식은 여기서 비롯되는 것이다.
살펴본 대로 우리 군은 건강하고 당당한 군사문화와 국군 이미지의 구축을 위해 국민과의 어우러짐도 강화하고 문민 통제의 시스템도 확실히 세워 나가야 한다. 이런 마당에 군 내부가 아닌 거리에서 군복 입은 사람들이 몰려다니는 것이나, 군복 입은 무리에겐 행정관청도 경찰도 통제를 못하고 적당히 넘어가는 특권적인 풍토는 군을 국민에게 다가가지 못하게 하는 요인 중 하나다.
우리 국군은 군과 군사문화가 시민 민주주의와의 대척점에 놓여있지 않고 국민을 존중하고 국민으로부터 존경받기에 마땅함을 증명해내야 한다. 왜 아직도 이 나라에 프로이센과 사무라이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는가 말이다.
야스쿠니 신사의 무게는 가볍지 않다
일본 야스쿠니신사에 위패가 놓인 전몰자들은 만주사변부터 태평양전쟁까지 이른바 15년 전쟁에서 숨진 사람들이다. 일본은 자기네 침략과 약탈, 패망을 얼버무리기 위해 15년 전쟁이라고 뭉뚱그려 부른다. 여기엔 총탄에 맞아 숨진 사람보다 병에 걸려 숨진 사람이 훨씬 많다. 얼어 죽고 굶어 죽고 폐병 걸려 죽고 후방에서 여자를 탐하다 성병에 걸려 죽은 사람까지 다 들어가 있다. 청일전쟁 때는 전체 사망자의 86퍼센트가 병사자였다. 군부의 탐욕과 광기에 의해 전장으로 내몰린 허망한 죽음들이 모여 있다.
카미카제 자살공격대로 나선 청년이 자신을 돌봐주던 나이든 여성에게 이렇게 인사를 건넸다. “아주머니 저 반드시 살아서 돌아오겠습니다.” 그러자 그 아주머니는 기겁을 한다. “안됩니다. 큰일 날 소리. 영혼이 반딧불이 되어 돌아와야 합니다”라고 타이른다.
천황을 대신해 죽으러가는 병사로서 확실하게 죽으라고 격려하는 이런 여성의 역할을 ‘특공아주머니’ ‘병사할머니’라 이름 지어 불렀다. 일본은 이런 아주머니 할머니들을 매스컴을 통해 적극 영웅시했고, 여성들은 병사들에게 목숨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장렬하게 전사하라며 등을 떠밀었다.
국가주의와 모성애의 결합이 극적으로 드러난 예는 일본의 어머니날이다. 1934년 일본 애국부인회는 3월 6일을 어머니날로 정했는데, 이날은 왕후가 아키히토 왕자를 출산한 날이다. 이런 걸 총후보국, 총후의 여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병사는 적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여성은 병사의 총 뒤에서 함께 싸운다는 뜻이다.
오늘날 일본이 자신들의 전쟁범죄에 대해 뉘우치지 못하고 망언과 망상이 이어지는 것에는 이런 이념적 토대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아베 총리가 총후보국의 어머니 밑에서 자라며 야스쿠니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그 주변 인사들 다수 역시 천황제 모성애 국가라는 허위의식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2014년 4월 우리나라를 방문한 오바마 대통령, 한미정상회담 기자회견 자리에서 일본이 저지른 위안부 만행을 ‘끔찍한 인권침해’라고 비난했다. 이제는 시간이 없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남은 시간이 없듯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우리 역사를 치유할 우리의 시간도 결코 넉넉지 않다.
신흥 사교집단 열전
백백교는 1900년 평안남도 영변에서 전정운이란 인물이 금강산에 들어가 3년 동안 도를 닦고 세웠다는 사교집단. 1904년 6월에 인류가 멸망하지만 백백교를 믿으면 동해바다에 새로 생길 신선의 땅으로 옮겨져 불로장생하게 된다면서 신도를 끌어모았다. 1904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고 신도들이 반발하자 반대신도들을 살해하고 강원도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신도 1만 명, 전정운이 거느린 여인만 60명, 교인들의 재산을 갈취해 방탕한 생활을 하다 병으로 숨졌다. 아들이 뒤를 이어 교주가 돼 부하들과 함께 신도들의 부인과 딸을 빼앗고 남자들을 죽인 뒤 도시로 진출해 교세를 넓혔다.
용화교 사건도 있다. 교주는 서백일. 교리를 빙자해 금품을 갈취하고, 여신도들을 간음해오다 1962년 발각돼 사회적으로 크게 물의를 빚은 집단. 전라북도 김제군 청도리가 근거지였다.
오대양 사건. 교주 박순자가 1984년에 공예품 제조업체인 오대양을 설립하고 종말론을 내세우며 사이비교주로 행세했다. 신도들과 자녀들을 집단시설에 수용하고, 신도들로부터 170억 원에 이르는 거액을 뜯어냈다.
이밖에도 다미선교회 시한부 종말론 사건, 영생교 사건, 아가동산 사건, 장막성전 사건, 천존회 사건, JMS사건 등 사교집단의 폐해는 조선시대로부터 21세기에 이르도록 끊이질 않는다.
신천지 예수교 증거 장막성전. 이미 20여 년 전 한국 교회가 이단으로 규정하고 경계령을 내린 집단이다. 이만희라는 인물이 장막성전, 통일교, 전도관 등 여러 사교집단을 전전하다 1984년에 독자적으로 세운 종교집단이다. 교회 속에 침투해 교회를 분열시킨 뒤 신도들을 빼내갔기 때문에 한국 교회가 조직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약한 사람들의 약한 곳을 파고들고 잘 짜인 매뉴얼을 준비해 집단적으로 작업을 벌이니 개개인이 당해내긴 쉬운 일이 아니다. 어느 집단이든 인간을 세뇌시키는 데는 3가지 방법을 섞어 쓴다. ‘반복, 지속, 속도’
처음에는 다정다감과 사랑으로 다가간다. 그러다가 친해지면 낯선 곳으로 데려간다. 낯선 환경에서 인간은 심리적으로 위축되며 데려온 사람을 의존하게 된다. 종교적 진실에 대한 다른 해석과 검증은 일체 끼어들지 못하고 하나의 해석만을 집중해 반복 청취하면 점점 현실감과 상식적 판단을 잃고 넘어간다.
그동안 믿어온 가치관이나 종교에 대해 잘못하고 있는 문제점이나 허점을 파고들며 의문을 갖게 한다. 기존의 종교의 약한 부분을 집중 공격하는데 먼저 진실만을 쭉 얘기해 나가다 중간중간 자기들이 의도하는 속임수와 거짓말을 끼워 넣는다.
만일 잘못되거나 부족한 점을 지적한 뒤 흔들리면 미리 정리해 준비한 내용을 꺼내 놓으면서 공감을 얻는다. 어쩌면 이렇게 잘 풀어줄까 신기하게 여기며 빠져들게 한다. 공개토론도 가끔 한다. 비판적 의견이 나오면 저 사람은 아직 진리를 이해 못해 저런다며 몰아가 점점 반대 의견을 눌러버린다. 그러면 결국 모두가 똑같은 의견만 말하게 되고 반대하는 데 대해 두려움을 가지면서 남보다 열광적으로 찬성하는 모습을 경쟁적으로 보인다. 북한의 주체사상 주입과 비슷하다.
사람들은 종교적 신심과 영성도 자본주의적으로 체득해가고 있다. 마치 쇼핑을 하듯 엔터키를 눌러 저장을 하듯 얻으려 한다. 종교적 구원을 얻는 데 선착순이 있고 6개월이면 해당 종교의 진리를 빠삭하게 꿸 수 있다는 광고에 현혹된다. 아니다. 종교적 영성은 온몸과 온 마음으로 오롯이 한길을 걸었을 때 득하는 것이다. 아니다. 그것도 아니다. 종교적 진리는 일생을 따르는 것이지 어느 순간 얻는 것이 아니다.
나름의 신념과 종교적 신앙의 차이는 얼마든지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기만과 사술은 차이가 아니라 범죄다. 아닌 건 아닌 것이다.
여성 참정권 쟁취 잔혹사
세계 정치사에서 전국의 모든 여성에게 선거권을 인정한 최초 국가는 뉴질랜드로 1893년, 오스트레일리아 1906년, 노르웨이 1913년 순이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여성의 사회참여가 대폭 늘어났고 권리도 커져가면서 유럽 국가들의 여성참정권이 급속히 확대됐다.
아시아로 보면 미얀마 1922년, 태국 1932년, 필리핀 1937년, 중국, 인도 1949년, 파키스탄 1956년.
신사의 나라 영국, 1883년과 1892년에 온전한 여성참정권을 위해 의회에 법안이 제출됐으나 남성 의원들에 의해 모두 부결됐다. 여성에겐 지방의회 투표권만 허용되고 있었다. 여성들은 전국여성사회정치연맹을 만들어 비폭력 시민불복종 운동을 펼쳤다. 정부는 주동자들을 감옥에 가뒀고, 갇힌 여성들은 단식투쟁으로 맞섰다.
호스를 목에 넣어 강제로 음식을 먹이는 방법이 영국 경찰에 의해 동원됐다. 사회문제화 되자 굶으면 풀어주되 경찰이 24시간 따라 붙어 감시하고 건강을 회복하면 다시 잡아넣는 ‘고양이와 쥐 법’이 이때 만들어졌다.
시위와 당국의 진압은 점점 폭력적으로 변했다. 궁전에 숨어들어 난간에 몸을 묶은 채 시위하는 여성도 생겨났다. 1913년 런던 근처 경마장에서 열리던 더비 경마대회에서 그 유명한 ‘에밀리 데이비슨 사건’이 발생했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여성참정권운동에 참가했던 에밀리 데이비슨이라는 여성이 경마 경주장에 뛰어들어 영국 국왕의 말에 부딪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다. 마지막으로 외친 말이 “어성에게 투표권을!”였다.
여성참정권은 여성이 투표소에 가 한 표 찍는 걸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걸 시작으로 사회의 모든 남녀차별에 대해 문제가 제기될 것이 뻔하다. 그러면 남녀차별을 도구로 이용해 사회 각 분야에서 기득권을 누리며 지배하던 남성의 권력구조가 시쳇말로 전방위적으로 도전받는다. 취업, 임금, 가사 등 남성이 꺼릴 것은 많고 많다. 버티던 남성사회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여성들이 남성 대신 ‘전시 노동’에 동원되자 그 보상으로 드디어 참정권을 내놓았다. 1928년의 일이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남자만.
프랑스 혁명이 내건 구호는 “모든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였다. 그러나 여성이나 흑인은 그 ‘인간’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앙투아네트는 그래서 정치적 처벌을 받는 국사범이 아니라 잡범으로 단두대에 올랐다. 그때 단두대에 오른 여성이 또 있다. 이름은 올랭프 드 구주, 그녀는 프랑스 혁명을 기뻐하며 옹호했으나 혁명이 내건 자유와 평등이 남성에게만 해당되자 ‘여성권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 일로 그녀는 ‘자신의 성별에 적합한 덕성을 잃어버린 사람’으로 단죄를 받았다. 그녀가 남긴 유명한 대사, “여성이 사형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면 의정 연설 연단 위에 오를 권리도 당연히 있다.”
사우디에선 “여성의 월경이 정치적 판단을 흐릴 수 있다”가 정치참여를 배척해 온 명분이었다. 1999년 요한 바오로 2세는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성을 가진 사람은 다른 성을 가진 사람보다 더 평등하다”라고 선언해 여성들에게 실망을 안겼다.
이런 불평등한 구조와 억압을 깨뜨리는 방법 중 가장 확실하고 필요한 것이 여성의 삶 속으로 정치를 가져오고 정치 속으로 여성이 들어가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정치는 정치를 바꾸는 게 아니라 삶을 바꾸는 것이다. 엄연히 헌법에 보장돼 있는 권리다. 그리고 그 권리는 그저 얻어진 것이 아니라 엄청난 희생을 치르며 선배 여성들이 쟁취해낸 것이다. 정치학자 울린이 설파한 대로 “정치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병역기피의 역사
중국은 거대한 자본과 느긋함을 앞세워 지배전략을 펴나가지만 일본은 침략적인 야욕을 탐미적인 화려함과 작위적인 소박함 속에 감춘다. 국화꽃 속에 칼을 숨기듯 아주 미학적이다. 일본의 국기, 국가에서 드러나듯 섬세하고 곱고 때로는 센티멘털하고 처연한 느낌으로 다가오지만 늘 위험하다. 일본인들이 허리를 90도로 꺾어 절하기를 반복하며 속마음을 감추듯 은밀하게 위험하게 번진다.
독일이나 이탈리아도 20세기 들어 군국주의의 길을 일본과 함께 걸었다. 하지만 내용에서 다르다. 독·이는 국민대중을 선동해 국민지지 기반을 확보한 뒤 군국주의로 이끌어 갔다. 그러나 일본은 철저히 소수의 권력집단이 과도적인 지배체제를 구축하고 왕을 상징물로 내세운 뒤 국가체제를 강압적으로 재구성했다.
일본의 지배체제 구축은 오히려 김일성의 주체사상, 세습체제와 비슷하다. 일본의 사죄와 반성이 쉽게 이뤄지지 않는 것 역시 군국주의의 핵심인 왕과 소수 군부·관료 지배자들이 살아남아 세습을 거듭하기 때문이다. 신도·신사·왕실·무사도 등의 코드로 국민의 시대인식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의 해결은 외부에서 지탄만 해 될 일이 아니다. 일본 내 양심세력들이 결집해 일본 국민에게 역사를 바로 알리게 해야 하고 진보적 시민운동이 벌어지도록 국제적으로 지원할 필요가 있다. 또한 미일 안보조약 체결을 바탕으로 한 거대 보수정당인 자민당의 출범과 일본의 군비 증강 및 천황제 유지에 배경이 돼온 미국의 역할도 놓쳐서는 안 된다.
국회 국정감사에서 병역기피 해외미귀국자 관련 자료가 공개됐다. 병역기피 대상 의심자가 올해 들어서만 801명, 지난 5년간 두 배 이상 늘었다. 강남 3구인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에 주소지를 가진 인원은 108명으로 5개 주요광역시를 합한 83명보다 많았다.
병역기피의 역사는 조선시대부터 있어왔다. 조선 초기엔 양반 아들들도 요식적으로나마 군역을 치르는 제도가 있었으나 양반이 평민들과 군역을 같이 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며 빠져나갔다. 천민은 국가의 노비이거나 양반 노비이므로 군역 면제.
평민은 징집되거나 세금으로 군포 2필을 바치는 것이 병역의무의 기본이었다. 그러나 1인당 군포 2필은 엄청난 부담이었다. 그래서 평민이 양반집 노비가 되어 피하거나, 머리 깎고 중이 되거나, 무작정 도망치는 기피사례가 생겼다. 돈으로 사람을 사서 대신 징집 내지 노역에 보내기도 했다.
비리도 생겼다. 돈을 받고 징집된 자를 일찍 집으로 돌려보내주는 방군수포, 갓난아기도 군적에 올려 군포를 부과하는 황구첨정, 죽었는데도 죽기 전 밀린 군포 내라며 군적에서 삭제하지 않고 계속 군포를 거둬가는 백골징포, 도망간 사람의 군포를 친척이나 이웃에게 부과하는 족징·인징 등 군복무제도가 백성을 무겁게 짓눌렀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징용이나 징병을 피해 도망친 청년들이 산 속으로 들어가 항일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1944년 경북 결심대 사건, 1945년 지리산 보광당 사건, 1944년 경기도 포천 조선민족해방협동단 사건 등의 기록이 남아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병역기피의 시작은 국군의 전신인 조선국방경비대의 초대 사령관이자 이승만 정권의 막후 실력자인 원용덕의 아들에서 시작된다. 아들이 육사를 마치고 그 동기생 150명 전원이 전선에 투입될 때, 자기 아들만 헌병 병과로 빼돌려 후방에 배치해 온 국민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중국 마오쩌둥 주석의 아들이 인민지원군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해 북한 땅에 묻혀 있고, 유엔군 벤플리트 사령관의 아들도 한국전선에서 실종된 걸 생각하면 창피한 일이다.
대학에 들어가는 게 가장 보편적인 병역기피 방법이었다. 허름한 건물에라도 대학이라고 간판 붙여 놓으면 학생지망자가 몰렸다.
이 나라에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존재한 적이 없다. 1·2차 병무파동 이후 1976년 병무자료가 전산화되고 기업들이 병역기피자 여부를 철저히 가려 채용하면서 병역기피는 10퍼센트 대에서 0.001퍼센트 대로 줄었다. 대신 애매한 제도가 생겨났다.
석사장교. 석사 학위자들 중 선발해 군사훈련 4개월, 전방실습 2개월 합쳐 6개월에 군복무를 마치게 하는 제도여서 일명 ‘육개장’이라고도 불렸다. 이 석사장교로 혜택을 본 인물 중에 전두환, 노태우 두 대통령의 아들들이 들어 있어 결국 그러려고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래서 사라졌다.
이 제도의 혜택이 계속됐더라면 이회창 후보의 두 아들도 석사장교로 병역을 마치고 15대, 16대 대선 결과는 뒤바뀌었을지도 모르는 일. 이 후보자 아들의 병역사항이 선거에서 쟁점. 병역비리 수사가 다시 전개됐고 병무직원 89명이 처벌을 받았다.
지금의 병역기피는 이전과 비교하면 미미하다 할지 모르지만 문제는 귀족과 특권층, 부유층이 먼저 전선으로 나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전통은 통일신라 이후 이 나라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거란 우울한 생각이 우리를 답답케 한다.
일본의 잔혹한 유전자
미국의 인류학자이자 국화와 칼 저자인 루스 베네딕트는 “일본인들에게 도덕적 규율이란 지역적이고 제한적이어서 해당되는 영역을 벗어나면 정상을 벗어나 돌변한다”고 분석했다. 천황을 제외하고는 자신을 비롯한 모든 사람의 목숨을 한순간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던 전통, 오랜 기간에 걸친 막부와 지역 군벌 통치 아래서 영주나 ‘오야붕’에게 목숨을 맡기고 살던 풍토가 바탕이 돼 일정 영역을 벗어나면 거리낌 없이 생명을 하찮게 여길 수도 있다는 설명.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 전에 기독교 선교사들을 모두 추방했다. 2천 만 인구 가운데 80만 명이 기독교인이었는데, 임진왜란이 끝나고 난 뒤에는 더 강력하게 기독교를 탄압했다. 방법은 잔혹하고도 절묘했다. ‘테라우케’는 모든 사람은 절에 등록해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절의 증명서를 받고, 여행, 혼인, 이사, 취직 때는 절에 가 허가를 받아 제출할 것을 말한다.
‘후미에’라고 해서 1년에 1번 이상 예수의 초상화를 땅에 깔고 침을 뱉은 뒤 발로 밟아 기독교인이 아님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도 있다. 이를 어기는 사람은 기독교인으로 간주하고 처형했다. 처형 방법은 난징 대학살보다 훨씬 잔인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이 죽음을 순교로 받아들이자 최대한 오랫동안 최대한 고통을 받으며 죽어가도록 온갖 고문방법을 고안해 냈기 때문이다.
5호감시제. 5가정을 하나로 묶어 서로 감시·고발하도록 하되 고발 없이 기독교인이 적발되면 5가정 모두 연대책임을 지는 제도였다. 일본인이 혼내(속마음)를 끝내 숨기고 다테마에(외양)만으로 남을 대한다는 혼내-다테마에 풍조가 이때부터 시작.
기리시단류족 개명제도 있다. 기리시단은 크리스천을 의미. 기독교인이 발각되면 그 친족들도 모두 집에서 나오지 못하고 격리 수용돼 마을 전체의 감시를 받는 벌칙이다. 농사일 외엔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단 집에 불이 났거나 사람이 죽어 산에 묻으러 갈 때는 외출이 허가됐다. 일본의 이지메 전통이 여기서 시작됐다.
주한미군이 특별한 이유
한반도 분할 통치는 미국 육군부 정책과장이던 딘 러스크가 낡은 한반도 지도 한 장을 펴서 수도 서울을 남쪽에 두고 한반도 북쪽은 소련에게 주고, 서울이 있는 남쪽은 미국이 차지하면 된다며 38선을 별 고민없이 그어버렸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미국은 우리를 우방국으로 대우하지 않았다. 미국은 사전에 일본총독부에 밀사를 보내 미군이 들어갈 때까지 당분간 지휘체계를 그대로 유지할 것을 명령했고, 일본은 조선 건국준비위원회에 모든 권한을 이양하겠다는 우리 국민에 대한 약속을 취소했다. 그 후 등장한 것이 맥아더 포고문 제1호다.
“일본의 항복문서 내용에 의해, 나의 지휘하에 있는 승리에 빛나는 군대는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를 점령한다. 오랫동안의 노예상태와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해방 독립시키라는 연합국의 결심을 명심하고, 조선인민은 점령목적이 항복문서를 이행하고 자기들의 인간적 종교적 권리를 보호함에 있다는 것을 새로이 확신해야 한다. 태평양 방면 미국 육군부대 총사령관인 나에게 부여된 권한에 의해 나는 이에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과 조선주민에 대해 군사적 관리를 하고자 다음과 같은 점령조건을 발표한다. 제1조-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와 조선인민에 대한 통치의 전 권한은 당분간 나의 권한하에서 시행한다”
미군 범죄는 점령군으로 시작된 불평등한 한미관계라는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불평등한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미군들의 점령군처럼 구는 잘못된 인식과 태도, 강대국의 눈치를 살피는 한국 정부라는 세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나타나는 사회문제다.
9.11 테러 직후 미군의 안전을 위해 야간통행금지조치를 취했다. 이때 미군 범죄 급감. 한국인도 안전을 되찾은 것이다. 통금 조치가 해제된 이후 범죄는 다시 늘어. 이러니 일단 미군 측이 뭔가 특단의 조치를 취하고 인식을 바꾸는 게 필요하다.
우리 모두 낀 세대다
미국에서는 낀 세대를 트윅스터라고 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매한 세대라는 뜻. 우리가 쓰던 캥거루세대와 비슷하다. 독립할 나이가 됐는데도 직업을 갖지 않거나, 직장을 다녀도 독립적으로 생활하지 않고 부모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20~30대의 젊은이들을 일컫는다.
영국에는 키퍼스가 있다. 부모의 퇴직연금을 축낸다는 뜻이다. 프랑스에서는 탕기라고 부른다. 자유로워지고 싶은 부모에게 달라 붙어 죽어도 독립 않는 아들을 묘사한 프랑스 코미디 영화 ‘탕기’에서 유행시킨 말이다. 이탈리아에서는 맘모네라 해 어머니가 해주는 음식만 먹으려 한다는 의미로 부른다. 캐나다에서는 일도 없이 나가 쏘다니다 밥 먹을 때 되면 집으로 돌아온다는 뜻에서 ‘부메랑 키즈’라고 칭한다. 호주에서는 가정을 먹고 자는 곳으로 쓴다는 의미에서 ‘마마호텔’이라는 비유가 있다.
우리 사회의 낀 세대는 젊은 세대가 아니라 나이 든 세대를 가리킨다. ‘묻지마라 갑자생(1923년생)’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갑자생은 태어나보니 일제 치하였다. 학교에서 일본말 배우고 사회로 나가려하니 태평양전쟁에 징용·징병이 들이닥쳤다. 죽을 고비를 넘겨 해방조국을 맞았는데 일제 때 배운 건 별 소용없고 사회혼란만 거듭되다 6.25전쟁이 터졌다. 다들 결혼은 생각도 못하다 전쟁 끝나고 허겁지겁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내세울 거라곤 고생한 것과 훌쩍 장년이 되어버린 나이밖에 없는 서러운 갑자생. 이 세대들의 아들딸이 베이비붐세대(1955~1963)다. 갑자생 언저리 부모들과 그들의 베이비붐 자녀세대 사이에 낀 세대가 최근 흔히 거론되는 한국의 ‘낀 세대’다.
모두가 낀 세대다. 너나 할 것 없이 다 아프다. 세계가 함께 치른 전쟁과 제국주의, 냉전 대결에 이어진 인구구조의 변화와 기술문명의 발달에 따른 디지털 구조조정에 이 문제의 뿌리가 박혀 있다. 노인의 고용시장 진입이 청년 것을 잠식하고 젊은 세대에 치여 우리 고생한다는 식의 생각은 문제를 제대로 짚지 못한 것이다. 넓게 멀리 보며 서로를 격려하고 어깨를 걸자.
중국은 북한을 포기하지 않는다
중국에는 북한에 대한 강경론과 포용론이 늘 맞서며 논쟁이 돼왔다. 중국 정계와 학계는 북한을 쓸 만한 수하로 남겨둘 것인지 아니면 부담스런 혹덩이로 간주하고 처리할 것인지 늘 논란이 있어 왔다. 이것을 표현하는 용어가 ‘전략적 자산’이냐 ‘전략적 부채’냐다.
북한과 중국은 ‘북중 우호협조 및 상호원조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상대 국가가 군사공격을 받으면 다른 한쪽은 자동으로 전쟁에 개입한다는 게 골자다. 30년씩 2번 연장돼 2021년까지 유효하다.
중국은 북한의 봉건적 세습권력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다. 입장차가 있다. 1980년 김일성 주석에게서 김정일 위원장에게로 권력이 넘겨질 무렵부터 제기된 비판이다. 런민르바오(인민일보) 사설 일부다.
“수령은 인민이 선택하는 것이지 개인적인 숭배와 신격화로 가는 건 일종의 미신이자 반맑스주의다. 당은 기관이고 조직이지 특정 개인이 아니다.”
중국은 북한을 국제관계에서 우위를 유지하는 데 이용하고 미국을 움직이는 지렛대로 삼아왔다. 한반도가 통일되면 이런 이점을 놓치게 되고 동맹국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니 괜한 꼬장꼬장함으로 손해볼 수는 없는 일이다. 또 북한 정권이 붕괴되면 북한난민 수백만이 강을 건너 중국으로 밀려와 사회 불안정을 야기할 수도 있다는 점을 중국은 주시하고 있다. 그리고 북한이 무너지면 그동안 중국이 원조한 만큼 뽑아내지도 못하고 투자한 걸 잃어야 한다는 점도 계산에 넣고 있다.
중국은 지금 양다리 연애중이다.
중국은 한반도 통일보다는 분단 상태로 지속되는 것이 나쁠 게 없다. 중국에 대한 의존을 이어가는 한 세습은 묵인할 수 있고 다만 통제 불가능으로 보일 만큼의 사단은 자제했으면 하고 바란다. 그리고 북한에 새로운 발전 전략을 찾아보라고 권한다. 중국의 개혁개방과 한국의 발전 전략을 합쳐서 북한식의 개방과 발전을 해보라는 것이다.
한반도에 통일한국이 들어서려 한다면 과감히 지지해주고 북한을 개방으로 유도하고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확실하게 굳혀 근본적으로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는 게 중국의 미래에 도움이 더 된다는 의견이다.
중국의 대북정책은 당근과 채찍으로 나가는 데 있어 새 방법을 모색해낼 가능성이 크다. 당근과 채찍은 지배력을 키우려는 것이고 겉으로는 독립된 나라지만 실제로는 중국에 예속된 위성국가로 끌고 갈 수도 있다.
탐욕이 지배하는 미국
진격의 거인. 1853년 여름 일본의 에도만 우라가 항에 미국 전투함 4척이 나타난다. 당시 일본 군함보다 10배나 큰 이 배를 일본사람들은 흑선이라 불렀다. 일본을 개항하러 온 페리 제독이 이끄는 군함들이었다. 페리 제독은 1년 후 다시 돌아올테니 그때까지 결정하라고 위협하고 떠났다. 1년 뒤 일본은 문을 열고 굴욕적인 미일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일본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이 이 사건을 상징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복수의 칼날은 한반도를 향해 겨눠졌다. 1876년 강화도에 일본 군함 운요호를 무조건 정박시키고 전투를 벌인 뒤 책임지라며 강화도조약이라는 불평등조약을 맺었다.
지구촌 어디고 간에 제국주의 강국이나 세계지배의 야심을 가진 초강국이 배를 정박시키거나 깃발을 꽂거나 하면 그 땅에서는 뭔가 험악한 일이 벌어진다. 이제 일본도 ‘진격’에 동참하겠다고 나섰다.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던 일본이다. 70년 전의 일을 물고 늘어지지 말라한다. 헌법에 규정한 ‘전쟁과 전력 보유, 교전권을 포기’한다는 약속이 취소됐다. 아베 신조 총리의 일본은 군대를 보유하는 보통국가로의 회귀다. 그러나 일본은 보통 국가일 수가 없다. 멕시코·필리핀·쿠바·베트남을 점령해간 미국이 여전히 이라크·아프간 등에서 전쟁을 벌이듯 침략과 점령이라는 제 버릇이 쉽게 포기될 리 없다.
동아시아는 미국의 철저한 계산 속에 혼선이 계속될 것이다. 서로 다른 꿈을 꾸면서 미국에 기대려 할 것이고 중국의 눈치를 볼 것이다. 이렇게 대단히 가변적이고 혼란스런 상황에서 역사적 문제를 풀기엔 현 정부의 신뢰도가 걱정이다. 대통령의 수첩에 어떤 해답의 실마리라도 적혀 있기를 기대하지만 아무리 좋게 보아도 이는 난망이다.
엘리자베스, 가문의 위기와 영광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는 1945년 조국을 위해 봉사하고 싶다며, 아버지 조지 6세의 허락을 얻어 또래 소녀들이 봉사하고 있는 영국여자국방군에 입대해 구호품 전달 서비스부서에서 군복무를 했다. 그 때 여왕의 나이 19세. 계급은 소위였다. 맡았던 임무는 트럭 운전병으로 타이어 바꾸고 엔진 수리하던 모습이 국민에게 깊이 각인돼있다. 공주 때 애칭은 릴리벳.
남편 필립 공도 2차 대전 참전 용사다. 찰스 왕세자는 공군 전투기 조종사, 앤드루 왕자도 아르헨티나와의 포클랜드 전투에 참전했다. 손자 중 윌리엄은 공군 복무 후 전역, 해리 왕자는 아프간에서 군 복무를 했다.
핵에 푹 절은 일본, 후쿠시마 차별
일본 “우리는 후쿠시마 원전 사태로 인해 세계에서 유일하게 원전 사태에 대응할 수 있는 기술력과 경험을 축적했다.” 일본 후쿠시마의 비극은 제대로 된 비판과 점검 없이 급성장한 핵산업은 결국 모두의 위기로 돌아온다는 교훈을 줬다.
일본이 지닌 플루토늄은 10톤 정도로 추정된다. 핵무기 1천250발 분에 해당한다는 분석이다. 미국·러시아·영국·프랑스에 이어 세계에서 다섯 번째, 아시아에서는 압도적인 1위다. 일본은 우라늄 농축기술을 보유했고, 인공위성 발사도 몇 차례 성공했다.
북한이 빌미만 준다면 일본도 몇 발이건 핵탄두와 그 운반 수단인 장거리탄도미사일을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다. 또 우려한 대로 일본은 대지진과 원전폭발 이후의 국가적 통합을 위해 국가주의를 내세우며 파시즘 세력이 등장하고 있다. 평화 공존을 무시하는 극우정권이 득세하는 것도 후쿠시마 비극에 이어져 있는 변화다.
인류는 핵이 안고 있는 문제를 꽁꽁 싸맸을 뿐 핵의 구조적인 위험과 기술적인 결함을 해결하지 못한다. 미완성의 위험한 기술이다. 원전사고, 핵무기화, 폐기물 처리 등 핵이 안고 있는 문제는 지금껏 어느 것도 해결된 것이 없다. 다만 묻어두었을 뿐이다. 그리고 동북아에는 원전과 핵무장을 적극 추진하는 3개국, 북한·일본·중국이 몰려 있다. 우리나라마저 원전 수출에 몰두하고 있어 동북아에서 ‘핵’이란 어떤 존재인지 이제라도 심각히 시민사회의 공동논의가 필요하다.
야스쿠니신사는 일본인들의 자부심
일본의 신도는 사람 사는 일과 온갖 자연현상을 관장하는 신이 곳곳에 널려있다고 믿는 일본의 고유 종교다. 신사에 모시는 각종 신이 800만에 이른다는 추산도 있다. 이런 신들을 모신다고 하는 곳이 신사다.
야스쿠니신사는 근대 일본이 치른 내란과 전쟁에서 숨진 전몰자들을 신으로 승격시키고 그 명부를 보관한 신사다. 246만 명의 신령이 된 인간을 제사지내는 곳이다. 여기에 태평양전쟁의 A급 전범 14명이 포함돼 있어 국제사회는 이를 경계하며 지켜봐왔다.
문제는 A급 전범에 대한 참배만이 아니다. 전범에 대한 참배와 추악한 과거에 대한 미화작업이 가져올 미래의 불행이 무엇일지에 집중해야 한다. 종교와 관련한 일본 역사의 특징 중 하나는 개방과 배척이다.
외국에서 다른 종교가 발전해 일본으로 수입되면 일본인들은 쉽게 문을 열어 맞아주고 자기들 전통신앙과 섞어버린다. 그러다 융합작업이 끝나면 밖에서 들어온 종교를 솎아내 묻어버린다. 에도 시대에 유교는 유교신도론에 의해 공격을 받았고, 불교는 ‘신불습합’이라는 과정을 통해 토사구팽당했다.
일본 신도의 신이라는 개념은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의 신과 다르다. 일본국 및 일본인들과 관련된 모든 것이 신이 된다. 신도가 섬기는 신은 현실을 넘어선 절대적인 신, 즉 인류 모두에 대한 보편성이나 영원성에 기초한 신이 아니다. 일본이라는 나라, 일본인이라는 사람들에게만 국한되는 신이며 일본국과 일본 왕족, 귀족의 현실과 이익 자체가 신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다.
어떤 인생을 살았건 문제되지 않는다. 일본 왕을 위해 죽으면 된다. 그런 이유로 야스쿠니 신사에서 떠받드는 신은 청일전쟁, 러일전쟁, 조선 진압, 시베리아·만주 정벌,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을 치르며 숨진 사람들로 계속 대상자가 늘어왔다. 그렇게 246만 명이다. 이들의 가족만 해도 엄청나다. 그렇기 때문에 야스쿠니 신사의 무게는 일본 정치인들에게 가볍지 않다.
<기자 그리고 ‘기자 비슷한’ 자>
저널리즘이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바는 인간, 그리고 사회적 여건과 운명에 얽혀덜어가는 인간의 정황이다. 그러나 인간을 지향하는 것과 뉴스가 인간 개개인에게 함몰되는 것은 전혀 다르다. 뉴스 가치가 있는 사안이라면 거기에는 시대적 배경이 있고 사회구조에 따른 맥락이 존재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뉴스는 배경과 맥락은 외면하고 개인의 영욕에 초점을 맞춘다. 그나마 거창하고 고상한 것인 양 치장도 해준다.
뉴스의 개인화, 개인의 뉴스화
뉴스의 개인화와 개인의 뉴스화는 무엇이 다른가. 국정원 사건을 전직 국정원장의 문제로 다루는 것과 국정원 및 국정원을 움직일 수 있는 권력의 문제로 다루는 것의 차이다.
뉴스의 개인화는 독자와 시청자·청취자들이 해당 뉴스가 전달하는 것이 자신의 삶과 행로에 어떤 영햐을 미치고 사회에 어떤 변화를 불러올지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개개인이 자신과 관련된 문제로 받아들여 궁리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게 만드는 뉴스로 전하는 것이다.
개인의 뉴스화는 독자와 시청자와 청취자를 구경꾼으로 만드는데서 그친다. 맥락을 읽어내고 힘들게 분석하기보다 그대로 옮겨 적고 즐겁게 묘사할 테니 편히 감상이나 하라고 던져주는 뉴스다. ‘개인의 뉴스화’는 취재도 쉽다. 꽤 많은 사람들이 즐겨 읽는다. 탈도 나지 않는다.
진실이 아닌 진실이 적당히 섞인 것
국민 다수가 언론을 거부하고 거리로 나선 지금도 언론은 그 안락함에서 빠져나올 줄을 모른다. 이런 연유로 우리 언론이 전하는 걸 사람들은 진실이라 여기지 않는다. 진실이 아니라 ‘진실이 적당히 섞인 것’이라 여긴다. 국민이 우리가 전하는 것을 진실이 아니라 진실 비슷한 것이라 꿰뚫어 본다면 우리는 기자가 아니라 기자 비슷한 사람이 된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 비슷한 것이 되어 버린다.
디스패치에서 발견한 한국 언론의 아이러니
가십의 유래. 가십의 어원은 미국 독립전쟁 때 조지 워싱턴 장군이 이끄는 미국 측 첩자들이 적군 지역 술집에 밀파돼 적군에게 술을 ‘홀짝홀짝go sip go sip'하게 만들고 부대 내부의 사정을 떠벌리게 유도한 뒤 첩보를 수집한 데서 유래한다고 전해진다.
가십은 17세기 말과 18세기 초 인쇄업이 발달하며 대중문화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당시 일반대중이 글자를 배우고 신문을 받아보면서 가장 궁금해 한 것은 “우리보다 나은 사람들의 나쁜 행태”였다. 왕족, 귀족, 장군 등 상류층이 따지고 보면 우리보다 나을 것도 특별할 것도 없다는 걸 확인하려 한 것은 피압박자의 설움이나 열등감이 반영된 것일까? 또 여성의 문자 해독률이 높아지면서 정치경제보다 조금은 더 감성적인 읽을거리들이 비중을 늘려간 것도 가십기사의 발전을 거들었다.
흔히 가십거리라고 격을 낮춰 불렀지만, 이제는 결코 하찮은 이야기가 아니다. 가십은 사회문화의 주요 구성요소가 돼버렸다. 언론사마다 클릭수를 올리려 페이지뷰를 늘리려 가십에 매달린다.
디스패치는 ‘세월호의 참사로 상처를 입은 실종자 가족들이 정부를 불신하게 된 이유’를 집중 조명했다. 불신의 시작과 실종자 가족의 48시간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주목받았다. 디스패치는 대책본부의 혼선은 물론이고 해경 특수구조단과 민간잠수협회 고위관계자를 인터뷰해 잠수사의 구조정보에 관한 오해와 진실도 전했다. 네티즌들은 갸우뚱하면서도 반가워했다.
가십에의 몰입은 우리 사회의 지적·문호적 빈궁함과 산만함을 보여주는 척도가 된다. 디스패치.. 아이러니컬. 끈질긴 취재와 현장 중심, 사실 위주의 보도라는 저널리즘의 기본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언론이 전통의 기성언론이 아닌 연예전문매체라면 이는 우리 사회의 비극이기도 하다. 사족일지 모르지만 디스패치의 흔들림 없는 진군을 기대한다. 늘 기성언론을 부끄럽게 만들어주기 바란다.
경고판을 세우는 것이 저널리스트의 직무
어떤 사회현상의 결정적 원인이나 이유가 있다. 그런데 그것을 빼버린 채 연관성이 적은 것을 원인과 결과 이어붙이는 것을 ‘결합효과의 오류’ 또는 ‘공통원인 무시의 오류’라 부른다. 사회범죄가 벌어지는 데는 사건마다 나름의 배경과 이유가 있다. 물론 공통된 배경도 있다. 각각의 범죄가 갖고 있는 배경과 특수한 상황, 공통된 배경을 일일이 파악하려면 복잡하고 고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것도 스트레스라면 스트레스다.
그래서 인간은 현상의 원인을 간단한 몇 가지로 몰아감으로써 복잡한 사유로부터 빠져나가려는 본능을 보인다. 사회심리학에서 ‘근본적 귀인의 오류’라고 부르는 현상이다.
제3자효과. 자기를 빼고 따지는 것을 가리킴. 운전 중에 휴대폰 사용은 위험하니 휴대폰을 꺼둡시다하면 옳은 지적이라고 수긍하나 운전에 익숙한 자신은 해낼 수 있다고 여기며 휴대폰을 집어 드는 것과 마찬가지.
감정추단의 오류. 사람들은 세상에서 마주치는 사람이나 현상을 나한테 좋은 것, 나쁜 것 아니면 우리 편에 유리한 것, 불리한 것. 이 두 가지로 빨리 간단히 결정하려 한다. 정말 그런가를 증명해야 하지만 생략하고 싶어한다. 반박하고 반증해야 하지만 접어버리거나 자꾸 뒤로 미뤄 놓는다. 인간이 자신의 이익에 반응해 성급하게 판단하고 처음의 판단에 사로잡히는 것이 감정추단의 오류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정파나 정치이념의 기준에 의해 유리·불리를 따져 반응하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집권세력에 불리한 건 죄다 몰아가는 사람들, 모든 사건, 사고가 대통령이 무능해 그렇다고 가져다 붙이는 사람들도 감정추단의 오류에 빠진 건 아닌지 살펴볼 일이다.
저널리즘의 직무. 이런 결합효과의 오류, 근본적 귀인의 오류, 제3자효과, 감정추단 등의 함정이 존재함을 알리고, 그 앞에 ‘오류에 빠지지 마시오’라는 경고표지판을 세우고 길을 안내하는 것이 저널리즘의 책무다. 정치적, 사회구조적, 사회 심리적 오류까지 짚어내 제시하고 판단은 독자와 시청자에게 맡기면 된다.
정치참여 대신 투표만 하라고?
언론자유를 제약하는 주요인으로 정부와 정치권력을 지목한 비율은 노무현 대통령 참여정부 시절인 2005년에 34.3%, 2007년엔 23.3%였다. 이명박 정부 집권 2년째이던 2009년에 56.7%, 2012년엔 65.2%까지 증가했다.
저널리즘의 원칙
첫째 의무는 진실이다.
사실 확인은 지켜야 할 본질이다.
시민들에게 충성해야 한다.
취재하는 대상에게 매이지 말고 독립하자.
권력은 감시해야 한다.
공공의 여론이 형성되도록 기여하자.
시민들이 중요한 일을 중요하게 인식하도록 흥미롭게 전달하자.
뉴스는 포괄적으로 보도하되 비중에 맞게 보도해야 한다.
양심을 지켜라
시민들도 뉴스에 대해 권리와 책임이 있다.
1953년부터 20년간 발행된 1인 신문이 있었다. 미국의 IF스톤이 발행한 <IF스톤즈 위클리>라는 신문이다. 독립적인 언론인의 모델이고 정직한 블로거의 개척자인 그는 혼자 취재하고 자신의 집에서 편집해 주간지를 찍어냈다. 우체국에서 신문발송도 직접 했다. 기자실, 기자단, 기자회견장에 들어가지도 못했고 고위소식통을 두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특종이 많았고 분석도 뛰어났고 발행부수가 7만 부나 됐다.
미국 실천불교의 지도자 베르니에 그라스만 “당신이 억압자와 하나라는 것을 깨달을 때, 당신은 비로소 억압자에게 맞설 수 있다.” 그라스만의 충고대로 우리는 스스로가 사회부조리의 일부이며 부패한 정치권력의 일부이며 탐욕스런 자본세력의 일부임을 알아차려 각성해야 한다. 거기가 우리의 출발점이다.
국민은 자신들이 정치에 무관심했다고 자책한다. 아니다. 국민은 자신들의 정치를 박탈당해 온 것이다. 기득권에 둘러싸여 비싼 입장료를 요구하는 기성 정치권력과 투표장에 가는 것이 국민에게 부여된 정치의 전부라고 오도한 우리 언론에 의해서 말이다. 이제 언론은 시민의 편에 서야 한다. 그 첫걸음은 언론이 시민의 정치권력과 권리를 어떻게 박탈해왔는가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대자보, 우울한 시대를 대변하다
대자보 덩샤오핑 “대자보는 형식이 간편하고 생동감이 있으며 여러 사람에게 주의를 줄 수 있고 군중을 선동하는 데 편리하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대자보는 괘서, 익명서, 은닉서, 벽서 등의 이름으로 존재한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신라 진성여왕 때 정치를 비방하는 글이 큰 길 가에 나붙는 사건이 발생했다. 고려 충렬왕 때도 궁궐 문에 글이 나붙었는데 누가 귀신과 무당을 섬기고 공주를 저주한다는 내용이었다.
정조는 자기 비방 벽서가 붙자, ‘과인이 정치를 잘하면 저 벽보는 당연히 없어진다’며 괜한 공권력 동원이나색출조치를 삼가라고 했다.
구한말에는 1898년 독립협회 등 개화파에게 밀리기 시작한 수구파가 서울 곳곳에 이씨 왕조를 뒤엎으려는 모반이 진행되고 있다고 써 붙여 독립협회 지도자들이 구속되기도 했다.
현대 들어 1980년대 후반 민주화 운동과정에서 대학 대자보를 통해 광주항쟁의 진상, 5공 집권층의 비리 등이 국민에게 알려졌고, 대자보가 시대문화로 자리 잡았다. 언론이 통제 당하니 대자보가 민중저항매체 노릇을 한 것이다.
언론 아닌 잡론의 시대. 대학 후배들에게 미안함을 담은 언론인의 대자보도 고려대에 등장했다. “졸업생으로서 현재 지상파 방송에 기자로 근무하고 있다. 방송기자로 미력하나마 한국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되고자 했지만 지금 펜과 마이크를 들 수 없다. 일터인 방송이 오히려 진실을 외면하고 사실을 축소하고 매일 저녁 무척이나 ‘안녕한’ 뉴스만을 내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후배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더욱 싸워가겠다.”
이제 새로운 시대의 주류언론은 신문도 아니고 지상파 방송도 아니고 케이블 방송도 아니다. 시민 스스로가 자신의 의견을 전파하고 서로 소통하기 위해 새로운 미디어, 새로운 디지털 소통수단, 새로운 온오프 커뮤니티를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주류언론이 될 것이다. 이미 기성언론은 대학생 대자보를 베껴서 시국현안을 전하는 지경에 이르러있다.
지금의 주류언론은 더 이상 주류로 존재하지 못한다. 시민 스스로 생성하는 언론에 대한 보조언론이 되고 말 것이다. 상당수는 지금처럼 보조언론도 아닌 기득권에 목 맨 잡론으로 존재할 것이다. 오늘의 대자보는 그래서 저널리스트에게 무겁고도 아프게 다가온다.
조직의 구성품이 되기를 거부한다
“일을 하면서 저희가 원칙으로 삼았던 것은 쓰는 사람이 자존심을 지키고 대상에 대해 존중하는 글을 쓰는 것이었다. 연예매체들은 주로 연예인이나 이런 사람들을 대상화시키거나, 흥미 위주의 글을 쓰는 것들이 많았다. 저희는 마음 속으로 ‘아, 이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그런 트릭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많이 읽을지가 아니라, 말하는 사람이 ‘말하고 싶어 하는 부분’이 무엇인지, 즉 ‘원형’을 전하고 싶었다.”
저널리스트의 싸움터는 힘센 권력과 치고받는 현장만이 아니다. 정치·사회·경제·문화. 어느 분야에서고 보도의 대상을 존중하고 이야기하는 사람의 원형을 전하는 것, 트릭 없이 취재원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 뉴스를 기다리는 이의 열망에 부응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가로막는 모든 간섭과 억압, 나태함에 맞서는 것. 그것이 저널리스트의 싸움터다.
본 대로 들은 대로 판단한 대로
본질은 명료하다. 현장에 더 가까이 가고 사건의 주인공을 직접 접촉하고 다양한 의견을 들어보고 그대로 전하는 것이다. 본 대로 들은 대로 판단한 대로 보도하는 것이다. 추악한 비리나 모순을 폭로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도 설명하고 거기에 우리 사회가 뭘 놓치고 있는지도 이야기해야 한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라는 ‘대충’의 틀을 넘어서야 한다.
조직의 구성품으로 머물기를 거부하고 자기만의 시각과 자부심, 가져야 할 만큼의 깊이를 갖고 자신을 드러내야 할 때가 됐다.
저널리스트란 누구인가? 나는 왜 저널리스트가 되려고 했는가? 때때로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지고 한 점 흐트러짐 없는 눈빛으로 답할 수 있도록 마음을 다져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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