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30일 일요일
1201_남북 실용적 화해 해법 보여 준 나진하산 사업 등
- 러시아산 석탄을 싣고 북한 나진항을 출발한 화물선이 그제 오전 포항 앞바다에 도착
ㆍ 남북 물류협력사업인 나진 하산 프로젝트 시범사업의 성공을 알리는 신호탄
- 이번 시범사업의 성공은 여러 가지 이유로 눈길을 끈다.
ㆍ 5.24 조치의 예외로 인정한 정부의 자세
ㆍ 제3국을 경유한 간접적 대북 투자나 경협은 실용적 잣대에 따라 허용
ㆍ 남북관계의 경색을 풀어 나갈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리란 기대
- 광역두만강개발계획(GTI) 본격 참여의 발판
ㆍ UNDP가 주도한 두만강지역개발계획이 GTI로 전환한 이래 적극적 관심에도 참여 X
- 러시아의 시베리아ㆍ극동 에너지 자원에 대한 안정적 획득 가능성을 끌어올림
ㆍ 나진항 경유, 육해로 복합운송은 타경로에 비해 약 1.5일의 시간과 15~20% 비용 절감
- 물론 리스크는 있다. 남북관계의 불안정이라는 정치 리스크는 여전하다.
ㆍ 어려운 남북관계의 현실에서 경협 기반강화와 확대는 의미 있는 위기대응 방안
‘정규직 과보호'
유행하는 웹 용어로 말한다면 “아, 쫌!!”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정규직 과보호’론을 펼치고 기획재정부가 ‘정리해고 요건 완화’를 입에 담은 상황 말이다.
사실 정규직의 정리해고 요건 완화는 굳이 정부가 나설 필요도 없다. 최근의 ‘쌍용자동차 판결’을 비롯한 몇몇 판결을 보면, 이미 대법원이 알아서 판례를 ‘정리해고 요건 완화’ 쪽으로 바꾸어내고 있다. ‘해고하기 어려운 정규직’이란 것은 이제 그저 보수정부와 대기업의 수사 속에서나 존재할 따름이다.
그렇기에 한국 노총 출신인 새누리당의 김성태 의원마저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발언에 우려를 표한다. 김성태 의원은 28일 CBS라디오 <박재홍의 뉴스쇼>와의 인터뷰에서 “비정규직에 대한 보호방안을 찾자는 차원에서 엉뚱하게 화살을 정규직으로 돌려 노동시장 전체를 하향평준화하려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는 목소리가 크다”면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에 대한 보수격차가 크다면 비정규직에 대한 보호를 높여 문제를 해결해야지, 오히려 정규직에 대한 보호를 낮추겠다는 발상은 자칫 실효성이 없는 사회적 갈등만 초래할 위험성이 상당히 높다”고 비판했다.
또 김성태 의원은 “최경환 부총리나 정부 관계자들이 정규직에 대한 해고를 쉽게 만들고 고용유연성을 높여야 비정규직의 처우가 향상된다는 것은 넌센스”라며 “비정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업의 계약직 근로자로 2년을 채우면 정규직으로 전환해 주는 법이 되려 기업 입장에서는 2년이 되면 근로자를 잘라야 된다는 법으로 통용돼 버렸다. 기업들의 노력과 배려는 전혀 가져가지 않은 채 갑자기 ‘정규직에 대한 해고를 쉽게 만들어서 고용유연성이 돼야 지금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논리는 잘못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정부가 원하는 것은 ‘수사’가 아니라 ‘실질’일 것이기에, 갑자기 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해고 조건이라는 금단의 영역을 건드리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정부의 정규직 노동운동에 대한 비난과는 별개로, 현재 정부와 대기업과 대공장 정규직 노조는 암묵적 협력관계에 있다. 더 이상의 정규직을 충원하지 않는 대신 그들의 일자리를 보장해주는 방식의 협약이다. 이처럼 눈에 뻔히 보이는 공모상황에서 정규직 노동조합에게 삿대질하는 평론가들의 자세야 사회문제 해결이 아닌 다른 어떤 것에 대한 집착에 다름 아닐 것이다.
어쨌든 이 상태로 이십 여년 정도 지나면 대부분의 산업 영역에서 ‘정규직 노동자’는 멸종할 것이다. 현장에선 어떻게 느끼는지 모르나, 대기업의 연구소에 다니는 이들은 “사실 이젠 자동차산업도 기계화가 많이 진행되어서 숙련노동자가 거의 필요가 없다”고 증언한다. 예외가 있다면 매번 개별 계약으로 ‘다른 배’를 만들어 내야 하는 조선업 정도라고 한다. 운동세력에서야 안 그래도 10%에 불과한 노조조직률이 1~2%로 떨어질 수 있는 이십년 후의 디스토피아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지만, 정부는 사실 무리한 일을 벌일 필요가 없는 상황이다.
그렇기에 정부의 노림수는 다른 곳에 있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실제로 기획재정부는 ‘정리해고 요건 완화’ 건은 빠르게 번복하고 임금체제 개편 얘기를 꺼냈다. 고령화-저성장 시대에 맞춰 정년을 연장하는 대신 임금피크제를 확산하고 호봉제 연봉 대신 직무급 전환을 추진하겠다는 취지다. 이를 공공기관 개혁과 관련해 공기업 등에서 먼저 추진하고, 노사정위원회에서의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 대기업들에게도 적용하겠다는 취지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정책 취지에 합리성이 없다고는 볼 수 없다. 정년을 늘려야 할 필요성이 있고, 그 경우 지금처럼 근속연차에 따라 계속해서 임금이 올라가기를 방치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일단 특정 나이를 지나면 오히려 임금이 줄어들게 되는 피크제를 실시하면서, 호봉제가 아닌 직무급 전환을 시도하는 것도 필요하기는 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들이 ‘정규직 과보호’를 비난하면서 나온 비정규직 대책이 될 지는 의문이다. 공무원연금 개혁의 목적이 격차해소가 아니라 ‘부자감세’로 축난 재정을 확충하는 것이라면, 임금제도 개편의 목적 역시 격차해소가 아니라 새누리당의 주요 지지층인 중장년층을 배려하면서 기업의 출혈을 최소화하는 것에 목적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결국 이 정부는 다양한 이해관계 집단의 충돌을 조장한 후 원하는 정책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는 ‘지지율 관리’의 차원에서 “유능하다”라고 평할 수는 있겠으나 사회개혁은커녕 문제해결과도 큰 관련이 없는 일이다.
진보파를 자임하는 이들 중에서도 사실상 정규직 노동을 비난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박근혜 정부와 비슷한 인지를 보이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언제나 정규직의 과도한 임금 때문에 비정규직이 착취를 당하고 있으므로 격차해소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러한 주장을 하려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높은 비율의 최저임금 인상안이나 호봉제 약화 대신 초임 상승 정도의 제안은 들고 나와야 한다. 정규직 노조는 자신들의 권리를 내려놓을지 말지만 결정할 수 있을 뿐 비정규직 처우 개선을 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 물론 정규직 노조에 대해 그들의 몫을 떼어내서라도 비정규직 노동자를 보호하라고 요구할 수는 있겠으나, 그런 요구를 할 거면 정부와 사측에 대해서도 비슷한 제안을 들고 나와 정규직 노조를 설득하라고 말해야 한다.
기업의 이윤추구는 신성한 원칙으로 받아들이면서 정규직 노조는 이기적이라 욕하고, 그 이기성을 욕하면서도 이타성을 발휘할 수 있는 정책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해결될 리가 없다. 인구구성상 청년층이 적고 비정규직은 애초에 투표하기가 힘들다는 얄팍한 정치적 판단이 있겠지만, 그와 같은 안이한 생각에서 사회문제를 방치해서는 장기적으로 보수의 지지층을 좀먹을 뿐이다.
제1야당이 하도 무능하니 일본식 자민당의 장기 집권체제, ‘1.5당 체제’ 얘기가 나온다. 하지만 자민당의 장기집권은 일본의 고도성장기에 안정적으로 작동했음을 잊으면 안 된다. 제1야당이 무능하고 진보정당과 노동운동이 무력한 시대, 보수정당은 꽃놀이패를 들었다 믿을 수 있지만 사회가 황폐화되면 사람들의 욕망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혼돈의 카오스’의 세상이 올 뿐이다. 아니, 지금도 이미 반은 왔다.
그런 실정에서 자기 잇속만 교묘하게 차리는 보수정당의 미래는 담보받을 수 있을까. 지금은 정규직 노조라도 욕할 수 있지만 그들이 멸종당한 이후의 세계, 공무원 연금도 사라진 세계에서 1대99의 갈등구도가 나타나게 된다면 1은 어떤 식으로 자신을 방어할 것인가. 새누리당은 몇 백년 후 ‘한민족 멸종 시나리오’까지 고민할 필요는 없으니 이십년 후 정도는 고민해볼 일이다.
미디어스: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5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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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디컬 독후감
아버지랑 친했던 동네 아저씨가 원천동 삼성전자 맞은편 주유소 한켠에서 카센터를 하고 계신다. 가끔 타이어 바람 넣으러도 가고 엔진 오일 교환하러 가기도 한다. 가끔 찾아뵈면 취업 준비하느라 고생한다며 어깨도 토닥여주신다. 내게 하나님은 아버지가 아니었다. 카센터 아저씨처럼 가끔 찾아뵙고 인사드리면 나를 격려해주시는 그런 분이었다. 그랬던 그가
"하나님 아버지" 말로는 수만번도 더 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고백하기까지 무척 오래 걸렸다.
전작권 자료 모음
2014년 11월 28일 금요일
사회정의란 무엇인가
전두환 전 대통령의 국정 운영 캐치프레이즈는 "정의 사회 구현"이었다.
불의한 권력이 정의사회를 부르짖었다. 전두환 대통령이 부르짖은 정의 사회는 우리 실정에 너무 멀리 있다.
사회정의란 무엇인가
개인에게 정당한 몫을 부여하고 그 몫에 대한 권리, 책임의식, 이익을 정당하게 부여하는 것이다. 기회의 균등한 분배와 투명한 사회를 지향하는 것을 함축시킨 사회-철학 용오가 사회정의다. 어느 한 개인에게 희생을 부여하는 것을 반대하며, 그 희생 강도가 약하나 강하나 차등을 부여하지 않는다. 이 외에도 권리에 대한 책임의식 또한 주장한다.
사회정의에 대해 처음으로 정립화시킨 미국의 진보주의자이자 철학자인 존 롤스가 1971년 저작한 정의론에서는
1) 모든 이에게 자유를 완벽하게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정의의 첫째 원칙이고,
2) 가장 빈곤한 사람들의 복지에 대해 우선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 정의의 둘째 원칙이고,
3) 결과의 불평등은 존재하되 모든 사람에게 균등한 기회를 주는 것이 정의의 셋째 원칙이라고 사회정의를 정의했다.
사회정의는 형식적 정의와 실질적 정의를 모두 중시하는 사회에서 나타나는 정의로운 현상에 대한 것을 총망라해 나타낸 의미다.
인간의 부정적인 면을 포함하지 않고, 인간의 긍정적인 면을 포함하여 점진적인 사회혁신을 위한 철학적 가치로 여겨왔다.
이타주의
평등주의
인본주의
풀뿌리민주주의
여성주의
진보주의
법치주의
신문의 자유와 책임
신문은 정치와 더불어 가장 현실적이다. 그때그때 현실에 매우 민감한 반응을 나타낸다.
권력이 독재적 성향을 띨 적에 어느 권력이고 독재를 하겠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우선 국가적 사명이 중대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언론에 대해서는 책임과 의무를 강조한다.
정치는 현실의 상황변화에 따라서 적절하게 국민을 지도하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그것을 정치권력을 유지하는 데 효율적으로 이용한다.
오늘날 권력이 정치발전과 언론자유를 내세우고 있다. 그런데 언론은 여기에 덩달아 권력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고 있다. 권력이 언론의 국가적 사명이다, 책임이다, 윤리라는 것을 강조하고 독재를 할 때 언론은 자유를 내걸고 투쟁하고 저항해야 한다. '언론의 자유와 책임보다는 언론의 독립이 더 중요하다.'
지금은 결코 책임을 강조할 때가 아니다. 자유를 강조할 시기이며 따라서 신문의 날 표어로 자유와 책임을 내세운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언론의 독립이다. 우리 언론은 지난 10여년 간 제도적, 구조적으로 권력과 기업에 완전히 예속돼 있었다.
언론의 독립을 위한 참된 길
편집권의 독립은 제도적으로 구체적인 보장이 필요한데 나는 언론기업을 특수법인체화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본다. 언론사주가 '나는 바지사장이냐'는 반발을 할 수도 있지만 가당찮은 소리다. 언론이나 교육사업은 그 사업 자체에 막중한 국가의 공공성이 있기 때문에 기업시, 사물시해서는 안된다.
독재자: 으레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도 책임을 지지 않는 정치 집단.
권력자는 반드시 자유를 내세우면서 책임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자유행사를 견제하자는 데 뜻이 있는 것이다.
언론의 책임은 지난 몇년 동안 억압당하거나 외면 당한 공중의 절규를 듣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이 이상도 이 이하도 아니다.
직필과 곡필
언론인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자랑스러워 할 수 없는 하찮은 직업이다. 옳은 기자 노릇하기가 어렵다. 글 쓰는 생활이란 참으로 책임이 무거운 직업이라는 것을 느낀다. 비단 우리 사회에서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그러하다.
지식인들의 활동은 언제나 공개된 곳에서 행해진다.
신문기자는 활동이 활자로서 오래도록 남기 때문에 절대로 속일 수 없고 음성적으로 할 수도 없다. 그만큼 미치는 영향 또한 크다.
신문기자는 언제나 반드시 자기의 믿는 바에 따라 글을 써야 하며 어떤 다른 사정에 의해 마음에도 없는 글을 쓰는 일이 없어야 한다.
일시적 필요에 의해 글을 어떤 방편으로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 글은 활자로 후세에 남는다.
감출 수도 속일 수도 없다. 자기의 글에 대해서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한다.
그때그때 시대적 여건을 무시하고 소신대로만 글을 쓸 수도 없다. 옳은 말을 한 글을 정론이라고 하고, 시대에 아부한 글을 곡학아세한 글이라고 욕하고 비웃는다.
청사에 빛날 정론을 춘추직필이라고 하고 시대에 아부한 글을 곡필이라고 욕한다. 그리고 정론은 언제나 건설적이며 곡필은 불건전하고 파괴적 글인 것으로 생각한다.
정론은 반드시 건설적이고 긍정적이며 곡필은 반드시 파괴적이며 부정적이라고 단순히 생각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정론은 표면상 부정적이며 따라서 그 시대에서 볼 때 파괴적인 듯 보이며 곡필이야말로 자신을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것처럼 자처한다.
정론을 펴고자 하는 사람은 부조리하고 부패한 정치를 반대하고 새 질서를 주장한다. 정론이 파괴, 부정적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 시대를 긍정하고 현상 유지하고자 하는 언론은 따라서 자연 부정적이기를 기피한다.
정론과 곡필의 관계는 이와 같이 일반적 생각과는 달리 오히려 정론이라 일컬어지는 언론일수록 부정적, 파괴적인 듯이 보이며
곡필이라 일컬어지는 언론일수록 일견 긍정적, 건설적 양상을 나타낸다. 따라서 정론은 항상 소수의견이고 곡필일수록 다수의견인 듯이 보인다.
글과 생활의 일치
글 쓰는 사람은 절대로 기분에 따라 이렇게 혹은 저렇게 횡설수설해서는 안 된다. 글에는 논리가 일관돼 있어야 하고 전에 쓴 글과 다음에 쓴 글 사이에 모순이 없어야 한다. 어떤 때는 이런 소리를 하고 어떤 때는 또 저런 소리를 하는 식의 글을 써서는 안 된다. 글은 사람의 인격표현이라고 했다. 내용에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글의 내용이 자기의 숨김 없는 생각을 나타내지 않고 어떤 필요에 의해 자기 생각과 다른 말을 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글 쓰는 사람은 독자에 의해 글에 따라 하나의 상이 그려진다. 한 줄의 글도 마음에 없는 글을 무책임하게 쓰는 일이 없어야 한다.
글 쓰는 사람은 글의 내용과 자기의 생활에 모순이 있어서는 안 된다. 글로써는 부정부패를 증오하는 듯이 주장하면서도 실제 생활은 글 내용과 전혀 다른 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다. 부패의 지탄을 받는 인사가 부패를 가장 증오하는 듯한 글을 쓰는 것은 사람을 웃긴다.
글과 사람과는 모순이 있어서는 안된다. 일제 때 아부하고 자유당 때 아부하며 바람 부는 대로 자신과 민족을 더럽힌 인사가 나라를 걱정하고 부정부패를 규탄하고 지조를 운위하는 것은 가소롭기 비할 바 없다. 글의 내용과 자기의 생활 사이에는 큰 모순이 없어야 한다. 평소 부정과 부패를 지탄하는 글을 쓰면서 자기 자신 남한테 지탄받을 생활을 한다면 큰 모순이다 .
사회의 부정, 부패 , 그 밖의 각종 악과 싸우는 언론인들은 우선 자신의 생활부터 모범적이 되어야겠다. 언론인은 떳떳해야 한다. 정치인이 국민에 이것저것 공약을 했으면 꼭 지켜야 하듯이 언론인도 독자 앞에 어떤 주장을 했을 때 그런 생각과 최소한 모순되는 생활을 하지 말아야 한다. 글과 생활을 한 인간의 인격을 통일시켜야 한다.
곡필의 논리
직필하기가 얼마나 어렵고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가에 대해서는 그다지 깊은 검토가 없는 듯하다. 현실을 지배하는 것은 대부분 조소의 대상인 바로 그 '곡필'이며 당연한 것처럼 생각되는 '직필'은 놀랄 만큼 읽어보기가 어렵다.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점은 곡필은 그 자신이 결코 곡필이라고 정체를 드러내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곡필일수록 '대국'을 논하고 '민족'과 '국가'를 걱정하고 때로는 '민주주의'와 '헌법'과 사회의 안녕질서와 반공을 내세우기를 잘한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곡필의 근거는 반민주부패권력이다.
곡필은 어떤 의미에서 볼 때 현실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곡필도 논리를 갖추고 있다.
곡필의 위장논리를 폭로하는 곳에 직필의 임무가 있다. 조선민족은 독립할 필요가 없고 일본에 예속돼 있어야 한다는 매신의 망국론이나 4.19의 학생데모를 끝내 폭동으로 일관 주장한 당시의 서울신문 논조도 매우 이로정연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바야흐로 이 나라 언론계가 위기에 빠진 오늘 지난날의 '훌륭한' 곡필들을 검토해ㅐ보는 것도 결코 무의미하지는 않을 듯하다. 서명곡필은 일절 인용을 보류했음을 밝혀둔다.
'보도'가 내포하는 의미
기자라는 직업은 '있는 그대로' 국민에게 알려주고 해설해주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라는 표현은 흔히 생각되듯 객관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고 높은 차원에서의 주관적 존재라는 점을 깨달아야 하겠다. 저널리즘이 '객관적 사실'을 주관적 요소가 끼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의미한다고 주장하게 된 것은 일반적으로 19세기 이후의 일로 알려져 있다.
신문의 판매정책상 커다란 변화가 생기면서 객관성, 공정성을 따지기 시작했다. 그 이전까지는 어느 특정계층 사람만이 신문을 읽어왔으나 사회가 근대화, 대중화되면서 위에서 말한 것처럼 특정계층 사람만을 독자로 상대할 수 없게 됐다. 모든 독자에 다같이 만족을 주는 신문을 만들어야 하게 된 것이다. 공정, 객관성 개념은 저널리즘의 본질이 아니라 신문사상 일정단계의 역사적 산물이라는 사실이다.
사안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는데, 그 사건 또는 그 문제에 대한 입장, 즉 이해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국가이익, 집단이익, 심지어는 개인이익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문제에 대한 보는 눈이 달라지는 것이다. 즉 자기의 입장에서 자기의 이익에서 보기 때문에 달라지는 것이다. 이것을 저널리즘의 이데올로기성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신문학과의 문제점: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영화, 게임, 마케팅, PR관련 수업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사회 인문과학에 속하는 강좌는 8,9개에 지나지 않는다.
신문학과 강의의 목적은 사회와 인간을 보는 눈을 기르는 것이 돼야 한다. 한데 우리나라 대학 신문학과는 매스 미디어에 관한 전문적 교수만으로써 족하다고 믿고 있다.
언론인이란 사회과학적 눈(내용)과 신문학적 눈(형식)을 겸비한 사람이 아니면 안된다.
3분의 2를 사회과학강좌로 채워야 한다. 역사, 경제, 법률, 사회학, 철학 이밖에 많은 사회과학 계통의 강좌를 선택과목으로 해서 사회를 보는 전문적 안목이 상당히 높도록 양성해야 한다. 전문선택과목제를 활용해서 전문화의 교육을 했으면 한다.
언론인의 기본자세
한국신문윤리실천요강 "사실은 부분만이 아니라 그 전모와 의의를 포괄적으로 보도해야 한다". 즉 정확한 보도를 하는 데 있어 먼저 필요한 것은 사실이 가지는 이른바 전모와 의미란 무엇이냐가 먼저 구명되지 않으면 안된다. 전모와 의미를 알리는 보도는 먼저 사실의 구조가 다원적 존재라는 점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외부의 바람 속에서 언론의 순수성을 지킨다는 것은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다. 바람에 따라서 방풍의 길도 다를 것이다. 어떤 바람은 방풍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방풍하기 힘들 것이다. 이러한 바람 속에서 지난 몇 해 동안 언론계의 양상은 많이 변했다. 이 변화에 적응하는 일이 힘들다. 살기가 힘들다.
언론인이 순수성을 잃으면 안된다. 순수성이란 오로지 기자로서의 직무에 충실하다는 것이다. 직무에 충실하다는 것은 행동과 주장을 신뢰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신뢰란 어떤 일관성을 의미하며 때와 장소에 따라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주장하지 않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기사는 기자의 양식과 사상의 소산이다. 기자의 활동에도 일관성이 있어야 하고 지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언론이 나아갈 길
첫째, 무엇보다 시급한 것이 언론기업이 정치, 경제적인 독립을 확보하는 일이다.
둘째, 언론을 규제하는 모든 악법을 철폐해야 한다.
편집권을 사주가 독점적으로 가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신문은 어느 개인이 이용할 수 없고 이용해서도 안된다. 모든 사원이 공동으로 가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편집강령을 내걸자. 사시는 무어니 해서 표어를 내걸지 말고 신문의 제작방침을 구체적으로 밝히자는 것이다. 그러면 정치적으로 어떤 노선을 따라서 어느 단체를 지지하고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으로는 어떤 방침이라는 것을 다 알게 된다.
김수환 추기경 "민주화를 위해선 개헌보다 언론자유의 실현이 더욱 선결문제"다.